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북 칠곡군 석적면이 고향인 황상파 32세 장성환입니다.
현재 정부(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각 지역별 향토문화 관련 인터넷 홈페이지(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축사업에 우리 인동장씨와 관련된 일부 오류와 누락된 부분이 있어, 관련 사업의 개요와 문제점에 대하여 우리 인동(옥산)장문 가족들에게 알려 드리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우리 카페에 게시하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개요 및 현황
○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를 총체적으로 발굴·분석하여 디지털화하고, 전국 각 시·군별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여 해당 지역의 향토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사업이 정부출연 학국학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 이 사업은 조선시대에 국가주도하에 이루어진 전국 규모의 향토문화 편찬사업인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여지도서(1757) 등과 각 지역별로 편찬된 ‘읍지’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향토문화와 관련한 중요한 국가사업입니다.
○ 사업의 진행은 각 시․군의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항목분과위원회에서 해당 지역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분석·연구하고, 기초자료의 조사, 항목의 추출 및 구성, 집필자 후보의 선정 작업 등을 수행하여, 각 시군별로 ‘디지털ㅇㅇ문화대전’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 문제점
○ 문제는 이 사업이 각 시군별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하다보니, 자료의 오류나 누락이 발생할 수 있고, 같은 내용이라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 아시다시피 우리 인동장씨의 본관인 인동(仁同)은 신라 때부터 1천년간 관아의 소재지로 인동현, 인동부, 인동군 등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인동군이 칠곡군에 병합되고, 1978년 舊인동군의 일부 지역인 칠곡군 인동면과 선산군 구미읍이 합쳐지면서 구미시가 되면서, 예전의 인동군 지역은 현재 경북 구미시와 칠곡군 지역으로 각각 나뉘어져 있습니다.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사업은 각 시군별로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칠곡군 지역의 디지털칠곡문화대전(http://chilgok.grandculture.net)이 먼저 완료되어 서비스 되고 있고, 최근에 구미시 지역의 디지털구미문화대전(http://gumi.grandculture.net)이 시범서비스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 인동장씨 관련자료도 칠곡군과 구미시 두 곳의 디지털문화대전에 각각 실려 있습니다.
○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의 인동장씨 관련 자료는, 내용의 충실성과 사실성에 있어 크게 오류가 보이지 않으나, 이번에 시범서비스를 실시한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 인동장씨 관련 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중대한 오류와 누락 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 성씨별 자료 ‘인동장씨’ 내용 중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dataType=0205)
- 시조 : 장계
- 연원
인동장씨(仁同張氏)는 고려의 개국원훈(開國元勳)인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시조 장계(張桂)는 1305년(충렬왕 31)에 국학진사(國學進士) 권지도평의록사(權知都評議錄事) 동진사(同進士)에 등과하였고,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고 옥산군에 봉해졌다.
- 입향경위 :
인동장씨는 장계와 장금용(張金用)의 계보로 나뉘어 있으며 인구도 비슷하다. 장계는 장정필의 14세손이며,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았다. 그리하여 인동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구미지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 내용 중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dataType=0205)
- 인동장씨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 장정필(張貞弼)을 도시조로 하지만, 종파 간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못하였다. 지금도 안동 태사묘에서 삼태사(김선평·권행·장정필)를 모시고 춘추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 후대는 각각 장계(張桂)와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여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장계는 장정필의 14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등과하여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중략)
다른 계열의 시조인 장금용은 고려조에서 삼중대광신호위장군(三重大匡神虎衛將軍)을 지냈다. 후손들이 옥산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옥산으로 하여 천년을 이어온 오랜 씨족이다. 조선 말기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되자 관향을 인동으로 고쳤으나 그대로 옥산을 본관으로 하는 후손도 있다. 장금용의 묘소는 구미시 인의동에 있다. 14세손 장보(張俌)의 자손들은 인동·성주 등지에 살다가 18세 이후로는 예산·진주·하동·원주·상주·무안·은진·공주·서천 등지에 살고 있다. 고려조의 인물로는 장선(張善)·장안세(張安世)·장중양(張仲陽)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정승 1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55명을 배출하였다.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에 수록되어 있는 위 내용을 보면, 인동을 관향으로 하는 장씨의 시조를 ‘장계’로, 우리 상장군계 인동장씨 대종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태사공 장정필을 우리 인동장씨의 도시조로 하는 내용이 각각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인동장씨에 대해 ‘장계’를 시조로 하는 직제학계 인동장씨 쪽으로 편향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디지털칠곡문화대전에 수록된 우리 인동장씨에 대한 기재된 내용을 보시면 두 자료의 차이가 더욱 명확해 질 것입니다.
