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들은 왜 ‘팝뽕’에 취했나
*팝뽕: ‘크레용팝의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칭하는 팬들의 은어.
by 댄싱인더문라잇
2014.1.25.
2012년 10월 26일, <댄싱 퀸>의 충격
‘10월 26일’이란 날짜를 소쉬르 이론에서의 기표(記標·시니피앙)로 생각해 보자. 그 기의(記意·시니피에)는 무엇이 될까? 내게 그것은 세 가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의거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 그리고 세 번째는 2012년 10월 26일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KBS 음악방송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방송됐다.
“댄스 댄스 춤을 춰요 그대.”
간결하고도 단호한 도입부가 흐른다. 젊은 여성 다섯 명이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오른손 손가락으론 위에서부터 아래로 허공을 네 번 찌른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가요사(歌謠史)를 쓸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이 날을 특별한 날짜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이돌 그룹이 가요 시장에서 주축을 이루며 한류(韓流) 열풍을 이어간 지 오래인 상황. 붕어빵 찍어내듯 나오는 이두박근 보이그룹과 섹시 콘셉트 걸그룹들이 경쟁하는 그 시장에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아이돌’ ‘걸그룹’이라는 어휘를 철저히 반어화(反語化)한 채 오직 본질만으로만 승부하겠다는 새로운 아이돌의 모습이 등장한 날이기 때문이다.
크레용팝의 <댄싱 퀸>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전에 첫 곡 <새러데이 나잇>을 야심차게 발표했으나 철저히 ‘말아먹고’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무명 걸그룹이 두 번째로 발표한 <댄싱 퀸> 첫 방송은, 그야말로 경악과 전율의 현장이었다.
먼저 그들의 의상은, 다섯 명이 모두 위아래 똑같은 색상의, 표기 원칙에 따르면 마땅히 ‘트레이닝복(服)’이 되겠으나 일상 언어 사용에서는 ‘추리닝’인 옷이었다. 그것도 국군의 내무반 생활복과 같은 주황색 추리닝이었다. 철저히 ‘활동성’에 초점을 맞췄을 뿐, 크레용팝 이전에는 연예인의 무대 의상으로 꿈도 꾸지 못했을 그 옷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귀까지 덮는 흰색 털모자와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복장만이 아니었다. ‘발차기 춤’에서 ‘고독 춤’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다채로운 안무로 가득 채워진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들은 모든 동작이 절도 있게 들어맞는 이른바 ‘칼 군무(群舞)’의 진수를 보여준다. 마치 결전의 장(場)에 선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이번이 살아생전 마지막 무대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의 표정은 웃고 있을 때조차 빈틈없는 긴장과 결의를 드러낸다. 소율은 노래를 부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웨이의 뺨에는 땀방울이 흐른다. 손을 치켜든 채 눈을 감고 길게 뽑아내는 초아의 목소리엔 구한말 판소리 5명창의 SP판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귀기(鬼氣)마저 감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그 2분 40초의 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작년 가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모든 노래의 장르마다 ‘고독한 개인의 결단과 성찰을 담은 곡’이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영화 주제가 중에서는 <원탁의 기사>였고, 가요 중에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으며, 팝송 중에는 비틀스의 <길고도 험한 길(The Long and Winding Road)>이었으며, 군가 중에선 <행군의 아침>이 될 것이며, 걸그룹 노래 중에서는… 바로 크레용팝의 <댄싱 퀸>이 되겠습니다.”
이런 기막힌 노래에 저런 놀라운 안무라니! 과연, 이 방송을 위한 무대 리허설이 끝나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방송사와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했다고 전해진다.
사회의 쓴 맛 겪었던 ‘을(乙)중의 을’
그들 다섯 명이 함께 모인 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제 그들의 삶을 복기하기 위해선 다큐멘터리 영화와도 같은 도입부가 필요하다. 밑바닥에서부터 고난의 사다리를 차곡차곡 밟아 올라간, 미솔로지(mythology)보다는 사가(saga)에 가까운 이야기 말이다. 다섯 명의 소녀가 있었다.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다른 연예인처럼 십대 시절부터 화려하계 그 세계에 입성(入城)할 형편은 되지 못했다.
