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영미 작가들 / 김종길(13)
윌리엄 제이 스미스와 루이스 심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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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했지만 1969년 가을의 미국 여행헤서 내가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것이 그해 9월 19일 오후였는데 그날 오전에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이륙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즈의 여객기가 다섯 시간 반 만에 워싱턴 근교의 댈러스공항에 착륙한 것이다. 그때의 나의 여행은 미 국무성 초청이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무성 산하의 '지도자 및 전문가 협의회'의 초청이었다. 그래서 댈러스공항으로 마중 나온 사람은 그 협의회의 담당직원인 토플로스키라는 키가 큰 청년과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 장학관으로 판견되어 있던 강성일 씨 두 사람이었다.
강성일 씨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 내가 대구에 있을 때 잘 알고 지내던 분이고 당시 워싱턴 근교의 메릴랜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의 집안사람 김호길 박사와도 아는 사이여서 공항까지 나와준 것이다. "김 박사도 나오기로 했는데---" 하면서 강씨는 두리번거리는 눈치였으나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강 씨는 자기 차로 나를 워싱턴 근교에 있는 호길 교수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그 집 주인도 들어왔다. 이야긴 즉 그는 강의가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공항에 나간 것이 우리가 거기를 떠난 조금 뒤여서 우리와 길이 엇갈렷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과 그 다음날 밤을 그 집에서 묵으면서 호길 교수와 쌓인 회포를 푼 다음, 내가 워싱턴 시내의 윈지파크호텔로 숙소를 옮긴 것이 9월 21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호텔에서 쉬면서 서울의 가족과 몇몇 친지에게 그림엽서로 무사히 워싱턴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연을 적기로 하고 미국 방문의 공식일정을 시작한 것은 그 다음날, 즉 9월 22일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토플로스키 씨의 사무실로 갔는데 그는 자기 사무실 직원인 플리셔 양으로 하여금 내가 워싱턴에서 만나고 싶었던 시인 윌리엄 제이 스미스(1918~) 씨가 있는 국회도서관으로 데려다주게 하였다.
스미스 씨는 당시 그 '국회도서의 시고문'이었는데 그것은 뒤에 미국의 계관시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자리였다. 그래서 당시 그의 사무실이 국회도서관 내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 것은 그가 그해 5월 하순 서울에 왔을 때 몇 차례 만났고 내가 재직한 고려대학교에서 강연도 하게 하여 친해진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보다도 8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서양인으로서는 키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인품도 온화하고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재회를 기뻐하면서 국회도서관 내부를 구경시켜주고 인근 식당에서 점심도 대접해주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도 자기 집에서 같이하자고 초대해주었지만 그날 저녁엔 선약이 있어 다음날 저녁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내가 워싱턴에 도착하여 미국 방문을 시작할 무렵에 이틀에 걸쳐 환대를 해준 스미스 씨는 한 달 남짓 미국을 일주하다시피하고 있는 내가 워싱턴으로 되돌아가 미국 방문을 끝맺을 무렵에도 또한 여러모로 환대해주었다. 내가 휴스턴을 출발하여 워싱턴 지구에 도착한 것이 그해 11월 1일 오후였는데 그 다음날 오후 나는 스미스 씨의 사무실에 들렀다.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인사도 할 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 영문과에서 내던 저널인 <피닉스>11집(1967)을 대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거기서 그 저널을 대출한 것은 그 다음날 오후 내가 메릴랜드대학 영문과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게 되어 있어 거기에 실린 T.S. 엘리엇에 관한 나의 영어논문을 참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 사무실에서 스미스 씨는 그 다음날 저녁 그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시낭독회가 열리니 꼭 들으러 오라는 것 아닌가!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때맞게 여행을 끝내고 워싱턴으로 돌아왔고 또 때맞게 내가 그날 그의 사무실에 들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다음날, 즉 11월 3일 오후 메릴랜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고는 국회도서관으로 직행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시를 낭독한 시인은 두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이 다 여류시인이었다. 한 사람은 시카고에서 온 저명한 흑인 여류시인인 궨돌린 부륵스(Gwendilyn Brooks, 1017~2000)였고, 또 한 사람은 어느 대법원장 부인이기도 하다는 고령의 백인 여류시인이었다. 낭독회가 끝난 뒤 스미스 씨는 그 두 여류시인과 귀빈들을 30명 가량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파티를 베풀었는데 나도 초대를 받아 그들과 함께 밤늦도록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윌리엄 제이 스미스는 미국 남부의 루이지애나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에 재미를 못 본 그의 아버지가 클라리넷 주자로 육군군악대원이 되는 바람에 1921년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근처로 옮겨 가 그의 소년 시절을 거기서 보냈다. 대학생활도 그곳에 있는 워싱턴대학에서 불어물문학과를 다녀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해군 통역장교로 복무하여 태평양 전선과 대서양전선에서 활약하였고, 전후에는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47년에 로우즈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학 워덤학료에서 유학하기도 하였다.
