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第四의 刺客!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소호(巢湖)의 호숫가를 걷는 황삼(黃衫)의 청년은
오래 전에 폐허로 변한 토지묘(土地廟)의 처마 밑을
습관처럼 힐끗 쳐다보았다.
곧 큼직한 일거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팽노대(彭老大)로부터
벌써 일 년째 소식이 없다.
오늘도 역시 토지묘의 처마 끝에는 아무런표식이 없는 것이다.
황삼청년은 무심한 시선으로 호수를 쳐다보았다.
겉보기에 그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 점의 생기도 없는 무감동한 동공(瞳孔)은
섬뜩한 느낌을 들게 했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서있던 황삼 청년은
아직 서늘한 새벽의 냉기에 오한을 느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지난 일 년 동안 지내온자신의 초막(草幕)으로 들어섰다.
이 초막은 그가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 곳으로
주위의 마을이나 시진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어 인적이 드물었다.
그는 때때로 옷을 갈아입듯이 거처를 옮겨 다녔다.
직업의 특성상 많은 원수가 생길 수밖에 없고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추적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냄새를 남기게 되는 때문이다.
그가 지금의 거처로 삼고 있는 이 허름한 초막에는
다 낡은 나무 침상과 때묻은 이불,
그리고 한 개의 의자와 솥 밖에 없었다.
그는 함부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설사 밖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이른 새벽에
그 튼튼한 몸에 독소처럼 괴어 버린 긴장감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산책을 나올 뿐이다.
물론 때때로 며칠분의 음식을 사기 위해 시진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그밖에는 그저 몇 시간이고 계속 창가에 앉아 호수를 쳐다보거나
수면을 취할 뿐이었다.
황삼청년은 천천히 의자에 앉아 밝아오는 소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바다같이 드넓은 소호의 호면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의 장막속에서
붉은 빛을 뿌리며 떠오르는 태양은 몽롱한 형상으로 그의눈에 비추어졌다.
조금의 감흥이라도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면 절로 탄성을 토할정도로 아름다운 소호의 일출이건만 청년의 눈길은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
잠시 일출을 바라보던 청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곧 고른 숨소리와 가슴의 일정한 움직임이 일어
그가 깊은 수면상태에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매일 매일이 똑같은 생활, 무의미한 삶이었다.
하지만 청년에게 그것은 조만간 닥쳐올 일에 대하여
준비하기 위한 휴식일 뿐이다.
그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굴 속의 불곰처럼
팽노대의 소식을기다리고 있었다.
무림맹 총단에서 돌아온지 삼 일 후,
극비로 봉인된 몇 장의 문서가 귀견수 조중의 손에 들어왔다.
그 속에는 그의 세 심복들이 조사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첫 번째 부분은 사공표와 자운유가 보낸 것으로
모충(毛忠)과 진여상의 살해사건과 관련해서
다시 재조사하여 알아낸 결과였다.
두 번째의 보고서는
장차수가 비마영의 행방을 알아본 결과에관한 정보였다.
장차수는 어느 정도 그자의 발자취를 추적한 것 같았다.
모충의 주변을 탐문하고 있는 사공표와 자운유의 보고서에는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모충의 출신내력에 대한 정보와 그가 죽기 전 행방,
그리고 월화에 대한 며칠 사이의 동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조중은 모충이 자신에게 팔려던 암살기도에 대한 정보가
확실한 것임을 깨달았다.
모충은 뒷쪽의 세계에서 청부살인업을 중개해오던
월화(月花)의충실한 살인도구로서
그 동안 여러차례 자객행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그는 명문가의 여식에서
하루 아침에 창기의 신세로전락한 진여상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사문인 공동파의 추적이 항주성까지 미친 것을알자
그는 진여상과 도피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진여상과의 도피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게 된 그는
정보를 팔기 위해서 조중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이번 건이 허위정보였기를 바라던
조중의 한가닥 바램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 실제로 누군가에 의해서
무림맹 요인의 암살이 기도되고 있는 것이다.
암살기도가 사실로 확인되자 조중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다.
고요하던 그의 혈관은 긴장과 흥분으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石無心)은
월화의 주선으로 세 번째자객인 독수귀(毒手鬼)라는 인물과 만났다.
이십대의 중반의 나이에 대단한 미남자인 이 인물은
어느 모로 보나 자객 같은 험한 일을 할 인물로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사람들의 그같은 선입관이
그의 일을 쉽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수귀는 석무심이 제시한 막대한 액수에 순순이 일을 맡았다.
