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돌아간 후 윤은 창가에 앉아 새하얀 달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바라만 보던 소연이 말하였다.
“참 이상하지?”
소연의 목소리에 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곧은 자세는 여전히 황후처럼 위엄 있어 보였다. 서북인의 검은 색 의복을 입고 있으나 화장을 지운 말간 얼굴은 윤이 알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지금의 저 모습이 딱 소연이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한남국의 황후였다가 서북인 장사꾼들의 수장이 되고 그리고 이제는 그 어떤 신분이나 직위도 아닌 그저 소연으로 살아갈 모습이 보이는 듯 하였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은데.”
윤은 말하는 소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째서 이리도 가슴이 뛰는 것일까.”
소연은 손을 들어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꾹 누르며 말하였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이리도 불안하구나.”
“…….”
소연의 말을 들은 윤이 일어나 소연에게 다가갔다. 윤이 소연의 뺨을 어루만지니 윤의 큰 손에 비해 소연의 얼굴은 아이처럼 작게 느껴졌다.
“이 인연의 실타래가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모르겠다.”
윤이 말하였다.
“내가 그 분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때부터였을 까. 어쩌면 그때 그 분의 명이 연장되면서 운명이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
윤의 말을 듣는 소연의 눈동자가 당황하여 떨리는 듯 하더니, 이내 차분하고 슬프게 가라앉았다.
“네가 시작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구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진 것 같은 소연의 눈가에 입을 맞춘 후 윤이 말하였다.
“그 분은 유와 함께 오지 않으실 거야.”
“윤아…….”
자신을 부르는 입술에도 입을 맞추었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그곳에서 끝도 함께 하고자 하실 거야.”
“나는 이제야 너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어…….”
애절하게 말하는 소연을 보며 윤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이대로 떠난다면, 나는 마음에 큰 짐이 남을 거야. 평생 그 짐을 안고 살아가겠지.”
윤을 바라보는 소연의 눈에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윤의 손이 다정하게 눈물길이 난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지금은 이것 하나만 약조할게.”
“…….”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윤의 말에 소연은 대답 대신 윤의 품에 안겼다.
68.
윤을 만나고 온 유는 걸음을 서둘렀다. 분위기가 언제라도 유승상의 반란군이 초이란 황궁으로 쳐들어올 것만 같았다. 마침내 황궁의 가장 후미진 동쪽 담장 앞에 서서 담을 넘으려는 찰나, 차가운 무언가가 유의 뺨에 닿았다.
“…….”
그 차가운 것은 이내 유의 뺨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유가 천천히 손을 뻗으니, 손바닥 위로 새하얀 깃털 같은 것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더니 닿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눈?”
한남국 사람인 유에게 눈은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온통 고요한 밤하늘에 새하얀 솜털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처음에는 작던 눈송이가 이내 커지기 시작하더니 곧 바닥과 지붕에 하얗게 쌓이기 시작하였다.
방으로 돌아온 연정 또한 창문을 열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얼마만의 보는 눈인가 하였다. 어릴 적에는 눈이 오면 또래 계집들과 함께 눈을 뭉쳐 무언가를 만들어 장난을 치기도 하였고 사내아이들은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지며 놀곤 하였다. 겨울이 긴 초이란이 그래도 그렇게 삭막하지 않았던 것은 이 눈 때문이었다. 눈이 오면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지곤 하였다.
“보고, 계십니까……. 마마…….”
연정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시현 역시 동궁에 서서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면 동궁 내원에는 눈을 구경하는 궁인들로 가득하였다. 그런 날 밤이면 시현이 피리를 불었고 궁인들은 피리소리와 함께 별 대신 밤하늘 수놓는 새하얀 눈송이를 구경하곤 하였다. 눈 구경은 동궁에 가쳐 사는 궁인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눈을 돌려 쭉 내원을 훑어보니 그 날의 모습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였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이 동궁 내원을 가득 채우는 듯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현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이제 막 열여섯을 넘긴 어린 계집이 있었다. 대대로 초이란 무관 출신인 서 씨 집안의 여식이라 하였다. 무술 실력은 웬만한 사내보다 나은 대다 여인이라 날렵하기도 하다 하였다. 일명 황자파라 불리 우는 신료들이 몰래 입궁 시켜 황자의 호위를 맡게 한 것이었다.
