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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 반에 추워서 깼다가 다시 잤다. 7시 반에 일어나 들판 산책 겸 볼일을 보았다. 약간 움푹 들어간 이곳은 아니나 다를까 이미 볼일을 많이 본 상태. 그러나 상쾌한 초원의 공기에 아름다운 꽃이 핀 들판을 바라보며 일을 보는 기분이 좋았다. 먼 들판과 산에는 낮은 비구름이 머물고 짙은 허브 향의 들판에 자잘한 야생화들이 여리게 피어 아름답다. 강에 가서 세수를 하려다가 비가 쏟아져서 들어왔다. 안으로 비가 약간 들이쳐서 보니까 X자로 엮어진 자바라에 펠트 천을 씌웠을 뿐이다. 추운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영하 40도 정도인데 그떄는 천을 몇 개 더 덧씌우고 산다.
주인 아줌마가 불을 피워 주려고 왔다. 안이 금방 더워진다. 투멘과 딸은 자고 있고 나는 어제 일기를 못써서 지금 어제 것을 쓴다. 강도 보고 꽃 사진도 찍으려고 나갔다 왔다. 빵과 소시지로 아침을 먹는데 8시 반에 조카가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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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호텔이라는 곳을 보고 도로를 따라 테를지 입구의 오보에 도착했다. 원주민 몇이 야생딸기와 베리를 팔고 있어서 샀다. 이상한 바위들도 보이고 산도 있다. 미국의 평원 같은 경치이다. 언덕 쪽으로 차가 오른다.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꽃들이 자잘하게 만발하여 계속 감탄을 했다. 꿈속 같이 아름답고 신기한 풍경이다. 잠깐 멈춰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안해서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들이 길을 가로막았다(다른 동물들 특히 염소, 양은 부리나케 내빼는데 이 놈들이 가장 강적이고 그 다음은 말이다). 내려서 여러 가지 꽃들을 찍었다. 러시아 자르비노의 벌판도 멋있었는데 이곳이 훨씬 아름답다. 어떤 곳은 보라색 벌판이다. 물도 많고 자연이 풍요롭게 느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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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아는 집에서 잠깐 말을 탔다. 나중에 테를지에 갔던 사람들에게 들으니 3시간씩 탔단다. 사방 천지 발에 밟히는 흔한 잡초가 다 귀한 에델바이스이고 예쁜 꽃들이다! 이런 걸 소, 야크가 뜯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도 잠깐 세워 달래서 꽃을 찍었더니 자기들이 생각하는 흔한 잡초(!)들에 감탄하는 내가 참 신기한가보다. 투멘이 고맙게도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꽃들을 꺾어 주었다. 꽃을 꺾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나를 배려하는 아줌마의 마음이 아름답다. 꺾어준 개양귀비, 쑥부쟁이, 에델바이스 등을 일일이 떼어 내어 책 속에 꽂아 두었다. 공룡 모형이 있는 호텔에 아줌마가 볼일이 있어 잠깐 들를 때도 또 꽃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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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차에서 졸다 보니 투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여기서 두 딸과 아들까지 뒤에 네 명이 타게 되었다. 울란바타르 근교로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차바퀴가 펑크났다. 아스팔트 도로가 거친데다 너무 많이 타서 그런가보다. 어떤 아저씨가 멈춰서 도와주셨다. 잠시 후 조카들 둘이 나타나 투멘과 나는 그 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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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여름 별장 격인 작고 낡은 목조가옥에 도착했다. 마당에는 이미 많은 친척들이 모여 음식을 잔뜩 차려 놓고 먹고 있었다. 러시아로 떠나는 투멘 오빠를 환송하는 모임이란다. 특별히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무심하지도 않다. 은근히 신경을 써주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워 마치 내가 몽골인 가족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의 친척 모임과 비슷하다. 떠들썩하게 있었던 일 얘기도 하고 웃고 음식을 먹는다.
여태까지의 음식과는 달리 짜지 않고 맛있다. 샐러드처럼 약간 소금에 절인 야채들, 우리 깍두기(!), 몽골 튀김 만두 보츠, 양고기를 소금만 넣어 삶은 것(한 마리 잡아 감자와 노란색의 무 등을 넣고 삶았다), 각종 술과 안주, 과일 등이다. 이곳에서 먹은 만두와 마유주(별로 안 시다), 야채, 과일은 맛있었지만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는 싱거운 고기다. 작은 갈비뼈에 살 붙은 것 하나 먹었다. 좀 질기고 입맛에 안 맞아서 많이 먹기 힘들다. 그러나 이들은 수북하게 쌓아두고 금방 먹는다. 끓인 국물도 따로 그릇에 담아준다. 맛이 희한하다. 게다가 시바스 리갈을 놓고 마시는데 나에게도 한잔 주었다. 술안주는 마른 과일과 우리나라 청우식품 과자들이다. 음식이 입에 딱 맞지 않으니 속도가 안나서 열심히 깍두기와 같이 먹었다. 천도와 사과를 먹으니 커피를 갖다 준다.
