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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7월15일 토요일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수도회] 고독의 계곡에서 용기있게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49,29-31.33; 50,15-26ㄱ
† 복음 마태 10,24-33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오해도
많이 받으셨지요. 질시와 모략 역시 많이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빛은 반드시 어두움을 걷어 낼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금은 핍박을
받기 때문에 남몰래 기쁜 소식을 전하곤 하지만, 곧 주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할 때가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교회는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교회는 강해졌고, 복음은 더 널리 전파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복음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를 늘
지켜보시는 하느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끝없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처럼 참새 한
마리까지도 잊지 않으시는데,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신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세상에 몸담고 있기에 겪어야 하는 오해와 불신도 많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내가 한 것처럼 떠다니기도 합니다. 나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한 말이 왜곡되어 퍼져 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 밝혀지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이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2017년 가해 7월15일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그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9,29-31.33; 50,15-26ㄱ
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4-33
강화에는 일몰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 있습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많은 사진작가들이 멋진 일몰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 이곳을
찾습니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래서 이곳을 사진 찍기 좋은 일몰 여행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서 본 일몰이 참으로 멋졌었기
때문에, 종종 강화를 찾아오시는 분에게 안내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작년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과 함께 이곳을 찾아갔습니다.
일몰이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는 해가 떨어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서 있었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던지요.
차가운 겨울바람은 저희를 오들오들 떨게 만들었지요. 함께 갔던
분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몰을 꼭 여기서 봐야 해요? 저 위의 카페에서 바라보는 일몰도
멋질 것 같은데요?”
고생하면서 보는 일몰이 더 멋지지 않겠냐면서 끝까지 이 자리를
지켰지만, 생각해보니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바라보는
일몰도 정말로 멋지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바라보았던 일몰이 영원히 잊지 못할 진한 감동을 주었을까요?
사실 그날 찬바람을 많이 맞아서인지 저와 함께 갔던 분은 감기로
며칠을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때 보았던 일몰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일몰이라는 아름다움은 사실 그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에 일몰의 아름다움을 전혀
떠올리지도 않고 기대도 하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아름다움을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신앙인들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당 안에서만 신앙인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성당 밖에서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별 차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지 않나요? 성당 안에서만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 밖 역시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거룩한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정관념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을 행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일과 시간을 보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조금만 생각의 폭을 넓힌다면 분명히 전혀
다른 삶, 특히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 지금 해야 할 나의 모습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세상의 고정관념에 휩싸여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사막에선 밖에서 물을 구하면 안 된다. 낙타나 선인장처럼 자신의
몸속에 수분을 저장해야 한다. 그 외로운 작업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단절이 내면을 풍요롭게 한다(이어령).
시나이산에서 맞이한 일출입니다.
색깔을 세라(리웨이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7인을 만나라’ 중에서)
누구나 감정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화가
나도 꾹꾹 참으며 오랫동안 억누르다가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성격이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간에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미국 심리학자 레너스 펠더는 화가 날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특히 충동적인 사람들이 감정을 통제하는 데 도움
된다.
어떤 일 때문에 화가 치민다면 먼저 하던 일을 멈추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주변 경치나 사물을 둘러보며 속으로 색깔을 센다. 예를
들면 “연노란색 탁자, 녹색 서류함, 하얀 벽....” 이런 식으로 약
30초쯤 열두 가지 사물의 색깔을 세는 것이다. 화가 난 곳을 당장
떠날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색깔을 세어도
괜찮다.
화가 나면 갑상샘 호르몬이 분비되어 혈액 순환의 속도가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돼 생리적인 기능이 약해진다. 그때 색깔을 세면 시각
기능이 회복되어 일시적인 완충 작용이 일어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이성적 사고도 가능해진다. 열두 가지 정도의 사물 색깔을 센
뒤 냉정을 되찾으면 눈앞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또렷해질 것이다.
여러분은 화가 날 때에 어떻게 하십니까? 색깔을 세는 방법,
현명하게 화를 대처하는 방법인 것 같아서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고독의 계곡에서 용기있게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15일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10,24-33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마태 10,24)
고독의 계곡에서 용기있게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참으로 보기에 좋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셨을 뿐 아니라 늘 함께 하시며
사랑을 나누려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천부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지요. 그렇게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품고 사랑을 찾아
순례합니다. 정의이신 하느님을 품고, 진리와 공평과 평화를 위한
호흡을 이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 스스로를 ‘고독의 방’에 가두기도 합니다.
망각의 병에 걸려 하느님을 잊고, 그분의 사랑을 거슬러 정의롭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행동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며 교만을 떨기도 합니다. 재물과 권력의 힘이 영원할 것처럼
믿고 착각하며 인생 갑질을 해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을
소외시키고 추해지는 것이지요.
