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6 - 불세출의 용장이자 맹장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제3차 십자군을 이끌다!
프랑스 앙주 백작 헨리 2세는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왕비였다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니
기존의 노르망디 공작에다가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을 얻었고......
영국 공주인 어머니 마틸다의 지분으로 1154년에 영국왕이 되어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열었으며 낭트 백작, 브르타뉴 상위 주군에 스코틀랜드 왕국 상위 주군, 아일랜드 영주 입니다.
셋째 아들인 리처드 1세는 아버지에게 반역해 내란을 일으켜 부왕의 군대를 쳐부수고 영국 왕위
에 올랐으니 위의 아버지 헨리 2세가 가졌던 직위에다가 키프로스 영주를 더했는데,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이자 군사 전략가로 능력이 뛰어나 제3차 십자군 원정시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왕의 맞수로 맹활약했으니......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사자심왕이라 불렸습니다.
롤모델은 알렉산더대왕이니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마케도니아군
중장 보병으로 페르시아군 기병대를 격파했고, BC 330년 메소포타미아 가우가멜라에서
보병들이 창과 활로 말과 마부를 쓰러뜨리는 동안 알렉산더대왕은 몸소 기병대 선두에 서서
다리우스 3세를 향해 돌진했으니..... 귀신 처럼 다가오자 겁을 집어먹은 다리우스왕은 도주합니다.
중국에는 초패왕 항우가 있으니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유방이 수도 팽성을 점령하자
단 3만의 기병만 이끌고 급히 돌아오는데, 한왕은 여러 제후들이 보낸 원군을 합쳐 60만
대군을 이끌고 나오자 항우는 특유의 용맹과 무예로 바람 처럼 적진을 돌파해... 대나무를
쪼개듯 연합군을 격파하고 유방이 식겁해서 자식까지 내던지며 죽자살자 달아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겐페이전쟁 중인 1184년 이치노다니에서 미나모토 요시쓰네는 미나모토군 6만 중에 별동대
1만을 지휘해 산맥을 통과한후 부대를 3개로 나누고는 그 중에 기병 70기를 이끌고 적의 후방
으로 돌아가 경사 30도 산비탈길을 기병으로 돌진해 내려가 적의 성에 불을 지름으로써 후방
급습과 연기로 아군의 숫자를 분간못하게 해서 배반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한 다이라군은 와해됩니다.
또 1570년 6월 28일 오다 노부나가는 도쿠가와군과 28,000명으로 오다니성에 이르니 아사이씨는
아사쿠라씨와 연합해 18,000여명의 군대가 아네가와 전투가 벌어지는데, 아사이씨의
선봉 이소노 가즈마사는 오다군의 사카이 마사히사 부대를 돌파해 파죽지세로 하시바 히데요시
와 시바타 가쓰이에 진 등을 격파해서... 오다군 13단 진 중에 11단 까지 쳐부수는 맹공을 보입니다.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8살까지 살았으나 왕이 된후 10년간 잉글랜드에 있었던건
6개월 정도라는데, 아내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는 재위 동안 잉글랜드를 방문한 적이 없으니
일생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3년 정도는 제3차 십자군 원정으로 레반트에 머물렀으니
잉글랜드의 지배계층 앵글로-노르만 귀족들 처럼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모어로 구사했습니다.
리처드 1세를 '본질적으로 남프랑스인' 이라고 말하니 정체성 형성은 보르도 등 서남부 프랑스 에서
이루어졌는데, 리처드는 자신을 부계인 '프랑스 앙주 가문의 사람' 으로 여겼으며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하는 성질, 집착적인 성격을 '검은 공작' 풀크와 같은 앙주가 조상들에게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리처드는 유년기를 프랑스 서남부 아키텐에서 보냈고 북부 프랑스어도 썼지만 아키텐 공국
에서 쓰이는 남부 프랑스어가 모국어였으며, 잉글랜드의 왕자이기 이전에 아키텐의
공작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니 여러차례에 걸친 아버지에 대한 반란도 헨리 2세 부왕이
리처드의 삶과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키텐을 리처드에게서 빼았으려고 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후원하며 형성된 음유시인과 궁정식 연애 문화는 프랑스
에서 아서왕 전설이 기사도적인 연애 낭만담으로 재창조되는 배경이 되었는데...
리처드도 봉신의 아내와 궁정식 사랑의 모범을 따른 연애를 했고 베르트랑 드
보른등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을 후원했으며 프랑스어로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습니다.
