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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출가학교 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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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출가학교 6기 스크랩 체로키족의 눈물의 행호
견도(6기) 추천 0 조회 246 17.07.12 10:2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16.02.20 21:41

admin조회 수:20

 

The Trail of Tears

of the

Cherokee

 

체로키 인디언의 " 눈물의 행로 "

 

 

   미국 원주민 인디언의 한 부족인 체로키 족은 원래 미국
동남부 애팔래치아 산지에 살고 있었다. 1600년대부터
유럽 이민자들과 접촉하며 백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학교와 도로, 교회를 건설하는 등 매우 문명화된 부족이
었다.

1800년대 초에는 주로 동남부 지역인 조지아주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하지만 현재 체로키 부족은 미국 동남부
지역이 아닌 중부지역의 오클라호마주에 살고 있다.

어떻게 된 일 일까 ?

여기에는 이런 피눈물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바틀즈빌 우레락 박물관
(Woolaroc Museum Bartlesville, Oklahoma)

화랑에 전시된 대형 유화(油畵)
 


 

화가 로버트 린드노(Robert Lindneux)(1871~1970)
가 그린
 '눈물의 길'(1942년작)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전인 1838 ~ 1839년.

지금의 미국 동부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러
배마 주 일대에 살고 있던 체로키 인디언이, 백인 이주민국가
'미합중국'의 강제 이주령에 의해 고향에서 5천리(2000km)
떨어진 머나먼 오클라호마 주 허허벌판으로 쫓겨났다.

이들이 미국 기병대에 쫓겨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사연을
미국사 에서 '눈물의 길' 또는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눈물과 죽음의 길' 이었다.

위의 그림을 보면 마치 이들이 따뜻한 담요와 말, 마차를
갖고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걸친 옷 정도밖에는 거의
갖고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쫓겨난 것이다.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추운 한겨울에도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약 4,000명이 도중에 숨졌다.
이 피눈물과 죽음의 강제이주는 1839년 봄에 끝났다.

 

 

[체로키족의 눈물의 어메이징그레이스(Amazing Grace)]

체로키인디언족은 미국 원주민 부족 중 가장 큰 집단으로
북미 인디언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의 문자를 갖고 있으며 일
찌기 백인문화인 기독교도 받아들인다.

그들의 독특한 정서 - 즉 감사를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준다
든지, 또 필요한 것 외에는 대지에서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체로키족의 생활철학과 자연의 변화를 감지해서 씨 뿌리
는 때를 아는 지혜 같은 체로키족의 전통적인 가르침, 타인을
배려하는 삶. 그래서 그들은 일찌기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체로키인디언은 강제이주로 고향에서 5천리 너머
중부지방(오클라호마)으로 쫓겨났다.

이 때 이동하며 이들이 부른 노래가 어메이징그레이스였다.
이 전통적인 기독교 찬송가는 훨씬 이전에 선교사들의 도움
으로 이미 체로키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죽은 동료, 아이들을 땅에 묻으며 이 음악의 영감을 빌려
그들의 명복을 빌었고 살아남은 이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이 노래를 눈물로 불렀다.

이 노래를 체로키어로 번역해 이들에게 전해 준 인물은,
이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이주에 끝까지 반대해 법정투쟁까지
하며 이들을 도운 백인 선교사 새뮤얼 워시스터(Samuel
Austin Worcester)(1798~1859)였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노래를 거의 애국가처럼 부른
다고 한다.

 

Amazing Grace / Andre Rieu

 

Amazing Grace / Walela (Cherokee female trio)
 


팝가수 겸 작곡가로 유명한 리타쿨리지(Rita Coolidges)
(맨오른쪽)가 결성한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
'Walela'는 체로키어로 '벌새'의 뜻이라함

 

 Nu No Du Na Tlo Hi Lu 

" The Trail of Tears" '눈물의 길'을 체로키족은
자기들의 언어로 이 길을 "Nu No Du Na Tlo Hi Lu"

'우리가 울었던 길' (The Trail Where They Cried)
부르고 있다.

 


 

눈물의 길은 북쪽 루트, 물길(Water Route), 벨 루트, 벤지
루트등 여러 길이 있으며, 체로키 부족뿐만 아니라 4개 부족
들이 더 추방되었습니다.