이제 석무심이 네 번째 상대와 만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은밀히 수하를 시켜 화룡전장(火龍錢莊)에 계약금을 위탁했다.
소호(巢湖)변에 있는 토지묘의 처마 밑에
언제부터인가 다 낡은 제비모양의 연(鳶)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날리다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제비연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은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새벽 산책을 하던 황삼 청년의 시선이
토지묘의 처마에 걸린 연에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연을 발견한 순간
황삼청년의 눈빛에는 한 가닥 이채가 스쳐 지났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봇짐을 손에 든 황삼청년이 초막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초막에서 사라진 직후
초막이 있던 곳에서 짙은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곧 걷잡을 수 없는 화염에 휩싸인 초막은
채 두 시진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재만 남기고 사그라 들었다.
신고를 받고 관부(官府)에서 관리가 나와 조사를 했지만
건성으로 한 번 잿더미가 된 초막을 훑어보았을 뿐,
오랫동안 버려졌던 초막이 불에 탄 이 화재 건은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이틀 후,
봇짐을 멘 황삼청년이 초췌한 표정으로
죽립을 눌러쓴 채 항주성으로 들어섰다.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은 채...!
철혈무정 석무심은 화룡전장에 황금 오천냥의 계약금을 위탁한 후 삼 일 동안 한 번도 자신의 거처인 상가장(桑家莊)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상가장은 항주성 동쪽에 있는 장터에 위치한 조그만 장원으로
남의 눈을 피해 잠적하기에는 극히 좋은 장소였다.
상가장의 장주는 소금사업으로 얼마간 부를 획득한 소상인이었다.
한 달 전 석무심은 자신들을 관인(官人)으로 소개하고
몇 가지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라면서 한 달 동안 상가장의 바깥채를 빌렸다.
예로부터 백성들은 관인을 하늘처럼 무섭게 보아왔다.
거기다가, 금전까지 듬뿍 쥐어 주니
상가장의 식솔들은 그들을 신주 모시듯 극진히 대접했다.
석무심은 계획대로 세 사람의 자객에게 따로따로 일을 맡겼다.
지금쯤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을 옮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네 번째 자객은 월화가 그처럼 극찬한 이상 특히 믿을만 할 것이다.
제사(第四)의 자객인 그자 또한 다른 세 자객들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석무심은 자기가 없는 동안 이 미지의 자객으로부터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여타의 다른 일들은 모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석무심은 그렇다고 쳐도
기약없이 상대를 기다려야만 하는 이미묘한 상황은
그의 수하들인 세 회의장한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들 세 장한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돌아다니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 지금같이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문객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야 하자
안정되지 않은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석무심은 낮에는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씩을 교대로
홍등가로 보내어 무림맹의 활동도 탐지할 겸
쾌락도 맛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상가장 내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현재 항주 곳곳에는 무림맹의 수하들로 인해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여간 경솔한 행동이 아니다.
석무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침상에 몸을 눕혔다.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제사의 자객에 대한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황금으로 일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도 그렇지만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데 그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지 필요 이상으로 호기심이 일어났다.
황삼청년이 항주성내의 유명한 은장(銀莊)인 화룡전장을 나서자,
곧 쥐새끼같이 작은 눈에 염소수염을 기른 사십대의 왜소한 사나이가 나타나 태연히 그 황삼청년의 뒤를 따랐다.
황삼청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흡사 벽지에서 처음 대처(大處)로 나온 시골뜨기가
항주성의 화려한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 살피면서 장터로 향했다.
장터는 수많은 인파로 인해 북새통처럼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황삼청년은 단 한 사람과도 부딪침 없이
교묘히 이리저리 빠져 나갔다.
거의 장터를 벗어날 무렵
황삼청년은 길가에 자리잡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미행하던 염소수염의 사나이도 재빨리 발걸음을 재촉해 뒤따라 들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염소수염의 사나이 눈이 째질 듯이 커졌다.
음식을 먹으러 들어간 줄 알았던 황삼청년이
다시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재빨리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황삼청년이 완전히 사라지자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급히 뒤따라 나왔다.
어느 새 황삼청년은 장터를 빠져나가 샛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행인들과 부딪침에도 아랑곳없이 맹렬히 달렸다.
