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한학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일찍이 고향 논산과 강경에서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육당 최남선의 문하생이 되었던 김관식은 1955년 시단에 나타났다가 동양적 사유의 시와 숱한 기행(奇行)을 남기고 10여 년 병고 끝에 그의 뜻을 더 넓게 펴보이지 못한 채 70년 불과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우리는 혈연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심각하게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시기는 이르러 온 것이다. 나는 봐레리나 릴케보다는 도연명과 두자미(杜子美) 또는 육방옹(陸放翁) 왕마힐(王摩詰)을 더 좋아한다. 오든이나 엘리옷, 스펜더, 프레이저의 경우도 또한 그렇다. 피카소나 마이오르의 화화와 조각에서 받는 소박한 인상에 비해 저 남화(南畵)의 평화로운 색조에서 오는 애정과 체온이 훨씬 더 절실하고 감명 깊은 까닭은 무엇인가.”
라고 하여 그 자신이 동양인임을 선언했다. 그것은 6ㆍ25 전란 이후 물밀 듯 밀려오는 서구적 풍조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자 동시에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보수주의적 성향의 발로이기도 했다.
『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녹차(鹿車)에 가구를 싣고
가랑잎 솔솔 내리는
이끼 낀 숲길
영각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나물
노어회(鱸漁膾)
강동(江東)으로 갈거나
구양수(歐陽修)
글을 읽는
이 가을 밤에.
- <이 가을에> 전문 -
어느 해 가을 반겨 맞아줄 고향도 집도 없다고 쓸쓸히 읊었던 시인의 고향은 충남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 505번지다. 그는 이곳에서 1934년 음력 3월 3일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삼짇날 사천 김씨 낙희를 아버지로 정성녀를 어머니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전 은행동에서 ‘생문방 한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그의 가형 김창규에 따르면 아버지 김낙희는 ‘논산과 강경에서 약방을 하시며 서원의 전교도 하고 향교에 나가서 제관도 한 분’이었다. 김관식의 유아 시절 본가가 강경으로 이사한 뒤로는 ‘싼 약값과 병이 잘 치유되어’ 일대에서는 유명한 한약방이 되었다. 그러므로 김관식은 어려서부터 경제적 궁핍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유복하게 자라난 셈이었다. 더욱이 만득자인데다가 일찍이 한문에 대한 비상한 재질을 보여 아버지는 그를 몹시 귀여워했다.
40년 7세 때 그는 강경의 중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강경의 좁은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년씩 괴나리봇짐을 지고 인근의 부여와 청양 등지를 쏘다니며 외부의 문물을 익히는 비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 괴이한 행적 때문에 고향 사람들은 ‘신동’이라 하기도 하고, ‘미친 아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같은 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송혁(宋赫)(시인. 동국대 교수)은 그때의 일화 하나를 이렇게 들려준다.
“8ㆍ15 광복 직후 학생들이 한글을 제대로 모를 때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관식은 그 해답을 모두 한문으로 썼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를 세워놓고 한글로 써야 한다고 타이르기는 했으나 그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학에서뿐만 아니라 한자 서예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미당 서정주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는 일본 서예전에서 입선하였다고 하며 그 부상으로 받았다는 추사글씨 두 폭 중 한 폭을 내게 주기도 했으며 가람의 사랑을 받아 강경상고 1학년 때인가 가람이 한글을 쓰고 그가 한자를 쓴 습자책을 만들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김관식은 암기력에 있어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른 학교에서 다녔던 송혁은 방학 때 금강 가에서 그를 만나고는 했는데 그때 십리 둑길을 다 걷도록 바이런, 하이네 등의 시와 서정주 등 한국 시인의 시들을 끊임없이 외었다고 전하면서 그가 외고 있던 시가 수백, 수천 편이 되지 않았을까 회상한다.
그는 학교 공부보다는 외지로 방랑하면서 한학의 대가난 이름난 시인들을 만나 그들의 학식과 사상과 시세계를 섭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6ㆍ25 전란 때(51년) 전주로 피난 가 전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웬 고등학교 학생 모자를 쓴 학생이 한발 높이가 되는 한서를 보자기에 싸들고 찾아왔다.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주자대전(朱子大典)이라고 하면서 최병심(崔秉心) 선생(성리학의 마지막 법통)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왔던 길에 들렀다는 것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하니까 죽죽 낭송을 하는 데 놀라웠다. 마침 방 하나가 비었으므로 우리집에 기거하라고 했더니 일주일 가량 묵고 갔다.”