 


 

 미기병대 호송임무 병사의 50년뒤 뉘우침의 수기 


오 ! 하나님 기독교도인 체로키 추장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한없이 울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체로키(Cherokee) 족이 조상 때
부터 살아오던 정든 땅 미국의 남부 지방에서(지금의 조지아
주 북부) 백인 들에게 추방당하여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속에
미지의 땅 서부로 가축처럼 끌려가는 과정을 그린 병사 존
버넷(John Burnett)의 수기(手記)이다.

존 버넷이 80세 되는 생일에 이웃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들려준 이야기이다.

체로키 족이 추방당할 때, 그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띤 병사
가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담을 수기로 써서 후세들에게 전해
준 살아 있는 역사이다.

   필자 존 버넷(John Burnett)은 체로키 족이 강제 이주당
할 때 제2연대 아브라함 중대 소속의 기마 병사였다.

 

 

제목은 『눈물 젖은 길(The Trail of Tears)』이다.
다음은 이야기를 간추려서 소개합니다.

"아이들아!
1890년 12월 11일은 나의 생일로, 오늘 나는 80세가 되었다.
나는 작은 사냥칼과 작은 낫을 허리에 차고 수주 동안을 자연
속에서 홀로 방랑한 적이 많았다.

   여행 중에 나는 많은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 사귀며 함께
사냥하고 밤에는 그들의 캠프, 모닥불 옆에서 노숙하기도 하
였다. 나는 그들의 말을 배웠고 또 그들은 동물 추적법, 사냥,
기구, 덫 놓은 기술등을 가르쳐 주었다.

   1829년 가을, 숲 속에서 사냥하고 있을 때 유랑중인 사냥꾼
들의 총에 맞은 체로키 족의 한 청년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는 과다한 출혈로 힘을 잃어 걸을 수도 없었으며 목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샘으로 업고 가서 상처를 씻겨
주고 총 맞은 상처를 싸매 주었다. 그리고 그를 체로키 사람들
이 사는 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과 여러 날을 보내며서 많은 인디언들을 알게 되었고,
또 그들 언어에도 유창하게 되어 1838년 5월 스모키 마운틴
군에 통역관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잔인한 명령을 강제
로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체로키 족들이 총검으로 위협당하며 들에서 일하던
남자들은 체포되어 뾰족한 말뚝을 나란히 세워서 만든 울타리
안에 감금되었다. 집에 있던 부인과 처녀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는 백인 병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따로 수감되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로 삼아야
했다. 나이 많은 쇠약한 노인들조차 예외는 아니어서 총검에
찔려가며 수용되었다.

   또 다른 집에선 과부로 보이는 어떤 가냘픈 엄마는 어이들을
무릎 앞에 모아 놓고 공손한 기도를 드린 후에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충성스럽던 강아지야,
잘 있어라." 이별하고 갓난아기는 등에 업고 두 어린애의 양손
을 붙잡은 채 집에서 쫓겨 나왔다.

 

 

   그리고 1838년 10월, 차가운 가랑비 내리는 새벽에 그들은
가축처럼 645대의 마차에 실려 서쪽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추장 존 로스(Principal Chief: Jhon Ross)가 기도하고
나팔소리가 울려퍼지자 마차들은 출발하였다.

   그 때 정든 고향산천과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안
아이들은 소리지르고 발을 구르며 작은 손을 흔들고 눈믈을
흘렸다. 그들의 대부분은 담요도 없는 상태에서 맨발로 강제
로 끌려나왔다.

 

 

   얼어붙은 차가운 빗물과 무섭게 눈보라 치는 11월 17일
아침부터, 목적지에 도착한 1839년 3월 26일까지 체로키
족의 고난은 실로 끔찍하고 지독하였다.

   그 추방의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그들은 밤에 마차에서,
혹은 맨땅 위에서 불도 없이 자야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22명이 치료도 받지 못하고 폐렴으로, 감기로, 혹은 담요도
없이 얼어죽는 것을 보았다.