등 뒤에서 그와 부딪친 행인들이 욕설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샛길로 접어들은 그는 급히 앞쪽을 살폈다.
제법 떨어진 앞쪽에서 다시 황삼청년의 신형을 발견한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였다.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눈앞의 황삼청년이 담벼락을 따라 돌자
재빨리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염소수염의 사내가 급히 담벼락을 끼고 돌았지만
황삼청년의 신형이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흠칫 놀란 그는 황망히 담벼락 저쪽의 모퉁이를 향해 뛰어가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나를 뒤쫓느라 수고가 많군.}
갑자기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한 쌀쌀한 목소리에
염소수염의 사나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높직한 담장 위에 한명의 청년이 태연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물론 염소 수염의 사내가 미행하고 있던 황삼청년이었다.
황삼청년을 발견한 염소수염의 사내는 급히 뒷걸음치며 무어라 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
그는 황삼청년의 주먹이 눈앞을 스치는 것을 보았고,
이어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황삼청년은 널브러진 염소수염의 사나이를 내려다보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떤 자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실망인데.}
다분히 조소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는 실신한 사나이를 안고 훌쩍 몸을 날렸다.
한 사람의 장한을 안고도 가볍게 물을 날리는 그의 민접함은
실로 영민한 것이었다.
상지호(相支湖)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는
철혈무정 석무심이 신임하는 세 명의 수하 중 하나였다.
벌써 한 달째 항주성에서 머물고 있는 그는
홍등가에서 한바탕욕정을 발산한 뒤 상가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밤 샀던 홍련(紅蓮)이란 기녀도 나쁘지는 않았다.
육덕이 흐드러진 몸매에다 전문가답게 사내를 녹여버리는 그 부분의 기교는 발군이었다.
거푸 서너 번이나 그년의 몸에 배설을 하고 나자 몸 안에 쌓였던 피로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계집만은 못했어!)
상지호는 진여상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단 한차례였지만 진여상을 범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진여상은 동전 몇 문으로 쉽게 사서 즐길 수 있는
전문적인 창기들과는 전적으로 틀린 계집이었다.
무언가 고급스럽고 깔끔하다고나 할까?
한 번 즐긴 뒤 죽여 버리기에는 정말 아까운 계집이었다.
(별 잡생각을 다 하는군! 그년은 그때 반드시 죽었어야만 했어!)
상지호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셨다.
그와 동료들은 오늘로써 사 일째 의문의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짜증을 내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자
상지호는 미안한 감이 들었다.
약간 취기와 시원스럽게 홍등가에서 음욕을 배설한 상지호는
상가장에 도착하자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사 일째 꼼짝없이 갇혀 있다시피 한
자신의 상사인 석무심을 생각할 때
그의 앞에서 술기운을 풍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한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담벼락에 난 쪽문을 슬며시 열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당신의 주인을 만나고 싶소.}
어둠 속에서 나직하나 단호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쪽문을 열려던 상지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숙련된 동작으로 방어를 갖추고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쪽 이 장 떨어진 곳에 목소리의 주인이 서 있었다.
나이는 잘해야 이제 이십 세 가량쯤이나 되었을까?
오랜 여행에지친 듯 얼굴은 초췌하고 몸에 걸친 황색장삼은 먼지가 가득 묻어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지만,
상지호는 이 황삼청년과 마주 서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발가벗은 무방비 상태로
사나운 맹수와 마주 선 듯한 기분이었다.
황삼청년은 바로 지난 일 연간 자신의 은신처가 되어주었던
소호변의 초막을 불태우고 떠난 장본인이었다.
상지호는 가슴의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 헌데, 이 자는 어디서 튀어 나왔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 황삼청년이 자신의 곁에 다가서는 것을
상지호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상지호 역시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빈틈없는 방어의 자세를 취하며 짧게 내뱉었다.
하지만 상지호로써는 최대한 내심의 놀라움을 감추려고 노력했으나
입을 빠져나온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문득 황삼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상지호의 작은 간담을 비웃는 조소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무의미하게 웃는 듯한
모호한 웃음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오.}
황삼청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상대가 누군지를 확인한 순간 상지호는 깜짝 놀랐다.
월화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네 번째의 자객(刺客)-!
상지호는 그 제사(第四)의 자객이
적어도 무언가 특별난 점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었고 기대를 했었다.
헌데, 자신들이 지난 사 일 동안 노심초사하며
지루함 속에 기다린 자가 이토록 초라하고 볼품없는 인물이라니...!