부왕 헨리 2세 통치때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라고 알려진 검이 글래스톤베리에서 발굴되었는데,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왕 탕크레드와 협상할 때 그 칼을 시칠리아 배 19척에 팔아
넘기기도 했다는데 앙주와 아키텐은 프랑스왕의 봉토이니 신하인데 비해 잉글랜드는
국왕으로 만들어주는 땅이었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감과는 별개로 의전에서는 신경을 썼습니다.
리처드는 1157년 옥스퍼드에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3남으로 태어난후 프랑스
아키텐으로 이주한뒤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으며 기사 작위를 위한
군사훈련을 했다는데, 13세에 프랑스왕 루이 7세의 딸 아델과 약혼했으며 16세
에 보르도 대주교에 의해 푸아티에에서 아키텐 공작으로 정식으로 서임 받았습니다.
헨리 2세는 형인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왕, 노르망디 공작 및 앙주 백작의 후계자로 지명
했으며 리처드에게는 아키텐을 상속하고, 사남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를, 막내 존은
성직자의 길을 걷게 할 계획이었으나 아들들에게 실권은 조금도 주지 않는데다가 처를
멀리하고 바람을 피우니 존을 제외한 자식 3명이 함께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1173년에 리처드와 그 형제들은 프랑스 땅에 영국왕이 영지를 가진데 대해 불만인
프랑스왕 루이 7세를 만나, 루이 7세로 부터 기사 서임을 받았으며 1173년
3형제는 노르망디를 공격하니 스코틀랜드 사자왕 윌리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등이 가세했는데... 대반란의 배후에는 어머니 엘레오노르 왕비가 존재했습니다.
리처드는 사랑하는 모후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당장 라로셀로 진군했지만 도시의 격렬한
반항에 부딪혀 승전보를 울리지 못하는 반면, 헨리 2세는 신속히 진군해서는 동맹군을
완전히 압도하니 불로뉴 백작은 전사하고 루이 7세 프랑스왕은 패배해 도주했으며......
리처는 궁지에 몰리자 부왕의 발 밑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후 남프랑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키텐 공작 리처드는 1177년에 가스코뉴로 진격
하여 아키텐 반군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이듬해 1178년, 헨리 2세가 아키텐에서
지내는 동안 조언자의 역할에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잉글랜드로 건너간 뒤에는
군 통솔권을 완전히 장악해서는... 난공불락이라는 타유부르 공성전을 벌여 성공합니다.
1179년 11월, 랭스에서 열린 13세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의 프랑스왕 대관식에 참석해서는
동생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와 함께 아키텐 공작령과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필리프 2세에게 충성서약까지 했으며, 1181년 리처드는 형인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
와 힘을 합쳐 썽쎄흐와 플랑드르의 반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구합니다.
1182년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 리처드파인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해서는 리처드의
아키텐으로 진격해오고 필리프 2세 프랑스왕은 뒤에서 은밀하게 용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리처드에게 은혜를 원수로 되갚는데.... 헨리 2세가 형에게 충성서약을 하라고
하자 "나의 주군은 필리프왕 뿐이고 영지는 모후에게서 받은 것이니 상관할 일이 아니다"
형인 청년왕 헨리가 이질로 급사하니 헨리 2세는 리처드에게 아키텐을 막내 존에게 양도하고
대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와 앙주에 잉글랜드를 상속받으라고 지시하자,
분노한 리처드는 부왕에게 복종을 거부하고 아키텐으로 달려가 전쟁준비를 하였고, 동생
제프리 2세는 위선적인 정치 공작을 펼쳐 부왕의 호의를 사면서 야심을 실현시키려고 합니다.
결국 리처드는 부왕에게 굴복해 아키텐을 반환해야 했고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열을 꾀하던
상위 주군인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동생 제프리를 헨리 2세의 후계자로 대우하고
리처드를 박대했으며, 프랑스 공주 아델을 싫어한 모후 엘레오노르는 은밀히 결혼동맹
을 맺을 신부를 물색했으니 나바라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 공주와 비밀리에 약혼합니다.
1186년 8월 동생 제프리가 파리에서 급사하자 리처드에게 기회가 찾아오고 30세인 리처드
는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는데, 헨리 2세는 막내 존에게 아키텐을 주기 위해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시키려 했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을 재촉
하지만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와의 약혼을비밀로 부치니 제각기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스크족의 나바라 왕국은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기독교 세력은 서북부
산악 지역으로 위축되었을 무렵인 824년에 에네코 아레차의 지도로 건국해,
남부는 1512년 아라곤에 북부는 1620년 프랑스로 귀속되는데 몇년전 테러를 저질렀던
바스크 분리주의자 땅으로 수도는 팜플로나였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걸쳐 있었습니다.