그러나 그때 서정주도 천재소년에게 베푼 온정으로 말미암아 김관식과 동서간의 기연을 맺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김관식은 서정주의 집에 걸려 있는 한글 족자를 보고 그것이 누구 글씨냐 물어 서정주의 처제 글씨라는 대답을 듣고 그 처제와 결혼할 결심을 굳혔다.
그는 서정주의 처제 방옥례가 있는 정읍의 주소를 알아내 그곳을 찾아가서 구혼했다. 그러나 정읍에서 은행에 다니고 있던 방옥례는 나이가 4세나 위인데다가 그가 학생의 신분이었으므로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규수가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사실을 깨닫자 관식은 그 무렵 하숙을 하고 있던 집으로 읍내의 구두닦이들을 모두 불러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읍내 곳곳에 뿌리게 했다. 그 유인물의 내용은 관식과 그 규수가 이미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 규수는 너무 창피해서 다니던 은행도 그만두고 집안에 들어박혔다. 이웃 지방으로 도망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는 관식의 끈질김에 져서 그의 아내가 되고 말았다.”
- 신경림: <시인 김관식>([한국인](1982년 8월호) -
그것이 54년 1월 1일 김관식이 구애를 시작한지 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난 그의 나이 겨우 21세가 되던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당 최남선이 주례를 설 만큼 그의 애제자가 되어 있었고 오세창에게서는 만오(晩悟)라는, 조지훈에게서는 추수(秋水)라는 아호를 받고 있었으며, <낙화집>이라는 어엿한 시집도 갖고 있는 조숙할 대로 조숙한 청년이었다. 그는 결혼을 하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최남선의 소개로 그해 봄 경기도의 여주농고를 시발점으로 가을에 서울공고로, 다시 이듬해인 55년에는 서울상고에 몸을 담는 교사가 되었다. 그러는 한편 아버지가 사 준 세검정 골짜기의 2천4백 평 과수원을 경영했다.
그는 한 권의 시집을 낸 바 있으나 정식으로 시단에 나온 것은 그 해 [현대문학]지를 통해 서정주의 추천을 받게 되고부터였다.
나는 잠자리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하나의 잔잔한 그림으로 보여 준 <연(蓮)>과 <자하문 밖>과 같은 관념적 서정의 세계가 그의 초기의 시 경향이었다. 그리하여 57년 <김관식 시선>이 나올 때 임긍재(林肯載)는 그 시집 발문(跋文)에서 “즉 이 시인의 유리알처럼 가다듬어지고 보석처럼 박힌 낱낱의 시작들이 동양적인 사색니 빚은 극치의 주옥편이 아닌 것이 없고 흑단처럼 칠칠한 윤기와 아치(雅致)에 풍요한 품위가 어디 전쟁이라던가. 사회 의식에 침식되지 않은 신대륙을 발견한 듯 황홀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단의 천재는 그의 시 세계와는 딴판으로 이따금 벌이는 기이한 행적 때문에 그가 몸을 담고 있는 학교나 문단으로부터 눈총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는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지 않아 가정 방문을 갈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을 시켜 여유있는 집안의 학생집으로 그가 가정 방문을 가게끔 되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가정 방문을 하고는 대접하는 다과류보다는 술을 내오라 하여 학생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는가 하면, 시내에 나갔을 때 전차 대신 지게꾼을 불러 지게 위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었다. (제자 김문숙 회고담)
그가 후줄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새로 부임한 교장이 그를 급사로 오인했었다든지, 시험 때는 공부 잘하는 학생더러 못하는 학생에게 시험지를 보여 주라고 했다든지, 학생들을 시켜 개를 잡게 했다든지, 그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박종화(朴鍾和)까지 군(君)으로 불렀다든지, 출판 기념회 같은 모임에 술을 마시고 나타나 마이크를 빼앗고는,
“야, 돼지 같은 자식들아. 여기 저기 벌려 잘도 처먹었구나!”
라고 외쳤다든지 하는 일화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김관식은 59년에 자의 반 타의 반 학교를 사직하고 김광섭이 「세계일보」 사장 때 논설위원으로 근무한 적도 있으나 그것도 1년을 못 채우고 그만 두었다. 1960년 4ㆍ19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그는 그 무렵 최고의 인기 정치인이라 할 장면(張勉)과 겨루기 위해 제5대 민의원 입후보자로 용산 갑구에서 출마했다. 결국 27세의 오기는 오기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득표 결과는 최하위를 면한 5위에 그치고 말았으니까.
