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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仁派世居地 -太平烟火宜仁村-
[眞脈 第2號(眞城李氏서울花樹會 2002. 5. 12.發行)揭載(150-164쪽)原稿]
22세 東耈(의인파)
1. 머리말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가 자자손손 이어오면서 손세(孫世)가 번성하여 중시조의 호 또는 관직과 세거한 곳의 지명으로 문중의 호칭(OO파)으로 하고 있다. 대게 한 문중에서 갈라져서 명실공히 문중이 형성되기까지는 파시조(派始祖)에서 4~5대를 내려가서 자손이 번창하여 한 가문을 이루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의인파(宜仁派)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인파의 파시조께서는 퇴계선조(退溪先祖 ; 諱 滉, 字 景浩, 號 退溪, 諡 文純, 1501-1570)의 손자 3형제분 중 둘 째 분으로 장사랑공(將仕郞公 ; 諱 純道, 字 醇甫, 1554-1584)이시다. 장사랑공의 증손이신 수월헌공(水月軒公 ; 諱 集, 字 伯生, 號 水月軒, 1672-1746)께서 8남2녀의 자녀를 두시어 비로소 자손이 번창하여 상계파(上溪派)에서 분파된 문중으로 족보 또는 파보를 편찬할 때 의인파(宜仁派)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즉 의인은 장사랑공의 후손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 살아온 터전이다.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누대를 집성촌으로 살아온 세거지를 떠나 새로운 터전에 옮겨갔다.
그 동안 잊혀져 가는 조상님들이 살았던 터전을 살펴 후손에게 알리고 조상님들의 흔적을 보전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의 책임일 것으로 생각되어 자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2. 의인은 어디인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이다. 의인은 의촌리의 동쪽지역으로 도산서원 앞의 안동호를 건너서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들어가는 길은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선착장으로 내려가서 안동호에 담수가 되면 안동시의 행정도선이 하루에 3번 왕래하며, 땜의 물이 빠져 행정선의 운항이 어려워지면 의촌리 주민들이 건조한 나룻배로 내왕하고, 나룻배도 내왕 못할 정도로 강물이 줄게되면 선착장아래에 주민들의 정성과 약간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잠수교를 건너서 시사단을 지나 약 2Km정도 가면 된다.
또 다른 길은 안동에서 도산쪽으로 가다가 와룡에서 예안면(옛 월곡면)으로 가는 길로 주진교를 지나 정상동(예안면 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봉화 재산으로 가는 길을 향하여 고개를 넘어 교량(태곡교)을 지나자 마자 좌회전하여 약 10Km정도 오다가 도산서원이 바라보이는 갈림길이 보이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들어오면 의인이다. 이 길은 안동땜이 건설되면서 이설도로로 개설된 도로이다.
안동땜 건설은 낙동강에 인접된 전통을 간직한 많은 마을이 수몰되어 수백년을 세거하며 자손을 번창시켜 국가의 동량으로 역할을 다 해온 명문거족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되었다. 의인도 이러한 마을 중의 한 마을이다. 안동땜 건설 후 연안의 안쪽 마을은 섬 아닌 섬이 되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정책에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의인은 더욱 그랬다. 이설도로는 임동서 정상동을 거쳐 삼계까지는 포장도로 만들었으나 의인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에 좁고 험하여 도로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자동차를 이용하려면 부포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하고 배를 건너서도 부포에서 약 4Km에 불과 한 거리는 형편이 없었다. 다행히 1999년부터 경상북도의 오벽지개발계획에 의거 의인으로 가는 길이 확장 포장을 연차적으로 하고 있으며 도산서원 앞까지 이어진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고 한다.
3. 의인은 왜 의인인가?
의인은 의인현(宜仁縣)의 폐현(廢縣)자리라는 것이다. 의인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년)에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에서 의인현으로 승격되어 안동부(安東府)에 속읍(屬邑)으로 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년)에 예안군(禮安郡)으로 옮겨 속읍이 되었다고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誌)에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태조가 견훤과 싸울 때 선성원(宣城院)이 도와 견훤을 물리치게 되어서 선성원을 선성부(宣城府)로 승격되었고 당시의 관사 마당에 있던 넓적 바위가 지금의 밭 가운데 남아있고 이 밭이 고려 때의 동헌터 였다고 하고 돌의뫼는 옥사(獄舍)터라고 하며 조선 태조 때 이곳 관청은 예안으로 옮겼다는 설과 고려 초기 안덕현으로 부르다가 고려 공민왕때 어진(仁) 사람이 살고 있다하여 의인현이라 개칭하고 현재까지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설이 있다. 뒤의 두 가지 설은 앞의 고려사의 기록이 잘못 전해진 듯하나 의인현의 폐현자리가 있다는 지명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에서 의인현(宜仁縣)으로 승격되었음은 당시의 지방행정구획의 등급이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신분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군․현이라 할지라도 정부에서 중벌을 받으면 향․소․부곡으로 떨어져 천민집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면 보다 높은 행정구획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의인현도 부곡에서 현으로 승격되었음은 국가에 상당한 공을 세워 포상차원의 승격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슨 공로를 세웠을까?
