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소식] 퍼거슨 '매니저'와 안첼로티 '코치'의 차이

[Aron 램시123]

같지만 다른 감독의 의미 – 퍼거슨 '감독'과 안첼로티 '감독'

왜 EPL 감독들은 대륙 클럽 감독들보다 한 팀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일까.
왜 EPL 감독들은 대륙 클럽 감독들보다 이적 뉴스에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일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감독들의 평균 재임 기간이 비교적 긴 편이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오래 한 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23년째(1986년 부임), 아스널의 아슨 벵거 감독은 13년째(1996년 부임) 각 팀의 수장을 맡고 있다. 에버턴의 모예스 감독(2002년 부임)이나 리버풀의 베니테스 감독(2004년 부임)도 각각 7년과 5년 동안 팀을 이끄는 중이다.

반면, (유럽)대륙의 감독들은 한 팀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스페인 라 리가의 최장수(最長壽) 감독은 비야레알의 페예그리니(2004년 부임)로 이제 5년을 넘겼고,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는 AC밀란의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2001년 부임)이 8년간 팀을 이끌며 현역 최장 재임 기간을 기록 중이다. 비교적 재임 기간이 긴 독일 분데스리가의 경우 역시 10년째 팀을 이끄는 브레멘의 토마스 샤프(1999년 부임)를 제외하면 5년 이상 팀을 이끄는 감독은 드물다.

영국 섬 강타하는 '풋볼 디렉터' 바람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클럽 지휘 구조의 차이가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영국과 대륙 리그에서 발견되는 각자의 전통적 지휘 시스템의 차이는 감독들의 수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풋볼 디렉터'는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다.

최근 들어 영국 축구 관련 뉴스에서 출현 빈도가 높아지는 '풋볼 디렉터'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디렉터 오브 풋볼(Director of Football)', '스포팅 디렉터(Sporting Director)', '테크니컬 디렉터(Technical Director)', '익제큐티브 디렉터(Executive Director)' 등은 '풋볼 디렉터'와 대동소이한 역할을 각 팀에서 수행한다. 이 글에서는 이 모두를 '풋볼 디렉터'로 통칭한다.

국내 프로 스포츠에서는 그 역할을 담당하는 직위가 명확하지 않지만, 굳이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사무총장, 단장, 감독의 역할을 일부 뒤섞어 놓은 직함이다. 미국 스포츠에서는 General Manager라 부르는 직위와 흡사하다.

감독 재임 기간을 거론하다 난데없이 '풋볼 디렉터'를 꺼내든 이유는 이것이 영국과 대륙 클럽의 시스템 차이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쪽 리그 클럽 감독들의 재임 기간에 격차가 벌어지는 결정적 단서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 없이 짧아지고 있는 감독 교체 주기 역시 '풋볼 디렉터'의 등장과 맞물린다. 이를테면, 뉴캐슬이나 웨스트햄, 첼시, 토트넘 같은 구단은 풋볼 디렉터의 권한이 늘어나면서 감독들이 팀을 떠나기 시작한 대표적 케이스다.

[WORLD SOCCER] 2008/12 참조

퍼거슨은 '매니저(Manager)', 과르디올라는 '코치(Coach)'인 까닭

전통적으로 영국 축구에서는 감독이 팀 내 거의 모든 업무에 전권을 쥐고 있다. 경기 전술을 짜고 선수들의 기용을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계약과 유스 선수들의 발탁, 훈련 등에 관여하는 것도 전적으로 감독에게 주어진 권한이자 의무였다. 반면, 유럽에서 감독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감독은 구단(이사진 혹은 풋볼 디렉터)이 골라준 선수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훈련과 전술을 제시할 지에 초점을 맞춘다.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는 직책인 셈이다.

