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남침(6.25) |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의 도움을 받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했다.당시 남한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국군의 최고 책임자들은 금방이라도 적을 쳐부술 것이라고 큰소리를 했다. 많은 시민들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이미 피난을 떠나고 서울에 없던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된 목소리가 곧 적을 물리칠테니 안심하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서울함락(6.28) |
북한군이 남쪽을 공격한지 하루 뒤인 27일 국군은 기습을 받아 서울을 3일만에 내주었지만 '질서있는 후퇴'를 했다. 비가 내리며 어둠이 가득한 한강에서 두번의 폭팔이 일어났고 한강 철교가 끊어졌다. 많은 피난민들이 한강을 넘어 전쟁을 피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다리가 끊어지면서 1000여명이 사망했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군대도 발을 멈춰야 했다.그 후 이 일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높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다리 폭파의 책임을 맡았던 대령 한 명만이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미군 첫교전(7.5) |
6월 30일 북한군은 3일간의 정적을 깨고 북한군이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한편, 29일 한국을 방문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고 30일 트루만 대통령은 한국에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인 7월 1일 부산에 미국의 스미스부대를 투입하였는데, 스미스부대는 나름대로 북한군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부대는 대패하였다. 첫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540명의 부대원중 150명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냈고 72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겨우 6시간동안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을 뿐이었다.
영덕지구전투(50.7) |
1950년 7월 중순 북한 공산군 5사단이 포항 북쪽에 위치한 영덕까지 밀고 들어오자 육군 제3사단 23연대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이들을 막아냈다.
뒤에 22연대도 힘을 합하여 8월 17일까지 이들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 기간 동안 아군의 특공조가 공산군의 전차 3대를 파괴하였고, 공산군 병력의 40%가 괴멸되었다.
대전후퇴(7.20) |
미군은 지상군을 투입하였고, 유엔군도 지원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전세는 분리하기만 하였다. 미군은 죽미령, 천안, 금강 방어선에서 계속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계속했었고, 대전에서 북한군과 또 한번 격렬한 전투를 치루었다. 하지만 혼란 중 제 24사단장이 포로로 잡히면서 대전마저 북한에게 내주었다.
낙동강방어선(7.25) |
그해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과 제공·제해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격퇴하였으며,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다음날부터 총반격을 시작하였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북한은 권력층 내부에 알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게 되었다.
다부동전투(8) |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을 적에게 붕괴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정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인천상륙작전(9.15) |
6.25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국제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서울수복(9.28) |
같은 달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열세에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서울탈환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상륙작전의 선봉에 선 미국해병 제1사단과 한국군해병대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너 그 일부는 영등포와 여의도비행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 방면을 공격, 서울의 동쪽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그 일부는 시흥·안양·수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낙동강전선에 있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19일 행주 방면에서 강습도하를 감행한 한·미해병대는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21일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안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한·미해병대는 북한군의 필사적 저항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다가 함재기와 포병의 강력한 화력지원하에 돌격을 감행, 24일 오후 연희고지를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서빙고 부근에서도 한강도하작전이 이루어져 미군은 남산·왕십리 방면을 제압하고, 한국군은 망우리 일대를 탈환하였다.
이와 같이 북쪽의 의정부 방면을 제외하고 서울 시가지를 3면에서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 밤이 깊어가면서 점차 서울 중심부로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26일을 고비로 해서 북한군의 저항은 기가 꺾여 다음날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완전 수복되었으며, 다음날 정오 의사당에서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다.
압록강진격(10.26) |
한국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 꼭대기에 있는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11월에는 동부전선의 미군도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북쪽 끝에 있는 강으로 이 강의 반대편은 중국이었다. 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압록강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은지 보름만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했고 곧이어 항구 도시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중국의 참전(11.2) |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뛰어난 화력과 많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해 전술을 쓰는 데는 속수 무책이었다.말 그대로 "인해(사람의 바다)"의 공격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중국평양점령(12.5) |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이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첫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째,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다.
1.4후퇴(51.1.4) |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게 38선까지 밀렸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보급원을 완전히 끊기 위해 북한의 공장지대와 주요 도시인 평양, 원산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월에는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수원까지 진출하였다. 중국은 이에 맞서 2월에 대공격을 감행했지만 UN군은 이를 무사히 막아냈다.
도솔산전투 |
한국 해병대의 승전(勝戰) 전투로서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하여 미국해병 제1사단장으로부터 “한국 해병대가 아니었다면 이 전략적 요충지를 수중에 넣지 못하였을 것이다”라는 극찬을 받은 전투이다. 도솔산 지역은 양구와 인제 사이의 태백산백 중에서 가장 험준한 곳으로, 평균 해발고도가 1,000m 이상이고, 양양~철원을 삼각의 저변으로 하여 원산을 그 정점으로 하는 중동부의 삼각산악지구에서 가장 중심이 되므로 전략상의 가치 역시 컸다. 당시 대치하고 있던 북한군은 막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이었다.
최초의 도솔산 일대에 대한 공격은 미국 해병사단이 담당하였는데, 많은 손실만을 내고 성공하지 못하여 한국군 해병사단에 인계되었다. 6월 4일 아침 8시를 기해 시작된 한국 해병 제1연대의 공격은 9일간의 격전 끝에 캔사스선(Kansas Line:북한군의 공격기도를 분쇄하고 방어에 유리한 지역을 설정한 주저항선으로서 임진강∼화천호∼양양을 잇는 선) 내의 15개 목표고지를 일단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다음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하였다. 공격기간 중 해병대의 손실도 북한군에 못지않게 컸는데, 이는 지형이 험난하여 공격에 난관이 많았고 특히 계속된 강우와 짙은 안개로 항공 및 야포 지원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해병의 끈질긴 전투능력 때문이었다. 이후 제2단계 작전으로 옮아가 6월 19일 도솔산에 대한 마지막 야간공격으로 정상을 정복하였다. 그 후 도솔산전투는 해병대 5대작전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고, ‘도솔산의 노래’라는 전투 군가(軍歌)를 제작하여 그날의 승리와 기백을 선양하였다.
단장의 능선 |
강원 양구(楊口)와 인제(麟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일련의 고지 이름이다. 당시 이 고지는 금성(金城) 지구에 위치한 적의 후방기지를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고, 아군의 동부 전선에서의 진격작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전략적 요지였다. 1951년 9월 13일 한국군 제7사단과 미군 제2사단 병력이 연합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9월 18일 일단 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적이 곧 맹렬한 반격을 해 옴으로써 그 후 약 1개월 동안 일진 일퇴의 백병전이 거듭되었으며, 10월 13일 끝내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함으로써 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3,700여 명, 북한공산군은 2만 5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처절한 전투 양상을 상징하여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백마고지전투(52.10) |
1952년 10월 6일 저녁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은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을 이끌고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 명에 국군 제51·52·53포병 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4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9일 동안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10월 15일 오전에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지정학상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국군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사이의 적절한 협동, 공군의 항공근접지원,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이다.
휴전협정 |
1952년 10월의 휴전회담 중지에 이어서 유엔 총회는 1952년 12월 3일의 결의로써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재확인하고 전쟁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총괄적 계획을 제안하였으나 공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공산측이 광범위한 지연책을 쓰고 나서 1953년 7월 13일과 14일에 전란 중 최대의 공세를 취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북한군과 중공군) 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휴전협정은 정전, 쌍방간의 비무장지대, 38선의 약간 이북을 대부분 통과하는 군사경계선 및 증강을 목적으로 한 군대와 장비의 한국도입금지에 관하여 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