[ 기도하며 종족을 이끈 존로스 추장부인 - 병든 소녀를
살리고 대신 죽다 ]

   그 중에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우아한 부인인 추장 존 로스의
아내도 있었다. 고상하고 인정 많은 여인은 병든 어린아이를
살리려고 한 장밖에 없었던 자신의 담요를 아이에게 덮어 주고
희생되었다. 그녀는 살갗을 에이는 겨울 밤에 얇은 옷을 입은
채 바람이 새어드는 마차에서 얼음 비와 눈보라를 맞으며 폐렴
으로 신음하다가 그레그스 중위의 안장용 담요를 베고 죽었다.

 

 

   나는 추장 로스에게 안타까운 조의를 표하고 마차 옆에 머물
러 있었다. 그녀는 관도 없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길가
에서 자그마한 무덤으로 남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마차행렬은 계속되었디.

   서부를 향해 계속되었던 그 길고 고통스럽던 여정은 스모키
산맥 언덕에서부터 오클라호마에 설치한 서부의 인디언 지역에
이르기까지 4,000개의 말없는 무덤을 남기고 1839년 3월 26
일에 끝났다.

[비정한 백인 - 제7대(1829-1837)
미합중국 민주당 앤드류잭슨 대통령]

   추장 쥬날루스카(Chief: Junaluska)는 앤드류 잭슨(And
-rew Jackson) 제7대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쥬날루스카는 호스 슈(Horse Shoe) 전투에서 잭슨을 살려
준 일이 있다. 그 전투에서 쥬날루스카는 잭슨을 죽이려고 달려
드는 북미의 강력한 크릭(Creek) 원주민 용사의 머리를 전부
(戰斧:전쟁할 때에 쓰던 도끼)로 찔러 죽였다.
(그때 잭슨은 원주민 토벌 작전하러 나왔단 사령관이었다.).

 

 

   추장 존 로스는 체로키 족의 보호와 서부 이동 중지를 청원
하기 위하여 쥬날루스카를 사절단 대표로 잭슨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이 건장한 산림의 사
나이에 대한 잭슨의 태도는 냉담했고 쌀쌀하였다.

   잭슨은 쥬날루스카의 호소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잭슨은
무뚝뚝하게 
"접견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체로키 족의 파멸은 결정되었던 것이며, 워싱턴 정부는 체
로키 족을 서부로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백인들에게 양도하
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1838년 5월 4,000명의 정규
군과 3,000명의 자원병은 윈휠드 스코트(Winfield Scott)
장군 지휘하에 체로키의 나라로 진군하여 미국 역사에서 가장
잔악한 페이지를 기록하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 범죄행위를 비난할 것이다.

   스코트장군에 의하여 강제로, 원주민 추장과 그의 어린
자식들을 추방한 나와 같은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
야만 했다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체로키 족이 서부로 강제 이주당한 때부터 25년 후, 많은
체로키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들에게서 1863년 그때의 추장 존 로스가 아직도 그 지
방의 통치자라는 소식도 들었다. 


   기를 꺾기 위하여 침략자들은 그를 체포하여 한동안 감방
에 가두기도 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그는 민족에게 진
실하였다.

   소녀를 구하고 자기를 희생한
 그의 크리스천 아내의 고상
한 행위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후에 앵글로색슨 족이
큰 기념탑을 세웠다. 


   1838년 여름 원주민 국토에서 강처럼 흘러내렸던 인디언
의 피에 대하여 누군가가 
설명하여야 한다. 누군가가 체로키
족이 추방되어 지나간 길을 표시하고 4,000개의
 말없는
무덤에 대하여 설명하여야 한다.

   훗날 미래의 역사가로 하여금 그들의 한숨, 그들의 눈물과
또 그들이 죽어가면서
 신음하고 울부짖던 슬픈 이야기를 말
하게 하여라. 또  우리가 한 일에 따라 보상케 
하여라.

   아이들아! 내가 약속한 나의 생일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오늘 1890년 12월 11일. John Bernett

 이야기 전문보기

위 전문보기를 클릭하시면 이야기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Cherokee Morning Song / Walela

 

 

   이 이야기는 여러 부족이 여러 번에 걸쳐서 추방되었을 때
에도 끝까지 추방을 거부하던 체로키 족이 백인 정부군의 총
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강제 이주당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
하고 있다.

   지금 오클라호마주 일대에 살고 있는 4만여 명의 체로키
족들은 그때 5,000리길을 끌려가서 그곳에서 살아남은 그
들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지금 체로키 지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인디언 이주령' 에 응하지 않고 산 속이나 동굴등
에 숨어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체로키 족의 후예들이다.

