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대웅보전
<정승열의 힐링여행>(53)강진 백련사
금강일보 기사 입력일 : 2014.08.26.
붉은 꽃잎, 그윽한 차향에 마음 설레네
국내 3대 동백나무 군락지 백련사
7천여 그루 동백 울창한 숲 이뤄
11월~이듬해 4월 붉은 꽃의 물결
다산 정약용, 다산초당, 그리고 茶
대웅전 주변 야생 차나무 군락 장관
만덕산 별칭 ‘다산’ 정약용 號 돼
남도기행 1번지로 알려진 전남 강진군의 도암면 만덕산(萬德山; 409m)은 나지막하지만,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서 산기슭에만 올라가도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만덕산은 동백나무와 차나무가 야생으로 자라면서 커다란 숲을 이루고 있어서 만 가지 덕을 가진 산이라 해서 만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특히 산기슭에는 조선 정조 때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19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다산초당과 그 옆에 천년고찰 백련사(白蓮寺)가 있다(2013.08.21. 다산초당 참조).
신라 46대 문성왕 원년(839) 낭혜화상 무염 대사(朗慧和尙 無染大師; 800∼888)가 창건한 만덕사는 고려 희종 7년(1211)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 1163~1245) 스님이 중창하면서 백련사(白蓮社)라고 고쳤는데, 이때 절 이름 사(寺)가 아닌 단체 사(社)로 한 것은 1208년 최씨 무신정권 이후 요세 스님이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한 기존 불교계에 대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주창하면서 사찰 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주장하는 송광사 지눌 스님의 조계종과 양대 산맥을 이룬 백련사는 이후 120여 년 동안 8명의 국사를 배출한 거찰로서 원묘국사는 마지막 국사(國師)이기도 하다.
백련결사 당시에는 승려가 1000여명, 절집은 8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하지만, 고려 말 남해안 일대가 고려청자 주산지이자 곡창지대여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서 약탈을 당할 때 많은 피해를 입고, 또 조선 건국후 숭유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고 사찰은 퇴보하여 거의 폐사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세종 9년(1426) 주지 행호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특히 1430년 전국을 유람하던 세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백련사에서 8년 동안 기거하는 동안 크게 중창했다. 효종 14년(1762) 3차 중수를 하면서 원묘국사 탑과 사적비(보물 제1396호)도 세웠다.
사실 백련사는 천년 고찰로서 보다는 동백나무 숲과 야생 차나무 숲, 그리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 1772~1811) 스님과 차(茶)에 얽힌 끈끈한 우정으로 더욱 유명하다. 먼저, 백련사 동백 숲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 여수 오동도 동백과 함께 국내 3대 동백 군락지로 손꼽히며, 약7000그루의 동백은 울창한 숲을 이룬다(천연기념물 제151호).
대부분 높이가 7m에 달하는 거목이고,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이 된 동백나무들은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붉은 동백꽃으로 탐방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또, 주차장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주변의 차나무 군락은 만덕산에 얼마나 무성했는지, 다산 정약용이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과 우정을 맺은 이후 만덕산 야생차를 즐겨 마시면서 자신의 아호도 만덕산의 별칭인 다산(茶山)이라 하고, 또 자신이 거처하던 초가에도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고 별호를 지은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강진 백련사를 찾아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끄트머리인 목포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강진나들목으로 빠져나가 강진읍에서 완도 방면 국도 3호선을 약7㎞쯤 가면 된다. 만덕산 아랫마을인 도암면 만덕리에는 다산초당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과 백련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란히 서있는데, 다산초당, 다산기념관과 공직자 연수원에 이르기 전 오른편 길가에 백련사가 보인다. 주차비, 입장료가 거저이다.
야트막한 흙길을 올라가는 백련사 일주문까지 주변은 온통 동백나무 숲과 무성한 야생차나무 숲이고, 동백나무 숲길에서 왼편으로 난 좁은 오솔길로 약800m쯤 떨어진 능선너머에는 다산초당이 있다.