춤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백보람(1988년생)은 부친의 병환 때문에 꿈을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며 가장 노릇을 한다. 피부과 간호사라는 말로 통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낭분리사’라는 희귀 직업이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될 무렵 우연히 크롬엔터테인먼트라는 신생 기획사의 오디션을 보고 합격한다.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는 2013년 10월 30일 크레용팝의 첫 국내 콘서트 ‘퍼스트 팝콘 인 서울’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당당히 말해 큰 박수를 받는다. 늘 큰언니와도 같은 마음 씀씀이로 다른 멤버들을 챙겨주는 수퍼 갑(甲) 외모 ‘금미’(호칭 당주)다.
어린 동생들과 함께 대구 인근 시골의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 김민영(1990년생)은 성인이 되자 쇼핑몰 피팅 모델로 일한다. 역시 우연히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지만 ‘백으로 들어왔다’ ‘외모로 들어왔다’는 질시를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는 여기서 좌절하거나 그만두지 않는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연습을 거듭한 끝에 정식 멤버가 된다. 마네킹 같은 도도한 외모지만 사투리와 허술한 언동(그래서 ‘엘구’라 불린다), 귀여운 실수 같은 반전매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는 미소천사이자 힐링천사인 ‘엘린’(호칭 여신)이다.
가수와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허민진(1990년생)은 ‘대학에서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검정고시를 거친 뒤 천신만고 끝에 서울예대 연기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휴학한 뒤 한 쇼핑몰에 입사해 고객상담 업무를 맡는 곡절을 거친다. 오디션에 합격해 회사를 그만두자 개그맨 출신의 쇼핑몰 사장은 “민진이는 꿈을 쫓는 친구라는 걸 난 알고 있었다”는 진심어린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남성팬이 줄을 서는 블랙홀 매력의 소유자 ‘초아’(호칭 공주)다.
고교 시절 한 포털사이트의 ‘얼짱’으로 뽑힌 박혜경(1991년생)은 2010년 일본 프로듀서의 한일합작 기획으로 탄생한 촉망받는 걸그룹의 일원이 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글로벌 신인스타 프로젝트’의 후보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돌연 걸그룹 기획 자체가 공중분해되면서 수렁에 빠진다(현재 크레용팝 팬사이트에서는 이 걸그룹의 명칭이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말해서는 안 되는’ 이름이다. 본인의 마음의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2012년, 다시 신생 기획사의 오디션을 보며 ‘신인’으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크레용팝의 귀여운 막내 ‘소율’(호칭 요정)이다.
이들 네 명이 투입돼 만들어진 5인조 걸그룹이 2013년 1월의 ‘허리케인 팝’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려 했으나, 멤버 한 명이 전격 이탈하면서 한 차례 위기를 겪는다.
이때 등장한 ‘크레용팝의 링고스타’, 즉 마지막 멤버가 허민진의 쌍둥이 동생 허민선(1990년생)이다. 고교 시절 친구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간 아이를 혼내 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던 그 역시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 실용음악학원의 보컬트레이너 강사와 ‘엔돌핀’이라는 인디 밴드의 보컬 활동을 한다. 당시 자작곡 ‘택시 안에서’를 지금 들어 보면 잔잔한 일상의 한 순간을 보석처럼 담아내는 정서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크레용팝의 마이크 담당이자 ‘먹방’ 담당, 통통한 볼살과 글래머 몸매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웨이’(호칭 총수)다.
다섯 명 모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다 대형 기획사의 눈에 띄어 벼락 스타가 된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이미 사회의 쓴맛을 겪을 만큼 겪었던 ‘을(乙) 중의 을’이었다. 훗날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길거리 공연 강행군의 강인한 정신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앳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걸그룹치고는 많은 나이에 출발했지만 그만큼 풍부한 경험을 통한 내적 성장이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은, 결코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으며, 끊임없이 도전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걷지 않았던 길로 발을 딛다
2012년 7월 18일은 크레용팝의 공식 데뷔일이었다. 첫 번째 미니 앨범을 발표한 날이지만, 데뷔곡 <새러데이 나잇>의 음악방송 출연은 그보다 하루 전인 7월 17일이었다. 신생 기획사인 크롬엔터테인먼트는 수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여러 버전으로 완성했다. 콘셉트는 ‘복고풍의 디스코 음악’으로 잡았다. 이들은 마치 1980년대 강남 나이트클럽의 의상을 연상시키는 대단히 화려한 색채의 복고풍 의상을 입고 나왔다. ‘DJ 춤’ ‘캥거루 춤’ ‘쇼트트랙 춤’이 곳곳에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는 이 노래는 지금 봐도 무척 다채롭고 복잡한 안무가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별처럼 많은 걸그룹 중에서 한눈에 시선을 잡을 ‘그 무언가’가 없었다. 만약 그 당시 잘 알려진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다면 크게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인 가수와 백댄서가 잘 구분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대중은 많지 않았다. 멤버들은 지금도 “이 때가 가장 어려웠다. 정말 가수 활동을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회고한다.