몽골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곳 마당에도 야생화는 흔하게 피어있다. 친척이 여름에만 여기서 생활한단다. 화장실은 뒤쪽 마당 구석에 있고 우리 옛날 식인 퍼세식이다. 나무 두개로 걸쳐놓았는데 냄새는 별로 안 난다.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논다. 투멘의 한 살짜리 외손녀는 처음에는 내게 오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안겨서 같이 돌아 다녔다. 대화가 되는 사람은 아줌마의 아들과(미국에서 학교 다닌) 며칠 전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줌마 조카 정도였다. 1시 반에서 4시 반까지 있었다. 떠날 때 헤어지며 돈이나 물건을 선물로 준다.
다시 울란바타르로 돌아왔다. 투멘이 나에게 숙소로 가겠느냐 자기 친구를 같이 만나겠느냐 묻길래 할 일도 없고 함께 가기로 했다. 가족들과 헤어지고 도착한 곳은 새 사무실, 투멘이 남자친구와 차린 여행사이다. 한국에서 12년을 살았다는 36세의 애인은 유창하게 우리말을 하는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 아줌마가 무척 착한 사람이고 살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고 말하는데, 특히 남편이 죽은 후 정신적으로 많이 위로가 되는 사업 동반자인 듯하다. 이 남자친구도 꽤 야심 있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은 UB 주인과는 정 반대로 이번에는 이곳의 한국사람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의리 없고 사기도 잘 치고 뒤가 안 좋고 등등... 무엇보다 한국사람이 왜 못사는 몽골에 와서 돈을 벌려고 난리인지 못마땅하단다. 아저씨의 형제, 아버지,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밤에는 서울에서 만난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국이 또 온단다. 이미 보드카에 취해버린 아저씨 친구인 경찰은 계속 마누라가 전화를 해대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처럼 술 많이 먹었다고 바가지를 긁힌다. 마누라 전화 받지 말라고 주위에서 부추기는 모습, 친구가 권하는 술을 의리 없다고 할까봐 거절하지 못하고 억지로 먹는 모습(너 돈벌었다고 내 술 안 받느냐는 소리를 듣는단다) 등이 영판 우리와 같다.
훕수굴 비행기표를 미리 끊어야 하는데 투멘이 미아트에 친척이 있으니 140달러 정도에 끊어주겠단다(몽골인들과는 가격이 달라 투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고 사실 176달러였다). 내가 고비에서 돌아오면 표를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 6시 반에 숙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줌마보다 10살 정도 연하인데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같이 고비에 갈 일행들이 라면을 먹고 있어서 같이 먹었다. 이미 장을 다 보아서 내가 합류한 후 필요한 것만 더 샀다. 일년 세계 여행 계획 중 이미 한 달을 중국에서 보낸 젊은 부부 미란, 병희씨와 음악가 재우씨가 일행이다. 모두 20대라는데 나보고 총무를 하라고 한다. 너무 젊게 본 모양이다. 총무 할 군번은 아닌 것 같다고 나이를 말했더니 놀란다. 사실 몽골에서 혼자 여행하는 한국여자는 나 빼고 1명밖에 못 봤다. 투어비 125달러에 숙식비로 10만원씩 더 걷었다. 남으면 나중에 나눈단다. 27만원짜리 여행이라니 꽤 비싸다. 주인은 이곳이 가장 싸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은근히 돈은 많이 든다. 350달러(42만원)를 가져온 나는 ATM에서 돈을 뽑아야 했다(10만).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속옷도 빨았다. 사진 찍은 것도 정리하고 충전했다(이곳만 전압이 맞고 다른 곳은 250V). 5000원 짜리 전화카드(15분 사용)를 사서 전화하며 가족들의 선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내일 해안이는 청학동으로 간다. 엄마는 전화를 받으래도 돈 든다고 안 받는다고 하신다.
6인실에서 젊은 미국 남자애들과 같이 쓰게 되었는데 말도 잘 붙이고 싹싹하다. 정확한 발음을 해서 듣기가 편했다. 이곳에 올 때 우리나라를 경유하느라 하루 머물었단다. 공항의 호텔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나가 보니 거대한 도시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너무 이상했다고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곳은 섬이고 단지 공항의 역할 만 하는 곳이며 도시는 멀다고 말했더니 그제야 이해를 한다. 개미 한 마리 안보이고 이게 정말 지구일까 생각했겠구나 했더니 웃는다. 영어를 가르치려고 자원봉사 온 애들인데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나에게 먹을 것을 권하면서 열심히 말을 시킨다. 나중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니 자기들끼리 말하다가 내가 누우니까 조용히 다 나가서 논다. 책 보려고 누운건데... 백인들에 대해 단순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고 특히 미국 애들에게는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이것은 나의 잘못된 태도이다. 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