백련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일주문~사천왕문~금강문~해탈문~수미산 등의 가람배치가 아니라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다른 절집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배치돼 있는데, 누하(樓下) 진입방식으로 만경루(萬景樓) 아래를 지나면 효종 12년(1760) 화재로 불탄 것을 1762년 복원한 대웅보전이 있다(전남도유형문화재 제13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인 대웅보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 1777)의 글씨로서 원교가 1755년부터 남해바다 완도 옆 신지도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중 대웅전 중건 때 백련사를 찾아와서 써준 것이라 한다. 대웅전 안에 걸려 있는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社)라는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또, 대웅전 왼편의 백련사 사적비와 그 오른편 비각 안의 원묘국사 부도비는 대웅전을 중창하던 효종 때 세운 것이다.
28세 때부터 해남 대흥사에서 노스님들을 제치고 강백을 할 정도로 실력가여서 30대 중반에 백련사 주지가 된 혜장 스님은 승려이면서도 유학, 특히 주역에 능통해서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인근 강진, 장흥, 해남의 선비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도 백련사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혜장은 천하의 다산을 몰라보고 거침없이 주역을 떠들다가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서야 그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며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강진으로 유배 온 처음 8년 동안은 강진만 포구 주막집에서 주민들의 눈총을 받으며 지내다가 호남의 명문가이자 외가인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만덕리 귤동마을로 옮긴 다산은 음력 1805년 4월 17일 혜장과 운명적인 만난 이후 매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800m의 산길을 오가면서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혜장은 10살 위인 다산을 스승 겸 글벗으로 깍듯이 모셨지만, 어디까지나 서로가 가르침을 주고받는 학문적 관계로서 다산은 혜장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치고, 혜장은 다산에게 선(禪)과 다도를 가르쳐주었으며,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즐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정약용에게 다산이란 아호 이외에 거처하는 집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별칭을 붙이게 된 것도 이 무렵인데, 다산은 혜장에게 아암(兒庵)이란 별호를 지어준 것은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혜장이 아이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혜장은 제자들이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을 만큼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불가의 큰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음주로 40살에 죽었다. 다산은 혜장이 죽자 만시(輓詩)와 제문(祭文) 그리고 탑명(塔銘)을 지어 그와의 우정을 그렸다. 혜장의 다비식에 다녀온 후 쓴 다산의 만시는 아래와 같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책 자주 읽었고/
구가(九家)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동백과 야생차로 유명한 백련사는 템플스테이와 함께 여연 주지 스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다도교육을 하며 중생들과 만나고 있다.
백련사 대웅보전
내부
백련사 삼성각
백련사 삼성각
내부
백련사 육화당
백련사 명부전
백련사 명부전
내부
백련사 응진전
백련사 범종각
백련사의
연등을 단 나무 앞에서
이성수
백련사의
연등을 단 나무
백련사 아래에 있는
차밭
[백련사~다산초당] 구간
탐방로 주변의
새싹이 나온 나무들
[백련사~다산초당] 구간
탐방로 주변의
제비꽃
백련사 가는 오솔길에 관한
안내문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은
정약용과 혜장선사가
서로 오가며
만남을 반복한 길이다.]
다산 정약용의 지음자 혜장이 남긴 것은
한겨레 기사 등록일 : 2022-05-24
글 : 원철 스님/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선시종가1080 / 17. 책이 천권이요 술은 백병이라
(본문)
엽엽우발(燁燁優鉢)은 조화석쇠(朝華夕衰)요
편편금시(翩翩金翅)는 재지재건(載止載騫)이라
빛나는 우담발라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었네.
펄펄나는 금시조
잠시 앉는가 했더니 곧바로 날아갔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혜장(惠藏1772~1811)이 4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서 지은 탑명(塔銘)의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했다. 그를 삼천년만에 한번 피는 우담발라화이며 수미산까지 날개짓 한번으로 단숨에 날아가는 금시조에 비유했다. 고인에 대한 말 인심은 어느 시대나 후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혜장은 재주가 뛰어났다. <능엄경>과 <대승기신론>에 밝았다. 또 공자의 <논어>도 좋아했고 <주역>에 관한 안목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게다가 차를 잘 만들었으며 문장을 짓는 솜씨 역시 빼어났다. 저서에는 <아암집> 3권(1920년 간)이 있으며 탑비는 승탑과 함께 대흥사 입구 부도밭에 남아있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승탑 사이에 위치한다.
