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timental Romance
Written By RHEtORIC
어쩌면 바이올린은 그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의 나는 누구보다 지쳐있었다. 이 세상을 통틀어서,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찢겨진 채로 너덜거렸다. 누군가를 챙기기에도 벅차던 내가 다른 사람을 챙길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친구가 내게 내밀어준 소규모 음악회의 티켓, 그 티켓이 너덜거리던 나를 다시 모아 붙여준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메인이라는 이 사람이 누군데? 유명해?」
「신문도 안 봤어? 유명한 사람이니까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지.」
「그런 것보다 난 이번에 개봉한 영화나 볼까, 했는데. 너, 나 클래식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런 건 자주 볼 기회가 없잖아. 영화는 DVD도 있고.」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조건 밀어 붙이는, 다소 나쁘게 말하자면 ‘아주 짜증나는 성격’이다. 지쳐있던 그 당시의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을 슬슬 질려하고 있었다. 그래, 난 그녀를 받아 줄 여유조차 없었다. 그 때 마음을 굳혔다. 티켓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던 그 음악회를 보고나서 헤어지자는 말을 하자고. 음악회의 여운으로 들떠있을 그녀의 여린 마음을 짓밟고 찢을 못된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렇게 흔히 말하는 빌어먹을 놈이 되고 있었다.
「지용아.」
그리고 그 때 나를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 슬프고 아련했다는 것을, 나는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깨달았다. 지금도 귓가를 맴돌면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그 슬프고 아련했던 그녀의 구슬픈 목소리.
「고마웠어, 이런 제멋대로인 여자랑 사겨줘서.」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우리, 헤어지자.」
그런 말을 왜 그녀가 하게 만들었을까,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내 앞길을 다시 다지는 것에만 급급해서 왜 그녀를 잃었을까.
「그동안 나한테 맞춰준 거, 알고 있어. 그러니까 그건 내 선물이야.」
「잠깐 기다려 봐! 갑자기 뭐야, 대체!」
「…안녕, 지용아.」
눈물과 함께 슬픈 미소로 떠나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내게 그녀를 잡을 자격 따위 없었다. 다시 잡는다고 해도, 그 당시의 나는 어차피 그녀에게 이별 선언 외엔 할 말이 없었을테니까.
결국 나는 혼자 공연 홀로 들어섰다. 가운데, 무대 위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리. 내가 그녀에게 맞춰준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그녀가 나에게 베풀어주기만 한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독히 헌신적인 여자.
입장 전에 받은 소책자에 출연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메인이라고 말했던 남자였다. 강대성, 촌스러운 이름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스물세 살, 나와 동갑인 그 남자의 사진 옆에 수상 경력 같은 것이 쓰여져 있었다. 한껏 폼 잡은 사진 옆에 촘촘히 쓰여진 것은 나와 동갑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었다. 무슨 주니어 대회 1위, 무슨 대회 1위, 무슨 콩쿠르 1위, 거의 대부분이 1위였다. 수상경력 밑에 짧게 쓰인 인사말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콩쿠르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라고. 웃기게 생긴 얼굴을 한 주제에 꿈도 크다. 그의 공연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사실 공연을 진지하게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졸리기만 한 클래식에 쭉 자다가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흥미가 생겼다. 같은 스물 세 살인데, 1년 동안 뒷바라지 해준 여자친구한테 차인 나와 1위를 휩쓸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 남자.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무대를 노려봤다.