그 뒤 그는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2년간 버몬트주의회 의원 노릇을 하기도 했고 1908년부터 1970년까지 국회도서관 시고문직을 맡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다작의 문필가로 도합 40권이 넘는 시. 번역, 동시, 문학비평 회고록 및 시화집을 출판하였는데 그의 초기시는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의 이른바 '순수시'와 흡사했으나 뒤에 실제적인 상황을 다룰 적에도 그의 압축된 시는 꿈 같은 이미지와 연상을 환기하는 음악적인 언어를 벼리어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후기에 독특한 자유시형도 시험했는데 그것도 미국적이라기보다는 프랑스류의 자유시형에 가까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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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인 루이스 심프슨(Louis Simpson, 1923~)을 만나러 그가 사는 롱아일랜드의 끝자락에 있는 스토니 부르크로 간 것은 로버트 로우월을 만난 다음날인 1969년 10월 3일이었다. 아침 일찍 뉴욕에서 그곳으로 가는 포트 제퍼슨 라인의 기차를 탔는데 미국에도 이런 기차가 있었는가 싶을 만큼 지저분한 데다가 역마다 서는 완행이었다. 기차가 스토니 브르크역에 도착했을 때 그곳 뉴욕주립대학의 영문과 직원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나를 맞아주었고 저기 차로 심프슨 교수의 연구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심프슨 교수는 스미스 씨처럼 서양인으로서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그와는 달리 곱슬머리에 피부색도 흰 편이 아니었다. 그는 친가가 스코틀랜드 계통이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지만 카리브해 서인도 제도의 섬나라인 자메이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프리카계의 피가 어디선가 섞인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은 그곳 캠퍼스에 이웃한 조그마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의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인을 만났을 때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인은 그보다도 키가 컸지만 검은 머리칼은 심하게 곱슬이었고 살결도 검은 데다가 눈동자는 선명한 초록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인은 한눈에 열대지방의 정열을 느끼게하는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그들의 집은 미국의 시골집들이 대개 그러하듯 매우 규모가 큰 나무로 지은 저택이었다. 특히 아래층 거실은 천정도 높고 작은 강당만큼이나 널찍했는데 나는 거기서 그들 부처와 오후 내내 환담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심프슨 교수가 그렇게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마침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품이 원래 따뜻하고 너그럽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시간을 너무 빼앗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들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떠나라고 붙드는 바람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심프슨 교수는 기차역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떠날 때까지 전송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저녁 열시경이 되어서야 뉴욕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내가 루이스 심프슨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편지는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난 지 이태 뒤인 1971년 5월 1일자로 내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인데 용건은 내가 아는 학생 한 사람이 그가 있는 그곳 대학 대학원 영문과를 지원했는데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답장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남짓 뒤인 그해 7월 중순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 학년도에 런던대학에 가 있어서 내 편지가 그리로 회송되는 데 시일이 걸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는 그 편지에서 그는 그곳 대학의 대학원 주임인 레빈 박사에게 선처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말을 하고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었다.
무고하시겠지요. 집사람과 나는 당신이 우리를 방문했을 때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프슨은 자메이카 태생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때이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에 컬럼비아대학에 진학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에 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복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몇 해 동안 캘리포니아에서 교편을 잡다가 1967년 뉴욕주립대학 스토니 부르크 캠퍼스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는 중년에 시풍을 근본적으로 바꾼 시인으로 초기에는 엄격히 전통적인 정형시를 쓰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자 자유시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그 무렵부터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미국 사회의 천박성을 규탄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1969년 가을 미국 방문 기간 동안 뉴욕에 체류하면서 만난 두 사람의 시인인 로버트 로우월과 루이스 심프슨은 둘 다 당신의 반전파 시인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지 내가 그러한 시인들을 골라서 만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로우월은 그러한 시인으로 알고 있었지만 심프슨도 그러한 시인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그때 미국 시단의 내막을 좀 더 소상히 알고 있었더라면 뉴욕에서는 더 많은 시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해서 그들 두 사람만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뉴욕 체류 기간 동안 그곳에 있는 문화단체 내지 기구를 꼬 여러 군데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곳에 도착한 다음날인 9월 20일에는 소잡지연합회를 방문했고 센트럴파크 근처의 피에르 호텔에 열린 미국 펜(PEN) 뉴욕지부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거기소 뜻밖에 <초당(The Grass Roof)>의 작가 강용흘(1898~1972) 선생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 다음날엔 미국 시인아카데미를 방문하고 그 다음날 즉 11월 1일 오전에는 컬럼비아대학을 방문하여 몇 사람을 만난 뒤 아시아협회를 방문하여 서울에 온 적이 있어서 구면인 그 협회의 사무총장인 보니 크라운 여사의 점심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턴 현대미술을 관람한 것은 스토니 부르크를 다녀온 다음날인 11월 4일 오후였는데 가리개 모양으로 된 모네(1840~1926)의 대형 수련(睡蓮) 화폭이 특히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