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33-35) 새 계명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고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광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시간에 말씀을 나누었던 32절에 보면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광이라는 것도 절대로 이 세상의 것과는 철저하게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세상의 것에 영광을 얻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생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부활한 자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뒤에 예수님은 33절에서 "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에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가신 곳은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가시는 그곳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고, 목적하고 평생을 추구하며 사는 것들이 예수님이 가신 곳에서는 모두 거부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소망하고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곳에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에 보면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이나 주는 존재로 인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34-35절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34-35절을 보면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에는 없고 신약에만 있는 새로운 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 계명은 구약이고, 새 계명은 신약이라고 단순히 구분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구약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새 계명이라고 해서 내용이 구약에 없는 새로운 계명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사랑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능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계명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 계명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것으로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보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줄기가 되고 우리는 가지가 되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지인 우리에게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스스로의 열심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였지만 신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겨우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불쌍하게 여기게 합니다.
나를 불쌍한 자로 볼 수 있기에 이웃도 불쌍한 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이 바로 우리입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우리를 해치 못하는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안에 있으니 사랑이 맺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 열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증거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전달자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이 없으면 전달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하는 일이 잘되는 것에서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 마시고, 영원한 사망에 처한 저와 여러분의 본질에서 은혜와 사랑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이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