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5년 아버지께서는, 유일한 두 분의 결혼사진(?)을 찍을 무렵 태백(당시 지명으론 장성)의 탄광 마을로 가셨습니다. 여차저차한 사정이 있으셨으리라. 그리고 이듬해 제가 태어나고 두어 해 더 일하시다 고향, 부산으로 귀향 하셨다, 는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또래 벗들의 아버지들보다 조금 더 자유롭고 방황도 많이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부산의 밤거리도, 영화관도, 구덕 야구장도, 술집도! 함께 다니는 호사를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 덕분에 마지막 입원하시던 2016년 여름까지도 함께 영화관으로 바다로 들로 다니곤 하였었지요.
하여, 지금도 '태백'이란 말만 들으면 아무런 기억도 없는 제가 태어난 맨 처음 고향, 어쩌면 제가, 저 시 속의 '누런 이빨 같은' '형'이 되어 '태백중앙병원'을 들락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더 뛰곤 한답니다.
아버지 떠나시던 김해의 병원 옥상에서, 입원하셨던 6개월 동안, 밤마다 바라보던 하늘엔 태백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별들은 없었어도 곁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2003년 랑딸 일곱 살 때, 처음 가본 태백(산)에서 쏟아지던 별을 보며 함께 놀라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렇게 별은 하늘에 머무르며 아버지에게서 저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랑딸에게로 흘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음력 12월 6일, 아버지 떠나신 뒤 두 번째 맞이한 제삿날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떠나신 어머니와 더불어 부디 잘 계시라고 말씀드리며 오십 년을 곁에서 함께 지낸 큰아들도 오늘은 울먹임 없이 제사상을 모시고 물러나 앉았습니다.
: 1965년 아버지께서는, 유일한 두 분의 결혼사진(?)을 찍을 무렵 태백(당시 지명으론 장성)의 탄광 마을로 가셨습니다. 여차저차한 사정이 있으셨으리라. 그리고 이듬해 제가 태어나고 두어 해 더 일하시다 고향, 부산으로 귀향 하셨다, 는 말씀을 듣고 자랐습니다.
또래 벗들의 아버지들보다 조금 더 자유롭고 방황도 많이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부산의 밤거리도, 영화관도, 구덕 야구장도, 술집도! 함께 다니는 호사를 누리며 자랐습니다. 그 덕분에 마지막 입원하시던 2016년 여름까지도 함께 영화관으로 바다로 들로 다니곤 하였었지요.
하여, 지금도 '태백'이란 말만 들으면 아무런 기억도 없는 제가 태어난 맨 처음 고향, 어쩌면 제가, 저 시 속의 '누런 이빨 같은' '형'이 되어 '태백중앙병원'을 들락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더 뛰곤 한답니다.
아버지 떠나시던 김해의 병원 옥상에서, 입원하셨던 6개월 동안, 밤마다 바라보던 하늘엔 태백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별들은 없었어도 곁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2003년 랑딸 일곱 살 때, 처음 가본 태백(산)에서 쏟아지던 별을 보며 함께 놀라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렇게 별은 하늘에 머무르며 아버지에게서 저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랑딸에게로 흘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음력 12월 6일, 아버지 떠나신 뒤 두 번째 맞이한 제삿날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떠나신 어머니와 더불어 부디 잘 계시라고 말씀드리며 오십 년을 곁에서 함께 지낸 큰아들도 오늘은 울먹임 없이 제사상을 모시고 물러나 앉았습니다.
첫댓글 회자정리라...그래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빠르고 늦음의 차이일뿐이고요..그래도 다시 한 버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