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시마 트리니다드 - 정식명칭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이 누에스트라 세노라 델 부엔 핀(Santísima Trinidad y Nuestra Señora del Buen Fin)-는 함포 112문 규모의 일등급 전열함으로 건조되었고, 이후 1795년과 1796년 사이에 선미갑판과 선원선실 사이의 상갑판에 함포가 추가되어서 130문 규모로 커졌으며, 1802년에 계속하여 네번째 포열갑판이 증축되어서 실제로 추가된 함포수는 적었지만 140문 규모의 화력을 갖춘 전함으로 성장했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재건조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무장선박이었다.
HMS 빅토리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아일랜드 국적의 조선기사인 매튜 멀랜 (에스파냐에 정착하면서 이름을 마테오 물란으로 개명했다.)이 설계하고 쿠바의 하바나에서 건조했으며, 1769년에 112문의 함포를 갖춘 3층함으로 진수되었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같은 시대 영국의 전열함인 빅토리호보다 훨씬 컸으며 프랑스 전열함 브레타뉴보다도 약간 더 크다고 평가받았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설계도
1795년에 선원선실과 선미갑판이 포함되고 8파운드 야포대를 장착한 네번 째 포열갑판이 증축되면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는 총합 140문의 대포로 무장한 전함이 되었다. 당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동시대의 어느 전함보다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하는게 가능했다. 이 전함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단순히 크기만으로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능가하는 프랑스의 120문 전열함인 오셍(1790년 건조)과 오리앙(1791년 건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엘 에스코리알 데 로스 마레스(El Escorial de los mares)- 바다의 궁전 - 라고 불렸다.
추가된 대포들의 무게 때문에 흘수선이 매우 높았고 이로 인해 항해속도가 대단히 느렸으므로 심지어 몇몇 해군 장교는 이 전함을 오직 카디즈 만을 방어하는 용도로만 사용제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USS 펜실바니아
발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역사상 몇척 건조되지 않은 4층 전열함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 해군은 136문의 대포로 무장한 4층 전열함 펜실바니아를 건조하였으며 프랑스는 발미 (펜실바니아호와 발미호는 갑판 배열 방식이 동일했다.)를 건조했으며, 영국 왕립해군은 4층 전함인 켄트 공작(Duke of Kent)을 건조할 계획을 - 실제로 건조하지는 않았다 - 세우기도 했다.
말라가 항구에 정박중인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리플리카)의 선수상
1779년 7월에 에스파냐는 대영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후, 프랑스와 협력해 미국 식민지들의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에스파냐 해군의 기함으로서 그해 늦은 여름 영불해협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합동 작전에 참여하였다.
1780년 8월에는 전열함 HMS 라밀레스와 3척의 프리깃함의 호위를 받던 63척의 영국호송대 상선 중 55척을 나포하였다. 1782년에는 지중해 소함대에 합류하여 2차 지브롤타 공격에 참가하여 잠시 싸운 후 지지부진한 스파르텔 곶 전투에 참전했다. 1795년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는 선원선실과 선미갑판이 포함되고 여분의 8파운도 대포들이 장착된 4층 갑판이 증축되었다.
1797년 1월 14일의 성 빈센트 곶 전투에서 펠라요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구출하려 시도하는 모습
1797년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1월 14일에 벌어진 성 빈센트 해전에 에스파냐 사령관인 호세 데 코르도바의 기함으로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심하게 파손되고 영국 함대에 거의 나포될 뻔 하였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넬슨 준장이 지휘하는 캡틴 (함포74문), 컬로든 (함포74문)호와 최초의 전투를 시작했다. 이후 블렌하임 (함포90문), 오리온 (함포74문), 이리지스터블 (함포74문), 엑설런트 (함포74문)의 협공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모든 돛대가 부러지고 승선인원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군기까지 빼앗겼지만 펠라요 (함포74문)와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 (함포112문)의 지원을 받아 후퇴하는 바람에 영국해군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나포하는데 실패했다. 며칠 후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파손되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에스파냐로 복귀하던 중 리차드 보웬 선장이 지휘하는 함포32문 규모의 프리깃함 HMS 테르프시코레의 공격을 받았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마침내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수리를 위해 카디스 항구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9년 후,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우리아르테와 해군 소장 발타자르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의 지휘하에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의 일원으로서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한다. 선체가 너무 커서 바람이 약하게 부는 날은 키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연합함대의 작전목적에 부합하는 전력으로서는 비효율적이었다. 산티시마의 거대한 선체와 위치로 인해 연합함대의 기함인 부솅타투르 대신 영국 함대의 집중적인 목표가 되었고 수 많은 전함에게 동시에 공격받았다. 돛대를 모두 잃은 끝에 결국 토마스 프레멘틀 선장이 지휘하는 넵튠호에 항복하고 만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파손된 채 프린스호에 견인되었지만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영국 포획자들은 선체에 구멍을 내어 폭풍우속에서 침몰시켜 버렸다.
첫댓글 동시대 유럽 해군에서 가장 훌륭한 전함을 스페인이 만들었군요. 하지만 저 전함을 제대로 움직일 승무원과 전투원이 부족해서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 ^ ~
이게 얼마만에 보는 리플입니까...흑흑...
리플이 그리우셨나요... ㅠ ㅠ;
역시 ㅋ 기동력이 생명이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