(해설)
나이를 잊어버린 친구관계를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아암 혜장(兒巖 惠藏, 1772~1811)이 그랬다. 십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남 해남 화산면 출신인 혜장은 1805년 가을 땅끝으로 유배온 다산과 처음으로 만났다. 다산은 혜장을 만나고서 ‘말세 인심이 야박하고 비루한데 요즘도 이렇게 진솔한 사람도 있구나’라고 하면서 엄청 고마워했다. 유배지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혜장은 당대 제일 지식인인 다산을 만날 수 있었고 다산 역시 아무도 없는 유배지에서 격조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다산은 주변과 어울리지 못할만큼 고집스러운 혜장을 향해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유순해질 수 없는가”라는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서 혜장은 그 자리에서 아암(兒庵)이란 호를 스스로 지어 부를 만큼 믿고 따랐다. 그렇다고 해서 성질머리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집에서는 이미 연파(蓮坡)로 불리고 있었다. 혜장이 입적한 다음날 쓴 만사(輓詞 만장 글)에는 “관어각(觀魚閣) 위에는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廂房)에는 술이 백병이네”라고 하면서 혜장의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글까지 남길 만큼 격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음다흥(飮茶興) 음주망(飮酒亡)’도 다산의 명언이다. ‘차 마시기-건강에 아주 좋음’ 후에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인 ‘술마시기-건강에 매우 나쁨’를 기필코 댓구로 달아놓은 것도 뭔가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혹여 혜장에 대한 안타까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 말로 미루어 본다면 결국 혜장은 술 때문에 요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6년간 만남은 조선후기 승려와 유생의 단순한 개인적 만남이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 끊어지다시피한 차(茶)문화의 중흥을 알리는 문화사적인 대사건이었다. 뒷날 초의(艸衣1786~1866)선사와 추사(秋史1786~1856)선생으로 이어진 차 문화 계승도 결국 그 시작은 다산과 혜장이라 하겠다.
2022년 4월23일 대흥사에서 공식일정인 서산(西山1520~1604)대사를 추모하는 향례(享禮)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인근 강진 백련사를 들렀다. 늘 행사장 혹은 회의석상에서 잠깐 잠깐 뵙는 것으로 만족했던 보각 대화상을 주석처까지 찾아가서 제대로 인사를 올렸다. 불교 복지학계의 선구자이며 복지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은 뒤 백련사 주지로 만덕산을 지키고 있다. 현재 복지계에 몸을 담고 있는 승려들의 대부분이 스님의 제자들이라 하겠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까닭에 교계에서 가장 상금이 많고 권위있는 ‘만해상(萬海賞)’ 실천부문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차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백련사(白蓮寺)의 제일 콘텐츠인 다산 선생과 혜장스님의 인연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따끈따끈한 신간 <역주 만덕사지(譯註 萬德寺志)>(2021년 간) 한 권을 방문선물로 받았다. 돌아와서 차근차근 살폈다. 그 책의 관계자인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전체 감수는 당연히 다산 몫이다. 편집자로 이름을 올린 학림이청(鶴林李晴1792~1861 이학래)은 정약용의 제자로 다산초당 아랫마을 귤동 출신이며 아전(衙前)인 하급관리의 아들이다. 다산을 제외한다면 유일한 재가자(在家者)이다. 하지만 신분이 세습되며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서리(書吏)집안인 중인출신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에 대한 욕심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에도 집착했다. 다산은 그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을 때 받게 될 상처를 늘 걱정했다. ‘이청이 망령되이 과거를 보려 하므로 말렸지만 듣지를 않는다“는 내용을 다른 이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언급할 정도였다.
<만덕사지>편집에 관여한 스님들은 대부분 혜장의 제자들이다. 기어자굉(騎魚慈宏) 철경응언(掣鯨應彦) 백하근학(白下謹學)등이 편집과 교열에 참여했다. 비슷한 시기에 편집된 <대둔사지(大芚寺志)>에도 수룡색성(袖龍賾性)과 기어자굉이 가담하였다. 특히 수룡색성은 혜장의 제자 중에서 가장 기개가 뛰어났으며 화엄경을 섭렵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보(杜甫712~770)의 시(詩)까지 배운다는 칭송을 다산에게 받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또 차를 잘 만들었고 혜장과 다산 사이의 차심부름까지 맡았다고 한다. 혜장이 입적했을 때 다산은 기어자굉에게 ‘곡하며 혜장의 영전에 산에서 나는 과일과 술 한사발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승속을 뛰어넘는 사제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철경응언은 혜장의 의발을 전해 받은 제일제자였다. 그에 대하여 다산은 “고래꼬리에 붙여도 얽매이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고래(鯨)는 아이처럼 묶여서 끌려(掣) 온다”고 하여 철경에 어울리는 인물평을 남겼다.
