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3)
4.유학의 진흥과 교육걔혁을 통한 중앙집권화
성종은 집권초기부터 노골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감행한다. 즉위년에 팔관회의 잡기들이
번잡하다고 지적하면서 이의 폐지를 명령하고, 다시 연등회도 폐지한다. 반면에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
교를 세워 대대적인 유학 풍토를 조성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유교사회 건설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꾀하려는 성종의 정
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태조는 고려 건국과 더불어 숭불정책을 실시하여 불교를 국교로 지정한 바 있다. 또한 ‘훈요십조’를 통해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고 정서적 풍요를 누릴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이 같은
태조의 당부보다는 중앙집권적 체제 완성이라는 대명제를 앞세워 과감하게 유학진흥으로 일관한다.
숭유정책이 강화되면서 불교에 대한 압력은 더욱 가속화된다. 월령(예기)의 규범에 따라 5월(중하 仲夏여름의 한창
때)과 11월(중동 仲冬겨울의 한창때)에 불교행사를 피하도록 명령하는가 하면, 유교적 예제(의식으로서 하는 제사)에 따
라 태조를 원구(圓丘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설치하는 제단)에 배향(配享 같이 모심)하고 중국 3황 중의 하나인
신농씨(神農 농사를 주관하는 신이 되었음)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직(社稷 토지신과 곡신 즉 나라를 뜻함)의 신위(神位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지방을 모셔 놓은 자리)를 거기에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성종의 유교사상에 따른 조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유교윤리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효이며, 이의 연장
이 곧 충이라는 경전의 내용을 기본으로 성종은 대대적인 충효사상 고취작업에 돌입했다.
성종 9년(990년)에 왕이 내린 교서는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먼저 근본을 알아야 한다. 근본을ㄹ 알기 위해서는 효고가 제일이니, 효도는 3황5제
의 기본사업으로서 만사의 강령이요 모든 선(善)의 주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의 황제는 양인(중국 북위 때의 효자)
이 자기 부모를 소중하게 여긴 것을 기특히 여겨 그 집과 마을에 정문(旌門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문)
을 세워 그의 효성을 표창하였고, 진(晉)나랄 황제는 왕상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뜻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기록하도
록 명령하였다.
근일에 사절들을 육도에 파견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이별하는 것을 구제하고 홀아비와 고아들의 곤궁
함을 돌보아주며,효행을 행하는 아들과 기특한 손자, 의로운 남편, 절개 지킨 부녀들을 조사하라고 하였던 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사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전개된 성종의 교서는 전국 각도에서 효행을 행한 사람들을 찾아내 표창하도록 명령하고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아아, 임금은 만백성의 우두머리요, 만백성은 임금의 심복이다. 백성들이 착한 일을 하면 그것이 곧 짐의 복이요 악
한 일을 하면 그것이 곧 짐의 근심이다. 부모 공양을 잘하는 자를 높여줌으로서 풍속을 아름답게 하고자 한다. 시골의
우매한 백성까지도 꾸준히 효도에 열심히 다하는데, 하물며 벼슬하는 신하들이야 자기 조상을 받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능히 자기 집에서 효자가 된다면 반드시 국가의 충신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관리와 평민들은 짐의
말을 명심하라.‘
성종의 교서는 효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충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곧 효사상을 고취시켜 충을 이끌어내려는 의도
이며, 결과적으로 유교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꾀하고 있다.
유교를 통한 중앙집권체제 확립에 대한 성종의 집념은 교육정책에서도 두드러진다.
목을 설치하면서 주목과 함께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고,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는 함편 전국에 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향교의 전통도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고려의 향교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향교의 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의 교과는 <주역>, <상서(서경)>, <주례>, <예기>, <효경>, <논어> 등이었으며, 지방학교에서는 경학과목을 비
롯하여 의학,지리,율서,산학 등의 잡학을 함께 가르쳤다. 이는 과거 과목에도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자감과 지방
학교는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교과목을 편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거 이후 임용된 관리들이 학문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성종은 또 다른 장치를 마련한다. 50세 이하의
휴직을 하지 않은 중앙관료는 매월 한림원에서 문제를 받아 시 3편, 부 1편씩을 제출하도록 했고, 지방관료는 매년 시
30편, 부 1편씩을 지어 제출하도록 했던 것이다.