또래의 궁녀들은 눈이 오면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였는데, 사내처럼 옷을 입은 그 아이는 생각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얼굴로 늘 전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이가 초이란 궁인들의 전통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하였다. 새하얀 옷을 입고 사뿐히 날아오르는 그 모습이 마치 나비와 같았다.
새하얀 나비.
그 모습이 몇날 며칠이 되어도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새하얀 종이에 붓을 들면 나비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려서는 황급히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접었다. 혹여나 마음이 들킬까 하여 꾹꾹 여러 번 접다보니 또 나비가 되었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실에 연결하여 창틀에 두니 바람이 불면 꼭 진짜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 모습이 그날의 그 아이처럼 어여뻐서 그리나 아꼈었다.
아꼈으나 취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를 처지였고, 그런 자신과 관련이 된다면 연정은 물론이요 그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담아 나비를 접었다. 그리고 그리울 때마다 불러보았다.
나비야. 나비야.
“공자!”
부르는 목소리에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 시절의 얼굴들과 웃음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동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초라한 폐허가 되었고, 그 시절의 얼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휑한 바람 소리만이 을씨년스러웠다. 나비도 없었다.
“…….”
시현의 시선이 유에게 멈추었다. 계집이면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유를 처음 본 순간, 연정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이 연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나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비는 없구나.
날아가 버렸구나.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그 생각이 시현의 가슴을 저며 왔다. 가슴에 느껴지는 저릿한 통증에 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내 시현이 풀썩 주저앉으니 놀란 유가 한 걸음에 달려와 시현을 부축하였다.
“공자!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소.”
“예?”
“마치 하얀 나비 같구나.”
시현은 허망한 얼굴로 눈발이 흩날리는 풍경을 보며 말하였다.
“그런데 너는 없구나.”
시현의 말에 유도 시선을 돌려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
“준비되었습니다, 승상.”
사내의 말에 유승상은 길게 숨을 내쉬어보았다.
“동이 트기 전까지 함락시켜야 하네.”
“예, 승상. 저 자들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유승상은 고개를 돌려 포박되어 있는 이승상의 아들들을 힐끗 한 번 보고는 말하였다.
“우리의 계획대로 잘 된다면 그 승전보를 전하는 게 될 것이나, 우리가 패하게 된다면 그 패전보를 전해야하겠지.”
그리고 곧 일어선 승상이 방을 나오니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날씨가 기묘하구나. 이것이 우리에게 운인지 불운인지는 두고 보면 알 테지.”
+
쾅! 쾅! 쾅!
천지가 개벽하는 듯 커다란 굉음이 초이란 성문 앞에서 울려 퍼졌다. 횃불을 든 반란군의 행렬에 마치 대낮인 듯 성문 앞은 온통 환하였다. 반란군이 커다란 통나무를 들고 와 성벽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사내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가 전속력으로 달려드니, 거대한 통나무의 힘내 철옹성 같은 성벽에 조금씩 결함이 생기고 있었다.
대장군은 없었지만, 훈련된 병사들은 위치에 자리하여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사다리를 끊어내고 활을 쏴서 통나무를 들고 있는 반란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한남국 군대의 장수들이 모여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회의를 하였다.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마침 대장군이 계시지 않을 때, 하필!”
“그것을 노린 것이겠지요.”
“초이란의 황궁은 궁보다는 견고한 요새 같은 형태이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단점은 성문이 뚫리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전에 초이란을 어찌 패망시켰습니까? 성문만 열리면 황제가 있는 곳까지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병사도 그리고 반란군도 초이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장수의 말에 다른 장수들의 낯빛이 하얗게 변하였다.
“우리의 병사들이 돌아서 우리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면, 이곳은 우리에게 요새가 아닌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 되는 것입니다.”