어쨋거나 다산과 혜장의 만남 이후 불가와 유가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대둔사지> <만덕사지> 편찬작업으로 이어졌다. 대둔사는 현재 대흥사로 부르고 만덕사는 백련사로 불리운다. 절 이름도 앞서 사용하던 명칭으로 다시 바뀌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붓다의 그 말씀을 다시금 되뇌이게 한다.
천일각과 백련사 가는 길에 관한
안내문
[길절] ’밤 깊도록 문 열어 둔 백련사’ 혜장과 다산
불광미디어 기사 승인일 : 2022.01.26.
글 : 최호승
길[道]은 여러 갈래입니다. 행복을 찾는 길, 즐거움을 좇는 길, 나아가 깨달음을 구하는 길 등등. 어찌 보면 여행이고 수행이자 순례이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둘러 길 걸으면서 절에 들러보는 여행이자 순례길을 걷습니다. 발이 젖으려면 물가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광미디어가 아름다운 길 찾아 절로 함께 걷습니다.
강진 백련사와 다산의 연결고리
애초 강진 백련사 동백을 보러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백련사엔 붉은 동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암 혜장(兒巖 惠藏, 1772~1811) 스님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우정이 깊게 배어있었다. 강진은 다산의 유배지였다.
그래서 ‘유배길’이 있다.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다산수련원 → 다산초당 → 백련사동백림·백련사 → 철새도래지 → 남포마을 → 이학래 생가 → 사의재 → 영랑생가로 걷는 15km 코스다. 굳이 코스를 나누자면 다산초당 ↔ 백련사로 코스를 잡았다. ‘오매 단풍 들것네’,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대표작을 남긴 시인 김영랑의 생가는 다음을 기약했다.
들머리는 백련사, 여기서부터 다산초당까지는 1km 남짓한 숲속 오솔길이다. ‘다산과 혜장 스님 우정의 오솔길’ 혹은 ‘백련사 우정길’이라 멋대로(?) 이름 붙였다. 우선 스크롤 압박 주의!!
붉은 동백만 있는 게 아니더라
백련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막 지나면, 동백나무숲이 펼쳐진다. 길 양쪽 옆으로 울창했다. 한겨울 오전에 내리는 볕은 동백나무 이파리의 초록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눈부시게 길을 밝혔다. 이파리 틈을 뚫지 못한 볕은 그림자를 짙게 만들었고, 이 절묘한 인연의 조화가 눈을 즐겁게 했다. 붉은 동백꽃만 눈에 띄었다면…. 1월 초, 너무 이르게 찾았다. 해탈문 지나 조금 걷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다.
혼자 걸었다. 길에 깔린 낙엽, 길 위를 터널처럼 만든 초목,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들, 겨울 볕과 나무가 길 위에 그려놓은 그림자, 길옆에 우거진 대나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길 위에 있었을 법한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두 사람 스쳐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폭은 혼자 걷기에 아늑했다. 경사가 야트막해서 고생스럽지도 않다. 게다가 소나무, 비자나무, 차나무 등 자생하는 초목이 천연림을 이루고 있어 눈이 청량해진다. 뒤에 알아보니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단다.
차가운 공기를 허파 깊숙이 밀어 넣으며 오르는 길 끝, 정자 하나가 멀리 보였다. 해월루였다. 역광으로 들어오는 볕 때문에 화려한 후광이 감싸고 있었다. 홀린 듯 가서 정자에 오르니, 강진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혜장 스님도 다산도 이곳(그땐 이 정자가 없었겠다)에서 함께 강진만을 봤으려나. 해월루는 후련함이 느껴지는 뷰 맛집이다. 카메라에 담아 보려 했지만, 역광이 말썽이었다.
붉은 동백보다 진한 우정
“봄이 됐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련사에는 벗 혜장 스님이 있었고, 찾아갈 참이었다. 벗이 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 스님은 다산에게 목마름을 해갈하는 감로수였다.
“우연찮은 해우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혜장 스님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 중)
혜장 스님에게도 다산은 도반이었다. 스님은 해남 대흥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고, 다산과 배움을 주고받았다. 다산 역시 혜장 스님의 학식에 놀라 스님을 선비처럼 대접했단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았고,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겼다. 비 내리는 깊은 밤에도 기약도 없이 서로를 찾아, 절도 초당도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단다.
