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명] 갈맷길의 봄

갈맷길의 봄 / 김지명     봄을 장자산에서 맞이한다. 갈맷길은 부산을 상징하는 오솔길이다. 갈맷길은 부산의 새 갈매기와 짙은 초록색이라는 뜻에서 '갈맷빛'의 중의적 의미가 있다. 해안 길, 강변길, 숲길을 모두 아울러서 갈맷길이라 한다. 갈맷길 칠백 리 중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곳은 장자산이다. 구마다 해안 절경이라고 자랑하는 갈맷길은 해운대와 송도 절영도 다대포 등이 있지만, 장자산 갈맷길이 가장 경치가 좋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접하는 곳은 장자산이 품은 오륙도다. 승두말(남해동해분준점)에서 시작되는 해파랑길이 장자산에서 갈맷길과 겹쳐져 있다. 갈맷길을 걷는 여인의 의상에서도 봄이 보인다. 외국계 상춘객은 천혜의 관광명소인 갈맷길을 걸을 때 기암절벽 위에서 눈앞에 보이는 경치에 원더풀을 외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는 장자산의 절경을 마음껏 조망하면서 오솔길 언저리에서 봄을 살핀다. 동풍이 불어오는 갈맷길에 불잉걸이 된 바위가 터줏대감처럼 퍼지고 앉아 있다. 갈맷길 언저리에 장롱 같은 바위도 있다. 전국에는 농바위가 몇 군데 있지만, 갈맷길에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하게 생긴 그 자태다. 자연이 만들어낸 농바위는 갈맷길 2-2구간의 포인트다. 농바위는 부산 남구 장자산 동쪽 기슭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감동은 주지 않는다. 짠물에 발을 담근 농바위는 파도에 수난을 당해 정강이가 매끈하다 못해 반질거린다. 기암절벽 위에 아슬아슬한 농바위는 장롱을 여러 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농바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는 무수한 세월의 흔적을 불 수 있다. 수억 년 전 농바위가 분리될 때 금 간 자리에 바람이 옮겨준 먼지가 가득 쌓여있다. 그 속에 뿌리내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칼바람에 줄기와 이파리는 메말라서 누렇게 변했지만, 살아있는 뿌리에서 봄바람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농바위 전망대 곁에는 고목이 된 두 그루의 소나무는 부부처럼 다정히 서 있다. 절벽 위의 노송은 바위틈에 뿌리내려 맑은 하늘에 이슬 먹고 살아간다. 억겁의 세월에도 해풍은 연이어 불어오지만, 노송은 움츠리고 봄을 기다린다. 메마른 바위틈에 뿌리내리고 천 년의 세월에도 농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항시 지켜보는 소나무다. 노송은 무엇을 증언하려고 저렇게 지치도록 서 있을까 싶기도 하다. 탑처럼 높이 쌓아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농바위가 애처로워 노송은 안타까움을 면치 못한다. 꾸부러진 노송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오늘도 해변의 기암절벽 위에 서서 해무를 기다린다.   봄이 온다는 것은 번식을 위한 삶의 발버둥이다. 산기슭 동쪽에는 봄이 왔다고 흔적을 보여준다. 실개천 언저리 작은 물웅덩이에 도롱뇽이 알을 낳아 뭉글뭉글 엉켜있다. 나는 매년 봄마다 이곳에서 도롱뇽 알집을 본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개구리 알처럼 보였지만, 도롱뇽이 있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알을 낳은 도롱뇽은 멀리 떠나지 않고 물웅덩이 언저리에 숨어서 알을 지키고 있다. 장자산에는 도롱뇽의 알이 봄을 알린다. 이것뿐만은 아니다. 양지바른 중턱에서 생강나무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생강나무 꽃은 팝콘이 터지듯 동시다발로 만개한다. 생강나무 꽃은 산수유 꽃과 많이 닮았기에 처음엔 착각하기도 했다.   승두말 언저리 둑에서 꽃씨가 날아 장자산 숲 속에도 앉았지만, 갈맷길에도 앉았다. 지난가을에 소슬바람을 타고 날아온 갯고들빼기 꽃씨가 거미줄에 걸려서 몇 달째 메말라 있다. 장자산 갈맷길 길섶에서 낙엽 사이로 끼어든 갯고들빼기 씨앗은 뿌리를 내리기 위해 봄비를 기다리고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삶의 터전을 끝없이 넓히려는 것은 생의 본능이다. 후대가 태어나면 반드시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난다. 도둑놈 풀씨라고 하는 가막살나무 이름도 다양하다. 도깨비바늘, 차귀사리라고 불리는 풀씨도 사람의 옷이나 동물의 털에 붙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자리 잡는다. 식물뿐만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동물이라도 자립할 정도로 성장하면 무리에서 쫓겨난다. 떠나가든 쫓겨나든 모두가 그곳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갈맷길 언저리로 시집온 민들레도 있다. 어디서 여기까지 이사 왔는지 민들레의 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다.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군락지를 꿈꾸는 민들레가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이파리는 말라 죽었지만, 동풍에 새싹을 보여주고 있다. 민들레 씨앗을 최대한 멀리 떠나보내려고 꽃잎이 지고 나면 꽃대는 절반이 더 자라는 기이한 식물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내기 위해 꽃대가 자란다. 민들레는 자녀를 다 출가시키고 모체는 외롭게 서서 안테나 역할을 한다. 전국에 흩어진 아들딸에게서 소식 들려오길 학수고대하는 엄마는 외로움도 잊은 채 손자의 탄생소식을 기다린다.   갈맷길은 인생살이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자갈길을 벗어나면 바윗길도 있다. 험난한 인생 여로를 맛보려 하지 않고 항시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윗대가 머물던 곳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바람 타고 날아가는 잡초의 씨앗처럼 여동생도 타지에 시집가서 살고 있다. 나의 형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서로의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이동해서 산다. 조카의 경우는 미국까지 날아가서 살고 있다. 혈육이란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핵가족 시대로 접어들어 자기 위주로 산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먼 곳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어디든지 떠나려는 현대인의 자녀들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라 자유의 몸으로 세상을 날고 싶은 심정이다. 남자들은 아직도 한 곳에 머물면서 기제사나 설, 추석 명절에는 연례행사처럼 만나는 것이 고정 과념으로 되어있다.   바다와 접하는 산은 대다수 절벽이지만, 장자산은 아주 넓은 바위가 해안선을 따라 펼쳐져 있다. 갈맷길 언저리에 넓은 바위는 억겁의 세월에도 하나같이 파도에 애무 당하면서 사랑에 빠져있다. 물침대에 누운 바위는 영겁의 세월 속에 잠시도 쉬지 않고 마사지도 받는다. 봄바람을 업은 파도는 해안선을 따라 자연의 소리로 배경음악을 연출한다. 나는 장자산의 핏줄 같은 갈맷길 언저리에서 봄을 살피고 있다.                                                                                                           201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