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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45년의 궁터와 천주교 성지가 있는... 전주 기린봉~중바위산
전주의 명문이었던 전주북중학교(현 전주고등학교)의 교가는 '기린의 높은 봉만 구름을 뚫고'로 시작된다. 그밖에도 기린봉이 교가에 들어있는 전주의 학교들은 많다. 기린봉은 이처럼 전주시민에게 상서로움의 상징인 산이다.
일반적으로 기린은 키가 큰 동물을 일컫는 외에,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젊은이를 가리키는 기린아라는 말에도 인용되고 있고, 성군이 이 세상에 나올 전조로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을 뜻하기도 했던 것이다.
기린봉(271m)과 중바위산(306m)은 전북 전주시 나로송도으 교동, 남고동, 인후3동(아중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전주 사람들에게 상서로움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으로도 귀여움을 받고 있다. 산자락 가까이까지 건물들이 들어서서 그 아름다운 경관이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전주에는 일대의 아름다운 곳을 고른 전주십경이 있다. 그 십경 가운데 제1경이 기린토월(麒麟吐月)이다. 동쪽 기린봉 위로 진주처럼 떠오르는 아름다운 달을 전주의 첫째 가는 경관으로 꼽은 것이다.
시인 이기반은 기린봉을 이렇게 노래했다.
'저 산 너머 종소리 여운을 딛고/ 기린봉 위에 두둥실 달이 뜨면/ 온 고을 백성들이 환하게 웃는다/ 그 향 맑은 얼굴 곱다란 웃음꽃에서/ 조상들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옛날 옛적 전설이 되살아난다/ 휘영청 밝은 달빛 품에 안고/ 기린봉 봉우리에 오르면/ 높푸른 하늘이 잡힐 듯이 잡힐 듯이/ 한 뼘씩 키가 크는 달밤에/ 기린처럼 기나긴 목을 늘이고/ 전라감영 옛 터전 돌아오면/ 온 고을 집집마다 기린의 달이 맑아/ 어두인 이 밤을 지새운다.'
전주의 귀염둥이와 암릉산행의 묘미
기린봉이 숲으로 된 옷을 입고 바위봉으로 우뚝 솟은 것과는 달리 중바위산은 톱날 같은 바위등성이가 200여m 거의 수평으로 이어진다. 여기 등성이 바위는 통바위가 아니라 모서리를 가진 차돌바위들로 날카롭고 뾰족하다.
그 바위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마치 대포처럼 남쪽을 향해 비스듬히 하늘을 향하고 있어 장관이다. 암릉 양편으로 벼랑을 이루고 있고 길도 따로 없지만, 그렇다고 통과하지 못할 것도 없어서 그저 조심조심 천천히 매달리고 기어오르고 건너뛰며 지날 수 있다. 그 바위등성이 끝에 천주교 순교자의 무덤이 있다.
중바위산 고스락 바로 앞 널직한 잘록이 오른편에 있는 200여 평의 기이한 소나무숲도 특이하다. 따로 가꾸어 놓은 것 같은 이 숲의 소나무들은 하나 같이 한 줄기로 꼬불꼬불하면서도 5m 키로 고르게 자라 있어 신기하다. 골짜기의 안개가 올라와 이 숲으로 스며들 때는 더욱 신비하고 꼬부랑 요술 할머니가 꼬부랑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올 것 같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바위산은 중이 고깔을 쓴 모양이어서 얻은 이름이다. 또 기린봉 남쪽 자락에서 중바위에 이르는 산을 '당그래봉' 또는 '일자봉' 이라 하기도 한다. 이 산줄기가 전주시의 우아동 방향에서 보면 일(一) 자로 보이고, 남쪽 상관에서 보면 당그래(고무래)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까지 내려다보는 산
기린봉과 중바위산은 호남정맥의 지맥에 솟아 있다. 백두대간 상의 영취산(장수)에서 서북으로 금남호남정맥이 갈라져 나오고, 이 산줄기는 주화산(완주-진안 경계, 모래재 옆)까지 와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북으로는 금남정맥이란 이름이 붙은 산줄기로 뻗어나가고, 남으로는 호남정맥이라는 이름으로 내장산을 거쳐 광양의 백운산에 이른다.
이 호남정맥이 지나는 만덕산 줄기에서 지맥 하나가 갈라져 기린봉에 이른 것이다, <전북의 백대명산>을 쓴 전주 산사랑산악회 김정길씨는 이 지맥을 '전주북지맥' 이라 부른다.
기린봉과 중바위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온 전주시가를 한눈에 구석구석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대도시 둘레의 산들이 매력이 있는 것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여기저기를 내려다볼 수 있고, 어디에 무엇이 보인다는 등 공동 관심이 있는 것들을 찾고 알아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시가에서 가깝고 그리 높지도 않아 밤에 기린봉에 올라 시가의 휘황한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시에서는 야간 산행꾼들을 위해 고스락까지 전등시설을 해놓았다.