혜장 스님이, 다산이, 벗을 찾아서 혼자 걸었을 모습을 상상했다. 같이 걸었을 땐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그 우정의 깊이를 헤아리기 벅차다.
강진에 유배 4년, 1805년 다산은 백련사에서 밤을 지새운다. 고독? 아니다. 토론 탓(?)이다.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찾아가 『주역』과 『역경』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단다. 다산은 혜장 스님을 만나자마자 경학에 밝은 식견을 찬탄했고, 혜장 스님도 다산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혜장 스님은 동문 밖 주막집에 머무는 다산에서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기도록 주선하기도 했단다. 이 무렵 펜팔을 했다.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 엮은 게 『견월첩(見月帖)』이다.
자료를 보다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문 게 해남 윤씨 자제들을 가르치려던 뜻도 있었지만, 당시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 옛 오솔길이 지금보다 거칠었겠지만, 40분 정도면 서로에게 닿을 수 있으니 그럴만했다.
가슴 아파도, 목이 메어도
사실 혜장 스님보다 다산이 10살 형이다. 유가의 경학자와 불교의 출가수행자라는 차이도 있었다. 그런데도 둘은 벗이 됐다. 파격적인 사이인 셈이다. 혜장 스님은 대흥사에서 29살 나이에 강백(講白, 경론 가르치는 강사의 존칭)을 지냈다. 당시 유가와 도가에도 관심이 많았던 대흥사 가풍에서 정진한 스님에게 경학에 밝은 학자 다산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겠다. 혜장 스님에게 ‘부드럽기가 어린아이 같이하라’는 의미로 호 ‘아암(兒庵)’을 지어 준 사람이 다산이다.
혜장 스님은 대흥사에 있던 초의(草衣, 1786~1866) 스님과 다산의 교유를 주선했다. 초의 스님은 혜장 스님을 통해 1809년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만났고, 혜장 스님이 입적한 뒤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고 한다. 나중에 초의 스님이 조선의 사대부와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유학적 터전은 다산에게 받은 셈이다.
지금, 여기 그러니까 이 우정의 길은 혜장 스님과 다산의 애틋한 사연 그리고 백련사에 들러 다산을 보러 가던 초의 스님의 자취가 담긴 길이다. 특히 혜장 스님과 다산이 서로가 그리워 하루가 멀다고 오갔고, 한참 정담을 나눈 후 밤늦게 돌아와서도 다시 가서 보고 싶을 정도였단다.
운명이었다. 혜장 스님은 39살, 일찍 입적했다. 가슴 아파도, 목이 메어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다산은 몹시 슬퍼했단다. ‘아암(兒巖) 장공(藏公)의 탑명(塔銘)’을 써서 스님을, 벗을, 도반을 기렸다. 다산은 이 글에 스님을 처음 만나 『주역』을 논하던 광경을 선명하게 글로 썼다.
다산초당을 서성이다
이래저래 우정을 곱씹다가 불현듯 오른쪽에 건물들이 보였다. 왼쪽에는 정자 하나가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안내판을 살폈다. 천일각이었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이다. 다산의 유배 시절에는 없었단다. 정조와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땐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으리란 추측으로 강진군이 1975년 세운 정자였다.
미련 없이 동암(東庵)으로 내려갔다.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000여 권의 책을 갖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은 건물이다.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 시간을 동암에 머물며 집필했다고 한다.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을 적은 『목민심서』가 완성된 곳이다.
조금 더 내려가니 아늑한 공간에 못과 한옥 하나가 보였다. 못은 ‘연지석가산’, 한옥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사실 다산초당보다 연지석가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산초당의 고즉넉함을 더해주는 연지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서 있는 돌탑을 가리킨다.
백서사건에 연루된 다산이 한양에서 1,000리나 떨어진 강진으로 유배와 지낸 곳이다. 강진에서 처음 머문 공간은 아니다. 주막 할머니 배려로 강진읍 동문 주막집 뒷방에서 지냈단다. 절집, 제자의 집 전전하다 1808년 외가인 해남 윤씨가 마련해준 초당에 거처를 정했다. 이 초당이 다산초당이다.