크롬엔터테인먼트의 젊은 사장이자 ‘크레용팝의 창시자’인 황현창 대표도 여기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광고 관련 일을 했던 그도 연예계에선 초짜였다. 그런데 모든 초짜들의 장점은 ‘남들이 전혀 걸어 간 적이 없는 길’에 거침없이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팬들로부터 ‘갓현창’ ‘제갈현창’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런 그도 당시에는 벽에 부딪쳐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콘셉트를 바꿔야 살아남는다. 그저 예쁘기만 한 걸그룹으로선 차별화될 수도, 생존할 수도 없다.’ 대략 이렇게 결론을 내린 황 대표는 처음에는 ‘트로트 의상’을 입힐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의상은 실제로 제작됐고,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민 멤버들의 사진이 남아 있다. 이것은 크레용팝의 흑역사(黑歷史)가 된 채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 다음 내놓은 의상이 바로 지금까지도 크레용팝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불멸의 콘셉트이자, 수많은 팬들의 의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추리닝이었다. 명색이 아이돌인 걸그룹이 그 옷을 입고 대단히 격렬하고도 독특한 노래와 안무와 함께 방송에 컴백한 2012년 10월 26일이 어찌 충격과 경악의 날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밤은 깊어가는데 나 어쩌나/ 나 지금 격하게 우울해 우울해/ 아무도 날 찾지 않는 이 밤/ 혼자선 외로워요 (워어)/ 아 진짜 신나는 일 없을까/ 불타는 금요일에 밤밤밤/ 베이비 빠라바빠빠 댄싱 인 더 문라잇/ 쏟아지는 별빛 아래 앗 뜨거운 밤에….”
훗날 KBS <힐링투어 야생의 발견>에 출연한 크레용팝 멤버들은, 이 노래에 등장하는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눈을 감고 몸을 흔드는 ‘고독 춤’을 자기들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안무라고 밝힌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어두운 밤과도 같은 시절, 바로 그들 자신의 정서가 투영된 춤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이 춤을 추는 그들의 표정은 로댕의 조각이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그들이 이것까지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들의 콘셉트는 철저히 ‘가수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혁명적인 선언인 동시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결의(決意)였다. 니체가 말했듯 세계의 본질이 이성(理性)이 아니라 의지(意志)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강화해 가는 의지이자 억센 삶에 대한 긍정이다. 그들이 의지를 통해 세상에 보인 ‘본질’이란 무엇인가. 춤과 노래다. 그것이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댄스가수의 본질이다. 그러기 위해 비본질적(非本質的)인 모든 것들은 생략된다. 의상? 위아래를 주황색 추리닝과 운동화로 통일한다. 헤어스타일? 보지 말라. 털모자를 덮어쓰겠다. 이것은 사실상의 삭발(削髮)이었다. 오직 우리가 피땀 흘려 연습하고 준비한 춤과 노래를 보라!
한겨울 길거리 공연에 뛰어들다
2012년 10월 26일의 방송 출연은, 그러나 안온한 아이돌로서의 삶이 아니라, 눈 덮인 험난한 고산준령을 맨발로 넘어야 하는 대장정의 출사표였다. <댄싱 퀸>의 음악방송 출연은 단 3회로 종결된다. 호피무늬 추리닝을 입고 나온 11월 10일 MBC <쇼! 음악중심>이 두 번째 출연이었다. 크레용팝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의상, 추리닝 바지를 입은 위에 고교 교복을 입은 이른바 ‘교리닝’ 의상을 선보인 11월 16일 KBS <뮤직뱅크>가 세 번째였다. 이날 노래 끝 부분에서, 크레용팝은 돌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이것을 흔들며 흐트러진 스텝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옛 DJ들이 췄다는 전설의 ‘판춤’이었고, 손에 든 것은 바로 자기들 <댄싱 퀸> CD였다. 어떻게든 홍보를 해 보겠다는 눈물겨운 시도였으나, 이 방송사고에 가까운 ‘거사’는 <댄싱 퀸>의 막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송 출연이 막혀버린 이들의 선택은… ‘길거리 게릴라 공연’이었다. 그것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결의의 극한(極限)이었다.
