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死賦絶命詩(임사부절명시) / 성삼문
擊鼓催人命 / 격고최인명 回頭日欲斜 / 회두일욕사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위해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黃泉無一店 / 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 / 금야숙수가 황천에는 객점이 하나도 없다던데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절명시(絶命詩)는 어떤 일로 목숨이 다하기 전 짓는 시를 말한다. 이 시는 성삼문이 거사에 실패하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라고 하나, 그 보다는 처형장에서 회자수의 칼날 아래 목을 내민 성삼문의 처절한 심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이 생생하게 전해오는 듯 하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세조 때 단종의 복귀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식년시에 응시해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이를 도왔고,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와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을 배우고 제도를 연구하는 등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하고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돼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세조가 성삼문을 보고 거취를 분명히 하라고 하자, 그답으로 다음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후, 성승·이개·하위지·유응부·박중림·김문기·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는데,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 그곳이다. 또 처형 직후 전국을 돌면서 사육신의 시신을 전시할 때,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다.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특별시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처형·유배 등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후, 사림을 중심으로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계속되어 그의 사후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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