☞ 디지털칠곡문화대전의 성씨별 자료 ‘인동장씨’ 내용 중
(http://chilgok.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301002)
- 시조 : 장금용/장계
- 연원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始祖)로 한다. 『여헌수록(旅軒手錄)』에 의하면, “상장군(上將軍) 금용(金用)을 인동장씨의 시조로 삼은 것은 단지(單只) 소급(遡及)해 올라가 아는 최상의 선조이므로 시조라 하는 것이며, 그 위의 조상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후손들이 옥산(玉山: 인동의 별호)에 세거하면서 지명에 따라 본관(本貫)을 옥산으로 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에 수동(壽同)이 인동(仁同)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지금은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는 장계계(張桂系)의 인동장씨가 있는데, 고려 충열왕 삼십일년에 등과(登科)하여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장계(張桂)는 태사공(太師公)의 후손이며 인동현의 남쪽 발영전(拔英田)에 터를 잡아 인동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 입향경위 :
인동장씨의 시조인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 장금용이 고려 초 인동에 정착하여 이로부터 1천여 년 동안 내려오면서 현재 그 자손이 38대(代)까지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명현석학(名賢碩學)과 충신열사(忠臣烈士)를 배출하였다. 1천여 년이나 인동에 세거하는 동안 숱한 전란(戰亂)을 겪으면서 종가(宗家)와 유지(遺址)를 보존해 오고 있다.
- 현황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현재 1,210여 가구 3,600여 명이 칠곡군 관내에 살고 있다. 인동장씨의 계보(系譜)는 고려 초에 인동에 정착한 후 고려 중기에 분파(分派)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25개 파가 전국 각지로 분파하여 나갔다. 중리(中里: 종통), 남산(南山), 진가(眞佳), 진평(眞坪), 황상(凰顙) 등 5개 파(派)가 인동의 본바닥을 지켜 장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1960년 기준으로 칠곡 및 선산 지역에 약 6만여 호가 살면서 영남의 대성(大姓)으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약 70만여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 관련유적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옥계서원(玉溪書院), 옥산사(玉山祠), 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옥산장공유허비 등이 있으며 칠곡군 관내에는 장맹저(張孟儲)의 추모지소인 삭제재, 장업(張岌)의 강학지소인 경양서당, 학거(鶴渠)장순(張峋)의 강학지소인 학림정,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의 추모지소인 반계정사, 기촌(岐村)장용한(張龍翰)의 추모지소인 봉양재, 심곡(深谷)장제원(張悌元)의 추모지소인 경심재, 검곡(儉谷)장내도(張乃度)의 추모지소인 일원재, 만회당(晩悔堂)장경우(張慶遇)의 강학지소인 화산서당, 만취당(晩翠堂)장경달(張慶達)의 추모지소인 대송재, 만계(晩溪)장경유의 추모지소인 만계정, 장보(張俌)의 묘재(墓齋)인 진목재, 장신손(張信孫)의 추모지소인 술효당, 장우일이 제시(題詩)하던 귀로정(歸老亭), 장원(張原)의 추모지소인 계산재, 장우원(張宇遠)의 추모지소인 심신재, 침류정(枕流亭)장우상의 추모지소인 침류정, 장복추의 강학지소인 녹리서당, 장규석의 추모지소인 하산재, 장승택의 강학지소인 뇌양정사, 회당(晦堂)장석영의 강학지소인 녹동서당, 장일환(張日煥)의 추모지소인 기주재, 화강(華岡)장상학의 강학지소인 공실서당, 아헌(我軒)장선원이 학문에 진력했던 아헌정사 등이 있다.
□ 마치면서
○ 디지털문화대전에 기재된 자료는 앞으로 각종 책자, 논문, 언론 등에서 인용될 중요자료라는 점에서, 우리 인동장씨에 대한 자료의 오류나 누락에 따른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고 할 것입니다.
○ 이러한 자료의 오류 등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 담당자에게 자료의 오류 및 누락에 대해 알리고 그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여, 정확한 내용이 수록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데, 이는 저 혼자 해결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라 일단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현재의 상황 및 문제점에 대해 여러분에게 알려드렸습니다.