1189년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함께 헨리 2세와 전쟁을 재개하니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이 배반했으며 6월에 헨리 2세는 르망에서 대패하고 시농성으로
퇴각하였으니 1189년 7월 3일, 리처드와 필리프는 서있기조차 힘든 헨리2세를 회담장
에 소환해서는 항복을 받는데 3일후 부왕이 병사하자 리처드는 잉글랜드왕으로 즉위합니다.
1189년 9월에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리처드 1세는 대관식 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
지기도 했으니,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 였습니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해 시칠리아와 키프로스를 거쳐 레반트에 상륙하는데
전쟁 비용으로 살라딘세라는 무거운 세율을 매기고 재정적으로 나라를 힘들게 했지만
그는 전술과 전략의 대가였고 공성전의 천재였으며...... 승부의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전세를 뒤집는 결단을 내렸고 병참과 보급의 달인이었으니 야전 사령관으로서는 최고였습니다.
리처드는 216척의 배를 이끌고 8,000킬로미터를 항해했으며 예루살렘으로 남하할때 2만명 십자군
에게 열흘간의 식량과 물을 공급하니 병사는 하루치 식량 1킬로그램과 장작 0.5킬로그램
등 15킬로그램의 보급품을 짊어졌고 우물에 사라센인이 독을 풀었을 것으로 보고 1인당 15
리터씩 물을 배급했고 6,000명의 기사에게는 건초 7킬로그램과 20리터의 물을 추가로 배급합니다.
살라딘의 수하 아미르는 "세계가 창조된 이래로 우리는 그렇게 용감하고 그렇게 무기
를 잘 다루는 기사를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진군하고
가장 늦게 퇴각하는데...... 그의 검을 피할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그와
싸우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일과 매한가지 입니다. 그는 인간이 아닌 사탄인가 합니다"
리처드는 솔선수범해서 일했으니 "왕이든 귀족이든 기사든 종자든 모두 함께 손으로
돌과 바위를 나르며 일했다." 그러면서도 리처드는 음유시인을 후원하고 여성을
숭배하는 남프랑스의 감수성에 깊숙이 매료되었고, 최고급의 사치품을 향유했던
등 뛰어난 심미적 감각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자만, 탐욕, 여색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리처드는 프랑스 동부의 베즐레에서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만나 제3차 십자군 출정식을
가졌는데 두너러 군대가 하필 시골의 외진 마을을 택한 이유는 베즐레 수도원 Vézelay
Abbey 이 있으니 아버지 루이 7세 처럼 바로 "막달라 마리아" 에게 의지하기 위함 입니다.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키프로스에서 군을 정비한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히고는 유유히 지나던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해오자 충각전술로 적의 배를 점령합니다.
이후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토착 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어 한동안 거동을 할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데,
열병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있던 침대채로 전선으로 이동해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쏴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크레를 점령함으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
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으니 원래는 성십자가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는데 살라딘이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리처드는 결국 포로들을 학살합니다.
1191년 8월 30일,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후위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
의 매복에 걸린 것을 보자 리처드 1세는 혈혈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투르크군의 머리를 가격하고 좌우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투르크군
들을 죽여대자 투르크군들은 이 야수같은 모습에 질려버려 모두 혼비백산해 도망쳤다고 합니다.
구호 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 갈 때쯤, 기사단의 단장과 불드윈 커루라는 기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 조지를 위하여!" 를 외치며 달려나가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가는데,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리처드는 기병대 전체에게 돌격을 지시하니 지원이
없었다면 섣부른 돌격을 한 구호 기사단은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입니다.
“나는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
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야파를 점령하고 아스칼론으로 남하했는데 팔레스티나 지역 이슬람 세력은 10만이 넘은데...
비해 십자군은 35,000명 정도로, 1차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엇으니 에미르들이
서로 싸우던 중이라 예루살렘성을 점령했지만... 지금은 살라딘으로 통일되어 있으니 설사
예루살렘을 탈환한다고 해도 리처드가 귀국하면 이슬람에 포위된 상태라 유지가 불가능했습니다.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데 성공하면 살라딘은 실각할수 밖에 없고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수
있으며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수 있으리라고 여겼지만,
부르고뉴 공작이 반대하고 나서자 포기하고는 이집트상단을 기습해 2천명을 죽이고
5백명 포로에 4,700마리 낙타, 수천마리 당나귀와 노새를 비롯하여 금은, 무기등을 탈취합니다.