“출마하기 위해 그분은 유산으로 받은 강경의 논 5마지기와 집을 처분했었지요. 우린 그 이듬해 과수원을 팔고 홍은동산 1번지로 이사를 했어요. 그분은 그 국유지에다 과수원을 팔고 남은 돈으로 나무를 잔뜩 심었어요. 하지만 과음은 벌써 몸을 해치고 있었어요.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 보니 위도 나쁘고 폐결핵도 와 있었고요. 아는 것은 많았지만, 학력이 없으니 어디 발붙일 곳이 있었어야지요.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만 마셔대는 거예요. 악순환이었어요.”
미망인 방옥례는 먼 세월을 돌이키며 한숨 짓는다. 그러나 결혼초부터 방옥례는 남편만 믿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라벌예대를 거쳐 국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이제는 아들딸을 어엿한 사회인으로 키워내고 그 자신도 올해 [신동아]지에 ‘논 픽션’ 현상 모집에 당선되어 뒤늦게 소설로나마 남편의 문학에의 뜻을 이어보고자 한다고 술회한다.
김관식은 병 중에서도 홍은동에서 인근의 거친 일꾼들을 이끌고 무허가 블로크 집을 지어 파는 일종의 부동산업을 하기도 했었다. 문학적 작업을 제외한 그의 일생은 거의 기행으로 일관한 것 같다. 그는 조선 시대의 기인(奇人) 김시습을 연상시킨다. 그의 기행은 세속적인 인간들에 향한 신랄한 해학인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산중 재상(山中宰相)>을 읽으면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었던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60년대초부터 시를 발표하지 않았던 김관식은 육당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본채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언덕에 서재 ‘육모정(六慕亭)’을 짓고 그곳에서 66년께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고 68년에는 사서삼경 가운데 가장 어렵다는 <서경>을 번역하는 정열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한시의 영향을 받아 유장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신념이 없었던 듯이 보이며 그의 참여시라고 하는 것도 복고주의풍의 시였다.”라고 등단 초기부터 그와 가까이 사귀었던 신경림은 그의 시를 평한다. 또 69년부터 그의 집에서 자취를 했고 결혼한 뒤에도 그곳에서 살았던 조태일은 그의 성격을 “몸이 쇠잔했던 탓이지 밖에서 들은 것과는 다르게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점잖고 차분했었다”고 들려준다.
그는 그 무렵 술이 자신을 죽인다고 하여 술주전자를 발로 우그러뜨려 육모정 천장에 매달아 놓고 술을 끊겠다고 선언했으나 음주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육모정 옆 바위에 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다.
1970년 6월 요양차 대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던 가형의 집에 머물렀다가 2개월만에 홍은동으로 돌아온 지 이틀 후인 8월 30일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가 삶은 달걀을 먹으라고 내놓았으나 그것을 도로 아내의 도시락에 넣어보낸 뒤 10시에서 11시 사이 장남 영문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속세를 떠났다. 여기에 천상병(千祥炳)은 <김관식의 입관(入棺)>에서 울음 울 듯 이렇게 읊었다.
시인 김관식, 가는 곳마다 엄청난 회오리와 천둥 번개가 함께 했던 사람. 고등학교 시절에「성리대전(性理大典)」을 떼고, 스물 미만의 나이에 최남선·오세창 등에게서 성리학과 동양학을 사사(私事)한 천재 소년. 스물두 살에「현대문학」추천으로 시인이 된 사람. 우리 나라는 너무 좁다며 문패만한 명함에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써 들고 다니던 사람. 문단에서의 기행으로 너무 유명하여 오히려 그의 문학적 성과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슴에 불을 담고 광기어린 행동으로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으로만 치부되기엔 그의 문학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가 세상을 향해 퍼부은 독설은 너무나 또렷하다.
김관식 시인은 1934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505번지에서 김낙희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룡리 마을은 육군훈련소와 인접한 마을이다. 당시로서는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 소재지에서 2Km정도 떨어진 산 밑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시내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마을로, 한때 200호에 육박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여느 농촌마을이 그렇듯 군데군데 빈집이 늘어 마을은 예전에 비해 크게 작아졌다. 당시의 가족 제도가 그렇듯이 김낙희 씨는 아버지를 모시고 형제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었다.