영국에서 감독을 'Manager'로, 대륙에서는 'Coach'로 각각 (영문) 표기하는 것은 두 진영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전통적 역할의 차이를 대변한다. 즉, 한국에서 똑같이 '감독'으로 번역하는 Manager와 Coach 사이에는 오역(혹은 오해)이 존재하는 셈이다. '감독'이지만 실제 역할에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유럽 각국 미디어들이 축구 뉴스를 다룰 때 등장하는 클럽 관계자들의 면면에서도 확인된다. 영국에서는 감독들이 뉴스의 주요 소스이며 구단주나 단장이 화제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구단주나 단장의 이름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감독이 전권을 쥔 전통적 잉글랜드 시스템에서는 감독이 뉴스의 중심에 서지만, 대륙 시스템에서는 임원진이 갖가지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예를 들어, 최근 핫이슈인 아르샤빈(제니트)의 아스널 이적 관련 기사에서도 보도에 등장하는 양측 구단 관계자의 직함은 뚜렷이 구분된다. 아스널 측에서는 아슨 벵거 '감독'이 이적 건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지만, 제니트 측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은 주변인으로 이름을 올릴 뿐이다. 대륙 팀들은 스카우팅 업무를 감독에게 주지 않고 '풋볼 디렉터'에게 건네는 식으로 1) 감독을 견제하거나 2) 이사진의 의견을 집중 반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레알 마드리드나 AC밀란, 인터밀란이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륙 명문 클럽들의 임원진 이름이 국내 축구팬들에게 좀 더 친숙한 것도 그래서다.

[WORLD SOCCER] 2008/12 참조

유럽 축구의 숨은 실력자 '풋볼 디렉터' – 이사회의 앞잡이 혹은 감독의 협력자

그렇다면 '풋볼 디렉터'의 구체적 역할은 무엇일까. 원칙적으로 이들은 감독이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전념해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스카우팅과 유스 아카데미 업무를 집중 관리한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선수와 지도자 경험이 있는 경기인 출신 인사들이 이 직위에 임명된다. 클럽을 운영하다보면 구단(프런트)와 감독(선수단)의 이해 관계가 – 예산 운용이나 선수 영입/방출 등 - 엇갈려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풋볼 디렉터는 그 중간 지점에서 조율자의 역할도 수행한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구단의 재정적/정신적 밸런스를 유지하는 직책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감독 권위의 약화를 야기한다. 특히, 이 제도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잉글랜드 리그에서 '전통적' 시스템에 익숙한 감독들은 풋볼 디렉터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한다. 더군다나 풋볼 디렉터는 '중립'적 판단을 내리기 힘든 자리다. 구단에 의해 고용된 인사로서 감독보다 이사진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으니 웬만큼 냉철하지 않고서야 감독의 환대를 받기 힘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EPL에서 벌어지는 감독-구단 갈등 구도의 중심에서 풋볼 디렉터들은 대체적으로 감독들의 뜻을 잘 반영하지 않았다. 감독들의 불만은 늘어갔지만, 구단(과 풋볼 디렉터)는 감독들이 권위와 '감'에 의존한 선수단 운용을 하려 한다며, 또는 자금의 과다 집행 가능성이 우려된다며 자신들의 뜻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감독들은 풋볼 디렉터의 존재 자체가 '감독의 권위를 해친다'고 받아들이고는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감독이 원하는 선수를 내보내고 원치 않는 선수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마찰이 계속된 탓이다. 올 시즌 초 팀을 떠난 웨스트 햄의 커비실리 감독(vs 나니 디렉터), 뉴캐슬의 케빈 키건 감독(vs 데니스 와이즈 디렉터)를 비롯해 멀리는 셰브첸코 영입 과정에서 촉발된 갈등으로 결국 팀을 떠나게 된 무리뉴 감독(vs 프랑크 아르네센/아브람 그랜트 디렉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영입 선수 선택에 ‘감독’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전통적 영국 축구 클럽과 달리 대륙 축구 클럽의 선수 영입은 이사회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 축구 개혁의 중심에 선 '풋볼 디렉터'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클럽들의 '풋볼 디렉터' 제도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구단주를 비롯한 임원진의 영향력을 증대한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지만 재정 규모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보다 전문적인 예산 집행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현실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2004년 레스터 시티 풋볼 디렉터였던 데이브 바셋(현 리즈 유나이티드 수석코치)의 증언은 구단들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만일 내가 6~7년전 리즈 유나이티드 풋볼 디렉터였다면 당시 프리미어리그 강호였던 리즈가 이 지경까지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리즈는 분수에 넘치는 고액을 들여 우수 선수를 영입하고 봉급도 매우 높게 책정했는데 머지 않아 파산하고 말았다. 결국 추락을 거듭하기 시작한 리즈는 현재 3부 리그(리그1)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며 악전고투하고 있다. 금전에 대한 감각 없이 좋은 선수 영입에 골몰했던 감독과 계획성 없는 임원진의 무한 질주를 중간에서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는 게 리즈 파산에 대한 바셋의 진단인 셈이다. 풋볼 디렉터의 역할을 강변한 것이다.

