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에 왜 나서는지 이유를 설명 받는 2박 3일이었다. 지난 13일 성삼재를 시작으로 15일 광대치란 곳까지 대간길 2회차를 소화했다. 그 동안 지리산과 덕유산 위주로 다니느라 그 사이 산과 봉우리, 마루금에 대해 무지했거나 경험하지 못했는데 너무도 당연히 두 발로 걸으니 우리 산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실감할 수 있었다.
넷째 날 13일 성삼재에서 고기리까지
아침 6시 30분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는 구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일식당에서 닭장떡국을 맛있게 먹어치우고 지난 2일 성삼재 탈출할 때 인연을 맺은 정진우 기사에게 젼화했더니 다른 기사분을 소개해줘 20분 만에 성삼재에 이를 수 있었다. 시암재까지만 일반 택시가 다니고 통행 금지된 바리케이트 자물쇠를 열 수 있는 택시만 출입한다. 토요일이라 노고단만 다녀올 요량으로 시암재에 주차하고 성삼재까지 2.2km를 걷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지난 2일 성삼재를 떠나 구례터미널까지 5만원이었는데 이날은 4만원을 결제했다)
휴게소 편의점은 물자 배송이 어려워 한 달 영업을 쉰다고 공지돼 있어 생수를 살 수 없었다. 11시쯤 산행을 시작했다. 늘 새벽에 헤드랜턴을 켜고 다니던 길을 느즈막히 태양을 등에 지고 걸으니 따듯하니 좋다. 눈이 제법 깔려 있어 적잖이 신경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수위는 아니었다. 안내산악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일행 30명 정도를 만났다. 산행 에티켓을 잘 모르는 이들인 듯 나는 늘 양보하는데 그들은 어쩌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대부분은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갔다.
묘봉치 지난 만복대 이르니 오후 1시가 다 됐다. 눈길이 흐릿해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갔더니 득달같이 스피커로 당장 나가라고 경고방송이 나왔다. 만복대(1438m)는 바람이 장난 아닌 곳인데 이날은 조용했다. 동영상을 카페 단톡 방에 올리고 발길을 서둘렀다. 정령치 내려가는 계단에 눈을 치우지 않아 상당히 위험해 신경을 바짝 세웠다. 정령치 휴게소도 영업하지 않았다. 차도에도 눈이 가득 쌓여 있다. 시암재부터 정령치 아래까지 아예 도로 접근이 봉쇄돼 있어 주민 생계에 타격이 많겠다 싶었다.
정령치 위 마애불상군을 보기 위해 잠시 주로를 벗어났다. 400m쯤 가면 마애불상군이 나오는데 그 전에 개령암지가 나온다. 호젓한 숲인데 정령이 깃든 곳이든 했다. 개령암지는 한 번쯤 꼭 들렀으면 한다.
이 코스에 고리봉은 둘인데, 그 하나는 묘봉치 근처에 있다. 해발 고도 1248m. 여기 정령치 위에 고리봉은 1305m로 북고리봉으로도 불린다. 우리 회원들도 이 봉우리에서 지리 주능선을 제대로 조망하며 탄복했다. 여기도 바람이 없어 잠시 지리 주능선의 유려한 능선미를 만끽했다. 이곳에서 세걸산을 거쳐 바래봉꺄지 걷는 길이 9.3km쯤 이어지는데 초기 백두대간 종주 루트를 만든 이들이 바래봉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산의 연결이 끊겨 당혹했다는 얘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남원시 운봉읍 고기리로 3km를 하산한다. 솔숲 길이 안온하다. 5시가 조금 안돼서 지방도 60번 도로와 만났다. 선유산장민박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카드기가 고장나 주인장이 차로 6km 떨어진 운봉읍에 데려다준다. 곡절 끝에 돈을 찾아 돌아오는데 마침 일몰이다. 솔숲 위에 붉은빛 울음이 선명하다. 유명 대학 직원이었다가 은퇴했다는 주인장, 안주인, 주방장꺄지 세 사람이 돌아가며 '그렇게 혼자 산행하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걱정해준다. 맥주 2병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잠들었다. 가장 호젓한 방이라 참 조용했다.
