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머니 태후와 형 선종의 죽음과 정토발원
1086년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 · 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송나라 화엄종은 당 말에서 5대 사이에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의천이 돌아와 1087년 『화엄경』 3가지 번역본 180권과 장경각 건립지 금 2,000량을 보내자 정원은 화엄각을 짓고 안치한 뒤 혜인사慧因寺라고 했는데 고리사(高麗寺)라고도 불렀다. 정원은 이로써 화엄종 종품을 진흥하고 중흥의 교주가 되었다.
의천은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국내의 고서를 모았다. 그는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교장』의 간행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는데,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었다.
1094년 어머니 인예태후와 둘째 형인 선종이 세상을 뜨고 선종의 어린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해인사로 내려가 남모르게 지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정토를 발원한다.
5) 「해인사에 물러가 지음(海印寺退去有作)」
의천이 가야산에서 머무는 동안 정토왕생을 발원하고 닦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가야산 해인사여, 여악사廬岳寺 좋다 해도 이보다 뛰어나랴,
가야(伽倻는 시냇물 이름)는 도리어 여산廬山의 호계虎溪가 흐르는 것 같구나.
혜원의 높은 자취 이어받기 어려우나,
죽을 때까지 평소 뜻 이룬 것 기뻐하노라.
삶에서 부귀영화는 다 허무한 봄날 꿈같고
모였다 흩어지고 흥하고 망하니, 다 물거품 같네.
정신을 안양安養에 깃들게 하는 일을 빼놓고
곰곰이 생각하니 무슨 다른 일 추구하랴!
『大覺國師文集』 「海印寺退去有作」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산 혜원의 길을 가기로 발원하고, 혜원이 정토 수련한 여산의 절보다 해인사가 더 낫다고 마음먹고 수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인사에 흐르는 시냇물 가야伽倻는 여산의 호계虎溪와 견주어서 여산에서 백련결사를 한 혜원처럼 정토 수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많은 불전을 공부하고 수행을 한 의천이 말년에는 극락=안양을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실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다.
여기서 의천의 극락에 대한 믿음(信)+바람(願)+염불(行)을 뚜렷이 볼 수 있으며, 그 열매(證果)는 극락에 간 것이다.
6) 「부여 공에게 부친다(寄扶餘公)
어린 헌종이 1년 만에 물러나고 숙종이 임금 자리에 올라 형제인 의천을 다시 불러 흥왕사 王寺 주지를 맡게 하고, 1097년 (숙종2)에는 국청사國淸寺 초대 주지를 맡겼다. 숙종 4년(1099) 왕과 의천의 형제인 부여공 수燧가 경산부로 유배 갔다. 이때 의천이 부여공에게 쓴 글에 극락(안양)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안양安養에서 만나자던 전일의 약속
가야산에서 노닐던 옛날의 추억.
꽃 같은 누각 어디 있는가.
남녘땅 바라보며 눈물 거두기 어려워라.
7) 여산(廬山)처럼 연사(蓮社)의 씨앗이 되길 빕니다
(祇合匡廬種社蓮)
1101년 의천이 세상을 뜨기 1년 전 6월 4일 천태의 현묘를 밝히는 강성을 한 뒤 문도들에게 3가지 의지를 말하는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에 이 일을 든다.
[옛날 인예태후께서 모임을 만들려고(結社) 발원할 때 가지고 있던 송나라 명화 ‘여산 18현廬山十八賢 그림(眞容)’이 원문院門에 버려져 있어 아직 전각에 모시지 못했었다. 내가 이 거룩한 인연에 따라 서녘(극락세계)의 업을 닦고 왕생의 길을 빌고자 한다(予欲仗此勝緣 修西方之業 用薦眞遊 云尔).]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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