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자, 지금부터 나오는 문장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위치에 가서 서면 됩니다!”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은 일단 의자에서 일어나서 하는 활동이라는 것에 귀찮은 듯 교실 뒤로 걸어나가서는, 또 무슨 활동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칠판 옆 화면을 보고 있다. 교실 뒤편에는 오른쪽에는 ‘매우 그렇다’, 왼쪽에는 ‘전혀 아니다’라는 표지가 붙어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생각에 해당하는 위치에 가서 직접 서 보는 것이다.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순서대로 나왔다.
‘나는 모든 것을 인간의 편리성을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며 자연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한다는 생태중심주의에 동의한다.’
‘나는 육식을 하는 것에 동의한다.’
‘나는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 찬성한다.’
‘나는 동물원을 만드는 것에 찬성한다.’
문장 하나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이 이동한다. 아이들은 이동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그리고 친구들의 생각을 몸으로, 눈으로 파악한다. 나는 아이들의 이동에 따른 변화를 칠판에 그래프로 그려놓는다. 이 활동을 하기 바로 전에 아이들은 나희덕 작가님의 <풀 비린내에 대하여>라는 수필을 읽었다. 이는 작가가 밤운전을 하면서 켜는 자동차 불빛에 수많은 풀벌레들이 부딪혀 죽은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편리를 위해 사용한 차가 다른 생명체들을 죽일 수 있는 도구가 됨을 깨닫게 되어 되도록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운전을 최소화하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수필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했던 질문만으로도 이미 다양한 생각들이 펼쳐지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고 움직이는 아이들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첫 번째 문장에서 4분의 3정도 되는 아이들이 중간부터 ‘매우 그렇다’ 사이에 섰다.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윤리적이고 좋은 문장이다. 쉽게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래서 두 번째 문장부터는 첫 문장을 삶으로 가져와보았다. 생태중심주의에 동의한다는 아이들이 육식을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문장에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게다가 생태중심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아이들까지 옮겨온다. 몇몇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육식에 동의하지 않는 쪽으로 가면 “너 오늘 급식에 불고기 나오는 거 안 먹을 거야?”, “너 어제도 치킨 먹지 않았냐?”와 같은 말과 “그래도 고기는 먹어야지.”, “고기는 포기 못하지.”와 같은 말들이 뒤섞인다. 세 번째 문장에서는 조금 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이동한다. 네 번째 문장에서는 (이제는 동물원의 갈 나이가 지난) 아이들이 더 많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이동한다. 활동을 마치고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 퇴근을 하고 나서도 아이들의 말과 생각들이 계속 무겁게 남았다. 마음에 걸려있는 그 무거움을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니 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동물권 자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자신만의 확고한 편향에서 나오지 못하거나 나올 생각이 없는 상태여서 지금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 속의 아이들을 보면 막막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가 깊어지면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먼저 공격을 하기도 해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지금은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하지 말까 싶다가도, 재작년 연수에서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이신 김지은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어 본다. 평론가님은 아이들마다 약자에 대한 벽이 달라서 한 명의 아이가 여성에 대해, 장애인에 대해, 동물에 대해 갖는 마음의 벽의 높이가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그래서 다양한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 한 쪽의 벽이 먼저 무너지게 되어 있고, 그러한 감수성은 다른 약자들에 대한 마음의 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지금은 받아들이지 못해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꾸준히 그러한 이야기와 작품을 접하게 해주다보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살리는 일’의 236쪽에 나온 ‘약자를 위하는 마음은 또 다른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연결되고, 확장된다’는 문장은 같은 맥락에서 무력해지는 마음에 힘을 준다. 무거워지고 무력해지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문장들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더라도, 언젠가 틔울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해야겠다고. 내게도 그런 씨앗들이 많이 품어져 있고, 그것이 나중에라도 싹을 틔웠던 경험이 있으니까.
두 번째는 앎과 실천과의 괴리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 앎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다. 변화를 다짐하거나 의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수가 뒤로 갈수록 적어진다. 이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 안에서도 사이가 존재하지만, 앎과 깨달음과 실천 가운데에 너무나 먼 ‘사이’가 존재한다. 이 사이를 어떻게 넘어가야하는지가 늘 고민이 된다. 환경에 대해 무지했던 나도 여러 친구들과 환경책읽기 모임을 하면서 기후위기와 동물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나마 변화된 것이 동물복지인증 제품을 사용하고 식사에 되도록 고기보다 콩이나 두부를 내놓는 것 정도이다. 그럼에도 내 스스로 완전히 채식을 선언하거나 사회 생활의 장에서 이를 의견으로 내놓지 못한다. 여전히 배달 음식으로 만만한 것은 피자나 치킨이고, 고깃집에서 하는 회식에 참여한다. 상황에 따라 나도 이렇게 흔들림이 많은데, 아이들에게 동물권에 대해, 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기도 하다. 작품을 읽고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예방적 살처분과 고기로 태어난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나눌 때 “선생님은요?”라는 질문 앞에서 부끄럽다. 동물권과 환경에 대해 인식하면서도 이러한 앎이 내 생활의 단면으로 들어올 때 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걷는 혹은 퇴보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엇이 그 사이를 좁힐 수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해주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첫댓글 저도 이번 책을 읽으면서 마음은 움직이는데 행동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면은 그건 또 여러운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ㅠㅠ 저도 고민하던 걸 글로 써주신 거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