중국 원나라의 반란군인 홍건적이 공민왕 10년(1361년) 10월에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오니 지형과 인심 그리고 백성들의 충성심 등을 고려하여 공민왕이 안동(당시 福州)으로 피난할 것으로 결정하고 공민왕 10년(1361년) 12월 임진일에 안동에 도착하여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2월 신축일에 안동을 떠나 환도의 길에 오른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안동을 중심으로 공민왕과 왕후인 노국공주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설이 여러 지역에서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의인 인근에도 예외가 아니다. 청량산, 가송(가사리)의 공민왕당, 내살미의 왕모산성, 단천의 굉매리, 고통의 지명에 전설이 전하고 의인의 장군서들, 섬마의 산성과 민왕대도 체집된 기록은 없으나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지도보부곡의 백성들이 공민왕 또는 노국공주의 청량산 기도 길에 충성을 다하여 도왔지 않았을까. 그래서 공민왕이 환도 후 피난시절의 공적을 심사하여 포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필자가 1990년 5월에 고려시대 군․현 제도의 연구에 권위있는 학자인 박종기(朴宗基) 교수(당시 국민대학교)께 편지로 문의를 한 바 「고려 후기에 지방 토호들의 수탈이 심하여 정부는 감무를 파견하여 국가가 개별 군․현을 직접 지배하면서 이 과정에서 군․현의 통폐합과 부곡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는데 안덕현에 속해있는 지도보부곡이 의인현으로 승격되어 안동부의 속현이 된 것도 공민왕의 안동피난에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고려 후기 국가 지배력의 강화책의 일환이다」라는 회신을 받았다. 결국 의인현의 승격은 국가에 공로가 있어 승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지명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면 지형지물이나 풍수설에 의하거나 특정한 인물이 지명을 부여하였으나 그런데“의인(宜仁)”이라는 지명의 어원은 무엇일까? 한자를 바로 뜻풀이를 하여보면 “마땅히 어질다”이다. 이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라는 지명도 “알고 있는 도리를 지키는 부곡”라고 뜻풀이가 된다. 이것 또한 현으로 승격되는데 기여하였을 것 같은데 기록을 찾지 못하니 짐작만 할 따름이다.
3. 의인현은 어떻게 변하여 의촌리가 되었을까?
의인현은 처음(공민왕 18년, 1369년)에는 안동부의 속현으로 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년)에 예안현에 감무를 두고 의인현을 속현으로 예속되었다고 한다. 예안은 본래 고구려의 매곡현(買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선곡현(善谷縣)으로 「고려사」지리지는 고려초에 예안군으로 고쳐서 현종 9년에 안동부의 속읍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경상도 지리지」에서는 고려 태조 때 성주 이능선(城主 李能宣)이 귀순해 왔으므로 후한 상을 내리고 예안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하고 있다.
경상도지리지(세종 7년, 1461년)에 의하면 의인현의 가구수는 99호(戶)이고 인구수는 627정(丁)로서 예안현(174호)의 반 이상이고 길안현(44호), 일직현(72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거주를 하였었다.
