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시절의 여름풍경
김 인 현 (고려대 법대 교수)
유년시절 우리 5남매에게 여름의 시작은 짜장면으로 상징된다. 조부님은 자식들에게는 너무나 엄격하신 분이셨다. 왜 그런지 부자간에 대화도 없다. 그렇지만 손자손녀들은 참으로 귀여워하셨고 손자녀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이셨다.
7월 중순이 되어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통지표가 나온다. 우등상은 한반에 5명 정도를 준다. 손자녀 중에서 한사람이라도 우등상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조부님이 동네 중국집에 우리를 모두 데리고 가셔서 짜장면을 사주셨다. 1년에 한번씩 먹는 짜장면, 맛이 있었다. 조부님이 사업에 실패하시고 동전하나 없으셨을 때라도 한해도 빠짐없이 이 행사는 계속되었다. 조부님은 좋은 일에는 꼭 칭찬을 해주시는 장점을 가지고계셨다.
어머니는 여름 방학만 되면 형과 나를 달산 인곡의 외가집에 보내셨다. 외조부님은 유학자로서 한약방도 하시고 농지도 많으셔서 여유가 있으셨다. 유년 시절의 여름방학 중 보름 정도는 외가에서 보냈다.
외조부님이 붓글씨를 쓰기 위하여 먹물이 필요한데 우리들에게 먹을 갈라고 하셔서 하루에 1시간은 족히 먹을 갈았다. 꿇어앉은 정자세로 1시간씩 먹을 가는 일은 어린 우리들에게 참 힘이 들었다. 먹물이 흐리면 먹을 더 갈라고 명하셨다. 잘은 몰랐지만 글을 쓸때는 정성을 다해야하는 구나하고 생각했다. 결국, 나의 학구적인 모습은 유년시절 외조부님으로부터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방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외조부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만원짜리 한 장을 손에 꼭 쥐어주셨다. 당시는 큰 돈이었다. 10만원은 족히 될 돈이었다.
형은 개구쟁이었다. 형은 외가에서 첫 외손이라서 나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대우를 받았다. 나는 형을 많이 의지하고 있을 때였다. 같이 온 형이 사라지고 없었다. 전기도 없이 호롱불로 지내는 곳인데, 형이 없어지자 나는 겁이 나서 형을 찾아나셨다. 외조모님도 형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스럽게 말씀 하신다. 몇 시간을 울고 찾았는데, 집앞의 높은 감나무 위에서 형이 나를 살짝 불렀다.
“인현아 울지마라 형 여기 있다. 할머니가 돈을 안주어서 여기 있다. 좀 있다가 내려갈께”
방물장수에게 무언가 사먹을 일이 있는데 외조모님이 더 이상 용돈을 주시지 않자 시위를 한 것이었다.
외조부님의 환갑잔치가 있었는데 마침 방학중이라서 어머님과 우리 형과 여동생 이렇게 셋이 가게 되었다. 돼지를 여러마리 잡았다. 외가집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새끼줄로 상하지 않도록 돼지고기를 달아서 우물에 내려두었었다. 지금 생각하니 냉장고 대신의 기능을 우물이 한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이다.
우리 집의 여름은 휴가란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이것은 시골에서 내가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직업과도 관련이 되었다. 아버지는 수산업에 실패하시자, 조선소에서 수리중인 어선에 페인트 칠을 하는 직업을 택하시게 되었다. 대형어선 3척의 선주였던 아버지로서는 어려운 결단이셨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향을 떠나지 않고 12명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이보다 나은 일은 없었다.
우리 동네의 어선은 한여름과 한겨울 두차례 휴업을 하였다. 혹서기에는 선주들이 어선을 동네 조선소에 올려서 갖가지 수리를 하였다. 수리를 하는 참에 선박에 페인트를 칠하여 배의 수명을 오래가져가는 일을 여름 휴업철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가 아버지의 일이 가장 많아지는 시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오늘 어느 선주에게서 일을 받았다”고 하시면 우리는 모두 기뻐하였다. 형과 나는 리어카에 페인트 깡통이며 붓을 싣고 조선소로 갔다. 아버지는 페인트로 범벅이 된 옷을 입으시고 자전거를 앞서 타고 가신다. 아버지가 먼저 선박의 바닥부터 선박의 외부 전체에 쭉 칠하고 나시면 나와 형은 작은 붓으로 빈곳을 칠하였다. 배 한척에 3일정도 일을 하셨다. 선수와 선미에 선박의 이름을 예쁘고 힘차게 그리시는 것으로 페인트일은 마무리된다.
아버지는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이렇게 하여 10척 가까이 일을 하셨다. 일한 대금은 생활비에 쓰이고 우리 학비에도 들어갔으니 아버지가 일을 받아오시면 우리 가족 모두가 기쁜 날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시고 대금을 받아오시면 우리 집은 생기가 넘쳤다. 수박도 2덩이 정도 사오셔서 수박파티를 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이 일은 마냥 즐거워만 할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생일은 한여름이셨지만, 생일 날에는 꼭 페이트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무슨 팔자에 생일날만 되면 일을 저렇게 하시노” 하곤 안쓰러워하셨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여름날 아버지의 어깨를 보기가 너무 민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시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시다가 6.25를 만나고 형인 큰아버님이 행방불명이 되자 조부님께서 외지로 보내지 않으시고 대를 이어라고 집에 잡아두신 바람에 조부님의 수산업을 부자간에 같이 하게 되셨다.