역시 클래식은 체질에 안 맞는다. 초반에는 분명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졸던 와중에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려서 부스스 눈을 떴다. 자다 일어난 터라 초점이 안 맞는 눈을 비비며 무대를 쳐다보았다. 무대 위에 그가 있었다. 스태프들이 마이크 세팅 따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검은 턱시도를 잘 차려입은 그는 멀뚱멀뚱 손에 쥔 바이올린만 보고 있었다. 온통 검은 그와 상반되는 새하얀 바이올린, 그는 한참 바이올린을 보다가 천천히, 그리고 높게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마치 바이올린과 교감이라도 하는 듯이 바이올린의 중심부 위를 가로지르는 현 위로 살짝 입을 맞추고는 환하게 웃었다. 남자의 주변에서 꽃이 피어났다. 화사하고 소복한 꽃이 잔뜩 피어나 그를 감싸고 있었다. 주변의 스태프도, 내 주변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무대 위의 꽃에 둘러싸인 그 남자와 멍청하게 좌석에 앉아있는 나, 둘 뿐이었다. 주변 정리가 끝나고, 그가 바이올린을 턱에 괴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유연하게 활을 들어 올린다. 깔끔하게 정리된 활이 바이올린의 현 위로 내려앉는다, 싶을 정도로 살포시 올라갔다. 그리고 올곧은 첫 음이 무대를 가로 질러 나한테 꽂혀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 때가 되서야 내가 줄곧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한꺼번에 공기를 몰아 삼키며 조용히 헐떡거리면서도 나는 그 무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주를 도와주는 피아노가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 전에는 무대가 전부 그와 꽃으로 가득 차서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었다. 느리게, 그리고 귀에 익숙하게, 부드럽고 따뜻한 음이 이어져서 그것이 바로 ‘음악’이 된다. 귀를 통해서 머릿속을 풀어주는 그 음악에 취해, 어느새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부드러운 음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천둥이 내리치듯, 몸이 절로 튀어 오를 정도로 강렬한 소리가 내리쳤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그 음악을 들었다. 집중하면서도 어느새 나는 그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내리치던 천둥이 잦아들면서 다시 부드럽게 꽃이 피어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또 절묘하고 신기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보니 아쉽다, 싶을 정도로 슬슬 끝이 나는 것 같아서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는데 다시 경쾌한 소리가 시작되었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집중했다. 말 그대로, 그의 손에 쥐어진 활이 바이올린의 현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무언가가 휘몰아치듯이 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점점 빨라지는 그의 리듬을 미처 피아노 반주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불협화음의 시작점에서 나는 눈치를 챘다. 한참 집중해서 활을 춤추게 하던 그가, 어느새 피아노의 반주에 맞춰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도 보이는 그의 찌푸려진 미간은 음악에 대한 감정과 집중이 아닌, 그저 불만족의 표시인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감탄할지언정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연주가 끝난 후에도, 모두가 일어나 그에게 박수를 보낼 때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허리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던 그 남자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니, 향한 건지 아닌지 몰라도 향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놀라움이 가득하던 그 눈빛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조용해진 홀에서도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음악에 취해 여운이 남은 마냥 보였는지 주변 정리를 하던 사람들도 딱히 나를 건드리진 않았다. 멍하니, 텅 빈 무대를 보고만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 곳에 그가 있었다. 만연한 꽃에 휩싸여 자신의 음악에 취했던 그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발목을 잡혀 비명을 지르며 자기 자신을 억눌렀던 그가 있었다.
“불쌍한 녀석.”
“내가?”
“어…어!?”
그리고 내 옆에도 그가 있었다. 물론 검은 턱시도가 아닌, 널널한 후드티 차림의 그가. 정말로 아닌 게 아니라 식겁해서 좁은 좌석에서 버둥거린 바람에 옆에 붙은 팔걸이에 옆구리를 제대로 찧었다. 끙끙거리는 날 멀뚱히 보던 그가 히죽 웃었다.
“권지용 맞지? 중앙고 다녔었던.”
“어…, 맞는데.”
“역시 권지용이네. 마지막에 인사할 때 보고 깜짝 놀랐어.”
그는 나를 아는 모양이지만 내 기억 속에 그는 전혀 없다. 내가 괜히 멋쩍어 시선을 돌리니까 그가 먼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1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기억에 ‘강대성’ 은 없다. 기억 못 할거야, 하고 그가 또 히죽 웃는다. 가뜩이나 작은 눈이 웃으니 눈초리까지 접혔다. 벌어진 입에 가지런한 윗니가 보였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차분히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 웃으면 보이지 않는 눈, 윗입술에 비해 훨씬 두툼한 아랫입술, 생각이 날 듯, 말 듯,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는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그는 더욱 웃어재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전학 갔거든. 난, 너 기억 나. 맨날 떠들고 뛰어다니고 혼나고 그래도 맨날 활발했잖아.”
“그 땐 그랬었지. 철없는 1학년이었으니까.”
“나, 할 줄 아는 게 바이올린밖에 없어서 친구도 없었는데, 있잖아, 나한테 처음 말 걸어줬던 게 너였던거, 알아?”
그가 물어봐도 기억이 안 나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쯤 되면 말하는 그도 서운한 기색을 보일만한데 그런 기색 없이 싱글벙글 잘도 웃으면서 말한다.
“뭐였더라, 조별 과제였던가? 워낙 말도 못 걸고 하니까 어디 끼기도 힘들고 그랬는데, 네가 먼저 나서서 같이 하자!, 고 해줘서…고마웠어.”
