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정선은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다.
승혜의 간절한 부탁도 있지만 더 이상 지우를 큰 집에 떼어 놓으면 아이의 성격이 변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지우는 처음과는 달리 아침이면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 울며 떼를 쓴다.
그런 지우를 떼어 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천근이나 되듯 무겁다.
승혜가 주고 간 돈이 천 만 원이다.
아마 몇 년을 적금을 부어 고스란히 가져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승혜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정선은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웬일이야?”
강승민의 퉁명스러운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진다.
“이번 주말에 집에 올 수 없어요?”
“왜?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꼭 집에 무슨 일이 있어야 오는 것인가요? 지성이와 지우가 보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지금 놀고 있어? 쓸데없는 전화를 하려면 끊어! 바빠서 올라갈 수 없어!“
그리고 전화는 끊어진다.
정선은 의외의 남편의 반응에 서운해진다.
아이들이라면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이 참으로 낯설고 타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내려가 보자. 얼마나 바쁜지 눈으로 확인을 해 보자.“
정선은 남편을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한다.
어차피 승혜의 차를 빌려서 갈 생각이다.
하루 종일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는 그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남편을 위한 반찬을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처음 일 년은 매주말마다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가지고 내려가던 남편이다.
식당 음식보다 집에서 가지고 간 반찬으로 밥을 손수 해 먹는 것이 더 맛있다고 하면서 해 주는 대로 가져가곤 했었다.
이제 남편을 위해서 얼마 만에 음식을 해 보는 것인가?
특히나 좋아하는 백김치를 더욱 정성을 다해서 담근다.
매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정선의 백김치를 매우 좋아한다.
백김치의 시원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기를 즐겨하곤 했다.
담백하고 시원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의 식성을 떠올리며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정선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진다.
맛있게 먹을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주말이 되자 정선은 아이들을 큰 집으로 데려다 준다.
승혜는 이미 차를 가져다 놓고 돌아간 것이다.
아침 일찍 자신의 차를 가지고 온 승혜였다.
정선은 준비 해 놓은 것들을 싣고 아이들을 데리고 큰집으로 간 것이다.
“엄마 다녀올 동안 말썽부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을 거지?”
지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지우도 울지 않게 잘 봐줄 수 있지?”
“엄마! 언제 오는데?“
“하룻밤 자고 내일 와! 그래도 형들 말도 잘 듣고 큰아빠와 엄마 말도 잘 듣고 있을 수 있지?“
“네!”
지성은 사내답게 시원스럽게 대답을 한다.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와! 서방님하고 좋은 시간도 보내고 와!“
“네, 형님!”
정선은 두시가 넘어서야 출발을 한다.
오전에 출발을 하면 남편의 일이 다 끝나지 않을 것 같기에 일부러 오후에 출발을 하는 것이다.
정선은 남편을 만나 그동안 어머님께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고 더 절약하면서 어머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것이 남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자신이 아무리 반대를 한다고 해도 어머님은 반드시 당신의 뜻을 꺾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공연히 남편과의 불화로 심기를 불편하게 해 주는 것보다는 남편의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말 오후라서 그런지 차는 많이 밀린다.
그래도 정선은 오랜만에 마음이 홀가분하다.
혼자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변의 경치들을 둘러보면서 차가 서서히 진행이 되는 동안 모처럼의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얼마 만에 이렇게 호젓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경치를 둘러보며 핸들을 잡아보는 것인지 모른다.
결혼을 하기 전에 정선은 자신의 승용차가 있었다.
비록 아주 작은 소형차였지만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자신의 애마였다.
결혼을 하고 별 쓸 일도 없고 유지비도 절감하기 위해서 처분하고 나서 가끔 남편의 차를 빌려 쓰는 일은 있었지만 그나마 남편이 지방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핸들을 잡아볼 기회도 없었다.
승혜의 차는 중형차였다.
승차감도 좋고 참으로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가 나가는 대로 서서히 핸들을 움직인다.
자신은 언제 이런 여유로움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집 융자금을 다 갚고 나면 아이들이 커져 등록금 때문이라도 별로 여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선은 그래도 남편과 아이들이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고 잘 자라주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정선은 휴게소에 들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를 한 잔 산다.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의 여유를 갖는다.
결혼을 하고 나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온 세월이라는 생각을 한다.
첫 아들을 낳고 그들은 얼마나 큰 기쁨에 감격을 했던가?
자신들이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아들을 키우며 좋은 부모가 되자고 말을 했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딸 지우를 낳고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에 퇴근을 하면 곧 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기 를 들여다보는 재미로 모든 피로를 잊곤 하던 남편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예뻐요?”
“암! 세상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것이 뭔가 했더니 바로 자식들이라는 것을 이제야 실감을 하오. 내 자식들이란 것이 이렇게 소중하고 예쁠 줄을 미처 알지 못했소.“
그렇게 자식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뻐하던 남편이었다.