부잣집 장자로서 붓대만 잡으셨지 노동일이나 근육운동은 하시지 않으신 분이다. 40대에 들어서 사업의 몰락으로 육체노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페인트공이 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선박의 페인트 일은 높은 곳에 칠을 할 때가 가장 힘든다. 5미터 정도의 길이를 가진 롤러에 페인트를 묻혀서 하늘을 쳐다보듯이 솔질을 해야 한다. 어깨에 참 힘이 많이 들어갔다. 나도 해보았지만 참 힘이 들었다.
아버지는 일년에 30여척의 어선에 페인트 칠을 하시는데 매번 어깨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의 어깨는 약하셨다. 그리고 팔에도 근육이 많은 것도 아니시다. 목물을 할 때 아버지는 시원하다고 하셨지만 야윈 아버지의 어깨와 팔을 보는 것은 이제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는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나는 얼른 자라서 아버지의 고통을 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학비가 없고 취직이 잘 되는 한국해양대학을 택한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여름철은 무척이나 덥다. 일을 마치고 오시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목물을 하여드렸다. 우리 집 마당의 펌프로 물을 빼 올린 다음 팔을 짚고 엎드린 아버지의 등에 어머니가 물을 부어드리면 아버지는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좋아하셨다. 우리는 새참으로 어머니가 만드신 미숫가루를 타서 조선소의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다. 우리 집 미숫가루는 두가지가 있었다. 보리로 만든 것도 있지만 찹쌀로 만든 것도 있었다. 찹쌀은 참 목넘김이 좋았다.
여름철에는 밀로치를 먹는 날이다. 어머니는 우리 5남매를 위하여 잘개 쓴 애호박에 밀가루를 넣어서 묽게 반죽한 다음 불판에 붙여주신다. 바로 구운 따뜻한 밀로치에 흰 설탕을 뿌려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는 굽는 즉시 모두 먹어치웠다.
여름 철 보신으로 우리 집에서 많이 준비한 것은 닭이다. 영해 장에 가서 어머니가 닭을 한 마리 사오신다. 닭의 목을 치고 나서 더운 물을 닭에게 부으면 닭의 털이 쉽게 빠져나갔다. 배를 가르면 암탉의 경우는 조그만 알들이 들어있었다. 이것을 서로 먹으려고 형과 나는 신경전을 벌렸다. 닭고기를 잘게 뜯고 쌀을 넣어서 끓여서 삶아내신다. 담백한 닭죽이 만들어지는데 한 그릇씩 받아들고 먹으면 그 맛이 참 좋았다.
여름은 나에게는 8.15. 광복기념 웅변대회에 나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원고를 적어서 10분동안 발표할 내용을 거울 앞에서 수십번을 연습하여 암기하고 손동작을 보았다. 정작 웅변하는 당일에는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기도 하였다. 나는 3학년 때부터 학교 웅변대회에 나갔고 아버지가 도와주신 원고의 내용이 좋아서 그런지 4학년 때부터는 거의 1-2등으로 입선을 하였다.
여름에는 한차례 혹은 두차례 호우가 와서 우리 집앞의 모래사장으로 누런 황토물이 흘러가면서 모래가 밀려 없어지는 경험을 하였다. 상류에서 쌓인 물들이 모여서 물밀 듯이 내려오면 축산천 하구인 우리 집 근처에서 바다로 밀려간다. 민물과 바닷물을 분리하는 모래사장의 일부가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에 밀려서 없어지는 것이었다. 모래가 10미터 정도는 유실되고없다. 처음 1주일은 분리되어있던 모래사장도 또 한 1주일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파도에 의하여 모래가 쌓이고 쌓여 제모습을 찾곤 하였다.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10터의 거리에 있는 첨방(제방)에 나가서 모래사장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바닷가에서 자란 나의 유년시절의 여름은 이렇듯 다양하다. 친가와 외가 모두 대가족제도하에 있었기도 하거니와 친가는 경제적으로 굴곡이 있었기 때문에 더 다양한 체험들이 나에게 제공되었다. 하나같이 나의 인생에서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어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게 되니 나도 어느 듯 50대 중반을 훌쩍 넘었고, 친가나 외가의 어른들께서는 어머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인이 되셔서 그 사랑을 되돌려 드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나의 유년시절 여름날의 풍경은 너무나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분들은 떠났어도 머릿속에 추억은 남아 그 분들과 나를 이어준다. 고마워하는 이 마음을 아시고 빙긋이 웃으실 조부모님, 아버님, 외조부모님이 생각난다. 하늘은 시원할 것 같은데 한 여름 잘 나시길 기도드립니다. (2017.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