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센고쿠 시대의 일본을 통일하고 관백과 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도 연이어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가문과 역사
센코쿠 시대에 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9]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 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太閤, 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따라서 전통적으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평가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당장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일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으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입지전적인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으로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으나
철저한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능력들은 다 평범 또는 일반인 이하 수준이었고 특히 글 읽는 능력과 개인 무예(맨손 싸움 실력)는 아예 무능아였다.
하지만 임기응변의 천재로 즉석에서 뭘 생각해내거나 상황 판단이 일반인을 아득히 웃돌 정도로 빨라,
위기가 계속 발생하는 센고쿠 시대에서는 이만큼 적합한 인재가 없었다.
그러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빠른 판단력과 뛰어난 임기응변을 가지고 있었고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이게 엄청 필요한 능력이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
뿐만 아니라 출신이 미천한 탓에 귀족들의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어서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제법 높은 지위와 재산이 손에 들어오자 이를 흉내내기에 바빴다고도 한다.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미천한 출신 때문에 후다이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인적 기반이 없었다.
이건 심각한 결점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임명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세력을 맡기는 등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초 병크를 터트리고, 같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기존 후계자이자 많은 가신들을 거느리고 인망도 높았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일족들을 몰살시키면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많은 신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계기를 만드는 등
정치적으로 실책을 많이 저질렀다.
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평가
병자호란과 같이 한국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근현대사의 인물 중에선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히로히토, 도조 히데키, 이시하라 신타로,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등과 함께
한국 입장에선 좋게 볼 수 없는 일본인 중 한 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다만, 전근대시대 인물에게 손가락이 6개였다느니하는 기록은 좀 걸러서 해석해야한다.
당대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기형은 마녀나 악마 숭배자의 상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고의로 특정인을 까내리려고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은 흔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도 먼저 가톨릭 탄압을 시작한 인물인 만큼, 그 가톨릭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그를 좋게 표현했을 리도 만무하다. 일단, 그가 다지증이라는 풍문은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