성종은 이처럼 충효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유학을 교육정책과 연계시키고, 그것을 다시 관리등용문인 과거제와 관료
들에게 대입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쳬제를 확립한다.
*.사서오경(四書五經)-유가(사람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주로 공자의 사상을 이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경
전인 사서와 오경.
사서에는 <논어(論語) 공자의 윤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이 기록한 책)>, <대학(大學), 예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예기
에서 대학,중용편을 분리하여 별책으로 편찬함)>. <중용(中庸)>, <맹자(孟子) 맹자의 말씀을 기록한 책>
오경에는 <역경(易經=주역>, <서경(書經), 고대 중국의 정치에 관하여 서술한 정치학 책>, <시경(詩經),중국 고대의 시
를 수록한 책>,<예기(禮記) 중국 고대의 예에 관한 기록과 해설을 정리한 책>, <춘추(春秋), 춘추시대 노나라 사관이 기
록한 역사책,공자가 필삭을 가함)
5. 성종시대를 풍미한 사람들
유교개혁론자 최승로와 <시무 28조>
최승로는 최은함의 아들로 927년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최은함은 원래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벼슬이
원보에 이르렀으며,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고려조정에 협조하였다.
최승로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12세 때 태조가 그를 불러서 논어를 읽혀보고 칭
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태조는 그를 원봉성(임금의 칙서 작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태봉에
서 고려초기)의 학생으로 둘 것을 명령하고 말안장과 식량 20석을 상으로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화려하게 소년시절을 보낸 최승로는 광종이 집권하던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학문과 관련한 소임만 맡았
을 뿐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광종은 주로 귀화인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신라 6두품
가문 출신인 최승로가 중앙의 요직에 등용될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광종 후반기에 과거에 합격한 신진관료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데, 최승로 역시 이들 신진관료 중에 한 명이
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비록 정치적인 요직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적 명성은 이미 높았던 것 같다. 광종시대를
거쳐 경종의 짧은 치세가 끝이 나고 성종이 즉위하자 그의 위상이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981년 성종은 즉위하면서 유교사회 건설에 대한 포부를 밝힌 후 이듬해 정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시무(현 정세)
와 관련한 상소를 올릴 것을 명한다. 이때 종2품의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으로 있던 최승로는 장문의 시무책을 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성종에게 채택되어 고려사회는 또 한 번의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상소문을 올리던 982년 당시 최승로의 나이는 56세였다. 56세는 당시로 봐서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학문적으로
는 이미 일정한 궤도에 오를 만한 나이였고, 정치적으로도 자기의 위치를 확보했을 때였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상소문을 올리게 된 배경이고, 둘째는 태조에
서 경종에 이르는 5대조에 대한 평가이며, 셋째는 왕을 위한 28조에 달하는 시무책이었다.
그는 상소문을 쓰게 된 배경에서 당나라 사관 오긍이 <정관정요>를 편찬하여 당현종에게 올린 일을 상기시키며, 자
신의 상소문 역시 그와 같은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오긍은 <정관정요>를 올리면서 당태종의 정치형태를 본받을 것을 강조했는데, 최승로는 태조에서 경종까지의 정치를
평하면서 그 중에 옳은 것만을 본받을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그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오대조의 정치를 논
한 이유였다.
*.정관정요(貞觀政要)-당나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당태종(재위 626-649)이 23년에 걸친 치세동안 위징 등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정관은 당태종 시기의 연호다.정관시대의 정치의 요체을 정리했다는 의미다. 8세기 초 오긍
(670-749)이라는 역사가가 정리 편찬했다.
다섯 왕에 대한 최승로의 논평은 왕도정치로 귀결된다. 태조에게서는 넓은 도량과 포용력을 배우고, 혜종에게는 왕족간
의 우애를 지키려는 마음을 배우고, 정종에게는 사직을 보존하려는 의지를 배우고, 광종에게는 공평무사함을 배우고,
경종에게는 현명한 판단을 배우라고 한 것이 다섯 왕에 대한 논평의 요지였다. 물론 반대로 각 왕들의 정치적 실수들
을 열거하며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일도 간과하지 않았다.