그러나 현역 감독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하다. 풋볼 디렉터들에게 부여되는 스카우팅과 유스 아카데미 책임자 권한은 잉글랜드 감독들이 매우 아끼는 분야이자 감독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감독이라면 남이 골라준 선수를 조련해 성적을 내는 '코치'로서의 역할 못지 않게 스스로 팀을 완성하고 성공의 쾌감도 만끽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에서 감독직의 보람을 느낀다. 대륙 빅 클럽 감독들이 수 십년간 풋볼 디렉터를 필수 직책으로 여겨온 반면, 영국 섬 감독들은 여전히 전통적 '감독 1인 체제'에 천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팀을 인수한 거부 구단주들은 풋볼 디렉터를 기용해 팀에 더 적극적인 관여를 하길 원한다. 이 과정에서 프리미어리그는 현재 '풋볼 디렉터' 증후군을 겪고 있는 중이다.

'풋볼 디렉터', EPL에 정착할 것인가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데이빗 플릿, 프랑크 아르네센, 다미아노 코몰리 등의 우수한 디렉터들을 줄줄이 영입하고서도 이적 시장의 실패와 성적 부진을 반복하는 토트넘 핫스퍼는 최근 해리 래드냅 감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풋볼 디렉터 직책을 잠정 폐지했다. 대표적인 '전통적' 잉글랜드 감독인 해리 래드냅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처이자 풋볼 디렉터 도입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이처럼 여전히 '매니저' 감독 체제가 힘을 발휘하며 우승컵을 휩쓰는 프리미어리그 특유의 제도적 특성은 '풋볼 디렉터' 제도 정착을 노리는 세력의 확장으로 일대 변혁기를 맞고 있다. 본격적 변화의 시발점은 '전통 시대'의 대표격인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과 아슨 벵거 아스널 감독의 퇴진 무렵이 될 것이다. 팀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두 감독이 현재 위치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 프리미어리그 각 팀간의 권력 구도 역시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물론, '풋볼 디렉터'의 안착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점점 더 큰 주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PS 1) 헐 시티의 머피
잉글랜드에 '풋볼 디렉터' 성공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올 시즌 돌풍의 핵으로 꼽히는 헐 시티의 경우, 4부 리그(당시 디비전3)에 머물던 2002년 영입한 콜린 머피 덕택에 더 빨리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다. 헐 시티 입단 이후 수석 코치, 풋볼 디렉터(Director of Development) 등의 직함을 번갈아 달았던 머피는 팀이 값싸고 유능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올 시즌 이적 시장마다 머피의 활약은 돋보였다. 지난 여름 제오반니(당시 맨시티), 조지 보아텡(당시 보로), 앤서니 가드너(당시 스퍼스) 등의 알짜 영입을 성공시켰던 그는 1월 이적 시장이 열리자마자 발빠르게 선수 보강 및 재편 작업을 진행해 다른 팀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달 들어 그가 영입한 선수들은 지미 불라드(풀럼), 케빈 킬반(위건), 마누초(맨유/임대) 등인데 매우 효과적인 보강이라는 평을 받고 있어 후반기가 더욱 기대된다.

PS 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나니
최근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는 웨스트햄의 질주를 풋볼 디렉터의 성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웨스트햄 풋볼 디렉터 지안루카 나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전문’ 풋볼 디렉터다. 감독은 물론 선수 경험조차 전혀 없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법학도였던 1990년대 축구계에 뛰어든 나니는 90년대말 이탈리아 브레시아 풋볼 디렉터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브레시아 시절, 안드레아 피를로(현 AC밀란), 루카 토니(현 바이에른 뮌헨) 발굴에 기여하고 로베르토 바죠의 브레시아 입단을 성사시킨 주인공인 나니는 4개 국어(영,불,서,이)에 능통한 외국어 실력과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선수 영입과 유망주 육성에 탁월한 장기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나니가 입단과 함께 글로벌 스카우팅과 이적 결정 권한을 차지하게 되자 당시 감독이던 커비실리는 이 인사에 반발해 불만을 품었고, 나니가 안톤 퍼디낸드와 매카트니를 선덜랜드로 이적시키자 곧장 사의를 표한 바 있다. 현재 나니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풋볼 디렉터' 시스템에 낯설지 않은 지안프랑코 졸라 감독과 긍정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