노모와 함께 온 딸이 연신 사진을 찍었다. 노모는 동암 위치와 백련사 가는 방향을 물었다. 반대로 걸어온 터라 친절히 안내해 드렸다. 다산초당은 멋들어진 한옥 건물이었다. 후에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草堂)으로 다시 지을 계획이란다.
백련사를 서성이다
동백숲, 이파리 틈 파고들어 땅에 떨어진 볕이 보석처럼 빛났다. 백련사로 들어가는 길 곁에 놓인 여러 돌탑(이건 못 참아!)도 보석 같았다. 맘 급해 먼지 꽃 피운 붉은 동백하나 발견한 설렘 안고 백련사에 발을 들였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이었다. 스님의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맘 급해 먼저 꽃 피운 붉은 동백하나 발견한 설렘을 안고 백련사에 발을 들였다.
대웅보전 안에서 백련사의 시간이 흐를 때, 시선은 현판에 붙잡히고 말았다. 조선 3대 명필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이었다. 사람이 걷는 듯한 대(大) 자, 사람이 웅크린 듯한 웅(雄) 자는 대웅보전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대 국사 무역(801~888) 스님이 산 이름을 따서 만덕사(萬德寺)로 산문을 열었다고 알려졌다. 백련사를 중창한 국사 요세(1163~1245) 스님이 주창한 백련결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도량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시기, 정치와 종교는 제 기능을 잃었고 몽골과 왜구 침략으로 피폐해진 민중의 삶에서 희망을 열고자 벌인 게 백련결사였다. 민중과 함께 참회와 염불 수행으로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이었다.
또 하나! 백련사는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불교에 귀의하고 입산한 사찰이라고 한다.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수륙재를 지내기도 했단다. 조선 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서울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우리에게 익숙한 서산 대사, 즉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의 의발을 받은 스님 8명이 백련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시예불이 끝났다. 다시 대웅보전 편액을 올려다봤다. 사람이 걷는 듯한 대(大) 자, 사람이 웅크린 듯한 웅(雄) 자…. 백련사가 역사로 증명한 불교의 역할이 아른거렸다.
벗이 그리울 땐, 문 열어두자
3월 말이면 백련사에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는 동백의 꽃말, 백련사에는 그 붉은 동백꽃만 있는 게 아니더라. 우정길에는 혜장 스님과 다산의 서로를 향한 그리움과 설렘이 걸음마다 뚝뚝 묻어났다. 기약 없이 찾아올 벗을 위해, 밤 깊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둘 일이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 『견월첩(見月帖, 혜장과 다산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 중
백련사 우정길 여정
코스 : 강진 백련사 주차장~일주문~해탈문~동백숲~해월루~다산초당
거리 : 왕복 약 2km
시간 : 왕복 1시간 10분
천일각
다산 정약용의 서체로 재현한
동암의
[다산동암]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동암의
[보정산방]
동암에 관한
안내문
동암
다산초당 옆에 있는
연지 석가산
다산초당 옆에 있는
연지 석가산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 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 밖에도 다산선생이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초당에 관한
안내문
다산초당에서 쓴 편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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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정약용이
돌에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이란 글에 관한
안내문
정약용이
돌에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이란 글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도중의
편백나무 숲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도중의
해남 윤씨 귤동 종중 영모당
해남 윤씨 귤동 종중 영모당의
표지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도중의
귤송당에 관한 안내문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도중의
귤송당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주변의
대나무 숲
[다산초당~다산 박물관] 구간
탐방로 주변의
홍매화
다산 박물관
다산 박물관 앞에 있는
정약용 동상
다산 박물관 앞에 있는
정약용 동상
다산4경에 관한
안내문
다산 박물관 앞에 있는
수원 화성 조형물