기대가 어긋나버린 상지호는 소태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물었다.
{당... 당신이 정말 담사(潭邪)라는 사람이오?}
{이름이야 무엇인들 상관있소. 사람만 확실하면 되지.}
황삼청년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깊이 침잠한 두 눈은
상지호에게서 한 치도 떨어질 줄 몰랐다.
황삼청년의 엉뚱한 답변에 상지호는 움찔했다.
{시간을 끄는 것은 좋지 않소. 그것도 이곳에서는.}
상지호는 청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상지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철혈무정 석무심은 담사(潭邪)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황삼 청년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폈다.
당연히 그로서는 처음 보는 이 청년은
마치 습관인 듯 얼굴에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견 이십 세 전후로 보이지만 어쩌면 겉보기보다는 나이가 좀더많은 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통사람보다 약간 큰 키에 이상하게도 등을 꼿꼿이 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먼지로 가려 초췌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지나칠 정도로 무감동했다.
어떤 희,노,애,락의 감정도 담사라는 이름을 지닌 이 청년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철혈무정 석무심의 날카로운 안력으로도
이 청년의 전부를 가름해보기는 불강한 듯 여겨졌다.
{석형께서는 내가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찾아온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겠지요?}
황삼청년 담사는 정중히 말했다.
석무심은 그가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데
내심 놀라움을 느꼈지만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이다. 담형.}
{그것은 별 것 아닙니다. 우연히 저를 미행하는 자를 알게 되어
몇 가지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솔직한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오히려 침착성을 잃어 버렸다.
처음 대하는 이 청년의 행동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이 청년의 성격을 파악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일견해 보아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담형의 의향대로 화룡전장에 금액을 맡겼으니
만족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소만..!}
석무심은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쪽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황삼청년 담사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의 재정 상태에는 전혀 흥미가 없소.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눈앞에 피차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는 것뿐이오.}
지극히 사무적인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절로 쓴웃음을 지웠다.
{나는 당신들의 단체에서 나를 고용하겠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오.}
'당신들의 단체'라는 그 말에 석무심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대체 이자는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담사는 석무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말에 별다른 생각은 가지지 마시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석무심을 쏘아보았다.
{석형은 단체를 대표해서 나를 상대하는 것
, 피차 무용한 긴 말은 생략합시다.}
추호도 여지를 두지 않는 상대방의 기세에
석무심은 자신이 이미 한 수 지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하고 불쾌한 일이지만 그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석형이 상대하려는 사람이오.
그리고 이쪽에서 원하지 않는 일은 단 하나!
성급하게 하려는 행동은 삼가해 달라는 것이오.}
담사의 단호한 말투에
석무심은 계속 이렇게 끌려 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담형!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료?}
석무심이 은연중 싸늘한 기세를 흘려내며 말했다.
하지만 황삼청년 담사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날카롭게말했다.
{나는 이런 일에 많은 정보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아니되오
나의 생명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정보와 조심성으로 자행해 올 수 있었던 것이오.}
황삼청년 담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 불필요한 말은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우리 사이에 거래부터성립시켜야 하니까.}
그는 석무심의 파르르 떨리는 눈빛을 무시해 버렸다.
{그쪽에서 보여준 호기는 마음에 들었소.
하지만 나는 아직 어떤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소.}
석무심은 이미 세명의 다른 자객들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숨기며말했다.
눈 앞의 이자를 상대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해봐야
헛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의 표적은?}
단도직입적인 담사의 말에
석무심은 입술을 실룩거리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무림인이오.}
담사의 눈가에 스산한 빛이 언 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선금의 액수로 보아 보통 거물은 아니겠군.}
그는 말하며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무심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세한 이야기는 석형의 상부자에게 들어야겠지요.}
순간 석무심의 눈빛이 모멸감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쓴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렇다면 일차 흥정은 끝이 났군.
내일 밤 삼경까지 다시 오겠소.}
담사는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침착한 자세로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의문의 청년 담사가 방밖으로 완전히 나가자,
석무심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 네 번째 자객의 태도와 어조는
완전히 그를 바보 취급한 것이었다.
태도는 방자하기 이를 데 없고,
또한 화가 날 정도로 무례했다.
석무심은 돌연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지는 않지만,
지금의 그 청년은
그를 형편없는 애송이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이 초면의 청년이
자신의 가슴 속에 불러일으킨 감정이
공포(恐怖)라는 것을 느끼며 흠칫했다.