세 살 무렵, 아버지가 강경에서 장춘당한약방을 경영하게 되어 강경으로 이사한다. 그 뒤 강경중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당대의 명문이었던 강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학교 공부가 별로 달갑지 않았던 그는 강경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남한 각지를 떠돌며 문인들을 만나고, 성리학의 마지막 법통이라 일컸던 최병심을 찾는다. 또 전주에 피난 와 있던 서정주를 만나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전주의 전시 연합 대학에서 청강을 한다. 1952년에는 충남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고려대학교로 전학한다. 또 처녀 시집「낙화집(洛花集)」을 간행한다.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전학하고, 최남선, 오세창 등에게서 성리학과 동양학, 서예 등을 사사받는다. 이듬해 3년간이나 구애를 하였던 방옥례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다. 그 해 봄에 경기도 여주농고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부터 연이은 과음이 시작된다. 다음 가을에 서울공고로 옮긴다. 여주농고에서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어느날 과음한 뒤에출근한 김관식을 교장이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은단을 한 줌 입에 털어 넣었다. 술 냄새에 은단에 범벅되어 그의 입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났다 교장은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다가 그에게 말했다.
"김관식 선생, 나는 은단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술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은단과
술이 짬뽕된 냄새는 아주 싫어합니다.?"
그 선생에 그 교장이랄까, 아주 유머가 넘치는 장면이었다.
파란의 여주농고 생활을 접고 가을에 그는 다시 서울공고로, 그리고 다음해에는 또 서울상고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구기동 산골짜기로 이사하여 과수원을 경영한다. 이 해에 창간된 『현대문학』에「연(蓮)」,「계곡에서」,「자하문 근처」의 작품으로 서정주로부터 6개월만에 3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한다.
물이 흐른다.
늙으신 어머니가 가늘은 눈웃음을 머금으실 때, 입 가장자리, 눈썹기슭에 조용히 말렸다가살며시 풀어지는 해설피듯 막막하고 그리고 잔조로운 사랑스런 주름살. 아니면, 흰나비 한 마리 가을 하늘에 가벼이 나래 저어 날아가는 자리마다 보일락말락 아슴프레히 일어나는 자잘한 무늬를 지나가면서.
아니 이것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다.
나는 한나절 초록바탕의 언덕위에 앉아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어린 누이들이 뒷골방에 숨어서 눈물 씻고 나직히 흐느껴 우는 소리.
봉우리에서, 또는 골짜기에서
사뭇 여기까지 굴러내려온 조약돌 조약돌 조약돌이 만일, 그 숱한 혼령들의 조각이라면 서어러운 햇살 아래 빛나는 이마빡을 가지런히 드러내고 지나간 옛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을 따라 나도 흘러가며는 죽은이들이 서로 도란거리며 의초로 웁게 모여서 사는 바다와 같은 마을이 없는가.
-「계곡(溪谷)에서」
1957년에 자유세계사에서 「김관식 시선」을 발간한다. 1959년에는 학생들과 왕왕구락부를 만들어 보신탕을 먹으러 다니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서울상고를 사직하고 세계일보 논설위원으로 부임한다. 그의 방랑벽은 멈추지 않아 이듬해 다시 세계일보를 사직한다. 그리고 용산에서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시 거물 정객이었던 장면과 겨루었다. 선거 중에 아버지뻘이나 되는 장면을 '군'이라고 호칭하여 또 화제가 됐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낙선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결핵과 위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가나긴 투병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경영하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하여 무허가 건물을 지어 파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려 하자 그는 지붕 위에 올라앉아 철거를 방해하면서,
"내가 장면과 겨루었다고 나를 이렇게 탄압하다니……. 이건 정치 탄압이다..?라고 외쳐 사람들의 실소케 했다.
홍은동 시대에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기며, 연이은 과음과 기상 천외한 행동으로 그의 아내를 한없이 슬프게 하기도 했다. 그는 술 때문에 생긴 병을 이기기 위하여 주전자를 천장에 달아매 놓고, 송주문(送酒文)을 써 붙이는 등 나름대로 술을 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게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그는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서경'을 번역하여 간행하였으며,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대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형을 찾아 살길을 구했으나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대전에서 2개월여의 투병 생활을 끝에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이 무렵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향하여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하여 지켜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가여운 아내 아들딸들아
아이예, 불쌍한 울음일랑 들레지 말라
그 동안 신세 끼친 여숙(旅宿)을 떠나
영원한 (本宅)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나의 임종(臨終)은」일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담담했으면서도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자녀들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을 느꼈던 듯하다. 그는 자녀들을 향해 회한이 가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를 남겼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길은 없는 것이냐.
