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적 글쓰기란 실제가 아닌 이야기를 지어 내어서 쓰는 글을 말하지만 나는 작가가 자기 심상에 비친 참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쓰는 거짓된 글이 허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는 행위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1차적으로 동공을 통해 들어온 영상이 망막에 비친 형태를 인식한다. 이때 우리의 망막은 모든 빛을 다 인식하는 게 아니고 가시광선만 인식한다. 이 단계에서의 우리의 인식은, 산은 보이는 자연의 산이요, 물도 보이는 그대로의 물로 인식된다. 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실에서의 우리 인간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인식하지 못한다. 망막에 비친 가시광선이 남기는 영상을 다시 투과시키는 2차적인 눈을 통해서 보는 때문이다. 우리의 망막에 비친 산과 물이 2차적인 눈을 통과하고 나면 산과 물은 자기만의 영상으로 변환되어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산과 물로 인식된다. 이것이 심상이다. 이 심상이 작용하면 우리가 아는 산은 참 산이 아니게 되고 물 또한 참 물이 아니게 된다. 2차적 필터링 작업을 통과한 빛은 상(像=실체)이 아니라 상(想=이미지)이 되어 허구의 산과 허구의 물이 된다. 이걸 글로 쓰면 제 아무리 참을 썼다고 강변하더라도 허구를 쓴 것일 수밖에 없다.
이 2차적 필터링 작업을 하는 눈이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경험이 만들어 내는 틀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 무의식이 자기 내면에서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살아간다. 자기만의 인식의 틀에 갇힌 것을 모른 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오해와 갈등은 여기서 일어난다. (=경험이 만들어 내는 인식의 오류 = 이게 강하면 트라우마가 됨). 제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또한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을 해도 이 무의식의 벽(=아상我相,= 분별지)을 허물지 못하면 참이 참으로 보이질 않으니(인식의 오류 때문에) 소통이 되질 않는다. 마치 적녹색맹인이 푸른 고추를 붉은 고추라고 강변하듯 그렇게 살아가고야 마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가 동물의 세계보다 더 심각한 모순과 오해와 갈등, 그리고 죽고 죽이는 전쟁 속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모든 각인이 자신의 무의식의 필터를 통해 인식하는 굴절된 이 虛想(허상)과 망상을 實像(실상)인줄 알고 쫓아다니는 때문에 일어난다. 상(想)을 쫒아 다니면 십인십색이 아니라 일인백색을 만들어 참에서부터 자꾸 멀어진다.
소통이 원활해지려면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이 무의식의 벽을 깨트려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벽이 두꺼운 사람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아무런 빛도 투과시키질 못한다. 심상에 빛이 전혀 비치질 않으니 완전색맹인 사람처럼 제 멋대로의 산을 산이라고 떠든다. 일관성도 없다. 깜깜한 속에 있으니 본디 밝음이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시인 이상은 이 세계의 모습을 <가정>이란 시로 그려낸 바가 있다. 이 시는 필자가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치던 날 국어 시험에 출제된 문제다. 이 시를 처음 접한 나는 시의 제목을 묻는 문제에 답을 "문"이라고 적었다. ^^
왜? 이 시의 제목이 가정일까? 인간이 최초로 구성하는 사회(소통) 단위가 가정인 때문이다.(필자의 견해일 뿐이니 그렇게 해석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참고)
家庭(가정)
門(문)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門牌(문패)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감)해간다.食口(식구)야封(봉)한窓戶(창호)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鍼(침)처럼月光(월광)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壽命(수명)을헐어서典當(전당)잡히나보다.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내면의 성찰이 부족하니 세상을 향해서 마음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 문을 아무리 밖에서 열려고 해보지만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의식의 벽을 깨트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건 오로지 각인 스스로가 참을 보려는 노력을 할 때만 가능하다. 형(形)이 상(像)이 되고, 상(像)이 다시 상(想)되는 이 과정을 이해하고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짓된 상(想)을 부셔나가는 것이다. ("야반 삼경에 일어나서 대문의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과 같은 말)
그런데 문제는 상(想)이 일어나는 근원인 틀은 그대로 둔 채 상(想)만 부셔나간다고 해서 참에 이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참을 만나려면 자신의 의식으로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여 무의식이 내재하게 된 근원을 찾아내어서 그걸 없애버려야 한다. 말하자면 2차적 필터링 작업을 하는 틀이 왜 생겼는지를 밝혀내어 그 필터자체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참 자신을 만나게 되고 참 자기를 자기 스스로가 내버렸음을 알고,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와 화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는 참 자기를 만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영혼이 정화된다.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제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 일어난다. 의식으로서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업장이 소멸되는 때문이다. 비로소 영혼이 맑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참을 참으로 인식한다. 이는 일찍이 임재가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하라고 가르친 것과 하나 다르지 않다. 물세례가 아닌 성령세례를 받아 내 영혼이 거듭남의 경지에 이른다는 성경의 말씀이나 해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상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2차적 필터링을 하는 틀을 깨버리고 나면 보이는 그대로가 바로 산은 산이되고 물은 물이 된다. 보이는 참 그대로를 적으면 문장이 되고 글이 되고 수필이 되고 문학이 되고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를 이해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을 목우도(심우도尋牛圖)로 그려서 표현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산, 자기만의 경험과 인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산, 그걸 타파한 후에 보이는 산은 다 같은 산이지만 전혀 다른 산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틀이 만들어지고 인식의 오류가 생기고 소통이 불통되어 고통에 빠진다는 뜻. 인식의 오류는 뇌에 세겨지는 이미지의 오류를 가져 옮으로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것임. 사슴을 말이라 하거나 사슴을 사슴이라 하거나 사슴은 자신을 사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어는 사슴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슴을 이미지로 떠올려서 이해 한다. 그런데 사슴이라는 언어에서 사슴이 아닌 말을 이미지로 떠올리면 소통이 되질 않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을 하되 이걸 알고 사랑해야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이걸 모르니까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삼키듯"이 어리석음이 반복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