황혼무렵,
십여 필의 인마(人馬)가
하남성(河南省)의 성도(省都) 낙양(洛陽)으로 들어섰다.
앞장 선 인물을 제외하고
한결같이 산뜻한 백색경장을 입은 마상의 기사들은
위풍당당했다.
대열의 맨앞에 선 삼십대의 비단 장삼을 입은 건장한 사나이는
한 자루의 보검을 허리에 매고 있었다.
강북사람들이라면 그가 바로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실력자인
뇌전신도(雷電神刀) 비사중(飛士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천뇌보(北天雷堡)>
그들은 산서(山西)와 하북(河北), 감숙(甘肅)일대에
크나큰 세력을 가진 북방(北方) 무림의 명가였다.
본래 서북방의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용맹하며 활달하다.
아마도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 탓일 것이다.
타고난 그같은 성정(性情)에다가 무예를 좋아하는 풍속탓에
서북방의 사나이들은 모두가 일당백의 호한(豪漢)들이다.
그들 서북의세력들에 의해
숱한 왕조가 명운을 달리해왔음은 사서에 잘 들어나 있다.
그 서북방 무림을 영도하고 있는 최고의 명가가
바로 북천뇌보(北天雷堡)다.
북천뇌보의 세력과 영향력은
구파일방의 어느 문파도 견줄 수가없으며
무림맹 조차도 그들 북천뇌보 적용(狄容) 일족에게는
어느정도 양보를 하는 정도였다.
그 북천뇌보의 요인인 뇌전신도(雷電神刀) 비사중이
몇 명의 수하들만을 대동하고 황하(黃河)를 건너
무림맹의 세력권인 이곳 낙양에 나타난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선 뇌전신도 비사중 일행은
낙양성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마장쯤 갔을까?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비사중 일행의 맞은편에서
세 필의 인마가 급히 달려왔다.
세필의 말 위에는 오순 가량의 화포(華袍) 노인과
청색 경장에장도를 메고 있는
두 명의 대한(大漢)이 고삐를 잡고 있었다.
이 화포노인이 바로 무림맹(武林盟)의 총관(總管)인
삼절우사(三絶羽士) 갈추상(葛秋相)이었다.
그가 직접 뇌전신도 비사중을 마중나온 것이다.
{어서 오시오 비대협.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먼길을 오시느라고고초가 많으셨겠소이다.}
삼절우사 갈추상은 뇌전신도 비사중 일행을 보자
말을 멈추고포권을 취했다.
무림맹의 총관인 갈추상이 반가운 표정으로 정중히 인사를 하자
비사중은 환한 기색으로 마주 인사를 했다.
{갈노사께서 이렇게 마중을 나오시다니,
비사중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비대협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우리 소맹주(少盟主)께서는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시오.}
갈추상은 흔쾌히 말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자, 가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갈노사.}
비사중은 급히 답례를 하며 말머리를 그와 나란히 했다.
갈추상이 말했다.
{그래 뇌(雷)보주께서는 무양하시겠지요?}
비사중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갈총관께서 염려하심으로
저의 주군께서 언제나 기력이 왕성하십니다.}
{무슨 말씀을... 물론 뇌소저께서도 편안하시겠지요?}
갈추상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비사중은 손을 훼훼 저으며 한숨을 토했다.
{편안이 다 무엇입니까?
이번 길에 소저께서 자신의 낭군이 되실
연(燕)공자를 직접 보시겠다고 따라 나서시는 바람에
정말 혼이 났습니다.}
비사중의 말에 갈추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뇌소저께서 장래의 낭군이 되실 저희 소맹주님에 대해
몹시도 궁금하시겠지요.
이해합니다!}
갈추상의 말에 비사중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사실 저의 입장으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갈노사께서도 아시다시피 뇌소저의 성격이 어디 보통입니까?}
{하하! 폐맹의 삼태상(三太相)들께서는
오히려 뇌소저의 그런 활달한 성품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갈추상의 말에 비사중의 표정이 은근해졌다.
{사실 연공자께서 소저와 정혼하신 후
그 사나운 등살에 어떻게 견디어 내실까 궁금합니다.}
순간 갈추상과 비사중의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대소성이 터졌다.
{핫핫핫핫...}
{하하하...}
두 사람의 대소는 한 점의 가식도 없이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