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올라와 있던 도마복음 풀이가 <또 다른 예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의 도마복음 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5월10일 서울 예담 출판사를 통해 나왔습니다.
책은 여기 올라와 있던 초고와 상당히 차이가 나기에 이제 초고를 내립니다.
단 고쳐진 서문과 도마복음의 서언에 대한 해설만 올려 놓기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길벗 여러분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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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독자들께
지금 여러분이 들고 계신 이 『도마복음』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보통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도마복음』에서 ‘또 다른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가 여기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22세에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 후 신비주의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 같은 이는 1945년 12월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까지 하면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 여러분은 지금 그런 책을 손에 들고 계신 것입니다.
우선 이렇게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문서의 특징은 무엇인지 잠깐 알아보고 지나가기로 합시다.
『도마복음』의 발굴
1945년 12월 어느 날,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부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나일 강 상류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부근 산기슭에서 밭에다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 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신jinn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으나 금덩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아리를 열어보았습니다. 귀신이 나오지 않아 안심은 되었지만, 실망스럽게 금덩어리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가죽으로 묶인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종이 문서뿐이었습니다. 문서가 들어 있는 그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던 그는 단지 고문서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시장에 가지고 나가 오렌지, 담배, 설탕 등과 맞바꾸었습니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고문서 전문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굴 경로입니다.2)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이때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 속에 숨겨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의 발견과 함께 성서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주로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는 특히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 뭉치들 속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전부 이집트 고대어 중 하나인 콥트어Coptic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란 ‘이집트’라는 뜻인데, 콥트어란 고대 이집트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쓰던 말이고, 콥트 사본이란 콥트 말을 그리스어 문자로 적은 사본입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이 있었습니다.3)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님, 그가 전하는 ‘비밀의’ 메시지가 그지없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글씨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해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씌어진 것과 비슷한 연대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게 본다면 『도마복음』은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이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비해 10년 내지 20년 정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도마복음』이 나그함마디의 콥트어 사본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말 영국 고고학자들이 나그함마디에서 나일 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옥시린쿠스Oxyrhynchus라고 알려진 고대 쓰레기 처리장에서 그리스·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 뭉치들을 발견했는데, 그중 일부 조각들이 나중 콥트어 『도마복음』이 발견된 후 『도마복음』 그리스어(희랍어) 본의 일부로 판명되었습니다. 이 그리스어 파편들은 콥트어 판의 약 20% 정도에 해당됩니다. 거기 있는 그리스 문자의 필체로 보아 이 사본은 대략 200년경에 필사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나그함마디의 『도마복음』과 비교해보면 약간씩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도마복음』의 특성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씀들 중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아는 분들에게는 귀에 익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실제적으로 약 50% 정도가 공관복음에 나오는 말씀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 대신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o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점입니다.4)
특히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씌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1:1)나 “지금”(요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 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5)
『도마복음』이 이런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이 그 당시 이집트, 로마, 그리스를 비롯하여 중동 지역 일대에 성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영지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영지주의를 두고 기본적으로 ‘영지’, 곧 ‘깨달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가르침이라고 본다면, 분명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핵심이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을 모두 악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영혼이 이런 악한 물질세계에 갇혀 있기에 거기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치는 사상체계라 한다면, 『도마복음』에는 그런 생각이 중심 사상으로 강조되어 있지 않으므로 영지주의 복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특히 2세기나 3세기에 유행하던 영지주의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최근에는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서’라 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1979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는 책을 펴내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를 세상에 널리 소개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일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도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최근 저서에서 그러한 주장을 일부 인정했습니다.6)
