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바뀌어 7월 28일, 공포정치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방식 그대로 재판을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도 없었고, 변론의 기회도 없었다. 그들의 죄를 고발한 검사 역시 공포정치 내내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온 푸키에 탕빌이었다. 오후 다섯 시,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 오귀스탱, 그 밖에 18명이 마차 3대에 나누어 실린 채로 혁명광장으로 끌려갔다. 공포정치 동안에는 그래도 당통이나 에베르 같은 거물의 경우 사형 판결이 나고 나서 며칠의 유예는 두었으나, 이들은 오전에 선고 받고 그날 오후에 바로 사형장으로 가야 했다. 민중의 소요를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연도에 나와 구경하던 민중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욕을 하거나 조롱을 퍼붓는 시민들과 매춘부들…. 어느 골목을 돌 때는 추레한 행색의 노동자들 몇몇이 서 있다가 마차에 대고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혁명광장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단두대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것은 오랫동안 지식인들의 골칫거리였다. 마르크스는 그의 진정성은 인정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문제의 근원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정치의 힘에만 기댔다고 보았다. 한나 아렌트는 그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없애는 자가당착을 저질렀고, 스탈린의 피의 숙청과 수용소군도의 모델을 만들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방법이 문제가 있었더라도, 민중과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꾸밈없는 사랑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 그는 보다 온건한 정치를 할 수도 있었으나 워낙 급박한 상황이 그를 어쩔 수 없이 살인귀의 길을 걷게 했다는 입장, 로베스피에르를 물리친 테르미도르의 주역들이 곧 부패와 타락에 빠져 추하게 물러나고 말았음을 지적하며, 로베스피에르보다 그의 적들이 더 문제였다고 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분명 그는 순수했던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진정 순수한 인간이, 아무런 사리사욕이 없이 스스로 정의라고 믿는 일을 할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