닷새째 14일 고기리~고남산~매요마을
약속한 대로 오전 7시 10분쯤 소머리국밥을 먹고 40분쯤 길을 나섰다. 60번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걷다 덕치리 방면으로 꺾어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노치샘이 있다. 물맛 좋기로 인근에 소문난 곳이다. 그곳 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초입에 옹골찬 소나무 네 그루가 바래봉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자태가 제법 웅장하다, 생각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있다. 뒤돌아보니 검정옷에 후드를 뒤집어 쓴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텐트 위 타르프를 걷어내고 있었다. 상당히 추운 날씨일텐데 야영을 했나 보다. 나중에 여원재 당도해 들으니 두 사람이 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바로 내려가면 마을에 민박집들이 있는데 야영을 하다니 참 호기롭다 싶었다. 그 여인은 날 향해 목례를 했고, 나 역시 목례로 답했다.
수정봉까지 4km를 걸어간다. 소나무 숲에 햇살이 뻗쳐 붉은 빛으로 달아오른다. 20분쯤 바짝 오르니 편안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아무도 없다. 수정봉은 예전에 수정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고 해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운봉에서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수정봉을 올랐다가 하산하면 여원재다. 태조 이성계가 전투에 나가기 전 이곳 주막집 여주인이 수정봉 어느 곳에서 기도를 올리면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해 따랐더니 그대로 됐더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여원재로 불리는데 지금도 주막이 있다. 산 날머리에 한자로 술 주자, 말 마자를 적고 그 아래 ㄱ을 붙인 표지판을 내건 여원재 민]박이다.
주인 할머니에게 요기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인월 흑돼지에 두부 썰어넣은 김치찌개를 내오신다. 삼천포(지금의 사천) 비린내가 싫어 도망친 곳이 이곳이었다며 대간 인기가 예전만 못해 발길이 뚝 끊겼다며 한탄이 그득하다. 그런데 이 할머니 입담이 장난 아니다. 딴은 외로운 것이다. 누굴 만나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나한테 막 퍼부으신다. 속으로 그만했으면 싶다가도 오죽했으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거의 한 시간쯤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고 박원순 전 시장이 이곳에서 밤새 술 마시고 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음날 사치재까지 가야 하는데 박 전 시장이 잘 곳이 없다고 걱정하길래 자신이 그 전에 매요마을로 내려가 마을회관 노인들에게 소주 댓병 사주며 간청하면 재워줄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그대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 묵는 것으로 일정을 짜 다시 들르겠다며 그 때까지 건강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았다.
운봉에 남쪽으로는 바래봉이 있다면 북쪽으로 고남산(846.4m)이 있다. 야트막한 동산과 봉우리를 10개쯤 오르내렸다. 통안재와 유치재를 거친다. 고남산 정상에는 군 기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눈이 남아있지 않은 산인데 정상 아래는 눈이 상당해 미끄러워 특히 신경을 쏟았다. 나 혼자니 절대 다치면 안 된다, 조심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엉덩이를 깔고 미끄려져 내려오기도 했다. 일기예보대로 오후 3시쯤 되자 구름이 많아지고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초조해진다.
전날 검색한 블로그가 알려준 대로 매요마을 1km를 앞둔 지점에 민박집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사치재는 고속도로를 관통하는 곳이라 민박할 곳이 없어 4km 앞에 있는 매요마을에 묵곤 했다. 박원순 전 시장이 했던 것처럼 마을회관에 신세를 지거나 마을회관 근처 쉼터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이제 새로운 민박집이 생겼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 30분쯤 뒤 찾아 뵙기로 약속했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구기 시작할 때 매요마을에 내려섰다. 말 마자에 허리 요자를 붙여 마요마을로 불리다가 매요마을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주인장은 비를 맞지 않아 복받은 분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민박집은 15년 전에 정부자산 처분 절차를 통해 매입한 뒤 가꾸다 지난해 정년퇴직하며 이주한 오규석 작가 부부가 교장과 교사 사택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섬세하고 정갈한 주인네 성품이 돋보인다. 마감재도 훌륭한데 오 작가가 직접 시공했다고 했다. 주방의 식기들도 하나같이 세련됐고, 화장실 비데에 샤워시설, 마감재 타일의 아름다움까지 상당한 수준의 미적 감각이 도드라진다.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샤워할 때까지 주인장이 차에서 기다리다 운봉읍까지 태워다줬다. 빗길 운전이라 죄송스러워졌다. 둘레길 하는 이들이 가끔 픽업을 시켜 익숙하다며 개의치 말라고 한다. 짬뽕을 먹고 싶다고 해 중국집에 갔는데 함께 들자고 간청해도 사모님과 함께 저녁을 드신다며 사양했다. 중국집 라이라이의 대만식 짬뽕 맛이 일품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퇴직한 젊은 셰프의 인상이 대단히 좋았다. 나중에 다시 찾아 어향가지새우 맛을 보고 싶어졌다.