시가뿐만이 아니다. 전주는 북쪽에서 동쪽을 거쳐 남쪽에 이르는 공간이 온통 산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동쪽으로 운장산, 서쪽으로는 모악산, 남쪽으로 고덕산의 조망이 좋다. 김정길씨의 말에 의하면 서해도 조망할 수 있다니 기린봉은 참으로 좋은 조망대임에 틀림없다.
또 가까운 곳에 경기전, 오목대, 전라감영, 풍남문, 남고산성, 고덕산, 완산7봉, 천주교 순교자 묘지 등 역사 깊은 유적들과 명소들이 많이 보여 이 지역의 역사까지도 부감(내려다봄)할 수 있어 더욱 좋다.
품안에는 선린사, 동고사, 기린사, 성불사, 일광암, 수도암, 보석사, 무애사 등 여러 개의 절이 있고, 석축으로 된 동고산성터가 있으며, 후백제왕 견훤이 45년 동안 자리잡았던 왕궁터도 있다.
중바위산의 바위등성이 바로 아래에는 천주교 성지와 성당도 있다. 냇가 산행 들머리에서 중머리산과 성지에 이르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는 '십지가길'로, 굽이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곳' 등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14개처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다른 한 길도 천주교 성직자 묘소를 거쳐 오르게 된다.
이 길들은 전주시 각 동의 천주교 신자들이 구간을 맡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중바위산 산행은 공원 산책 같아 기분이 좋고, 좋은 약수터도 여럿 있어서 물 뜨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화로의 선림사 들목이 산행기점
11월2일은 날씨가 좀 쌀쌀했다. 전북산사랑회 회원들과 함께 산행에 나섰다. 전북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전북의 백대명산을 가다> 라는 훌륭한 책을 낸 김정길씨(전북산사랑회 총무, 전주상공회의소 기획관리부장), 유영남시(전북산사랑회 총무, 일광인새소 대표), 송왕엽씨(약국 경영, 용지산악회 회장), 정만식씨(사진작가, 모예 대표), 한명국씨(제이상회 대표) 등 여러분이 동행해 주었다.
기린봉은 원래 마당재가 산행의 들머리다. 그러나 마당재는 도시개발로 산줄기가 깎여 지금은 큰 길이 지나는 평지가 되어 있다. 전주시 동부 우회도로의 아중역(아중저수지 옆)에서 마당재를 거쳐 풍남초등학교까지 새로 난 길을 문화로라 한다.
이 문화로의 마당재 근처에 기린봉 줄기와 아중리 택지개발지구 사이(철조망이 있음)로 선린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문화로와 선린사 들목의 모서리가 기린봉 산행의 들머리다. 모서리에 초소 같은 빨간 벽돌의 단칸 건물이 있다.
이 들목에서 산비탈의 통나무계단을 통해 마당재 절개지 위로 올라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등성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인지 넓고 좋으며 군데군데 운동시설은 물론 앉아 쉴 수 있는 긴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다.
15분쯤 가면 번듯한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 잘록이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가 된다. 계속 등성이로 계단을 밟아 오르면 곧장 기린봉에 이르고, 왼편 비탈로 돌아가면 꽤 규모가 큰 선린사에 다다른다. 선린사의 물이 좋다.
선린사에서 바로 기린봉으로 오르는 비탈길은 좀 가파르다. 선린사 길과 등성이 길은 기린봉 고스락의 바로 아래에서 만난다. 일행은 고스락에서 쉬며 전주시가를 둘러보고 운장산 모악산 고덕산 등도 조망했다.
일행은 거의 전북산사랑회 원로들로 50~60대의 은발인데, 14년에 걸쳐 전북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찾아다니며 고생한 분들이라 한다. 엊그제 지리산에 갔다가 80대 노인이 한복을 입고 올라온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인생은 80부터라는 말도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은발이 되어 건강한 노인을 보면 누구나 '나도 저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드는 모양이다.
기림봉은 기린의 목처럼 솟아 있어 가파르다. 기린봉에서 내려서면 잘록이가 있고 안내판도 있다(마당재 1km, 중바위 800m). 여기서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십자가로 나선다. 기린봉, 군경묘지, 약수터, 중바위로 가는 길이 교차한다. 중바위까지는 계속 등성이를 타면 된다.
우리는 약수터로 돌았다. 아중리 저수지로 터진 골짜기에 있는 이 약수터는 물이 좋은 것으로 이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떠다 마신다 한다. 시원한 물맛과 약수터로 돌아가는 넓은 길이 이 약수터의 소문을 말해주고 있다.