의인현의 관할구역이 예안현의 구역보다 1/3정도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주하는 인구수는 예안의 반 이상이나 된다. 그러나 의인에는 양반과 선비는 없고 병사만 있는데 얼마나 살아 왔는지 알 수 없다고하였으나, 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매우 소홀하게 다루어 단지 보고들은 것만 다루고 남쪽의 토성과 북쪽의 향교 터가 있고 의인현이 만력 계미년(1583년), 대사(大寺)가 만력 갑신년(1584년)까지 있었으니 이것을 기록한 사람들이 그 자세한 사실을 다하지 못한 것인 듯하다하였으니 산성에는 병사가 있었고, 향교에는 선비가 있었고, 현에는 관리도 있었고, 사찰에는 스님도 있었을 것이나 이 또한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의인현은 언제 폐현이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조선개국 후 왕권확립을 위하여 지방제도를 여러 번 통폐합 또는 개편하면서 폐현이 된 것으로 짐작되나 세종 7년(1461년)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에 의인현의 통계가 기술되었으나 성종 2년(1471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현감이 관할하는 현에는 의인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선성지(宣城誌)에는 선조 17년(1584년)까지 현(縣)이 있었다고 한다.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가 개편되어 예안군(禮安郡) 관할 7개면중 의동면(宜東面) 의인리(宜仁里)라 하였고 1914년 4월 1일 읍면 통폐합에 따라 예안군이 안동군에 편입되어 의동면(宜東面)과 의서면(宜西面)이 도산면(陶山面)으로 통합되어 의인리는 법정동으로 의촌동(宜村洞)이라 하였다. 의촌이라는 지명은 일제(日帝)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의인(宜仁)과 섬마(剡村)을 합하여 “인(仁)”과 “섬(剡)”을 뺀 이름으로 법정동을 정하고 행정동이라 하여 섬마를 의촌1동, 의인을 의촌2동이라 하였다. 그 후 1974년 안동땜 건설로 의촌1,2동을 통합하여 의촌동이라고 하다가 1995년 도농통합으로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가 되었다.
옛 문헌에 의인폐현(宜仁廢縣), 의인리(宜仁里), 의인평(宜仁坪), 의인김씨(宜仁金氏),라는 기록들이 있는데도 동명을 의인(宜仁)이라 하지 않고 의촌(宜村)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4. 의인은 천혜의 아름다운 곳
의인은 태백산이 남으로 흘러 일월산에 우뚝하고 다시 북으로 가지를 뻗어 청량산의 곁가지를 친 다음 서쪽으로 내려와 앉아 야산을 이루고 남쪽은 부포를, 북쪽은 의인을 만들었다.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힘차게 흘러 청량산을 지나오면서 기름진 퇴적토를 의인에 옮겨 쌓아 배산임수형의 의인들을 만들었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마치 배가 물위에 떠서 나가는 모양이어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하여 마을 동쪽 끝에서 싹실골로 가는 길을 배로[船路]라고 하고 마을 서쪽 강변에 돌을 모아 무덤같이 쌓았던 곳이 있었는데 행주형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마을 앞 들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이것은 선사시대 유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확인된다. 마을 뒤 계곡의 지명이 “신씨 묘구멍”라고 전하는 곳이 있어 진성이씨가 들어오기 전에 신씨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 앞은 물이 사시사철 유유히 흐르며 각종물고기가 노닐고 뒷산은 높지 않게 수목은 우거져 기화요초가 저마다 철철이 아름다움을 시기라도 하듯이 꽃을 피우며 고즈넉하게 자리잡아 평화롭게 살고있는 마을이다. 이 어찌 천혜의 아름다운 곳이 아니겠는가?
퇴계(退溪)선조께서도 「태평하게 연기를 피우는 곳, 의인이라는 마을이라네 고기잡아 요역을 대신하니 배부르고 따뜻하네」라 하셨다.
수월헌(水月軒)선조께서는 마을 동쪽 끝 절벽 위에 정자[江亭]을 짓고 그 아래 큰 바위가 흩어진 강변과 그 주변을 관어암(觀漁巖), 조은대(釣銀臺), 백화단(百花壇), 세심대(洗心臺)라 이름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셨다. 또 청안선조(諱 秉淳, 字 幼性, 行 淸安縣監, 1751-1818)께서도「안개 속에 묻혀 한가롭게 지내는데 태평스런 봄이 조용히 찾아오니 서쪽 산 아래는 푸르러지고 앞 냇가는 우거진 버들이 되는구나」라고 의인의 봄을 노래한 시를 남기셨다. 이 외에도 마을에 살았거나 지나간 많은 분들이 의인의 아름다움을 글이나 그림으로 많이 남겼겠지만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이 있다.