2023년03월28일(화요일) 전남 강진군 [석문산(石門山)&만덕산(萬德山)] 산행기 회비 46,000원 2월27일 포인트 결제 완료, 28번 좌석 산 : 전남 강진군 [석문산(石門山)&만덕산(萬德山)] [강진 만덕산(萬德山)은 다산초당과 백련결사로 유명한 백련사가 있어 문화유적지 답사를 겸한 산행지로 좋다. 그동안 만덕산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네 뒷산처럼 높지도 않고 크게 도드라져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덕룡산(433m)과 주작산(428m)이라는 빼어난 명산이 곁에 있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만덕산에 발을 들여놓으면 깜짝 놀랄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아기자기한 암릉은 물론이고, 바다와 인접한 조망도 걸출해 숨은 보석을 찾은 기분이다. 게다가 2016년 7월 2일, 만덕산과 석문산을 연결하는 110m 길이의 현수교(구름다리)가 개통됨으로써 이제는 만덕산~덕룡산~주작산~두륜산~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 중 단연 ‘명품 구간’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산행코스: [소석문~석문산~세종바위 포토존~‘사랑+ 구름다리’~노적봉 전망대~각재~바람재~만덕산~백련사~다산초당~다산 박물관~다산박물관 주차장] (약 10.5km) 일시 : 2023년 03월 28일(화요일) 날씨 : 연무가 낀 날씨 [강진군 도암면 최저기온 1도C, 최고기온 19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18분 소요) 07:03~11:43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양재역 1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산 92-4 번지에 있는 소석문으로 이동 (385km) [4시간40분 소요] [소석문에는 남녀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11:43~12:11 전남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산 92-4 번지에 있는 소석문에서 산행 출발하여 석문산(283m, 石門山) 정상으로 이동 [석문산 정상은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서 360도 파노라마 조망이 불가하다.] 12:11~12:15 사진촬영 12:15~12:44 석문공원에 있는 세종바위 포토존으로 이동 [세종바위 포토존에서 세종대왕(탕건) 바위와 큰바위 얼굴 바위를 볼 수 있다.] 12:44~12:46 사진촬영 12:46~12:50 ‘사랑+ 구름다리’로 이동 [석문산과 만덕산을 잇는 산악형 현수교 출렁다리인 ‘사랑+ 구름다리’는 지난 2016년 7월 개통했다. 길이 111m, 폭 1.5m인 구름다리 양 끝에는 하트 모양의 게이트 겸 포토존 조형물이 설치돼 있어 아름다운 풍광과 추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다리 바로 옆에는 노적봉의 다른 이름인 견우직녀봉이 있다. 노적봉 전망대에서 석문산 주변의 기암괴석과 ‘사랑+ 구름다리’와 석문공원의 물놀이장을 조망할 수 있다.] 12:50~12:56 노적봉 전망대로 이동 12:56~12:58 사진촬영 12:58~14:46 각재로 이동 14:46~15:03 바람재로 이동 15:03~15:40 만덕산(萬德山) 정상인 깃대봉(408.6m)으로 이동 [만덕산 정상을 기준으로 북쪽에 임천 저수지와 그 뒤로 멀리 영암의 월출산이, 북동쪽에 강진군청 앞을 흐르는 탐진강이, 동쪽에 강진만 건너 장흥의 부용산이, 동남쪽에 장흥의 천관산과 강진만의 섬인 가우도가, 남쪽에 백련사와 그 뒤로 다산초당이, 남서쪽에 덕룡산과 그 뒤로 해남의 두륜산이, 서쪽에 해남의 만대산과 금강산이, 서북쪽에 강진의 서기산과 그 뒤로 해남의 흑석산이 위치한다.] [깃대봉 정상석 왼쪽에 '청렴봉' 이라는 표지석이 또 하나 있다.] 15:40~15:45 사진촬영 15:45~16:09 만덕산 백련사(白蓮寺)로 이동 [만덕산 백련사는 천년 고찰로서보다는 동백나무 숲과 야생 차나무 숲, 그리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 1772~1811) 스님의 차(茶)에 얽힌 끈끈한 우정으로 더욱 유명하다. 먼저, 백련사 동백 숲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 여수 오동도 동백과 함께 국내 3대 동백 군락지로 손꼽히며, 약 7000그루의 동백은 울창한 숲을 이룬다(천연기념물 제151호).] 16:09~16:19 백련사를 탐방 16:19~16:35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이동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 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 밖에도 다산 선생이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茶山四景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16:35~16:41 다산초당을 탐방 16:41~16:54 다산박물관으로 이동 16:54~16:59 사진촬영 16:59~17:01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94-2 번지에 있는 다산박물관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한 곳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이에 강진에서의 다산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진군에서 다산기념관을 개관하였다. 다양한 다산 친필 간찰과 제자들의 유물들을 통해 강진에서 다산의 학문과 성과를 느낄 수 있다. 성인기준 관람요금은 2천원이다.] 17:01~17:20 휴식 17:20~21:25 "좋은사람들" 버스로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94-2 번지에 있는 다산박물관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380km) [4시간5분 소요] [석문산&만덕산] 등산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