간, 심(心),비(脾),폐(肺),신(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白金)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寶劍)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병상록(病床錄)」전문
그는 1970년 8월 30일 간염으로 타계하여,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마을 입구에 있는 사천 김씨네 종산(宗山)에 묻혔다. 그의 사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전집「다시 광야에」를 간행하였다.
살아 생전, 이 좁은 땅덩이에 태어난 것이 한이라고 명함에 그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써 가지고 다니던 시임 김관식은 말없이 누웠다. 그의 묘지는 생가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으로 그가 뛰놀던 마을과 잇닿아 있고 불과 5∼6미터의 거리에 읍내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있다. 가끔 인근의 사격장에서 총성이 들려와 무료한 일상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던 그를 깨운다. 앞에는 그가 여름마다 첨벙거렸을 냇물이 흐르고, 그가 바라보던 들판이 예전 그대로이다. 그는 뒤늦게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복을 누리고 있다.
김관식 시인이 세상을 뜬지 서른 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그리움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는 그의 시비가 세 곳에 세워져 있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1992년에는 대전·충남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대전 보문산 공원에, 그를 흠모하는 강경상고 후배들에 의해 강경상고 교정에 각각 시비가 새워졌다. 1997년에는 당시 전일순 논산시장의 배려로 그의 고향 논산시민들에 의해 논산공설운동장 옆에 박용래 시인과 나란히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 제막에 맞추어 박용래·김관식 시비 제막 기념문집인
「땅에도 별이 뜬다」(권선옥 편저)가 간행되었다. 한 시인의 시비가 세 곳에 세워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여유를 모두 보상받고도 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비에는 (「거산호」)가 새겨져 있다.
산에가 살래
팔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동방살롱 건너편 할머니집 앞 어스름 불빛 아래서 두 사나이가 맞상대를 벌였다. 1957년의 초여름 날이다. 김관식의 겨루기폼은 차차차 맘보 스타일의 권투자세에다가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몸통이어서 어디 한군데 파고들 틈이 없었다. 동방살롱에서 몇몇 문사(文士)들이 나와 기웃거리다가 자기들을 ‘시속(時俗)의 잡배(雜輩)’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천하의 ‘개차반’인 김관식인줄 알고는 슬금슬금 살아지고, 떼어 말리는 강민(시)이 옆에 있던 육군대령 출신의 시인 이영순이,
“야, 야! 한번 붙어 보라우!”하면서 부채질을 했다. 김관식의 상대는 이 글의 필자인 나다.
좌우간, 서로 한대씩 주고 받은 몰골 사나운 우리는 명동파출소로 연행 되었다. 조서를 꾸미는 살벌한 순경 앞에 압도적으로 험상궂은 첼리스트 김인수(음악회관 주인이기도한)가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젊은이들이 한잔 먹고 객기를 부렸기로소니, 웬 말라비틀어진 조서야. 이사람들 글쟁이야. 내가 보증 설테니 내보내.” 그렇게 우리는 풀려났다. 왜 싸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야말로 술김에 객기였던지, 안하무인의 그가 눈꼴시렸던지, 둘중 하나다.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에서 태어나(1934.3.3) 강경으로 이주한 한약방집의 아들인 그는 유아어(乳兒語)와 동시에 한약봉지의 한자와 친해졌고 타고난 천재적 기억력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섯살 때 줄줄이 외워 동리에서는 ‘신동’ 났다고들 했다. 강경은 일제가 만든 농산물 수탈도시로 교통과 교육환경이 인근에서 제일 뛰어났다. 명문이던 강경상업에 진학한 그는 이태준의 <문장론>으로 국어시간을 주물르던 선생에게 중국고전의 문장론인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달달 외워 기를 죽였다. 이미 그는 동양고전을 뀌뚫고 있었고 특히 당시(唐詩)에는 독보적이었다.
고2(대건고) 때였던가. 그와 초등학교 동창인 송혁(시)의 소개로 인사를 한 나는 강신학 등 그의 일행과 함께 강경포구 옆 10리나 되는 황금들판의 뚝방길을 걸었는데 그는 왕복 20리길 내내 한국시를 줄줄이 외워 댔다. 그 기억력, 그 열정에 나는 입을 담을지 못했는데, 송혁은 곁에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김관식은 유아시절, 청소년시절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아둥바둥 대학에 애써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전북대학에서 강의하던 가람 이병기 선생을 찾아가 그 천재성을 인정 받아 전북대학에 편입학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우이동의 육당 최남선 선생댁에서 기숙한다. 육당 또한 그 천재성을 인정하고 제자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동국대학 농학부에는 적만 두고 나가지도 않았다.