+
“공자! 반란이 시작 되었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유가 시현을 부축하니, 제대로 몸을 일으킨 시현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유의 손을 놓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어서 몸을 피하시게.”
“공자! 함께 가셔야 합니다!”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오.”
“예?”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자 죽을 곳이다.”
시현의 말에 유가 다급히 말하였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죽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훗날을 도모하시어,”
“그 훗날 내 곁에 누가 있겠느냐.”
“…….”
“지금도 아무도 없지 않느냐.”
“제가 있을 것입니다.”
유의 말에 시현이 가만히 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있을 것입니다. 결코 마마를 홀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는 유의 얼굴이 자꾸만 연정과 겹쳐 보였다.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시현의 말에 유가 말하였다.
“속아주십시오.”
+
이미 반란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성문 앞은 아비규환이었고, 사람들은 한 밤 중에 짐을 싸들고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윤은 그런 인파들과 반대방향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이나 어깨를 치이고 밀려도 계속 성문 쪽으로 향하였다. 그때 그런 윤을 잡아 챈 도복의 사내가 이내 검으로 윤의 뒷걸미를 쳐 기절을 시킨 후 윤을 끌고 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초이란의 성문이 부서지자 반란군이 밀물처럼 초이란 황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피와 비명이 낭자하는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문이 뚫리자 겁을 먹은 초이란 출신 병사들은 이내 마음을 바꾸어 반란군의 편에 서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수적으로 열세가 되니 장수들과 연정이 기거하고 있는 황제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란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니, 유혈이 낭자한 익숙한 황궁의 길을 따라 유승상이 들어섰다. 한남국에게 황제가 사살되던 날 유승상은 몰래 연회를 빠져나가 한남국 군사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자신은 몸을 피해 있었다. 자신이 뜻하는 대로 초이란의 황제를 죽인 유승상은 이제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그 자리에 스스로 오르기 위해 그날과 똑같은 피비린내 나는 황궁 길을 걸었다.
마침내 유승상이 자리에 앉으니 그 앞에 수 겹의 병사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 앞을 방어하였다. 황제 궁 앞에 커다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승기를 잡은 반란군과 독안에 든 쥐 꼴이 된 한남국 장수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반란군과 한남국 군사의 수는 2배는 더 되는 듯 하였다. 다만 남은 이들은 한남국 장수와 정예 병사들이니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반란군이 아무리 수가 많다 하나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제 유승상이 나서 합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물러난다면! 유혈사태 없이 모두 살아서 한남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유승상의 목소리가 황제궁 앞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황제궁에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 한남국의 병사들은 그 말에 크게 동요하였을 것이었다. 장수들이 그런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저 자의 세치 혀에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저 자의 말을 듣고 나가는 순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장수의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은 병사들이 눈에 독기를 품고 정면을 응시하였다.
“훗.”
한남국 쪽에서 반응이 없으니 예상한 듯 유승상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애국심은 국력과 비례한다 하더니, 딱 그러하구나. 이 나라 백성들은 자기 입에 풀칠해주면 그게 누구건 따지지 않고 붙어먹는데 말이야.”
유승상의 눈이 한남국 병사 옷을 입고 있는 초이란인들에게 향한다. 어차피 저들은 초이란 성만 되찾고 나면 다 죽일 것이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날이 추워 시체가 얼어붙으니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하하하하!”
유승상의 말을 들은 한남국 장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한나라의 승상이었다는 자의 입에서 어찌 저리 천박한 말이 나온다는 말인가.”
“이러니 패망한 게지.”
험한 말에도 한남국에서 동요가 없자, 유승상은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며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도복차림의 사내가 누군가를 끌고 와 앞에 세우니, 제 방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연정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공자?”
곧 유승상이 말하였다.
“이 자로 말할 것 같으면, 한남국 황실의 인척이자 거상의 장자인 채윤이다!”
생각지도 못한 인질에 한남국 장수들도 당황하여 동요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자의 목을 잘라 너희 나라 황제에게 바칠 것이다.”
첫댓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네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