리처드가 아크레로 간 후 1192년 7월 27일 살라딘과 6만 2천여명의 사라센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해 십자군을 성채로 몰라 넣은후 약탈에 미쳐 날뛰는데, 리처드는 샹파뉴의 앙리
가 이끄는 주력 부대는 내륙으로 보내고 해로로 출발한 리처드는 야파에 도착해 3필의 말과
80명을 이끌고 도끼를 들고 도시로 뛰어들어 6만 이슬람군을 몰아냈고 추가공격도 격퇴합니다!
리처드 1세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나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는데, 별안간
이슬람 투르크군 한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으니.....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 이라며,
날쌘 아랍말 2필을 보내준 것이니 리처드는 그 말에 올라타고 사라센인을 무참하게 도륙합니다!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조약을 체결하니....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 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하며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
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으며 십자군
들이 성묘 교회에서 미사를 보는 것도 승낙했고 포로들을 교환하니 이후 26년간 지켜집니다.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메시나에서 리처드 1세는 약혼자인 프랑스공주를 버리고 나바라 공주
베렝겔라를 맞이했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음모 또한 드러나게 되자 둘의 우호
관계는 깨졌는데, 아크레 함락후 귀국한 필리프 2세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해 동생 존을
사주해 음모를 획책하는 통에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됩니다.
리처드의 배는 지중해에서 풍랑으로 난파하니 일행은 허기와 병에 시달리던 도중 아크레성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 비엔나에서 생포되어 부하들은 고문을 받았고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어 검을 든 병사에게 밤낮으로 감시 받는 신세에 처해집니다.
1193년 2월,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에게 호송되어 트리펠스성에 수감되었고..... '말이나 망아지도
옴싹달싹 못할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았으며' 신성 로마제국 법정에 기소되었으니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 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립니다.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 보석금으로 십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으니 잉글랜드 연 소득의 2~3 배에 달하
는 금액이었는데 동생 존은 런던으로 진격해 형이 죽었다고 주장하고는 무력 행사를 하니 잉글랜드
내전이 진행되자..... 필리프 2세도 출병해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을 회유합니다.
영국에서 모후 엘레오노르가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1193년
겨울에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에게 심정을 표현하는 시를 보냅니다.
어떤 죄수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오.
슬픔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그는 위로를 얻기 위해 노래한다오.
나는 많은 친구가 있소만 그들의 선물은 적다네.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나는 죄수로 남아 있다네.
모후 엘레오노르는 잉글랜드를 쥐어짠 십만 마르크를 가져왔지만 필리프 2세와 존의 뒷
공작 때문에 날짜가 미루어지자 독일 공작들의 항의가 빗발치니 2월 4일에야 리처드
는 자유를 되찾으니 필리프 2세 왕은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내는데....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은 즉각 동생인 존은 파리로 도주 합니다.
리처드는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잉글랜드를 쥐어짜 군자금을 모아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존이 투항했고, 모후가 나서서 달래자 리처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
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 라며 용서합니다.
리처드는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필리프 2세가 이끌던 남프랑스 봉신들의 대반란
을 제압했는데 리처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발군의 군사적 능력을 증명하여 승기를 휘어잡고
필리프 2세의 주요 동맹국인 플랑드르와 툴루즈를 이탈시키고 실지를 회복하고 파리 외곽
까지 진군하자......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배반을 부추깁니다.
리처드 1세가 승리를 결정지을 즈음에 리모주 자작 아데마 5세가 필리프 2세의 계략에 넘어갔는
데...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잉글랜드령과 프랑스 간의 국경지대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라 리처드 1세는 직접 출진합니다.
당시 리모주 자작령은 중요한 곳이니 프랑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
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반으로 나누고 있었으니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이었습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으니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차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습니다.
화살촉은 어깨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으니 군의사는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
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내었지만 상처가 곪아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으며, 그전에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해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 이 리처드 1세 앞에 끌려오게 됩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짐이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죽이려 하였느냐?" 하자, "당신
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당신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도 죽을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구르동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겠다. 몸 성히 가거라." 라고 말한 뒤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는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에 모친
엘레오노르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일세를 풍미한 영웅의 죽음치고는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