5. 진성이씨의인파의 형성과 전개
의인파 시조 장사랑공께서는 퇴계선조의 둘째 손자이고 첨정공(僉正公 ; 諱 寯, 字 廷秀, 1523-1583)의 둘째 아드님이시니 진성이씨의 시조로부터 9세손(世孫)이시다. 당시(명종 갑인 1554년) 퇴계선조께서는 54세이시며 조정에 계셨고 첨정공은 32세이시고 집에 계셨는데 퇴계선조께서 이름을 아순(阿純)이라고 지으셔서 첨정공께 편지를 보내셨다. 퇴계선조께서 근사록(近思錄) 1질과 회암시와 선현의 잠명을 직접 쓰셔서 내리시고 익혀서 실천하도록 하셨다. 타고난 성품이 부드럽고 맑았으며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선조의 가르침을 받으셨고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에 계신지 1년도 되지 않아 슬픔으로 몸을 상해 질환이 더하여 향년 31세(선조 갑신 1584년6월18일)로 돌아가셨으니, 월천 조목께서는「오래 살 수 있음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심은 목숨인가? 운명인가? 아니면 슬픔이란 말인가?」라고 애통해 하셨다. 부인 선산김씨(1558-1654)는 일찍 남편 없이 혼자사시면서 가정을 잘 다스려 임진왜란때 대소가 모두에게 기아를 면하게 하셨고 내외손을 사랑으로 기르시고 향년 97세로 돌아가셨다.
분파 2세이신 별좌공(別坐公 ; 諱 嵂, 字 士聸, 1583-1615)께서는 선고께서 돌아가실 때 겨우 돌을 지난 나이셨다. 편모슬하에 숙부이신 동암공(諱 詠道, 字 聖與, 號 東巖, 1559-1637)께서 가르침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면서 임란당시 의병에 같이 출진을 하시고 퇴계선조 종묘배향시(광해 경술 1610년 윤3월 26일사시) 위판을 모시는 제사에 집사와 주인으로 참여하시게 하셨다. 조정에 출사하여 서울에서 득병하셔서 향년 33세(광해 을유 1615년1월26일)로 돌아가셨으니 고모부이신 운천공께서는「어려움과 복스러움은 하늘에 묻기 어려우며 오래 살고 일찍 죽음은 운수를 도망치지 못한다. 붉은 명정이 바람물결을 거슬러 오는 것을 어찌 참아 볼 것인가?」라고 애도하셨다.
분파 3세이신 교관공(敎官公 ; 諱 英哲, 字 明叔, 1607-1681)께서도 아홉 살에 아버님을 여의시고 할머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한 집을 이어가시게 되었다. 평생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외모가 준수하고 기상과 자태는 모든 사람이 사모하였다고 하며 당시의 방백 이상진(李相震)이 조정에 추천하여 동몽교관 선교랑(童蒙敎官 宣敎郞)을 제수 받으셨고, 시조(始祖) 밀직사부군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청송군수에게 묘소를 찾기 위한 조사를 하여 달라는 글을 제출하시어 잃었던 묘소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리셨다. 공께서는 겸암공의 손녀이신 풍산유씨(1605-1666)와 혼인하여 만촌(晩村 : 현 도산면 동부리)에서 거주하시며 자녀 6남매가 모두 성혼을 하지 못하고 잃으시니 11촌 조카로 대를 잇고자 했으나 자녀 없이 일찍 세상을 달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부인 유씨마저 돌아가시니 봉제사와 노모의 봉양을 위해 연세가 연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권씨부인(1642-1721)을 재취로 맞이하여 3남1녀를 양육하시어 장,차남을 혼인을 시키시고 1681년(숙종 7년)에 향년 75세로 돌아가셨으니 비로소 한 문중의 주춧돌을 놓으셨다, 그러나 장남(諱 梁, 字 材伯, 1668-1685)을 18세로 잃으시니 권씨부인께서 여러 곳을 옮겨 사시다가 1686년(肅宗 12년)에 처음으로 의인을 새 터전으로 정하시고, 차남(諱 檠, 字 以正, 1670-1688) 마저 잃으셔서(1688년) 또 두뫼로 이사를 세 번이나 하였다가 의인에 정착하여 3남(諱 集, 字 伯生, 號 水月軒, 1672-1746)만 남아 풍천임씨와 혼인하여 8남2녀를 두시어 형제분들의 후사를 잇게 하고 삼가현감을 역임하도록 하셨다. 나아가 의인파의 자손이 번창하게 된 것은 권씨부인의 의지에 결과라 할 수 있다.
상계파(上溪派)에서 분파 후 6세가 되어 14종반으로 자손이 번창하니 진성이씨의인파(眞城李氏宜仁派)라 하게 되었다.