약수터에서 중바위산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손질이 안 되어 어설프다. 이 길은 철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등성이 길과 만난다. 이 봉우리에 돌로 쌓고 동고산성터가 분명하게 보이고 크나큰 송전탑도 서있다.
여기부터 길은 평지처럼 편안하게 이어지다 슬그머니 서쪽 방향으로 틀며 천천히 잘록이로 내려선다. 이 잘록이 오른편에 견훤의 궁터가 있다. 넓고 네모진 궁터에는 낮은 철책이 둘러쳐져 있다. 궁터를 둘러보고 다시 잘록이로 돌아와 등성이를 조금 올라서면 넓은 평지 오른편에 앞서 말한 기묘한 꼬부랑 소나무숲이 있다.
소나무숲을 지나면 바로 중바위산 고스락이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고스락서부터 멋있는 바위등성이가 시작된다. 200m즘 되는 이 바위등성이는 까다롭고 위험하기도 해서 통과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수평으로 길게 이어지던 등성이가 아래로 기울어지며 바이가 끝나는 곳에 큰 돌십자가와 천주교 성지 안내판이 서있다. 돌십자가 위에 높이 선 천연바위가 성모 마리아상 같아 명물이다.
순교자 무덤은 이 돌십자가 남쪽 바로 아래에 있지만,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교자 무덤에서 내려서면 넓은 시멘트 마당이 있다. 치명자산 천주교 교회의 슬라브 지붕이다.
교회에서 14곳 십자가를 거쳐 내려오면 전주천 냇가의 길에 내려서고 내를 따라 4~5분 걸어 나서면 한벽당이다. 한벽당에서 맑은 냇물과 어우러진 중바위산과 고덕산 남고산성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 옛 어른들의 풍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산행 길잡이
많은 산길이 있으나 외지에서 갈 때는 기린봉과 중바위산을 잇는 산길이 가장 좋다. 마당재(문화로) 선린사 들머리~등성이~육각정~선린사~기린봉~잘록이~돌 십자가~순교자 묘지~치명자산교회~십자가길~냇가~한벽당(또는 그 역순) 코스는 느긋하게 2시간30분 잡으면 된다.
대중교통편으로 마당재를 찾아가기에는 좀 어렵다. 전주시청 경유 시내버스를 이용해 전주시청 근처에서 내리 택시로 기본료만 내면 마당재를 찾아갈 수 있다.
중바위산(치명자산)은 전주역 또는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리, 남관, 또는 관촌행 버스를 타고 가자 좁은목에서 내려 승암교를 건너면 바로 중바위산 아래 들머리다.
관광버스 또는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 또는 전주역에서 동부 외곽도로(남원 방면 17번 국도로 연결)에 들어서 효성로(전주 나들목~전주역)나 아중로(전주역~좁은목)를 타고 가다 아중역 앞에서 서쪽으로 넓게 뚫린 문화로에 들어서면 바로 마당재 절개지에 이른다.
*명소, 유적
천주교 성지 치명자산 천주교 신자들은 중바위산이라 하지 않고 '치명자산' 이라 한다. 천주교에서는 '천주와 그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이른바 '순교'를 '치명' 이라 한다. 이 '치명'을 목숨이 끊어진다는 뜻으로 쓰면 좀 애매하다.
중바위산의 멋있고 아름다운 바위등성이 바로 아래에 순교자 일곱 분의 합장 무덤이 있다. 이 때문에 '치명자산' 이라 부르는 천주교 성지가 되어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순교자 무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일가족 7명을 합장한 것으로, 가장인 유항검은 만석지기 갑부였다 한다. 호남의 4개도에서 활약하다 신유박해 때 부인 신희, 장남 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문철, 제수 이육희, 조카 중성 등 일가족 7명이 모두 처형당했다.
특히 아들 유중철(요한)과 그의 부인 이순이(루갈다)는 세계에서 오직 한 쌍이 순교한 동정부부라 한다. 이 부부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결혼 때 동정서약을 하고 4년동안 본능을 물리치고 남매처럼 살다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치명 당시 그들의 나이는 22살과 19살이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순이가 그녀의 친정어머니에게 보낸 옥중 서신에 의해 밝혀졌다 한다.
남문 밖에서 처형당한 이들 가족을 지금의 자리에 합장했다. 무덤 위에는 돌로 된 큰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무덤 아래에는 치명자산 천주교회가 세워져 있다. 돌십자가 옆에는 천연의 큰 바위가 마치 동정녀 마리아상 같아 신기하다.