그의 신화는 그의 기이한 행동과 탁월한 문학적 실천력으로 형성되고 다듬어졌다.
그는 이미 <낙화집(낙화집(落花集)>(1952)이란 시집을 냈고 현대문학에 미당의 추천으로 (1955 ‘연(蓮)’. ‘계곡에서’) 등단한 시인이었다.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가장 동양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독특한 시풍을 지녔다는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기행(奇行) 그 자체였다. 오죽 했으면 미당 서정주도 ‘미친 아이’라고 했을까.
미당의 처제인 방옥례와의 목숨 건(실제로 음독) 청혼과 결혼(1954), 서울상고의 교사취업(1955. 육당을 존경하던 교장 김도태에 의한 특채), 모 원로작가 출판기념회장에서 장기영 경제부총리의 축사를 휘저어 놓은 난장판(“자네는 그만 하게. 내가 할말이 있네.”라면서)과 박종화,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을 대놓고 박군, 김군, 조군, 박군으로 부르는가하면 어느 설날, 공덕동 미당댁 보다 먼저 한문학은 물론 <지조론>으로 지사풍이 도저하던 성북동 조지훈댁에 세배를 다녀온 것이 들통나 미당의 술주전자 세뢰를 받았던 것들은 그다운 애교일 수 있다. 그의 파격적인 교사로서의 행동은 학부모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꺾이고 세계일보 논설위원이 되지만(1958), 그런 얽매인 생활은 그의 기질이 용서 하지 않았다. 그의 천재적 열정을 달래줄 곳은 주로 명동의 술집들이었고, ‘갈채’에 나와 있던 김동리, 손소희, 강신재는 그가 내미는 당당한 손에 술값을 빚갚듯 했다. 그야말로 그의 명함 그대로 <대한민국 김관식>다웠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총선을 치루던 그 7월에, 그것도 당대 제일 정객인 장면과 맞서서 용산구에서 출마한 것은 돈키호테적 발상으로 밖에는 설명 되지 않는다. 용산초등학교(용산 소방서 옆에 있던) 유세장에는 장면이 연설하고 나가자 청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의 제자(서울상업) 몇몇과 송혁(시), 신기선(시), 정인영(소설), 이경남(시)과 내가 불어오는 운동장의 모래바람 속에 목쉰 김관식의 동양고전의 명구가 쏟아지는 명연설(?)을 들어야 했다. 지지표가 안나오기도 선거사상 기록일 것이다. 이 기록은 부모의 유산이던 과수원을 날리고 그를 빈곤으로 몰아 넣었다. 그는 그의 시처럼 세상살이에서 돌이되고 마는가.
ㅡ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석상(石像)의 노래>(마지막 싯귀 1957)
그를 좋아하던 황명걸, 신경림, 백시걸, 천상병, 박봉우, 이현우, 권용태, 강민, 송혁, 이규헌 등은 시우(詩友)이자 주우(酒友)였고 몇몇은 산초 판차모냥. 거칠것이 없는 ‘대한민국 김관식’이 홍은동 산꼭대기에 무허가로 지어놓은 성지(城址)의 선민(選民)이 되기도 했다. 그는 그 땅에 육각의 집을 짓고 이름하여 육모정(六慕亭)이라 하였으니 이는 육당 한사람만이 그의 마음안에 있었음의 증거이다.
부인 방옥례는 서라벌예대의 미아리 캠버스의 우리반 청강생으로 잠시 나오기도 했으나 생활에 쪼달리고 아이를 양육의 짐에 떠밀려 육모정의 곤궁한 부엌을 벗어나지 못했다
1967년 어느날, 나는 상도동행 버스 안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등에 담요로 둘둘만 이상한 물건을 가리키며 “이것이 관우가 쓰던 청룡언월도여.”라고 하길래 내가 되물었다.
‘그걸 워따 쓸건데?” 그러자,
“상도동에 내가 집장사를 벌렸는디, 집짓는 싸가지 없는 놈이 내돈을 안갚아야. 그게 워떤 돈인디. 그래서 오늘 요절을 낼 참이여.” 그리고는 분을 못참아 숨을 몰아쉬었는데, 생활현실의 비정한 좌절은 다행이도 끔직한 살인사건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김관식은 마지막 문학작업으로 현암사에서 <서경(書經)>을 완역해 냈다. 1970년이었다.