분파 6세이래 세거한 의인에서 충․효․애(忠․孝․愛)를 근본으로 자손들을 번창하여 1869년(高宗 6년)에 도산전서(陶山全書)간행에 참여하였고 자자손손 이어오면서 1970년대에는 6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1975년 안동땜의 축조와 더불어 흩어져 현재는 자손이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들 또한 오래도록 자손을 세거할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만, 조상들의 묘소와 약간의 삶의 흔적이 있어 후세들에게 전설로만 이어질 것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 1998년 강정(江亭)을 보수하기 위해 기금 모금 때 1959년 이후 출생자와 해외이주자를 제외하고 276가구 중에 139가구가 주소를 확인 할 수 있었고, 120가구가 기금모금에 참여하여 숭조향념이 대단함이 확인되었다.
6. 의인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역사의 땅, 억만 억겁을 다듬고 모아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드넓은 들판과 맑고 시원한 강물에 넘치는 곡식과 싱싱한 물고기에다 천혜의 경관을 간직한 의인은 의인파가 입향이래 320여년을 세세손손 이어오며 근거지로 하였다. 안동땜의 축조로 물이 들면 만경창파이고 물이 빠지면 잡초가 우거지는 폐허가 되어 섬 아닌 섬으로 몇몇 집들이 산아래 옮겨져 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옛 시인의 말은 있으나 의인은 인걸도 없지만 산천도 의구하지 못함은 실향하지 않은 사람은 실감이 없을 것이다.
신선바우, 가랑골, 호수골, 바른골, 도장골, 시스무골, 벌낭골, 솔마당, 외뚜들, 외이골, 동짝개골, 비끼골,서낭째, 당집개골, 소부골 속닥골, 깊은골, 쏜대모래이, 쌀실, 바름빼알, 음지빼알, 참남배로, 큰배로, 작은배로, 교동골, 양수기, 돌의뫼, 징구렁도랑, 굴웅굴, 앞웅굴, 앞들, 마짱들, 연지메, 보쌀, 엔떼이, 액바우, 마당방구, 강정앞․․․․․ 의인과 의인주변에서 정답게 부르던 호칭들이다. 골과 산과 도랑은 변하지 않고 있지만 웅굴(우물)과 연지메(연자방아)는 묻어져 보이지 않고, 보쌀과 엔떼이는 물결에 흘렀고, 고색창연 하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간데 없고 그 터는 방초만 우거졌으나, 강바닥의 마당 방구와 액바우는 그래도 물이 줄면 나타나니 놀던 바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은 있다.
320여년을 세거한 흔적은 위에 열거한 명칭들과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서낭째 웅굴[城隍峴泉]이 아직도 변함없이 맑은 물을 솟아내고, 주민들이 삶을 의지하고 길흉화복을 빌었던 당집[城隍堂]이 폐허가 되어 쓰러지기 직전에 있다. 팔 형제를 낳아 기르시어 의인파를 형성시키신 수월헌(水月軒) 선조께서 낙향하시어 유유자적하시고자 건립한 강정(江亭)은 수몰지로 인해 1975년 현위치인 솔마당에 옮겨 보전되며, 99간 기와집인 번남(樊南)집은 지방 문화재가 되어 옛 터전에서 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아직은 그 자리에서 건재하고, 교리댁(校理宅)은 안동민속촌 야외박물관에 옮겨져 다례원이 되어 관광객의 볼 걸이와 먹을 걸이를 주고, 진보댁(眞寶宅)은 영남대학교의 교정에 옮기어 의인정사(宜仁精舍)라는 당호를 얻어 후학들의 공부방이 되고 있다. 의인에 관한 문헌은 고려사의 기록과 그 기록을 근거로 기술한 세종실록지리지와 경상도 지리지, 영가지, 선성지 그리고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가 있고, 근세의 문헌으로는 경상북도사, 안동시사, 안동땜 수몰직전에 울산공과대학에서 의인의 취락 평면도를 작성한 것이 있다. 의인에서 자라 타지역으로 출가한 딸들의 택호가 의인댁(宜仁宅)일 것이고, 의인의 삶을 그리워 전설처럼 전하는 옛 예기들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안동호의 환경보호를 위해 수몰보상지에 경작을 금지시킨다하니 살아 갈 길이 없어지는 몇 안되는 주민들이 다시 살 곳을 찾아 떠나면 자손없는 세거지로만 전해질 것이다.
