최양업 신부, 박해시기 통틀어 교우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 사목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초상화
조선 교회 위해 헌신한 페레올 주교 선종
병오(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할 때, 페레올(高, Ferréol, 1808~1853)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해-병오박해 82위 순교자 행적을 프랑스어로 정리해 극동대표부로 보내는 한편, ‘성모성심회’를 설립해 성모님께 의탁하며 조선 교회의 복음화를 위한 성무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성모성심회’는 프랑스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가 1836년 창설한 신심회로, 성모를 공경하고 성모의 전구로 죄인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신심회를 알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는 184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조선대목구의 주보(主保)로 정해진 것과 김대건 신부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널 때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성모성심회’를 조선에 들여왔다.
페레올 주교는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던 김대건 신부를 잃고 큰 아픔을 겪었지만, 다블뤼 신부와 함께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면서 험한 교우촌까지 사목방문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입국 당시 6000여 명이던 신자가 1850년 1만 1000명, 1853년에는 1만 2175명으로 증가했다. 1849년에 최양업 신부가 입국하였고, 1852년에 다시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하였지만, 페레올 주교는 건강이 나빠져 1853년 2월 3일 서울에서 4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묻혔다.
김대건과 함께 1844년 부제품을 받았던 최양업은 김대건이 먼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간 이후, 메스트르 신부와 여러 번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최양업 부제는 1847년 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 가운데 기해박해 순교자 부분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사전도 없이 번역하였다.
그의 번역은 스승에 의해 큰 수정 없이 정리되어 교황청에 보내져 이후 79위 시복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다. 최 부제는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7개월간 만주대목구에서 사목활동을 한 후 그해 겨울 육로로 조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페레올 주교에게 인사한 후 병으로 위독한 다블뤼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주면서 교우촌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방송 TV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왼쪽)와 안내자가 한양으로 향하는 모습.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1850년 최양업 신부 귀국해 교우촌 순방
박해시기 전체를 통틀어 교우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사제는 최양업 신부라 할 수 있다. 최 신부는 신앙생활 외에 교우들의 삶과 생활에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방하면서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료에게서 오는 박해, 부모에게서 오는 박해, 배우자에게서 오는 박해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사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은총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우촌에 도착하면 어른·아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에게 인사하려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들은 공소 회장들을 연방 들여보내 어서 인사하고 사제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라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못 떠나게 붙들려는 듯이 저의 옷소매를 붙잡고, 어떤 이들은 제 옷깃에 그들이 보내는 애정의 정표를 길이길이 남기려는 듯이 제 옷자락을 눈물로 적십니다.
⋯어떤 때는 좀 더 오랫동안 제 뒷모습을 지켜보려고 산등성이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뚝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1850.10.1.)
최양업 신부가 귀국해 사목한 시기(1850~1861년)는 대체로 철종(哲宗, 1850~1863년)의 치세(治世)와 맞물리고 있다. 이 시기에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아, 지역적으로는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교우들의 영적 사정에만 정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교우들의 생활 전반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특히 여성 신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가정에서는 계율을 지키기 어려우며, 집을 떠나면 겁탈당하여 외인들의 첩이나 종이 되기 일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영적인 도움이 되도록 어떻게든 성사를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지낸 첫해(1850년)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스승 신부님께 두 가지 요청을 하였다. 첫째는 물을 정화하는 방법에 대한 문의였고, 두 번째는 조선 신자들이 좋아하는 십자고상·성패·상본 등을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배티성지에 복원된 최양업 신부 동상.
교우들 생활 전반에도 지극한 관심과 애정
“비위생적인 물을 개량할 처방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에 상당히 좋은 곳이 평야에, 산골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민들은 실성하거나 간질에 걸리고, 피 섞인 가래침이 나오며, 몸이 나른해지는 등 여러 가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자들은 성물을 가지려는 욕망이 불같습니다. ⋯상본은 예수님·성모 마리아·성 요셉·세례자 성 요한·사도들·거룩한 학자들, 그 밖의 성인 호칭 기도에 나오는 성인 성녀들의 상본이면 됩니다.”(1850.10.1.)
이처럼 신자들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방안을 계속해서 모색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신자들에게 상본과 성물을 보급하여 그들의 신심에 도움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최 신부는 1851년 서한에서 조선에서 전교활동에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제도를 이야기하였다.
“⋯조선의 모든 법과 습관과 풍습은 한결같이 교회법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의 초상부터 탈상까지 입어야 하는 상복의 풍속과 한글이 전교 활동과 교리 공부에 큰 도움을 줍니다. ⋯방갓을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 덮어써서 땅만 내려다볼 수 있게 하고, 또 얼굴 가리개로 입에서부터 코와 눈까지 얼굴 전체를 전부 가리고 다닙니다. 이러한 풍속은 서양 선교사 신부님들을 위하여 발명된 도구라 할 만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열 개의 모음과 열네 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상복 제도와 한글이 전교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