흔히 알려진 얘기는 황현창 대표가 ‘놀면 뭐 하냐, 게릴라 콘서트라도 하자’고 했다는 것이지만, 결코 그렇게 한가해 보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추리닝 속에 은장도를 품지 않았다 뿐이지 이것은 매일 펼치는 공연마다 마지막 공연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춤을 추고 노래하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출정식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실 첫 게릴라 공연을 시작한 날이 바로 ‘댄싱 퀸’의 첫 방송 출연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음 해인 2013년 2월까지, 그해 겨울은 혹독한 한파가 이어졌다. 그 날씨에 얇은 추리닝만 입은 채 길거리 인파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걸그룹 크레용팝’ ‘크레용팝 댄싱퀸’이라고 적은 커다란 팻말과 확성기를 들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펼쳤다. “자, 얼굴에 철판 깝니다! 슝~”이라고 말하는 순간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다 잊었다. 명동, 신촌, 대학로, 강남역, 잠실, 홍대앞…. <강남 스타일>의 커버댄스 공연에 무작정 끼어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산타 복장을 입고 캐럴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회고한다. 정말 괴로웠던 것은 추위도 피로도 아니라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고 말이다. 쟤들 뭐냐, 가수 맞느냐, 춤이 웃긴다….
크레용팝 공식 팬사이트(공싸)에 2012년 12월의 크레용팝 스케줄이 올라온 적이 있다. 방송 출연은 물론, 그 흔한 행사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빈 칸은 없다. 길거리, 길거리, 길거리…. 바뀌는 거라곤 길거리 장소와 추리닝 색깔뿐이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당시 쓸쓸한 신도림역 구내 한 귀퉁이에서 이들이 열심히 춤을 추는 동영상이 남아 있다. 지켜보는 관객 한 명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무심히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 영상은 2013년 11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서의 성공적인 게릴라 공연과 비교되는데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상황에서 똑같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두 장소 모두에서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추워도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춤출 수 있어 행복해요….’
크레용팝 팬들에게 ‘성지(聖地)’처럼 된 블로그 포스트가 있다. 자녀와 함께 2호선을 타고 가던 서울의 한 주부가 2012년 11월 3일에 올린 글이다. 주황색 추리닝을 입은 여성 다섯 명이 팻말을 들고 객차 안으로 들어와 공연을 펼친다. 현모(賢母)임이 분명한 이 블로거는 이렇게 기록한다. “처음에 시작은 미비하더라도, 결국 그녀들이 소망하는 것을 꼭 이루는 첫 번째 계단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말해 줬어요. 유명한 걸그룹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 저렇게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했던 결과라고…. 오늘 지하철에서 만난 크레용팝도 어느 날 팬들의 열광에 감사할 줄 아는 톱스타의 걸그룹이 되기를 저도 바래본답니다.”
그 블로거의 말이 맞았다.
2013년 여름, 마침내 그들의 땀은 그들의 꿈을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레용팝이 톱스타가 된 뒤, 그들을 따라하려는 걸그룹이 있었다. 추운 겨울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하지만 껍데기만 흉내냈을 뿐, 크레용팝 길거리 공연의 진정한 철학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의상, 헤어스타일, 무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한 채 가무(歌舞)의 본질만을 보여주겠다는 엔터테인먼트계의 순교자적 고행(苦行)의 정신 말이다.
‘팝저씨’의 탄생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2010년대 대한민국 전체로 볼 때 매우 주목할 만한 문화현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팝저씨’의 탄생이었다. ‘크레용팝 열성팬 아저씨’의 준말인 이 용어는 크레용팝의 매력에 빠져 그들의 의상을 따라 입고 행사장마다 몰려다니며 응원하는 20~50대 남성 팬을 지칭한다(입대 전의 학생 팬은 ‘팝생’이라 불린다). 그들의 등장에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크레용팝의 길거리 게릴라 공연 때, 그들과 똑같은 옷을 차려입은 아저씨 팬들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같이 따라다녀 줄게. 창피한 건 우리가 다 할 테니, 너희는 춤추고 노래하기만 하렴.”