한편 내 안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친다 하여도 고독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랑 대신 무시와
천대를 만날 때 고독을 맛봅니다. 정의와 진리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열망하지만, 구조악과 완고한 편견과 선입견에 막힐 때 우리는
고독을 느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길 거부하는 ‘악의 장벽’을
만날 때 우리는 깊은 외로움에 젖어들지요.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독은 단순히 정서적인 고독이 아니라
성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타락, 비인간화, 내 영혼의 깊은 어둠의
표상이며, 하느님의 고독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만큼 우리는 고독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고독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실존적이며 영적인 도전이자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10,24-25) 이 말씀은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어낸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똑같이
걸으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저지르는 죄와 불의와 차별과 소외
때문에 주님을 고독하게 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길, 정의와 평화를 위한 고독한 여정에서
하느님의 고독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제자의 길이 행복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나의 고독 안에서 하느님의 고독을 발견할 수
있다면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고독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행복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을 맛본다 하여도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10,28.31) 누군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나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죽이려 할 때, 우리는 두려워하며
고독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주님의 영이 살아계시는 존엄한 성전이기에
고귀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맞더라고 그 고귀함은 사라지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나의 영혼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인간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애정 깊은
눈길로 바라보시며, “보니 참 좋구나!” 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소중한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소중히 여기시며 늘 함께 해주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고독의 어두운 계곡 저
밑바닥에서 고독을 사랑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꿔주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지붕 위에서" 용기 있게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선포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위로와 희망의 희소식 하나
2017년 가해 7월15일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마태 10,24-33)
위로와 희망의 희소식 하나
삼복더위가 한창인데, 더위와 맞서느라 다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우리나라 여름은 이제 전 세계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온다습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선교사 신부님 왈,
그쪽은 온도가 높아도 습도가 낮다보니 차라리 더 견딜 만하다고
하십니다.
무더위로 고통스러울 때 마다, 요즘 같은 날에도 고온의 작업장에서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일하시는 근로자들, 제대로 된 냉방설비도
없이 좁은 쪽방촌이나 고시원에서 고생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잘 견뎌내야겠습니다.
‘덥다, 덥다!’ 소리가 틈만 나면 입에서 튀어나오지만, 이왕 다가온
여름, 잘 넘기시길, 더 나아가서 즐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아니라면 저 많은 여름옷들 언제 입어보겠습니까? 여름 아니라면
시원한 계곡물놀이며 수박화채며 언제 즐겨보겠습니까? 큰
마음먹고 느긋하게 견뎌 내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랜
친구처럼 그렇게, 또 서늘한 가을이 찾아올 것입니다.
태양은 강렬한데다 덥고 습하다보니, 평소보다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지는 느낌입니다. 머리숱에서만큼은 수도원 남자들도 담 밖의
남자들 못지않게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 점점
빈약해지는 머리숱 때문에 고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탈모방지 비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빗 마사지, 어떤 사람은 특정 메이커의 샴푸, 어떤
사람은 검은콩검은깨...그런데 지금까지 시도해서 가장 효과를 본
것은 역시 병원에서의 약 처방이더군요. 서로의 이마와 정수리를
바라보며, 서로 위로도 해주고, 서로 조언도 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천만 ‘탈모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희소식 하나를 전해주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오복음 10장 30절)
감사하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탈모로 고생하는 우리들 머리카락
숫자까지 헤아리고 계신답니다. 물론 세월의 흐름과 노화현상에
따라 점점 머리카락 숫자는 줄어들겠지만, 완전히 다 가져가시지는
않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적어도 몇 올은 남겨두시겠다고
약속하시니 너무도 힘이 납니다.
하느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 너무나 엄청나고 대단하신 분, 우주
전체와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 나같이 미천한 존재에게는
신경 쓰실 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하느님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다니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나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크시고
위대한 분이시만, 한없이 작은 내 삶에 직접 개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일대 일로 얼굴을 대면하고 싶어 하십니다. 내
속사정을 다 꿰뚫고 계시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인생사에
깊숙이 개입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원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의 생각 속에
존재했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받는 자라고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헨리 나우웬 신부님)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2017년 가해 7월15일 토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 10,24-33
며칠 전입니다. 인터넷에서 ‘닭, 꿩, 독수리’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모두들 날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닭은 닭장이라는
울타리에서 지내게 됩니다. 울타리는 갇혀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울타리는 보호막이 되기도 합니다. 울타리에 있으면 사나운
동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먹이를 구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울타리에 계속 있다 보면 날지 못하게
됩니다. 굳이 날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꿩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살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울타리
안에 사는 닭보다는 훨씬 자유롭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의
그늘에서 독립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부모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아직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높이 날아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발톱과 날카로운 부리로 원하는 먹이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독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더 높이 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 생각합니다.
전방에서 근무를 하거나, 위험한 지역으로 파견을 가는 군인들은
진급을 할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집니다.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골에서 근무하거나, 섬에서
근무하는 교직자들에게는 큰 도시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마련입니다. 힘든 곳에서 어렵게 지낸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요셉’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고,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악으로 대했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풍요로운 이집트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가끔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 교회는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의 사제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고 한국으로 와서 사목을 하였습니다. 메리놀, 골롬반
수도회의 신부님들도 한국에 오셔서 사목을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사제들이 많아 졌기 때문에 지금은 더 어려운
곳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도 서울 교구라는 울타리에 머물기 보다는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만큼 우리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추기경님의 지향에 따라서 ‘해외 선교
사목국’이 신설되었고, 선교 사제들이 사목을 잘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신학생들이 해외 선교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날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교만함입니다. 사제들, 수도자들은 늘 기도 중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쉽게 상처를 받고, 마음을
상하기도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찬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꾸짖었습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사고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운전을 잘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운전 실력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과속을
하기도 하고, 신호를 어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늘
제자들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예전에 산행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그만 미끄러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나무뿌리를 잡았지만 어두워져서 발 아래가 보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를
살려 주겠다. 나무뿌리를 놓아라. 그 사람은 자신의 생명 줄과 같은
나무뿌리를 놓을 수 없었습니다. 밤새워 나무뿌리를 잡고 있었던
사람은 다음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m도 되지 않는 발
아래에 푹신한 풀밭이 있었습니다. 나무뿌리를 놓았다면 안전한
풀밭에서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두려움 때문에 욕망의
나무뿌리를, 욕심의 나무뿌리를, 이기심의 나무뿌리를 놓지 못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수고하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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