제가 보기에는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영지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우주론, 신관, 인간론, 구원관 같은 여러 가지 가르침들 중에서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깨달음을 통해 옛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것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할 때, 저는 『도마복음』서를 구태여 영지주의라고 하는 한 가지 특수한 사상체계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생긴 결과라고 할 것 없이, 세계 종교 전통 어디서나 심층 깊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던 복음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한문으로 ‘영지靈知’라 번역하고 영어로 보통 ‘knowledge’라 옮기는 그리스어 ‘gnosis’란 용어를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침’ 혹은 ‘깨달음’에 해당하는 말로서, 꼭 영지주의에서 특허를 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prajna 곧 반야般若, 통찰, 꿰뚫어봄, 직관과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불교에서 반야를 통해 성불과 해탈이 가능해짐을 말하듯, 『도마복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참된 쉼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7)
『도마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만 적은 ‘어록’이라는 것입니다.8)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이나 활동 등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마저도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록으로만 이루어진 『도마복음』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거나,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쓰기 위해서, 혹은 신비적 명상을 위한 화두 비슷한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9) 그것이 무엇을 위해 씌어졌든지, 저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천국, 내 속에 있는 하느님, 내 속에 있는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는 기본 가르침에 충실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풀이에서 하려는 것
제 자신 대학 다닐 때 여러 해 동안 성서 그리스어(희랍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물론 도마복음서가 본래부터 콥트어로 씌어졌던 것은 아니고,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것이라 저의 그리스어 공부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콥트어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기에 제가 직접 도마복음 콥트어 본을 독자적으로 번역하지는 못하고, 여러 서구 전문가들의 훌륭한 번역과 역주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판을 꾸밀 수밖에 없었습니다.10)
여기 이 풀이에서 저는 모두 114절로 나뉘어 있는 『도마복음』 본문을 한 절 한 절 꼼꼼히 읽으며 제 나름대로 찾아낸 뜻과 거기에 대한 저의 반응을 중심으로 써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풀이가 다른 학자들의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제 자신의 배경을 살려 다른 종교 전통의 문헌들, 특히 『도덕경』, 『장자』, 불경 등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과 비교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도마복음』 본문 자체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최선을 다해 찾아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씀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그 말씀의 더욱 깊은 종교적인 뜻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거기에서 ‘촉발’되어 제 나름대로의 뜻을 찾아보려는 이런 식의 읽기를 ‘환기적evocative’ 독법 혹은 ‘독자 반응 중심의’ 독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물론 풀이에 나타난 저의 생각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들도 독자 나름대로 읽으시되 제가 읽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혹시 제가 읽는 방식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뛰어넘고 본문만 읽으면서 홀로 명상해보는 방법을 취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가 읽은 방식이 독자 스스로 더욱 깊이 읽으시는 데 약간의 자극제나 일깨움의 실마리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할 따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나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졸저 『도덕경』 풀이나 『장자』 풀이에서 저는 노자님이나 장자님의 말을 모두 경어체로 옮겼습니다. 그와 같이 이 책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경어체로 옮겼습니다. 30세 정도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반말로 했다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라 해도 자신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너희는 들으라’ 하는 식으로 말했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곤란합니다. 물론 지금의 ‘개역개정’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성경에 예수님의 말씨를 모두 반말로 했기에 거기 익숙하신 독자들에게는 이런 존댓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처음에는 좀 어색해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읽다가 보면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예수님을 발견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어색해서 못 읽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현재 한국 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의 표현법으로 옮긴 것을 밑에다 함께 실었습니다. 두 가지를 다 읽으셔도 좋고, 마음에 드는 것 어느 쪽을 택해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두 가지를 다 읽으신다면 말씀을 두 번씩 읽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하게 되는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본문에는 없지만 가독성을 위해, 그리고 색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 절에 제가 생각한 소제목과 부제를 붙였습니다.