다섯 왕에 대한 평가 이후 시무책을 열거하게 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시무 28조>다
<시무 28조>는 현재 22조의 내용밖에 전하지 않는다. 그 주요 내용은 크게 여섯 분야로 나뉘질 수 있는데, 1조는 서
북 변경의 수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간언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고, 2조, 6조, 8조, 10조, 13조, 16조, 20조에
서는 불교와 승려에 대한 지나친 예우를 삼가고, 연등회, 팔관회 등의 행사를 철폐하는 한편, 정치에서는 유교사상을
통해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3조, 14조, 15조, 19조, 21조에서는 광종대에 지나치게 강화된 시
위군(왕 직할군)과 궁중노비를 줄이고 군주가 신하를 예우하는 자세를 보이며, 공신들의 자손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한편 국가의 번잡한 제사를 줄이고 군주가 유교적 몸가짐을 가질 것 등으로 왕의 올바른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4조와 5조, 18조에서는 왕의 사소한 포시(布施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을 베풂)행위를 금지하고 상벌
과 권선징악을 통한 정치를 펼 것과 중국에 보내는 사신의 수를 줄이고, 금, 은, 동, 철을 사용한 불상 제작과 불경 필
사의 금지를 주장하는 등 경제외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7조와 12조에서는 주요 지역에 외관을 파견할 것과(12
목 설치) 섬 주민들에 대한 공역의 균등화 등 지방정책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8조와 11조, 17조, 22조에서는 의복제도와 가사제도, 양인과 천민에 관한 법 등을 확립하여 엄격한 사회신분제도를
유지할 것과 고려 고유의 풍속을 준수할 것을 언급하며 사회기강에 대한 문제를 집중 거론하고 있다.
이처럼 최승로의 시무책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사회, 행정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성종은 이것을 수용하여 즉
위초부터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983년 정2품 문하시랑평장에 임명된 최승로는 성종의 유교정치이념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중앙관제를 3성 6부제로 전환하는 등 성종대의 중앙집권화정책
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한편 개혁세력의 선두에 서서 고려를 양반귀족중심의 안정된 국가로 이끌고자 했다.
최승로의 과감한 개혁론은 교육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고려사회는 이미 광종대에 과거제가 도입되어 유학에 대
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으나 성종 즉위 때까지도 귀족들은 유학에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최승로는 이러한
현실을 교육제도의 미비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유교사상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꿈꾸던 성종과 유교사회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던 최승로의 만남 이후 고려사회는 다시 한 번 변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
다. 특히 교육개혁을 변혁의 제일 과제로 삼은 성종과 최승로는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전국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유학열풍을 일으켰다.
개혁과정에서 최승로는 988년 종1품 수문하시중(문하시중 바로 아래 직위)에 올랐으며, 청하후(청렴관리에 주는 작
위)에 봉작되어 식읍 7백 호를 받기도 했다. 이때 최승로는 회갑을 넘긴 노쇠한 몸이었고,그 때문에 여러 차례 치사(致
仕 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퇴직)를 청했지만 성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혁의 선봉에 서 있던 최승로에게 결코 치사
를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최승로는 더 이상 연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가 죽자 성종은 몹
시 슬퍼하며 교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정1품의 명예직, 왕의 고문을 맡은 원로대신에게 주는 최
고의 관품)벼슬을 추증했다. 또한 배 1필, 밀가루 3백 석, 입쌀 5백 석, 유향(乳香) 1백 량, 뇌원차(腦原茶)2백 각, 대차
(大茶) 10근을 부의로 내렸다.
성종의 이와같은 특별한 배려를 통하여 성종시대 최승로의 정치적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엿볼 수 있다. 개혁을 이
끌되 성급하지 않았으며, 중앙집권화를 꾀하되 결코 귀족세력을 무시하지 않았고, 귀족사회를 이끌어내면서도 서민들의
삶을 간과하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갖춘 인물 최승로가 없었다면 성종대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승로에게는 아들 숙이 있었으며, 최숙에게는 아들 제안이 있었다. 최제안은 현종, 덕종, 정종,문종 등 4대 왕들을
섬기며 벼슬이 태사,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느시대건 덕을 갖춘 인재가
나타나나 봅니다
몰아보기을 하네요 당일 못보인도 빼먹지는 못하겠어요 다음다음 이궁금하여서요
방문수 30여회 불과해서 실망했드니만
70회로 껑충 뛰어, 의욕이 생겨납니다.
계속 적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