다시 민박집. 주인장은 학교 후문으로 들어가 지금은 문을 닫은 운성초등학교 교사를 마치 견학 프로그램하듯 소개해줬다. 사무실, 전시실, 작업실, 가족이 회갑 기념으로 만들어줬다는 해우소(노래방 제목이었다), 회의실 등을 보여주는데 요점만 간단히 하면서도 자랑은 촘촘했다. 오 작가는 흔치 않은 전각을 공부했다. 나무목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것인데 전시관에 40점 가량을 전시하고 있다. 볼 만했다. 부인은 된장과 고추장을 담근다고 했다. 문화와 농업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회의실은 가족끼리 놀러와도 뭔가 토론할 거리를 시사할 수 있도록 세로가 사람 키만 한 대형 스크린을 설치했다. 음악이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영국 가수 아델과 그리스 피아니스트 야니의 영상을 봤다. 객실에 돌아와 좋아하는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를 보고 잠들었다.
엿새째 매요마을~사치재~복성이재~봉화산~대광치
푹 잤다 싶은데도 새벽 3시쯤 깨어나 책 투르게네프의 '첫 사랑'도 마저 다 읽었다. 바깥 문을 열고 별을 올려봤더니 별빛이 총총하다. 날이 맑겠구나 싶었다.
주인장이 문자를 보내왔다. 아침 일찍 출발할 거 아니냐며 사무실 올라와 커피 한 잔 마시고 가라는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다시 찾아왔으면 한다는 인사를 받고 7시 40분쯤 길을 나섰는데 어제 날머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줄 알고 올라갔다. 그런데 표지판을 보니 마을로 다시 들어가라고 표시돼 있다. 여원재 할머니는 그게 불편해 매요마을 내려가지 않고 대간꾼들이 그냥 사치재까지 간다고 했다. 그련데 이제 그 길은 어떤 이유에선지 막혀 있고, 마을회관 위 매요교회 앞을 지나치다 숲길로 들어선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 비석을 끼고 숲으로 들어선다. 바래봉 아래 제범 옹걸찬 봉우리가 있는데 황산이다.
20분을 허비하고 8시에 산행을 시작하는데 바래봉 왼쪽 자락에 말간 빛이 빼꼼 내민다. 사치재까지 3.2km를 걷는다. 초입에 맹견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80대는 훨씬 넘긴 듯한 주인이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나를 보며 으르렁대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두 걸음을 뗀다. 굉장히 위협적이다. 뒤돌아보면 두 걸음을 또 내딛고 더 이상 접근하지는 않는다. 가만 보니 저도 겁이 나는 듯했다. 3분여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나중에 보니 굳이 숲길을 택하지 않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이용해도 됐다. 잘 모르고 초행이니 위험을 감수한 셈이다. 솔직히 십년 감수한 느낌이었다.
3.2km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야트막한 구릉을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니 힘들었다. 사치재는 얘전에는 광주대구(옛 88) 고속도로 2차선을 무단횡단했다. 지금은 생태통로가 널찍하게 마련돼 안심하고 건널 수 있게 됐다. 사치재 넘어 이제 복성이재까지 3km가 이어진다.
복성이재를 나오니 차량 석 대가 연이어 나온다. 지금까지의 다른 재나 치(고개)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곳은 차량 통행이 빈번했다.
한 시간쯤 오르다 허기 져 아막성 돌탑을 바람막이 삼아 라면을 끓여 먹었다. 30분쯤 올랐더니 60대 부부가 조심조심 내려온다. 날 아는 척한다. 복성이재에서 봤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봉화산 정상 아래는 임도가 깔려 있어 차량이 오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종주 루트에서는 이틀 만에 처음이자 유일하게 마주친 이들이었다.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어 그저께 성삼재를 출발해 지금 여기 있다고 했더니 남편이 "그게 가능한가요. 혼자서?"라고 되물었다. 웃는 수밖에.