 

 

   우리에게 지리산둘레길, 제주올레길이 있는 것처럼 미국
에는 체로키족 희생자 위령비를 만나는 눈물의길이 있다.
눈물의길은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이야기 중 하나로 생각
되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의회는 1987년에 "눈물
의 길 국립 역사의 길"을 지정했다. 이 도로는 9개의 주에
걸쳐 있으며, 길이 3,540km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2004년 미국 상원의원인 공화당의
샘 브라운 백이, 과거의 "인디언 부족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
못된 정책"에 대해 "미국을 위해 원주민에게 사죄한다"라는
공동 결의안을 제안하고 그로부터 5년이나 끌어오다가 지난
2009년 말에서야 상하원에서 이를 통과시켰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에 이 결의안에 서명해서 170년만에
원혼들을 위로한다.

 

< 1840년대 체로키족의교회 >

 

< 눈물의길에 세워진 체로키족위령비 >

 

 체로키족 (Cherokee 族) 

 

 

   테네시 동부지역과 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서 살았다.
원래 오대호 주변에 살았으나 1650년에는 약 2만 2,500
명의 인구가 애팔래치아 산맥의 10만㎢에 이르는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

   여러 차례의 전쟁과 조약들, 미국 독립전쟁 때 잇달아 일
어난 전투와 협정들로 인해 조지아 주, 테네시 주 동부, 캐
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던 체로키족의 세력과 소유지가 상당
히 줄어들고, 이들의 영토에 백인들이 마음대로 투기를 하거
나  정착 할 수 있게 되었다.

   1800년 이후 체로키족은 백인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어
갔다. 미국 정부를 모방한 정부를 세웠고, 백인의 농사짓는
법, 직조 기술, 집 짓는 법도 받아들였다. 백인 문화에 동화
되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크리크 전쟁 당시
미군에서 복무한 체로키족 혼혈인 Sequoyah (시쿼이아)
가 1821년에 개발한 체로키어 음절표기법이다.

   그가 개발한 음절표기법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거의 모든
부족이 짧은 기간 안에 글을 익히게 되었다.

 

 

   참고로 Sequoia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와 오레곤주
등에 자라는 큰 상록수 이름이기도 한데 이 나무 이름은 바로
체로키 문자를 만든 Sequoyah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나 무크기가 워낙 크다보니 나무밑둥을 파서 승용차가 다니
는 곳도 있다는데, 사진하단에 사람을 보니 상상이 가네요.

 

 

   또 성서 번역을 비롯해 종교문학이 발달했으며, 1828년
2월 최초의 인디언 신문 〈체로키 피닉스 Cherokee
Phoenix〉가 발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지아 주의 체로키족 영토에서 금이 발견되자 인디
언들을 이주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1835년 12월 극소수
의 체로키족이 서명한 뉴이코타 조약에 따라 미국 정부에게
양도하게 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체로키족은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대법원은 체로키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으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판결의 집행을 거부했다.

   마침내 1830년 인디언 이주법에 따라 체로키족은 영토에
서 쫓겨나면서 약 1,000명씩 무리지어 걸어서 서부로 눈물과
죽음의 이주를 해야 했다.

   그후 75년 동안 각 종족은 땅을 분배받아 살면서 미국 주정
부를 모방한 준자치정부를 세웠다.

   1906년 여러 종족의 정부들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제한
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일부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이
라는 부족 소유지에서 산다.

   현재 오클라호마 동부지역에 사는 체로키족의 후손은 약
4만7,000명이며, 그중 순수 혈통은 약 1만 5,000명이다.

   1838년 이주 시기에 산악지대로 도망갔던 수백 명의
체로키족은 20세기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지역에 살고
있는 3,000명의 체로키족의 핵심이 되었다.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들, 수천년 동안 광활한 대륙을 누비
며 나름대로 문화를 발전시켜왔는데 지금은 보호구역에서 살
고있다.

   
이들의 아픔을 나타낸 노래가 바로 1971년에 크게 히트
했던 ‘Indian Reservation’(인디언 레저베이션) 이다.


   Indian Reservation (인디언 보호구역)은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의 거주지로 정해놓은 땅을 의미한다.