ㅡ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 /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ㅡ(<나의 임종은>에서) 라던 그도 깡소주에 절어 닳아빠진 오장을 견뎌내지는 못했다. 1970년 8월 30일 그는 갔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그는 구름위에서 이백(李白)과 더불어 술잔을 기우리고 있을까.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는
ㅡ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 마음의 푸른 창문은 열어 놓고 당신의 그림자가 / 어리울 때까지는 가슴 조여 안타까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하늘이여 / 로 시작되는 대표작 <다시 광야에서>가 시비로 서있다.
그는 광야를 떠돈 ‘미친 아이’인가, 불우한 천재인가.
ㅡ시집으로 <낙화집>(1952), <김관식 시선>((1956), <다시 광야(曠野)에서>(1976)가 있다.
문총(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회관이 광화문에 있었다. 조선일보사 바로 뒤쪽 세 갈래 길 모퉁이에 앉은 건물이다. 그때(자유당 말기)만 해도 문총은 산하단체의 하나인 [자유문학자협회]가 장악해서 좌지우지할 때였다. 거기서 매월 자유문협 주최의 월례 문학작품 품평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매월 문학지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대상으로 품평회를 갖는 그런 자리였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나는 신문 문화면에서 안내 기사를 읽고 그곳을 찾아갔다. 저녁 시간이었는데, 문에 들어섰을 때 한창 장이 서 있었고, 비좁은 회의장은 자리가 모자라 서 있는 사람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마침 이무영(李無影) 선생이 진달래 빛 얼굴을 한 묘령의 여류작가 구혜영(具暳瑛)의 소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단상 단하에 있는 시인, 소설가들의 이름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저 충청도 시골바닥에서 하늘의 별만큼이나 높이 우러러 뵈던 문단의 큰별들이 거기 ‘보통사람’으로 앉아있고 서 있는 것이 신기했다.
박성룡(朴成龍) 시인이 자작시 <유방>을 낭독할 때였다. “그것은 묘ㅅ등과도 같은…” 백열등 불빛 아래 떨리는 시인의 육성이 흐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탁한 소리가 뛰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나는 쪽으로 몰린다. 사회를 보던 김광섭 선생은 ‘저분이 김관식 시인입니다.’고 즉석에서 소개한다. 껑충하게 큰 키에 밭에서 막 뽑아든 조선무 밑둥 같은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다.
“아니, 저 사람이?…”
순간 내 머리 속은 혼란스러워졌다. 적어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로 읽은 김관식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려운 한문자와 예스러운 어법들은 두루마기에 수염을 기른 시골 선비풍이거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어야 했었다.
아무튼 김관식 시인은 갓 서울 올라온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김관식 시인에게 쉽게 가까워지고 말았다. 김관식 시인은 김광섭 선생이 사장으로 있는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나는 이웃한 뒷집에서 학교를 다닐 때여서 놀러 가기도 했다. 승복을 입은 고은 시인과 박희진(朴喜璡) 시인에게 함께 인사하게 된 것도 세계일보 논설위원실에서였다.
“근배야, 서정주에게 추천 받아라. 서정주가 제일이다.”
그는 어느 날 돌체 음악실에 왔다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문단의 선배들에게 ‘君’자를 마구 불러 대는 등 독불장군처럼 머리를 숙일 줄 모르는 그가 후배에게 서정주 선생의 시만은 인정하는 고백(?)을 한 것도 세상은 모르는 일이다.
어려서 정인보, 최남선 등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특히 육당의 수제자라는 꼬리표가 그에게 붙기도 했었다. 그가 외우는 시가 한시를 합해서 수천 수라든가. 천재성이 겉으로 철철 넘치고 있었다. 나보고 한문을 어디까지 읽었느냐고 해서 할아버지 밑에서 율곡의 <격몽요결>을 조금 읽었을 뿐이라고 했더니 “비례물시하며 비례물청하여…”라고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4ㆍ19가 일어나자 그는 갑자기 ‘혁명시인’이 되어 있었다. 우연히 돌체 앞에서 만났을 때,
“근배야, 나 용산 갑구에서 장면 군과 대결하기로 했다. 지금 석계향의 집에 정치자금 가지러 간다.“ 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장면 박사는 총리가 될 사람으로 7ㆍ29선거에서 최대의 강적이었다. 김관식 시인은 그 용산 갑구에 출마해서 달변으로 ‘대한민국 시인’의 위용을 유감없이 떨쳤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는 폭음을 한 탓인지 병을 얻어 명동에도 잘 나오지 못했다. 1966년 어느 날이었다. 그가 병든 몸을 추스려 지팡이를 짚고 명동 한복판 3층 꼭대기에 있는 송원기원엘 찾아 왔다. 바둑을 못 두는 그가 사람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이리라.