“아…어어…, 그래.”
“그런데, 너, 클래식 좋아했었어? 넌 조용한 음악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먼저 말문을 터주니 대꾸하기가 점점 쉬워졌다. 시시한 내 이야기에도 일일이 호응해주면서 웃는 바람에 혼자 좋다고 주절주절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남이 이야기를 들어주면 불타올라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꺼내는 타입이라 주절주절 말을 해댔다. 그래, 난 바보다.
“그래서 이게 여자친구의 마지막 선물이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헤에, 어땠어? 연주회는 괜찮았어?”
“앞부분은 전부 잤는데 네 차례부터는 빠릿하게 눈 뜨고 봤어. 멋있었어.”
잤다는 소리에 추욱 처졌던 입매가, 제 차례부터 제대로 봤다고 하니 바로 싱글벙글 올라갔다. 참 알기 쉬운 강대성. 지금 보면 참 활발한 것 같은데 1학년 때는 아니었다고 하니 내가 기억 못 하는가보다.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벌떡 일어났다. 영문을 모르는 나를 두고 그가 텅 빈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를 보며 아까의 그 무대의 시작처럼, 가볍게 목례를 한 그가 싱긋 웃으며 허공으로 왼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는 시늉을 한다. 긴 손가락 끝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도 무언가를 섬세하게 누른다. 그리고 턱을 이리저리 괴다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은 어떤 얇은 것을 쥔 듯 오므려져 있었다. 아, 그 때 깨달았다. 그는 바이올린을 쥐고 있었다. 조명을 받으며 빛나던 새하얀 바이올린을.
“딱히 주제를 정하는 연주회는 아니었지만, 난 개인적으로 주제를 정해야 직성이 풀려. 그래서 내 이번 연주의 주제는 봄이었어. 그래서 처음엔 부드럽게, 나무 위로 새순이 돋아나고 봉오리인채로 잠자던 꽃들이 피어나듯이.”
나직한 목소리의 끝에서 그의 오른손이 유연하게 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위, 아래, 또는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움직임엔 여유가 있다. 실체도 없는 공기 바이올린, 하지만 나는 그의 연주가 들렸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는 그의 주변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이 보였다. 분홍색, 노란색, 하얀색, 색색의 꽃에 둘러싸인 그는 꽃에 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의 빈 손 안에서 바이올린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꽃이 화려하게 잎을 펼치고…새들이 지저귀고…봄이 깨어나고 있는 그 때, 폭풍이…몰아치고!”
그의 말을 따라 피어나던 꽃들과 지저귀던 새들, 깨어나던 봄이 그 폭풍에 방해를 받는다. 그의 뒤로 펼쳐지는 연극에 넋을 놓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폭풍우에 꽃과 나무가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새들은 비바람을 피하려고 서로 뭉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폭풍우가 물러가고 다시 해가 반짝이더니 꽃은 이슬을 털어내고 새들은 깃털을 털어 말렸다. 그 쯤 내가 생각했던 건, 내 상상력 꽤 쓸만하구나, 였다.
“꽃이 피면 당연히…벌들도…날아오지. 한 마리가…아니고…여러 마리가…점점…!”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처럼 설명을 이어가던 그의 입이 멈췄다. 대신 그의 손이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피어난 꽃 위로 꿀벌이 한 마리씩 늘어났다. 조금 징그러울 정도로 윙윙거리는 벌들, 왜 내 눈에는 그들이 보이고, 왜 내 귀에는 그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있던걸까. 다시 생각하면 이상할 것 같은 그 경험은 마지막일거라고 생각했다.
“아까는 이렇게 빠르게 못 했어.”
연주를 끝낸 그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움직였던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제 옷소매로 슥슥 닦고 있었다. 본 공연보다 지금이 더욱 열정적이었다고 말하면 또 시무룩해할까봐 말을 삼켰다.
“그래? 그래도 되게 빠르던데.”
“진짜?”
“응. 내 옆에 있던 아줌마는 그거 보고 입이 떡 벌어져서는 어머, 어머, 만 연발하던걸.”
내 흉내가 그럴듯했는지 그가 와하하, 하고 호쾌하게도 웃었다. 그 후로 나는 그와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그는, 아니, 이제 편하게 부르자면 대성이. 대성이는 정말 좋은 녀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대화하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 웃음이 좋았다. 좋은 친구, 정말로 좋은 친구. 스물세 살이나 먹고서 진짜 친구 같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그렇게 친하게 지낸지 1년, 대성이보다 생일이 늦는 내가 스물네 살이 되던 날,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생일선물을 쥐어 준 대성이는 한참 망설이더니 겨우 말을 꺼냈다.
