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7. 12.
조지 레이코프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2004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 Know Your Values and Frame the Debate)’라는 책을 펴냈다.
책의 핵심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레이코프 교수는 인간을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봤다. 언어학자 레이코프 교수는 이런 프레임은 언어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고, 또 반복적인 단어의 활용을 통해 프레임이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임의 대표적 사례 중의 하나로, 그는 ‘지구 온난화’라는 단어 대신 ‘기후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든다.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뜨거워진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는 용어인 만큼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이때 기업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어서 보다 중립적인 뉘앙스를 가진 ‘기후 변화’라는 단어로 대체됐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용어는 프레임을 만들고, 인간은 그 프레임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요사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말이 나오고 있어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은 얼마 전,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둘러싼 시중의 음해성 소문을 강력히 부인했다. 이를 두고 여야 일부 정치인은, 왜 스스로 이에 대해서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이들의 논리는 ‘코끼리’에 대한 말을 먼저 꺼내면 일반 국민이 윤 전 총장을 생각할 때 항상 ‘코끼리’ 이미지를 연상한다는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측면이 간과됐다. 우선 당사자가 먼저 말을 꺼냄으로써 윤석열 전 총장 지지층에게는 이른바 윤석열 X파일이 거짓이라는 강한 믿음을 줄 수 있다는 측면을 간과했다. 음해성 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체 진화를 거듭할 가능성이 높다. 초반에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이 문제를 스스로 꺼내 듦으로써 윤 전 총장에 대해 제기되는 다른 의혹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특정인 관련 ‘코끼리’를 연상케 하면 당사자를 둘러싼 다른 이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러 음해성 소문이 있을 때는 일단 가장 부인하기에 자신 있는 테마, 가장 거짓임이 명백한 주제, 그리고 오히려 피해자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소재를 골라 먼저 언급하는 게 낫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소재만을 연상하게 만들어, 다른 음해성 소재의 힘이 빠지게끔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윤 전 총장 장모의 법정 구속이다. 이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안이다.
반면 단순한 측면도 있다. 일반 유권자는 윤 전 총장 장모가 법정 구속을 당했다는 것만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프레임으로 만들 수 있는 소재는 복잡하면 안 된다. 설명이 필요한 소재로는 프레임을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윤 전 총장 장모 문제는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지만, 장모가 구속됐다는 점은 간단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권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은 구속됐다는 사실만 갖고 프레임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윤 전 총장의 위기는 다가왔다. 윤 전 총장 대응은 그다지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것 같다. 윤 전 총장 캠프는 장모 문제를 처가에 국한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을 긋는 듯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이 정도 대응이 상당히 미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캠프 의도와는 다르게 해당 문제를 윤 전 총장과 연관해서 바라볼 확률이 높다. 더구나 윤 전 총장 처가 쪽 관련 재판이 아직도 몇 가지가 더 있음을 감안하면, 이번 문제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이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뜻밖에도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재가 외부로부터 나왔다. 바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점령군’ 발언이다.
이재명 지사는 지난 7월 1일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지 않는가…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이 나온 이유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바람에 이육사 같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예우가 부족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테다. 이 점을 강조하다 약간 오버하는 발언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논란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는 부분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관련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다.
지난 7월 1일 이 지사의 대선 출마 선언문을 봤을 때는, 이 지사가 지지층 확장에 나섰다고 판단했다. 출마 선언문에 이 지사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소득에 대해 단 1번만 언급됐고, 2017년 대선 당시 이 지사가 주장했던 사드 철회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선 출마 선언 직후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해버렸다. 해당 발언은 장모 문제로 고민하던 윤 전 총장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길 만하다. 이슈는 이슈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 정치판의 기본 상식이기 때문이다. 윤 전 총장이 이 문제에 역공을 취하는 배경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측면을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임이란 ‘특정 용어의 반복적 사용’에 의해 만들어진다. 야권과 여당 내 경쟁 주자들이 이 지사 발언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면 일종의 ‘역사관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이는 이 지사가 중도층으로 지지층을 확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당연히 이재명 지사 역시 작금의 상황을 조기 수습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지사가 윤석열 전 총장 측보다는 사태 수습을 조금 빨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지사는 대선을 많이 치러본 정당 소속 인사이고, 또 본인 스스로도 선거를 치러본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인사들도 선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윤 전 총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한 시선으로 윤 전 총장을 둘러싼 사태의 전개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제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됐다.
과거 선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선 주자들은 본의 아닌 실수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수하는 측이 손해를 볼 수 있어서다. 선거에서 손해란 곧 선거 패배를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누가 끝까지 실수를 최소화하는가, 그리고 위기관리에 성공하느냐가 선거 승패를 가를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재명과 윤석열 두 유력 주자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7호 (2021.07.14~2021.07.20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