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漢四郡)은 허구(虛構), 현도·낙랑·임둔·진번의 추정지역
일제를 몰아낸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한사군(漢四郡)이 현재의 이북에 있었다는둥 운운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민족은 참으로 미련한 민족임에 틀림없다.
겉으로는 제자랑하기 바빠서 혼(魂)을 빼놓고 살면서,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이나 정의(正義)와 진실(眞實)을 찾고자하는 정기(精氣)는 다 빠져버리고 '역사'분야에서는 마치 바람빠진 타이어 같은 꼴이다.
서기전 90년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한(漢) 무제(武帝) 유철이 죄인들을 방패막이로 앞세우고 조선 왕검성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왕검성은 점령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왕검성미하(王險城未下)']
즉, 서기전 109~108년 기간중에 연(燕), 대(代), 제(齊) 등의 군사를 동원했으나, 왕검성이 점령되지 않으므로, 전쟁을 끝내고 4군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고수정조선위사군(以故遂定朝鮮, 爲四郡.)']
만약 왕검성이 함락되었다면, 정복(征服)했다는 의미로 '칠 정(征)'자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할 정(定)'은 조선의 무엇을 정했다는 것인가?
만약 '평정(平定)'했다는 의미로 '정할 정(定)'자를 썼다면, '진압하다.', 또는 '정복하다.'의 의미가 들어갔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4군을 어디에 두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기』에 아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이 끝났다는 기록에 이어서 마지막 부분에 전쟁 중에 항복한 조선인 5인을 온양·기·획청·평주·추저 등 5군의 제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왕검성을 점령했다면, 왕검성부터 제후를 임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참가한 장수들을 기시형에 쳐했거나 평민으로 강등하였고, 그 대신에 항복한 조선인 5명을 제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양·기·획청·평주· 추저 등 5군이 왕검성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 왕검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다면, 조선에 봉한 제후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전쟁에 참가한 한의 장수들을 사형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한(漢)이 조선과의 전쟁에 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즉, 상기한 '정할 정(定)'자는 전쟁을 끝내고 패퇴하면서 마치 승리한 것인양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사마천이 그렇게 기록하지 앟았다면, 사마천은 목이 잘렸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사관이 거짓 기록은 하지 않되, 폭군의 행패를 면하려면, 모호하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기』에는 단순히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기』보다 약 180년 후(서기후 1세기 말)에 편찬된『한서』에 따르면,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등 4군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기』보다 약 500년 뒤(432년)에 편찬된『후한서』에 따르면, '정할 정(定)'자를 '멸망할 멸(滅)'자로 바꿔 썼었으며,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 등 4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사마천이 전쟁이 끝난 직후에 『사기』를 쓰면서 기록하지도 않은 지명들을 180~500년이 지나서 지명이 찾아졌다는 점과 군(郡)인지 부(部)인지도 구별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명(明) 대의 사관들이 『사기』조선열전에 위사(僞史)를 임의 삽입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간 고대 역사지명들을 추적한 결과, 조선 왕검성·현도·임둔·낙랑·진번·요동·요서·연·대·제·온양·평주 등의 위치를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림 1]조선 왕검성·현도·임둔·낙랑·진번·요동·요서·연·대·제·온양·평주 등 추정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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