“최승현이라는 형…알아?”
“최승현? …아아, 복학생? 지금 학교에서 완전 유명해. 그러고 보니 바이올린 켰다던데.”
“내일 너네 학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소개 좀 시켜주라.”
대성이는 어쩐지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말하는 그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내가 입술만 쭉 내밀고 그 형은 왜, 하고 장난스레 말을 붙였지만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서는 눈에 번뜩 빛을 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진짜로 존경하는 형이야. 내가 진짜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계속 동경했던 형인데 6년 전에 갑자기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서…아쉬웠는데 너네 학교에 있다고 해서…아, 말이 엉망이야. 저기, 그래서 혹시, 혹시 네가 알까봐, …아, 미안…, 역시 과가 다르지?”
혼자 말하고는 혼자 시무룩,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 최승현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른다. 6년 전에 왜 행방불명이 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대성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하는 그 최승현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바이올린은 켰었다, 라고.
“아니, 우리 과야.”
“어? 지용이, 너…”
“응. 광고디자인과.”
최승현은 바이올린을 켰었다. 그리고 지금은 켜지 않는다. 내 대답에 잠깐 멍하니 있던 대성이가 뭐?, 하고 다시 되물었다. 믿기지 않을테지, 동경한다고 했던 사람이 이제 바이올린을 잡지 않는다는 것은 충격이겠지.
“내가 잘못 알았나보다.”
“야.”
“그래, 내가…내가 잘못 안거겠지. 그럴리가 없는걸. 그렇게 즐겁게 연주했었는데 그만 뒀을리가 없어. 미안해, 내가 잘못 알았나봐.”
“희망을 꺾어버리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네가 아는 그 최승현이 맞을걸. 예전에 바이올린 켰었다고 했었어.”
다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한테 정말?, 하고 되묻는 대성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시무룩한 걸 보니까 좀 안쓰럽기도 해서 둥그런 머리통 위로 손을 얹어 이리저리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강대성, 나, 오늘 생일이거든. 신경 쓰이게 자꾸 그런 표정 할래?”
“아…, 미안.”
“그래, 그래. 좋아, 선물이나 풀어볼까! 기대해도 되냐?”
“헤헤, 기대해도 돼.”
기대해도 된다던 선물은 물론…참 강대성스러운 선물이긴 했지만 그 선물에 대해선 접어두고, 그 후로부터 대성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그것도 잠시였지, 거의 삼 주 쯤 지난 다음이었을까, 대성이는 나한테 연락도 없이 갑자기 우리 학교를 찾아 왔다. 정문 앞에 있다는 문자를 받고 나갔을 때, 대성이는 몇 명의 여자들한테 둘러싸여있었다. 아무래도 우리 학교에서 바이올린 좀 켜고 클래식 좀 안다는 애들이겠지. 그 증거로 손에는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인기 좋네.”
“아, 저기, 친구가 와서, 예, 감사합니다, 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너~.”
“그 전에 할 말은 없냐?”
“에?”
“나, 조금 있으면 수업이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거는…설마 최승현?”
대성이는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어떻게 알았어, 하고 찌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 최승현이 뭐길래 이 녀석은 이렇게까지 하는걸까. 그게 궁금하면서도 대체 얼마나 연주를 잘해서 사람을 이렇게 홀리게 해놨는지, 최승현에 대해서도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만나보고 싶어서 왔어.”
“만나서 뭐하게?”
“그냥…정말 그냥.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해서.”
그러고는 멋쩍게 웃으면서 목덜미를 긁적인다. 검지 끝으로 목을 긁적이는 건 대성이의 버릇, 쑥스러울 때의 버릇이다. 귀여운 짓 한다, 머리를 설설 쓰다듬으니 하지 말라고 또 손을 밀쳐낸다. 그렇게도 만나고 싶을까. 바이올린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그 남자가 그렇게 보고 싶을까. 난 종종 대성이를 학교 근처로 불러서 같이 놀기도 했지만 최승현이 우리 학교로 온 다음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일날 대성이한테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학교 근처로는 절대 부르지 않았다. 대성이의 기억 속에 남은, 그 존경한다던 최승현은 그냥 남겨놓고 싶었다. 지금 모습을 보면 분명히 이 섬세한 녀석은 좌절할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 내 생각보다 훨씬, 강대성은 참 강한 사람이었다.