고마운 분들
이 풀이를 2008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1년간에 걸쳐 연재해주신 『기독교사상』의 한종호 목사님과 편집진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원고의 일부를 길벗 게시판에 올렸을 때 이를 읽고 반응을 보내주신 길벗모임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첫 딸을 얻어 밤잠을 설치면서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여러 가지 좋은 의견과 조언을 보내준 신생 신비주의 전문학자 성해영 박사와, 몸소 깨달음의 삶을 추구하면서 원고를 읽어주신 박채연 박사님께, 그리고 제가 옮기는 『도마복음』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교우들과 함께 읽으시는 등 계속 응원해주신 캐나다의 임마누엘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최성철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내기로 결정해주신 위즈덤하우스의 박선영 부장님, 그리고 기획과 원고 검토에 힘써주신 박현찬 선생님, 멋진 책으로 단장해주신 이효선 편집장님께도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디 이런 귀중한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를 받아 더욱 풍요로워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009년 봄
캐나다 밴쿠버에서 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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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살아 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_도마 전통의 성립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입니다.
이는 살아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이라.
『도마복음』은 여기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비밀의 말씀들’임을 선언하는 말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여기에 나오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가장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꿰뚫어볼 수 있는 ‘비밀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제23절의 표현처럼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 꼴이라고 할 정도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관심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다.
종교적 진술에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피表皮 혹은 현교顯敎, exoteric 층이 있고, 정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밀內密 혹은 밀의密意, esoteric 층이 있는데, 여기 이 말씀은 바로 내밀적 기별, 감춰진 말씀, 비밀, 신비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성립된 ‘도마 전통’에서 이해한 대로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디두모Didymos’는 그리스어, ‘도마Thomas’는 아람어/시리아어,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쌍둥이’가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디두모 유다 도마’를 문자 그대로 하면 ‘쌍둥이 유다’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의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가룟 유다와 다른 유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 ‘도마’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도마는 꼭 문자적으로 육체적인 쌍둥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 같이 모두 한 분 하느님에게서, 혹은 한 태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과 쌍둥이라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깨치기만 하면 모두가 형제자매 내지 쌍둥이라 불릴 수 있는 경지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라 본다. 선불교에서도 함께 깨달음을 얻은 도반을 쌍둥이라고 한다.
1절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_해석과 깨달음의 중요성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직결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예로 들어본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1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있는 집이 100집도 넘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밤 12시라는 같은 시각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것에 의하면 호주는 지금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와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 하는 단계로 심화된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과 평화스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좀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의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써 사랑과 우의를 나누며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되고, 그러다가 교회나 동네뿐 아니라 온 나라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까지 생각하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좀더 장성하면, 혹은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신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과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적 이야기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다고 한다. 문자적hylic 의미가 있고, 나아가 심적psychic·영적pneumatic·신비적mystic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 카발라 전통에서도 성경에는 표면적Peshat, 비유적Remez, 미드라쉬적Derash, 신비적/비의적Sod 의미가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종교적 진술을 대할 때 우리는 올바른 풀이를 통해 점점 더 깊은 뜻을 깨달아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고 문자적이고 표피적인 뜻에만 매달리면 우리의 영적 삶은 결국 죽어버리고 만다. 바울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고 했다.
이처럼 올바른 풀이를 통해 여기 주어진 메시지의 가장 깊은 차원의 영적·신비적 뜻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우리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육체가 죽어도, 옛 사람이 죽어도 그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에 의하면, 들음에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귀’로 듣는 단계, ‘마음’으로 듣는 단계, ‘기氣’로 듣는 단계, ‘비움[虛]’을 통해 도道가 들어와 도와 하나 되는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영지주의나 카발라에서 말하는 물리적 차원, 심적 차원, 영적 차원, 신비적 차원과 대략 상응하는 것 같아 신기하게 여겨진다. 세 단계를 지나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우리 속에 도가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장자는 ‘심재心齋(마음 굶김)’라고 했다(오강남 풀이 『장자』, 183~188쪽 참조).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말은 『도마복음』에 네 번 나온다(제18, 19, 85, 111절). 이런 표현이 나오는 곳의 가르침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첫 절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영적 사활과 관계된 것이라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첫댓글 너무 길어서 읽어 볼려면 보름쯤 걸리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