나는 호주머니에 대폿값이 있음을 확인하고 곧 빈대떡집으로 안내했다. 그때 최일수(崔一秀), 이추림(李秋林) 두 분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가람, 조운, 초정 다음에 네가 한 획을 그었다”고 독설가답지 않게 덕담까지 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고 37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시를 모르는 이들이 살아서 시비를 세우고 있는데 아직 김관식 시비 하나 서 있지 않음이 오늘까지 가슴 저리다.
김관식 시인의 아내 방옥례씨의 회상기에 의하면, ‘세검정 산등성이의 술집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술꾼이던 김 시인. 미당 서정주의 처제이기도 한 방 여사는 은행원이던 21세 때 세 살 아래인 김 시인을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프로포즈를 받았다.
방 여사가 거절하자 그는 음독 자살 소동을 벌이고, 결국 그들은 술처럼 ‘엉망진창’인 결혼식을 했다. 그는 신혼초부터 술과 아내와 동거하며 교편을 잡았으나, 술에 취해 교단에 서고, 교장 사택에 용변을 보고, 제자들과 ‘왕왕구락부’를 조직해서 남의 개를 잡았고, 거의 매일 지게꾼에 실려 집에 왔다. 그래서 학교를 옮겨 다녔고, 그러면서 술주전자와 술 빈 병을 재산으로 남기고 타계했다.
남편이 간 후 방씨는 2남 3녀를 키우기 위해 스웨터 행상, 군화공장 공원, 회사원 등으로 고생을 해 왔는데, 이즈음 비로소 남편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조그만 인생이 되길 거부하는 거인, 천길 벼랑 청솔가지 위에 다리 하나 오그려 제낀 거만한 송골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송골매 중 가장 억센 송골매’라고 김 시인을 표현하며 진한 애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좌충우돌의 미학은 /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 드디어 끝난다. / 구슬도 먼지도 못되는 / 점잖은 친구들아, /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 되려 기뻐해다오. /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을"
천상병(千祥炳) 시인의 시 <김관식의 입관(入棺)> 일부분이다. 55년 서정주(徐廷柱)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김관식은 타계할 때까지 거칠 것 없는 행동으로 문단에 숱한 화제를 뿌렸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며 시 1천수를 줄줄 외웠던 김관식은 한학에도 밝아 시의 세계가 깊고 그윽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문단에서 그의 행태는 광기를 띨 만큼 호탕해 ‘미친 아이’로 불리기도 했다. 문단 대선배도 ‘군(君)’자를 붙여 제자 다루듯 했으며 시 세계에 가식이 섞였거나 조금만 삐뚤어져 있으면 독설(毒舌)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김관식이 4ㆍ19로 열린 민주국가에 기여하겠다며 서울 용산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 당시 거물급 정치인 장면(張勉)과 맞붙은 일화는 유명하다. 또 홍은동 산동네에다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 멋대로 팔고 가난한 시인들에게는 거져 주기도 했다.
세상 거칠 것 없이 몸으로 ‘좌충우돌의 시학’을 가르치다 죽었으니 시도 아닌 시로 점잔을 빼던 시인들이 기뻐했을 법도 하다.
첫댓글 길기도 길어라.. 근디 술이 문제여~
술 조금씩 머그면 괜찮어..........난 생전에 계신 김관식 선생님을 홍은동 육모정에서 뵈었는데 내친구 .. 만식(30회) 사촌 형님 이었거던.....술 엉청드셨어 맬 취하셨어.......
아~... 봉이는 아시는구먼... 소룡리 어디쯤 사셨는가?...
소룡리 와촌 한약방집 옆
그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 그런데 한약방이어디쯤이지![?](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 난... 그 동네 규동, 봉희, 태정이네집밖에 몰라...
규동이네~우리집 사이(옆집)
알았구먼... 고마 우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
추신: 간판없는 약방집(동네 약방집)
그려.... 근디 규동이는 시방 워디 산댜....?
대전 어디엔가 살고 잇댜 근데 모차져..........
소룡리에 그런분이 계셨 었네요?,,김관식 시인이 이곳 출신이라니!....자랑스럽습니다,
아랬말에 김씨가 마니살었어 지금은 1집만 남었음.........
귀한 분을 알게 됐구먼....근데 만식이 ....규동이 소식이 궁금해?
규동이는 대전 어디이엔가 살고. 만식30회 목동어디산댜.........나두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