과연 이 얘기가 믿겨지는가? 이것이 이 부박하고 삭막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궁금해진 나는 어느 날 취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이랬다. 토씨 하나까지 모두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의 <댄싱 퀸> 음방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크레용팝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013년 1월 25일 크레용팝이 <빙빙>을 발표하고 컴백한 이후, 이 팬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방송 카메라에 잡히기 시작한다. 크레용팝처럼 위아래 같은 색 추리닝을 입고, 황현창 대표가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크레용팝 TV’ 동영상에서 멤버들이 쓰고 나왔던 마릴린 먼로 가발을 쓴 아저씨들이, 다른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들과 더불어 방청석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팬덤의 규모는 점차 커졌다.
2013년 6월, 크레용팝이 드디어 <빠빠빠>를 발표하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때, 팝저씨들은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사람들이 “어떻게 걸그룹이 저런 노래를…”이라며 혼란스러워 할 그 타이밍에, 팝저씨들은 천연덕스럽게 방청석에 앉아 지금껏 음악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중저음의 목소리로 박자에 맞춰 힘찬 응원을 시작하는 것이다.
“백보람! 김민영! 허민진! 허민선! 박혜경! 크레용팝 빠빠빠!”
과연 대한민국 아저씨들답게 이 순서는 철저히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원칙을 지킨다. 쌍둥이조차 ‘언니’가 먼저다. 나는 이 응원소리에 대해 “실로 모뉴먼트 밸리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존 포드 서부극을 연상케 할 정도로 중후장대하고 위풍당당하며 우렁찬 목소리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겨레 기자 서정민은 “<우정의 무대>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굵은 함성과 응원구호, ‘떼창’이 들려왔다”고 표현했다. <새러데이 나잇> <댄싱 퀸> <빙빙> <빠빠빠> <꾸리스마스>까지 크레용팝 노래 다섯 곡에 모두 이런 응원법이 있다. 얼핏 거칠게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우 정교한 리듬감을 깔고 있다. 어느새 팝저씨들의 마릴린 먼로 가발은 <빠빠빠> 콘셉트에 맞춰 오토바이 헬멧이나 공사장 헬멧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로운 트렌드의 성공과 ‘폭풍 눈물’
헬멧과 개다리 춤, ‘직렬 5기통 춤’이란 이름을 얻은 엇박자 점핑 춤까지, 지금까지의 트렌드를 모두 뒤엎고 그 자신이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한 <빠빠빠>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은 냉혹한 가요 시장 경쟁에 단돈 30만원짜리 뮤직비디오를 안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크레용팝은 그 싸움에서 필경 승리할 것임을 예고했다. 8월 4일 방송된 KBS <출발 드림팀>의 걸그룹 머드레슬링 경기에서, 크레용팝의 막내 소율이 15cm는 더 키가 큰 다른 걸그룹 멤버와 맞붙어 끈질기게 버틴 끝에 승리를 거두고 팀의 우승을 가져온 감동적인 장면은 그 상징과도 같았다.
당초 가요 순위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던 <빠빠빠>는, 7월 12일 <유희열의 스케치북> 출연을 계기로 일대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된다. 한 팝저씨가 보낸 사연이 채택됐기 때문에 이뤄진 출연이었다. 유희열은 방송에서 그 편지를 읽었다.
“걸그룹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예쁜 옷을 포기하고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도 트레이닝복 한 벌만 입고 게릴라 공연을 다녔던 멤버들입니다. 처음에 보면 굉장히 웃긴 애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을 즐기면서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멤버들을 보면서 평균 나이 34세의 아저씨들이 울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적’이 시작됐다. <빠빠빠>는 각종 차트에서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왔다. 이것이 가요사에서 전무후무하다는 ‘역(逆)주행 차트’의 신화였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빌보드가 그들을 주목했고, 소니뮤직이 그들과 음반 계약을 맺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빠빠빠> 춤을 따라 하는 커버댄스 영상이 유튜브에 쑥쑥 올라왔다. 2013년 7월에서 8월 사이,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크레용팝이 차세대 한류 주자로 해외에 소개될 때마다 그들의 팬덤인 팝저씨가 함께 주목을 받았다. 그 와중에 터진 ‘일베’나 ‘표절’ 의혹 같은 일각의 질시와 모략도 함께 견뎌내야 했다.