견훤 궁터와 동고산성 기린봉과 중바위산 사이에 동고산성이 있다(지방기념물 제44호). 상성 내성 외성등이 전주시가지 동쪽을 에워싼 모양이고, 둘레 1,558m의 산성 안에는 후백제왕 견훤의 45년 궁터가 있다. 1991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가 발굴한 이 궁터는 반월형 대지 위에 전면 84m 측면 14m의 규모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터라 한다.
이곳에서 '전주성' 이라 새겨진 통일신라 말의 양식인 연꽃무늬의 수막새와 쌍조무늬 쌍무사무늬 암막새가 나왔다 한다.
궁터는 석축산성이 보이는 봉우리에서 중바위산 상봉으로 건너가는 잘록이 오른편, 전주시가쪽으로 터진 골짜기 윗편에 자리잡고 있다.
한벽당 중바위산 자락 냇가(전주천)에 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15호로 남원 광한루, 무주 한풍루와 함께 전북의 삼한루의 하나다. 400여 년 전 월당 최담이 세운 것으로 기린봉과 남고산과 전주천의 조망이 아름다워 옛부터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산행 뒤에 잠시 머물며 쉬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그밖의 명소들 기린봉과 중바위산 가까이에 조선조 태종 10년(1410년)에 만든 경기전이 있다(사적 제339호).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전주이씨 시조 이한공의 위패와 조선조 예종의 태실비가 있으며, 전주사고가 있었다. 넓은 경내에 숲이 좋고 경관이 아름답다. TV드라마 '용의 눈물'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산 가까이에 이목대, 오목대, 전라감영, 전주객사, 풍남문(보물 제308호), 조경단(전주이씨 시조 이한공의 묘) 등이 많다. 산행을 마친 뒤 둘러보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물
전북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밝힌 김정길씨
신경표의 금남정맥 오류도 밝혀내
벽송(碧松) 김정길(金正吉). 그는 '큰 사람' 이다. 14년에 걸쳐 전북의 모든 산줄기와 물줄기를 하나 하나 그 현장을 다니며 보고 살펴서 그 흐름을 밝혔고, 냇물이 시작되는 샘(원천)을 알아냈다. 그리고 전북 안의 모든 문화유적을 찾고 챙겨서 그것을 650쪽이나 되는 <전북의 백대명산을 가다>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제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졌던 것을 바로잡기도 했다. 그는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낙남정맥과 전북에 흐르는 5대 강(만경강, 동진강, 금강, 섬진강, 인천강)을 샅샅이 훑으며 살폈다. 그래서 실질적인 금남정맥이 산경표와 좀 다른 것을 알아냈고, 5대강의 발원지도 새로 밝혀냈으며, 주줄산(운장산), 계봉산(안수산), 방등산(방장상) 등 산이름이 변한 것들도 많이 찾아냈다.
아울러 전북산사랑회 회원들과 함께 전북 안의 61개 산에 표지를 세웠고, 5대강의 발원지에 표지와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책에 각 지역의 유적, 명소, 문화재, 전설까지 실었고, 산마다 자세한 산길도 소개했다. 이 엄청난 일은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었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직장(전주상공회의소 기획관리부장)에 다니며 공휴일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산과 강줄기를 찾아 나섰고, 유적과 명소 문화재를 돌아보았으며, 고증을 하고 전설을 모으기 위해 구석진 곳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만도 엄청나다. 생기는 돈은 이 일에 쏟아부었고 틈만 있으면 자료들을 챙겼다.
그는 천명을 안다는 쉰의 나이에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그 흔한 차 한 대도 없다. 그래서 남들처럼 호사를 못해주고 넉넉하게 뒷바라지를 못 해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해하고 참고 이해해준 그들을 고마워 한다.
오래 전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부인의 권유로 산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이제 산에 가지 않고는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고 몸에서 활기가 일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모악산은 틈만 나면 오르고 어쩌다 한 주일을 빠지면 밤중에라도 다녀와야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전북의 산줄기와 강줄기를 모두 밝히는 큰 일을 하면서도 모악산에 오른 횟수가 1,050번을 넘겼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 일과를 끝내고 밤에 모악산을 오르는 때도 자주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는 산에 관한 일 외에도 '푸른 온고을 21' 운영위원, '전주사 관광발전' 실무위원 등 10여 개 일에 참여하고 있고, '전북 문화유산의 이해' 등 출판된 각종 도서에 글을 썼다. 그뿐 아니라 신문과 방송에서 산과 문화에 관련된 일만 있으면 그를 찾아 연재와 방송을 청하는 바람에 늘 바쁘다.
그를 두고 큰 사람이라 한 것은 이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가 해낸 일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릴 줄 아는 겸손과 많은 사람들을 품안에 끌어안는 너그러움, 그리고 모든 일에 성실과 열정을 잃지 않는 그의 인품과 인간적인 멋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 월간<산> 200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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