   미국에는 약 5백50여개 인디언 부족이 있는 걸로 알려졌
는데 하지만 미국내 인디언 보호구역은 3백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보호구역 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특히 
체로키 부족의
경우는 Cherokee Nation (체로키 네이션)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사법, 행정, 입법제도를 갖춘 자치 민주정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보호구역과는 조금 다르다.

   이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을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 보호구역에서 나가면 보조금이 끊긴다.

   한국에서도 이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풀 리비어를
리더로 결성된 미국의 5인조 록 그룹 폴 리비어 앤 더 레이
더스 (PaulRevere & The Raiders)가 1970년 싱글로
발표하였다.

   이 곡은 1959년에 컨트리 가수인 '마빈 레인워터(Marvin
Rainwater)'가 
'The Pale Faced Indian' 이라는 제목
으로 발표했던 곡을 커버한 것으로 레이더스 최대의 히트 곡
으로 남게 된다.

   'Indian Reservation'은 1971년 7월 24일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
를 기록하였다.

 


 

레이더스가 부른 "Indian Reservation"

 

They took the whole Cheroke nation
put us on this reservation
Took away our ways of life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

체로키 인디안 땅을 빼앗고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지
자랑스러운 우리 고유의 생활방식
도끼와 활, 그리고 칼마저 빼앗아 버린 뒤

※ Tomahawk(토마호크)는 북미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손도끼를 말하는데. 미군의 토마호크
미사일 이름으로 사용하고있다.

Took away our native tongue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

우리의 언어마저 없애고
우리 자녀에게 자기네 영어를 가르쳤다네
그리고 우리가 조상대대로 손으로 만든 구슬 목걸이
이젠 모두 일본에서 들여온다네

Cherokee people, Cheroke tribe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체로키 사람들이여, 체로키 부족이여~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
Though I wear a shirt and tie
I'm still part 
Redman deep inside

체로키 인디안 땅을 빼앗고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만
내 몸속에는 조상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네

※ Redman : 

   피부가 붉은 사람이란 이 말은 미국 원주민 인디언
들을 가리킨다. 인디언들의 피부가 원래 붉은 색은
아니고. 옛날 캐나다 지역에 살고있던 Beotuk (베이
어턱) 부족 인디언들이 옷과 피부에 붉은 물감을 칠
하고 다닌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다른 인디언 부족들 중에도 붉은 칠을 한 부족이 있
었는데 이들은 보통 벌레를 쫓기위한 일종의 방충제로
오커 (ochre) 안료를 몸에 발랐다고 한다.

   하지만 베이어턱 부족은 붉은 색을 신성하게 생각
해서 1년 내내 붉은 칠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다른
부족들에게 red people (레드맨, 붉은 사람들) 이라
고 알려졌다.

   유럽인들은 이들을 Red Indians(레드 인디안스)
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원래 베이어턱 부족을 가리키
는 말이 인디언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redman, red people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멸과 멸시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Native Americans, American Indians, 또는
First Nations라고 불리우길 바라고 있다. 


   워싱톤 지역 미식축구팀 이름이 바로Washington Redskins인데. Redskins 즉 인디언은 용맹함을 뜻
하긴 하지만, 인디언들을 비하하는 말이기 때문에 구단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But maybe someday when they learn
Cherokee nation will return,
will return, will return,
will return, will return

체로키 사람들이여, 체로키 부족이여~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언젠가 깨달음을 얻는 날
체로키 세상은 다시 돌아온다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온다네

 

 

 
   

 

 

 

 

 

 

 

 

 

 

 

 

 

 

 

 

 

 

 
다음검색
댓글
  • 17.07.12 19:08

    첫댓글 서정적인 노래다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는 줄이야,,,,,
    그들을 위하여 눈물 한방울 흘렸습니다.

  • 작성자 17.07.13 18:09

    안녕하십니까^^
    예..전생이 아마도 인디언 이었을거라며ㅎ
    오랫동안 인디언들의 생활과 생각과 기록되지 않은 그들의 역사에 심취 했더랬습니다
    사진도, 일기도, 어떤 메모도 남기지 않으며 사는데...
    카페에 나날이 견도라는 명칭으로 흔적이 쌓여갑니다ㅎ
    견도는 진정한 '나'가 아님을 억지 부려보네요ㅎㅎ
    무더운 여름날...평안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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