“실망할텐데.”
내 말에도 대성이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냥 만나고 싶어, 그 말이 다였다. 대성이를 데리고 강의실로 향했다. 친구 놈들이 처음 보는 대성이를 힐끗거리다가 이내 자기들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맨 뒷좌석에서 턱을 괸 채 멍청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최승현을 향해서 내가 걸으면 걸을수록 대성이는 더욱 바싹 내게 붙어 오는 것 같았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지금의 최승현은 대성이의 기억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걸까. 죽은 생선처럼 빛 없는 눈으로 나를 힐긋 쳐다본 최승현이 고개를 돌리다가 멈췄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뒤에 있는 대성이를 빤히 보고 있었다.
“강…대성?”
맨 처음 화제가 됐을 때 사람들의 대답에 대꾸하던 그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목소리를 얼마 만에 듣는거지, 교수님이 출석을 부를 때도 대답을 도통 안 했었다. 그런 최승현이 대성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니 대성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최승현은 턱을 괴고 있던 손도 풀고 당장에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대성이가 정말 신기할 정도로 희미하게 웃었다.
“뭐하고 있어요, 형?”
“왜 네가 한국에…아니, 왜 여기…,”
“내가 물어보고 싶어요. 형이야말로 뭐하고 있어요? 협회에 등록된 연락처로는 연락도 안 되고…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건…”
최승현의 표정이 괴로운 듯이 구겨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고 대성이도 모른다. 대성이는 늘 가지고 다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최승현 눈앞에 내려놓았다. 아니, 늘 가지고 다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모서리가 약간 닳은 검은색 가죽의 사각 케이스,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나는 대성이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얼빠진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는 동안 대성이가 보란 듯이 케이스를 눕혀 열었다.
“열지마!”
잠금쇠를 푸는, 그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최승현이 급하게 손으로 케이스를 짓눌렀다. 정말로 짧은 순간에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낸 큰소리에 강의실 안의 모두가 우리 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드디어 최승현이 벌떡 일어났다.
“이걸 왜 가지고 왔어.”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겠다. 말끝의 음이 뚝 떨어져서 대꾸하기도 애매하다. 대성이가 그의 손에서 케이스를 빼앗다시피 잡아당기고는 다시 잠금쇠를 잠갔다. 달칵, 달칵, 그 소리에 최승현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내 보물이에요. 형이 줬잖아요.”
“그러니까…왜 이제서야…”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나는 대성이랑 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고, 아는 것도 꽤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화내는 걸 처음 봤다. 나긋나긋, 조근조근,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말투와 목소리였다. 언성 높이는 걸 1년 내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 날 봤다.
“6년이나 멋대로 연락 끊어버리고! 편지 보낸다더니, 안되면 메일이라도 보낸다더니, 전화라도 걸어준다더니, 뭔데! 너야말로 왜 이제서야 슬금슬금 나타나서 죽은 생선 같은 눈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광고디자인과에 죽치고 앉아있는데!? 너야말로 왜 이제서야……, 됐어! 나도 필요 없다고! 뭐가 보물이야, 뭐가 소중한 바이올린이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뱉은 대성이는 케이스를 최승현의 눈앞에서 패대기치고는 나가버렸다. 그 내리치는 충격 때문인지 케이스가 멋대로 벌컥, 열렸다. 광이 날 정도로 좋게 손질 된 바이올린, 마침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빛이 나는 것 같은 연하고 진한 갈색이 도는 바이올린.
“….”
최승현은 말이 없었다. 그저 팽팽하게 이어진 현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고는 손을 떼었다. 그 케이스를 닫을 엄두도, 치울 엄두도 나지 않는지 또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바이올린을 보고만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케이스를 닫아버리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번엔 죽은 생선이 아니라 조금은 빛이 돌아온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라도 하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뭐야, 바이올린 아직 좋아하는구만?”
나도 모르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최승현은 케이스의 잠금쇠를 손끝으로만 탁, 탁, 올려 잠그고는 케이스를 살짝 밀쳐냈다. 나는 그의 품으로 케이스를 바짝 밀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휑한 공책 위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무슨 생각이었던지는 몰라도 그걸 써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전화번호도 아닌, 강대성의 전화번호.
“꼭 연락해. 6년 동안 안절부절, 당신 죽었을까봐 조마조마했대.”