7. 후속연구를 위한 바램
어느 씨족, 어느 문중이 자손을 번창하여 대대손손 이어온 세거지가 아름답지 아니하고, 역사성이 없겠는가 마는, 의인을 조국 근대화의 제물로 수몰되고 그 터를 근본으로 살아온 자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수몰지가 고향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움의 반작용으로 선조님들의 유지(遺志)와 세거지에 관심을 가지고 문헌을 찾고, 전문가에게 묻고, 현장을 답사한지가 2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데 한정된 지면에 정리를 하고자 하니 두서가 없었다. 다만 독자 제현의 이해와 용서를 바라며 앞으로 의인연구에 많은 자료와 자문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으로 어릴 때 의인서 자라던 시절을 못 잊어 『의인촌 사모가』를 지었던 것을 다시 불러본다.
宜仁村 思慕歌
어허라 세월이 流水던가
上溪에서 가지뻗어 宜仁派가 자리잡아 살아온지 320餘年
吉事凶事 치르면서 밉고고운 情나누며 멀어봤자 스무촌에
生家養家 다합치면 血族寸數 당겨지니 이웃사촌 더하며는
四寸六寸 더될손가 찧고뽁고 박고치고 삶의터전 水沒이라
액바우와 마당방구 물속으로 들어가고 돌의뫼와 참남배로
물줄으면 보일런가 징구렁에 앞웅굴은 地名조차 없어지고
벌낭골과 서낭재는 水沒에서 除外되니 祖上幽宅 변함없고
省墓時節 宜仁찾아 故鄕山川 돌아볼제 물이차면 萬頃滄波
물빠지면 雜草茂盛 내살던곳 어디엔고 터도망도 없는집터
그리움만 찾아오네
설날이라 새옷입고 어른들께 세배하고 茶祀參祀 떡국먹고
제기차고 널뛰면서 年輩따라 모여앉아 모듬윷을 놀아볼까
콩나물이 한줌에다 시레기는 한제기라 참기름은 한방울에
무꾸한개 채쳐놓고 입쌀좁쌀 한시끄떼 모아놓고 윷을노니
모야뙤야 뙤야모야 청산에도 불랑뙤야 목터져라 외치다가
윷판멍석 먼지속에 호롱불에 끄으름은 이쁜얼굴 끄을리고
콧구멍은 꿀뚝됐네 비빔밥에 탁주한잔 배채우고 흥돋우어
열이오른 건공윷말 싸움판이 되었다네 東便西便 勝負날제
첫닭울면 밤세우고 이런재미 또있을까 정초되면 생각나네
해동되면 바쁘더라 이라워대 자락으로 소몰아서 밭을갈고
씨를뿌린 농사일이 또한해가 시작되네 꽃이피면 花煎이라
江亭앞에 百花壇은 三嘉할배이름지어 子孫놀라 하셨던가
時節이라 好時節에 이날보다 더좋을까
端午前날 짚단모아 동네청년 군디꽈서 솔마당에 한체메고
군디낭게한체메니 군디적신 보슬비는 풍년농사 약속하네
이이캬 올라가신다 내래가신다
답답한 속마음을 군디뛰어 날렸다네
여름이라 川獵에는 宜仁만큼 또있을까 맑고맑은 물속에는
천태만상 물고기가 은빛나는 모래위에 춤을추며 놀아나네
작살로 잡아볼까 초망으로 잡아볼까 물불으면 끄레이끌고
수루메기 모래무지 없는고기 또있을까 밤이되면 불치기로
은어잡고 메기잡아 매운탕에 찌재먹고 섬마에서 수박서리
이추억도 멀어졌네
농작물이 풍성하고 오곡백과 익어갈제 온동네에 길을닦고
솔마당의 풋굿판은 집집에서 모인음식 푸짐하고 푸짐하다
서낭님께 告祀하고 장구치고 메구치며 일년중에 고생잊고
즐거웠던 풋굿이라 저녁때에 싸움질이 황금들판 기약했네
가을이라 풍성함은 어느곳만 못하리오 秋收하여 藏席하면
祖上山所 時祀節祀 誠心誠意 精誠다해 떡짐지고 山川찾아
조상님을 뵙고나면 낙엽지고 눈내리니 또한해가 지나갔네
섣달그믐 묵세배에 좋은꿈을 꾸라시던 어른님들 덕담들이
귓전에 남아있네 그리워라 그리워라 수몰전의 의인동네
무인년(1998) 동짓달 東耈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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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