○ 참고로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 인동장씨 관련 내용의 집필자가, 경북도청 문화재과장이신 김용만(cbwnrtks@yahoo.co.kr)님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 이분이 관련 내용을 집필하였는지, 아니면 경북도청 문화재과의 직원들이 집필을 하였는지는 제가 급하게 자료를 올리느라고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거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리구요 구미시청 담당자/칠곡군청 담당자/ 한국학 중앙연구원 담당자와 통화해서 태사
장정필(안동 시조)와 인동(장금용)님은 전혀 틀리며 같은 핏줄도 아니며 잘못 기술된 내용이니 시정해달라고 요구햇으며 수정약속을 받앗습니다
장정필님은 중국인 장금용님은 한국인 어찌 같다고하는지 조상 바꾸지말라고 따끔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참고로 한국학 주앙연구원담당자 말씀으로는 이부분들을 돈을주고 용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대종회 전화번호 불러주고 다시문의후 수정해달라고하였구요
안동장씨 홈피와 인동장씨 홈피가 엄연히있고 그 후손들이있는데
왜? 물어보지도 않고 한 사학자의 말만 믿고 남의 조상을 함부로 바꾸는 짓을 했냐며 쫌 혼냈습니다
참고로 안동장씨 대종회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안동장씨 홈피 담당자가 저에게 그러했듯 인동과 안동은 같은 조상이라며 분명히 우길것이지만
우리인동장씨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혓습니다
아 그리고 아주 품위있게 말했으니 인동장씨 품위에 누가되지않게 혼냈으니 걱정마시구요~^^
경북도청 문화재과장이신 김용만님과 통화했습니다 본인이 저술한것이 아니랍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자체 용역 집필자의 실수라고합니다
그래요 우리 서림![종](https://t1.daumcdn.net/daumtop_deco/icon/deco.hanmail.net/contents/emoticon/things_34.gif)
문님 수고 하셨구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올바르게 수정이 되였는지 자꾸 ![확](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56.gif)
인 부탁의 말씀도 함께 드립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네 그렇게 하겟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방금 저도 디지털구미문화대전의 '내가 쓰는 백과'에 자료의 수정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게시해 놨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열정적으로 문중일에 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
직제학(장계)계 인동장씨 문중은
肅宗9년(1683) 이후 1920년까지 여러 차례 편찬한 족보에「吾派는 아는 바 최선조인 直提學公 張桂로 시조를 삼았다」하고 타관장씨의 족보에 직제학 張桂 위에 계대해 놓은 世系는 부인한다」고 하였으며
"張氏各派先系考異" 와 "傳疑錄"을 편찬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나온 이는 당나라 한림학사 張之賢이 玄宗天寶13년(753)년에 우리나라로 귀양 왔으니 장태사가 공을 세운 해(930년)보다 177년 앞인데 그 張之賢을 장태사의 손자이니 혹은 증손자라고 한 것은 크게 잘못이라」극렬비판 하였는데
↑위 글에 이어서~ 근래에 와서 아무 근거도 없이 14대손 운운하니 장태사를 조상으로 삼든 않든 우리가 상관할바 아니나 하루아침에 換父易祖를 서슴지 아니하니 참 이상하네요...
지려면 그동안 잘 못 알려진 세월 만큼은 흘러야 세인들이 우리 인동[옥산]과 안동의 시조님들의 바로된 정립이 될걸로 봅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은 바로 현세대인 우리들의 일이라고 보며 앞으로 우리 후대에게도 계속해서 일깨워 줘야 할걸로 봅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안동장씨문중 대표와 인동장씨문중 대표분들이 만나 더이상 남의 조상을 깍아내리는 행동에 대해
단판을 지을 필요성을 느낍니다
도데체 무었이 두려워서 무었을 위해 우리 조상도 아닌데 그들은 우리와 자기들을 한데 묶으려할까요???
아무레도 한국 토종이 아닌 중국 귀화라는 아킬래스건과 한국인으로 완전한 정통성을 내세우기에는 한계점을 느끼고
억지로라도 수라도 늘려 그 정통성에 한계를 넘어보려는 생각으로보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귀화한 분이 자신들의 조상이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면 될것인데
오히려 인동과 안동을 억지로 한데 묶으려는 행동들이 한국에 뿌리내린 그들 내면에
스스로의 조상에대한 정통성을 가진 한국인이 아니라는 귀화인이라는 열등감이 존재하는듯 보여집니다
안동장씨 문중을 욕되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동장씨들은 안동과 한 핏줄이 아니라고 극렬반대하는반면 안동장씨 그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잘못된 조상엮기에 전혀 신경스지않는것이 그 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들의 정통성의 한계를 뛰어 넘어보려는 무리한 행동보다 자신들의 조상에대해 다시금 제대로 알고 배우고 자부심을 가지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때야 비로소 명문이 되는것입니다
태생이 중국이라해도 자신의 조상에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조상에 누가되지않는 삶을 사는것이
후손된 도리라 여겨집니다 그것이야말로 형식에 억매여 만들어진 명문이 아닌 조상을 바로 섬기고
조상의 삶을 본받아 세상을 이롭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명문가문이라 생각되어집니다
관직이 높다하나 행동이 미천하다면 그것은 명문이 아니며 관직은 작다하나 사람들을 이롭게하고
행실이 올바른사람이라 주변에 덕을 얻는이 그가바로 명문 후예일것입니다
정말 수고들 많이 하십니다~!! 늘 함께하는 종문님들의 안녕이 가득하시길~!!
