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웅의 시 6 편
모정 母情
밭 두렁가에 폐비닐 한 무데기 쌓여 있다
온몸 흙 범벅이 된 체 여기저기 뻥뻥 구멍 뚫린 모습
투명하던 그날의 시력도 이제는 흐려져
지척의 물건도 뿌옇게 보이고
꼬여 헝클어진 허리는 수시로 푹푹 쑤신다
마당엔 헌 비료부대랑 벌겋게 술 취한 빈 소줏병이
어지러이 나둥글어져 있고
엄동설한 된바람 막으며 품안에 키웠던 애호박 상추 토마토는
도시로 다 팔려 나가
허리 휜 쇠기둥만 핏물을 흘리며 하우스를 지키고 있다
영감, 설날엔 아이들 올랑가 모르것소
펄럭, 찢어진 비닐 한 조각이
쓰윽, 눈물을 훔치며 녹슨 쇠기둥에 소맷자락을 걸치다가 돌아선다
빈 집
산간에 버려진 빈 집
흙먼지 속 발자국은 어지러이 흩어지고
한 줌 인적조차 없다.
팽팽했던 거미줄도 늘어져
덩그렁 껍데기만 있는 알몸
바람 앞에 견디는 세월의 무게를 본다.
사람은 집을 버려도
집은 사람을 버릴 수 없어
눈비 속에서도 처연히 서 있는 모습
떠나간 사람 기다리는 그 님 같다.
눈이 펑펑 내려
천지가 하얀 고요 속에 잠기면
산짐승 먹이 찾아 기웃거리듯
빈 집 근처에 헤매는 목마른 영혼
스쳐가는 한 줄기 따뜻한 호흡
빈 집의 공허함이 이렇게 훈훈한데
선뜻 들어서지 못하는
떠돌이별 하나 겨울바람 앞에 섰네.
- 시집 <나무는 언어로 말 하지 않는다> 중에서
붓꽃 한점
풀 섶 녹색 한 자락에
그어진 보랏빛 붓글씨 한 획
낙점이라기엔 너무도 힘 찬 한 획의 흐름
그 한 점이 퍼런 언덕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내려쳐진 맥박 같은 획
나의 삶에도
늘 느낌없이 헛되게 스쳐 왔기에
쪽빛 같은 빛도 없는 무채색 덤덤한 길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네 늦은 날
- 시집 <눈빛 마주 치면 붉게 물들까>중에서
유월이 오면
상큼 했던 머리 결 같은
꽃바람은 가고
구릿빛 햇살에서 나오는
농축된 화음들이
찬란한 빛깔이 되어
푸른 바다로 강물로 흩어진다
빛에서 나온 빛들은
부서져서 서로 만나지만
유월 녹색에 음각 된 꽃송이 필 때
벼논 덮은 파란 개구리밥에
무지개 빛이 아롱질 때
하얀 감자 꽃으로 홑 날리신 어머니는,
유월에는
꽃 냄새만 있어도
눈물이 난다
-시집 <오동나무 한 그루>중에서
술.6 영산홍 붉어라 보채고
영산홍 붉어라 보채고
잿빛 하늘 내려앉으면
난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다
정수리 몰렸던 바람 가슴으로 내려와
자진모리로 휘몰아치면
괜한 서러움으로 술잔을 채워야 했다
봄볕에 시든 파꽃 같은 삶
전생이 무엇인지 이유 없이 먹먹해 오는 가슴
술잔을 기울이다가
침묵에 머물다가 잠들다가 깨다가
다른 세상을 본다
난 다시 다른 날 찾아 나서야 한다
-시집 『눈빛 마주치면 붉게 물들까』중에서
망태
생고기 구워먹는 푸줏간 벽에
아이를 셋이나 낳은 쭈굴쭈굴한 어머니의 뱃살 같은
망태 하나 걸려 있다
씨앗이나 연장 새참꺼리 같은 하루를 담고 다니던 망태
원래 시골집 뒤란 허름한 곳에 있었는데
어느 날 황학동 고물시장에 나들이 하더니 이젠 여기 도심의 토속 푸줏간에
턱 하니 양반처럼 앉아 있다
지글지글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버티고는 있지만
수심 가득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서려 있고 한 무데기 쇠똥냄새 물씬한
논두렁의 애환이 누렇게 묻어 있다
옆문에 달려 있는 또 하나의 명물 같은 쇠 삼정의 놋쇠 종
문짝이 열릴 때 마다 댕그랑 댕그랑
손마디 부르튼 누런 얼굴이 찌든 망태위로 거미처럼 기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