주말이면 올라와서도 아이들과 노는 것을 유일하게 즐겨하던 남편의 모습이 또한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정선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미소를 띠운다.
일이 바빠서 집에 오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울 것인가를 생각하니 공연히 남편을 의심하던 마음이 미안해진다.
“그래! 우리 지성이 아빠가 절대로 그럴 사람은 아니다. 현장사정으로 인해 집에 올 수 없는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내가 좀 더 잘 해 주어야지.“
정선은 다시 차를 출발시킨다.
이제 한 시간여만 더 가면 되는 것이다.
정선은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하려고 번호를 누른다.
그러나 끝자리 번호를 남겨놓고 전화기를 닫는다.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그냥 도착을 해서 놀라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전화하는 것을 포기한다.
많이 놀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놀라기는 하면서 분명히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오랜만에 남편과의 뜨거운 사랑도 확인을 할 것이다.
남편의 뜨거운 몸짓에 그동안 쌓였던 자신의 모든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몸이 뜨거워진다.
그동안 가끔은 남편의 품이 그리웠던 정선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뜨겁게 자신의 몸을 안았던 남편의 품안이 그리워 더욱 긴 밤을 지새우곤 했다.
남편 대신 지우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정선은 그럴 때마다 잠이 든 지우를 꼭 끌어안고 자신의 뜨거워지는 몸을 달래곤 했다.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
시간은 이미 저녁때가 되어간다.
도착해서 부지런히 밥을 하면 남편과 단 둘만의 오붓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 모든 반찬과 남편이 좋아하는 찌개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온 정선이다.
남편은 이미 숙소에 돌아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차를 몰고 나간다.
공사 때문이라서 그런지 길을 아주 잘 닦여져 있다.
마을이 보이자 마음은 더 급해진다.
여기저기에 불빛들이 새어나온다.
몇 개 있는 점포들 역시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없는 것이 없다.
음식점에서부터 술집 그리고 슈퍼와 다방도 눈에 들어오는 마을이다.
도시 같지 않고 조용한 것이 시골다운 느낌을 준다.
남편이 살고 있는 집은 참으로 조용한 곳이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은지 얼마 되지 않는 깨끗한 집이다.
집 앞에 당도하자 집안에 불이 밝혀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람이 집안에 있다는 것이 된다.
정선은 흐뭇한 마음으로 마당으로 들어선다.
담이 있기는 하지만 대문이 없는 집이다.
집집마다 거의 대문이 없는 그런 마을이다.
정선은 짐을 내리려하다 그대로 핸드백만 챙겨들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남편과 함께 짐을 내릴 생각이었다.
현관문은 잠겨져있지 않았다.
정선은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집안에서는 음식 냄새가 풍겨져 나온다.
“응?그이가 직접 저녁을 하고 있나?”
정선은 신발을 벗으려다 말고 여자 슬리퍼가 있는 것을 본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척을 낸다.
“계세요?” “누구세요?”
낯선 여인의 음성과 함께 모습을 나타낸다.
“누구세요?”
여인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으며 묻는다.
“여기가 강승민씨가 있는 곳이 아닌가요?”
“.......................” 여인은 잠시 우뚝 멈추어 선다.
“누가 왔어?” 남편의 음성이 들린다.
“나와 보세요.”
강승민은 샤워를 끝냈는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팬티바람으로 나타난다.
“어? 당신이 어떻게?“ 강승민은 놀라는 얼굴이 된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죠?”
정선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남편을 바라보며 묻는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니까?” “왜요?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인가요?“
정선은 안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화장대 위에는 여자 화장품과 여자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정선은 정신이 아찔해져온다.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여자를 데려다 살림을 차릴 수가 있냐고요?“ 강승민은 그 사이 옷을 입고는 정선의 손을 잡는다.
“이러지 말고 나가서 얘기를 합시다.”
“나가다니요? 내가 여기에 있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인가요? 말해 봐요. 저 여자가 누구인지 설명을 해 봐요.“
정선은 남편의 손을 뿌리치며 높지는 않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을 한다.
“나가서 얘기를 하자니까! 어서 나갑시다.“ 강승민은 굳이 정선을 집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선은 남편의 팔을 뿌리친다.
“언제부터였어요? 이렇게 살림을 차린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말을 해요.“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으로 강승민을 바라본다.
“나하고 말을 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 괴롭히려고 하지 말고 나하고 말을 하자고.“
“........................” 정선은 남편을 바라보면서 아득한 낭떨어지기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당신이........ 정말 당신이 이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세상 모든 남자들이 아내를 배신한다고 해도 당신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정선은 그대로 그 집을 뛰어 나온다.
글: 일향 이봉우 |
첫댓글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