족보 기록의 역사는 오래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족보 기록은 조선중기에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成化譜, 성종대: 1400년대)'와 문화류씨 족보인 '가정보(嘉靖譜, 중종대: 1500년대)'를 최초로 보고 있습니다..그것도, 현재와 같은 '대동보(大同譜)' 형태가 아닌, 한 집안의 가계를 중심으로 내외척(內外戚)을 두루 갖춘 계보도(系譜圖) 형태의 '가첩(家牒)'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던 것이 조선후기(영조대: 1700년대)에 요즘 같은 씨족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보 형태를 갖춘 족보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그것은 각 성씨 마다 자신의 집안을 양반 벌족으로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 합니다.
우리나라 장씨 족보도 이때 거의 대다수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위조족보'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그것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중국에서 내화(來化)한 드러난 인물인 안동(安東)장씨 시조인 장태사(張太師)를 내세우며 '초무장성설(初無張姓說: 우리나라에 장씨가 없었는데 장태사가 최초로 우리나라 장씨란 주장)을 퍼트려 이후, 우리나라 장씨 종족사를 큰 혼란에 빠트리게 만듭니다..하지만, 처음부터 장씨는 모두 장태사 후손이란 망상은 근본부터 거짓이기에 이후, 드러난 문제가 불거지면 또 다른 거짓으로 해명해야 했기에 위조로 점철됐으며, '환부역조(換父易祖)'의 질곡으로 빠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 인동(옥산) 장문 족보는 죽정공[竹亭公: 휘 잠(潛) 부군, 황상파 분파조, 연산군~중종대]께서 처음 만드셨으나, 안타깝게도 임진란 때 소실되어 전해오지 않습니다..이 때문에 우리 장문의 족보 근간은 여헌(旅軒) 선생[휘 현광(顯光) 부군, 명종~인조대]께서 남기신 '여헌수록(旅軒手錄)'으로 삼고 있습니다..이 점 여러 현종님들께서는 숙지 하시길 바라며, 타관 장씨들이 주장하는 검증되지 않는 여러 허무맹랑한 설에 절대 부하뇌동하지 마시고, 우리 장문의 종족사를 올바로 굳건히 세워고 또한, 지켜나가야 할 막중한 의무가 부여된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네 잘알겟습니다 좋으신 말씀 잘 배웟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분명히 확실하게 해둘것이있습니다 지금 인동장씨의 대동보나 전자족보를 보더라도
종파를 비롯한 각파의 조상님들의 연원과 업적에대한 저술이 너무나 미흡하게여겨집니다
이부분에 대해 그동안의 문중 어르신들의 노고를 깍아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기본부터 충실하게 명확하게 있는 자료 그대로 라도 모두 저술해놓고
우리 문중분들이 다 배우고익 힌다면 타관 장씨들의 환부역조의 허무맹랑한 낭설에 현혹되지 않고 올바른 조상 알기가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장서림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최소한 시관조및 시조와 파조에 해당하시는 선조에 대하여는 관직과 봉직 그리고 업적을 사료에 의해서 고증하여 올려주신다면 타 장씨에게도 고증되는 자료가 되리라 봅니다. 족보만을 갖고 주장함은 왜곡 과장 미화 잘못계대등 구시대 유산으로 객관성이 없습니다.<설 송>
저는 결성장씨 카페지기겸 종사위원장 직분을 갖고있는 설송 장흥순 입니다.질문하기는 정회원이 아닌탓에 인사등업 항목에 간단히 질문을 드렸습니다.(참고) 장익창씨 께서 언급하였듯이 장씨성은 장태사공 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전제하에 1763년 장씨족보(일명 8관보)를 작성하면서 장씨 성씨를 보다 돗보이게 하기위하여 태사공 후손으로 끼여 맞추고 과장 미화등 임의 계대를 하다보니 장씨문중은 너나할것없이 문제를 안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장계(張桂)공의 1.출생~운명 년도와 최종관직 봉직내용등 2.장계공 선대4대조 각각의 성함및 관직 *상기 내용을 사료와 고증 내용을 댓글에 올려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설 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