물론 과장된 말이긴 했지만 대성이가 그간 보여준 반응을 봐서는 그 정도도 생각했었을거다. 착하니까, 강대성은. 결국 난 수업도 내빼고 대성이를 찾으러 나섰지만 그 날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질 않았다. 다음날에서야 미안, 하고 짧은 문자가 왔을 뿐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을 연락 없이 잠수를 타고는 다시 연락이 되서 만나러 나갔을 때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싱글벙글 웃는 최승현과 함께였다. 그것도 대성이가 보물이고 뭐고 하면서 팽개쳤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든 최승현.
“썅.”
내가 혀를 차며 하는 욕도 좋다고 웃는 강대성이 얄밉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는 최승현은 더 얄밉다. 나는 대성이의 양 볼을 쭈욱 잡아 당기면서도 웃으며 투덜댔다.
“일주일을 잠수타더니, 복학생이랑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나타난 이유라도 좀 들어보자?”
“헤헤…미안.”
“미안은 무슨 놈의 미안. 확 깨물어버릴라.”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들은 소리지만 최승현이 바이올린을 놨던 이유는 외국 진출에서 느꼈던 좌절 때문이라고 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노력형 천재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성이는 그걸 버텼고 최승현은 그걸 버티지 못했었다는 것. 전처럼 진지하게 바이올린을 켜지는 않아도 취미로 다시 켜게 됐다는 것. 그게 알게 뭐냐고, 그냥 나는 그 때 대성이를 뺏긴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본의 아니게 계속 어울리다 보니까 아무리 미운 털 박아 놨던 놈이라도 친해질 수 밖에 없더라. 어디 놀러 갈때마다 대성이가 자꾸 데리고 나오니까 미운 정이라도 드는 것 같았다.
“너, 처음 봤을 때 반말 날렸지? 꼬박꼬박 형이라고 해라.”
“6년 동안이나 대성이 마음 고생 시켜놓고 형 대접 받겠다고? 꿈도 꾸지 마셔.”
“망할 쥐새끼.”
최승현과 나는 가끔 둘이 이야기 할 때는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욕도 서슴없이 했다. 그래도 어쩐지 대성이가 앞에만 있으면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얘기하다보면 좋은 놈이다, 최승현도. 나는 내가 최승현을 평생 최승현이라고만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형이라고 부르는 날은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은 갑자기 찾아 왔다.
***
short방에 글이 안 올라가..으?으!?
이번 4월 26일이 너무 중요한 날이라 속도를 열심히 올려봤지만 기어코 상편, 하편, 잘리네요 ㅜㅜ
여기까지만 해놓으니까 탑성 냄새도 안 나구....역시 제 삼자의 시선으로 쓰는 탑성따위 어려워요
덕분에 권씨가 내비치는 흑심만 보이는 것 같구 잘 모르겠네요 ㅠㅠ
하편이 언제나 올라올지는 모르겠습니다 ㅜㅜ 아마 26일 내로는 못 올라올 것 같아요...
일이고 뭐고 하루 째고 글이나 쓸까, 하는 참 성인답지 못한 생각을 했습니다ㅇ<-<...
최대한 빠르게 하편도 써낼게요 :>
해가 갈수록 이쁜 강대성씨 생일 축하해요 :>
첫댓글 와!!생일선물인가요ㅠㅠ대박이네요.대성이가 바이올린 키면 되게 잘어울릴것같은데ㅎㅎ저는 탑성냄새나요!!그것도 달달하게 납니당ㅎㅎㅎ첨엔 ㄴㅅ인줄 알았는데 점점 탑성이 나오네요.대성이랑 승현이랑 다시 잘된것같아서 좋네요ㅋㅋ잘보고갑니당!!하편 기대할게요~ㅋㅋ
으아 레토릭님 글 오랜만입니다T_T 정말좋아했는데 대성이생일+탑성데이날 보게되서 좋네요!!! 바이올린 키는 대성이와 승현이 뭔가 낭만적인거같아요^_^ 지용이도 툴툴거리면서 대성이 챙기고...매너남 히히. 얼른 승현이를 형이라고 부르게 된 지용이의 얘기랑 대성이와 승혀니의 달달한모습 보고싶어요! 기다릴게요
와우! 맨마지막에 그런날이왔다는건 뭐일까요!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대성이랑 사이가 풀려서 다행이예요!! 탑성냄세도 납니다 나요. 대성이는 드럼을 치는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ㅎㅎ와일드한남자
우와! 오랜만에 왔더니 이런!!! 완전 좋아요~~ 아아~~ 뒷편도 빨리 보고싶어요!!
하편은 언제 나올까요~?? 완전 기대 되요~ 완전 기다리고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