매봉(712.2m)부터 봉화산 정상(910m)에 이르기까지 철쪽 능선이다. 봉화산 정상석은 봉화 불꽃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삼봉산 써리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벽소령 형제봉 명선봉 토끼봉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까지 지리 능선에 고리봉부터 바래봉, 그 뒤 수정봉과 고남산, 그리고 사치재와 복성이재까지 모든 능선들의 이어짐이 한눈에 들어온다. 써리봉 아래 치밭목 산장, 그 아래 대원사 계곡부터 여기까지 93km를 오롯이 두 발로 6일 만에 내달렸구나 벅찬 느낌이 차오른다.
종주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걸어갈 길이 만난다. 불안을 떨치고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감과 의지, 결기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흔감했다. 앞을 보니 광대치에 이르는 4km 능선길, 그 뒤 당초 이날의 목표 지점인 지지리 위 중치까지 3.2km가 매우 편해 보인다.
착각이었다. 억새, 힘없이 하늘거리기만 하는 군락 아래 눈이 제법이다. 미끄럽지는 않은데 속도를 내기 어렵다. 더욱이 숨겨진 벼랑 깉이 제법 많았다. 속도가 붙지 않는다. 물론 돌아보면 지리 주능선까지 유장한 능선미, 앞쪽 멀리 육십령이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데도 한 언덕 넘으면 다시 내려걌다가 다음 언덕이 나온다. 지칠대로 지쳤다.
벼랑 왼쪽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오른쪽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이다. 멀리 함양시가 보이는 널찍한 바위들이 나온다. 여기 끝내주네. 봉화산 정상 못지 않은 조망 포인트인 데다 바위가 안온해 점심을 들거나 요기를 해도 좋겠고 볕바라기를 해도 그만일 것 같다. 백전면 아래 마을이 훨씬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산약초를 뿌렸다며 내려오지 말라고 길을 막아놓았다.
2회차 끝내는 드라마틱한 탈출
월경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월경산을 향해 오르는 길을 택하면 중치 통해 지지리로 내려갈 수 있는데 오른쪽 백전면 하산 길을 택했다. 길 자체가 흐릿해 걱정이 됐지만 걸을수록 하산로가 분명했다. 산판 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사방댐 공사현장이 나왔다. 그리고 임도를 만났다. 마음이 탁 놓여 함양 택시를 불렀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임도가 뻗어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백전면 사무소에 전화해 어느 쪽 길이 더 빨리 하산하는 길이냐고 물었다. 직원은 잘 모르겠지만 왼쪽은 다른 마을을 들렀다가 내려가는 것이라 더 길 것이라며 오른쪽 임도를 택하고, 등산로가 나오니 잘 찾아보라고 했다. 번거롭게 해 미안하다고 감사를 표하며 전화를 끊었다.
날머리를 나와서도 대안리 마을회관까지 상당히 걸어나와야 했다. 중간에 여러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날 찾겠다며 달려온 면사무소 여직원 전화였다. 신지연씨라 했다. 내가 골짜기 등산로를 찾아 내려오는 바람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임도 통제하는 시설을 통과했느냐고 사진과 함께 물어온 문자도 와 있는 것을 저녁 7시 함양을 출발한 동서울터미널행 고속버스 안에서야 확인했다.
뛰다시피 해 택시(함양터미널까지 2만 1500원) 있는 곳까지 왔는데 기사님이 면사무소 직원들이 또다시 나를 찾겠다며 통제 시설을 넘어갔다고 했다. 괜히 내가 방정을 떠는 바람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고생한다니 이런 민폐가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조난 당한 적이 없었고, 단지 두 임도 중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좋은지만 문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심, 이렇게 열심인 공무원들이 있다니, 적이 안심은 됐다. 종주 3회차는 백전면 대안 마을을 통해 다시 월경산 쪽으로 올라붙어 장안산 줄기와 백운산 거쳐 육십령으로 향해야 하니 신지연 씨, 남자직원과 밥 한끼 먹고 오르자 마음먹는다.
첫댓글 대단합니더
종주자는 엄혹한 땅위를 걷고 있는데 나는 편안한 안방에서 지도위를 걷고 있습니다
바쁜 업무에 사진만 주르륵 보고, 오늘 점심시간에 차분히 앉아 꼼꼼이 읽었습니다. 가고는 싶지만 마음만 앞서는 종주길을 가시는 선배에게 부러움과 박수를 함께 드립니다. 오늘 종주기에서는 다음 문장이 가슴에 닿았습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H.카의 말이 겹쳐졌지만...).
"종주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걸어갈 길이 만난다. 불안을 떨치고 지금까지 걸어온 자신감과 의지, 결기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