운명의 날과도 같던 2013년 8월 30일, 그들은 마침내 KBS <뮤직뱅크>에서 대형 기획사 아이돌인 엑소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헬멧을 쓴 처자들이 트로피를 든 채 펑펑 눈물을 쏟았다. 마이크를 잡은 금미가 오열하며 말했다. 그건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한 아이돌에게서는 거의 들을 기회가 없는 말이었다. “저희가 길거리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 자리까지 팬심 주신 것,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팝저씨들도 함께 눈물을 훔쳤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울 수 있는 합당한 ‘권리’가 있었다.
아저씨들은 왜 ‘문화 현상’이 됐나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평소에 걸그룹이나 아이돌 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평범한 아저씨들조차 이 외계에서 떨어진 듯한 새로운 걸그룹에 열광하게 된 것일까? 그들의 삶의 계획표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돌 팬질’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등장하고, 음반과 굿즈(기념품)를 사 모으는가 하면, 전국 어느 곳의 행사가 있더라도 단 10분 남짓 펼쳐지는 공연을 보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는 것일까? 크레용팝 팬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중독’을 ‘팝뽕에 취했다’고 표현한다. ‘팝뽕’이란 크레용팝의 중독성 강한 매력을 지칭하는 크레용팝 팬 용어다.
팝저씨 중 한 명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노철중은 이렇게 분석한다. “걸그룹의 대세 콘셉트는 섹시다. 삶에 지친 아저씨들이 보기에 섹시함은 ‘욕망’의 대상이지 ‘행복’의 대상은 아니다. …대중가요의 콘텐츠 생산이 10~20대 위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행복을 갈망하는 세대들은 대중가요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크레용팝이 30~40대를 구원했다.”
행복이라니, 무엇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일까. 2013년 9월 28일 방송된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나온 팝저씨들의 인터뷰다. “밑바닥부터 일어났다는 것, 아이들이 힘들게 시작했던 만큼 그만큼 고생 많이 했다는 것. 그게 이 친구들의 매력인 것 같아요.” 고생을 했다는 것이 매력이다?
크레용팝과 콜라보 공연이 예정된 가수 김장훈과 2014년 1월 중순 통화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다 크레용팝은 좋아한다. 크레용팝은 지금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애들이 정말 건강하고 투명하더라! 어린 나이에 이 바닥에 들어오게 되면 아무래도 필터가 낄 수밖에 없는데 걔들은 굉장히 순수하더라. 계산을 하고 그런 게 안 보인다. 바닥에서부터 기어서 올라온 애들이다. 한겨울 게릴라 콘서트는 멘탈이 보통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대형) 기획사들이 아이돌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키워서 내놓는 연예계 풍토다. 그런 애들이 자생적으로 나올 수 있는 시기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나온 거다. 엄청난 희귀종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많은 ‘삼촌팬’들의 크레용팝에 대한 중독은, 물론 친숙한 복고풍과 B급 정서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들이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흘렸던 그 ‘땀’의 밀도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동화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훨씬 클 것입니다. 팬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한 발씩 올라오는 크레용팝의 모습에서 ‘을(乙)이 갑(甲)을 이기는’ 환희와 감격을 맛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그 길을 포기하려 했다면, ‘다른 길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여기서 ‘B급 정서’란 말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크레용팝의 노래와 안무에 대해 ‘B급’으로 규정하는 일부 평론가와 기자(그들 중에는 마치 정육점에서 고기 등급 나누듯 ‘B급 아이돌’이라는 거친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에 대해 반감을 지니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B급’은 이들의 실력이나 등급이 2류라는 뜻이 아니라, 이들이 의도적으로 ‘B급 정서’를 콘셉트로 삼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B급’이란 무엇인가? 메이저 연예계에 대한 마이너의 도전, 주류에 대한 비주류의 반격, 갑에 대한 을의 반란, 미리 정해진 듯한 결론에 대한 의외성의 역습, 숨 쉴 틈 없이 살아가는 빡빡한 일상 속 다른 방향의 제시, 갓길이 보이지 않는 생존경쟁의 흐름 속 숨통 트이는 힐링의 역할, 정격(正格)이 대다수인 사회 전체 분위기 속에서의 유쾌한 탈격(奪格), 정장과는 다른 캐주얼의 여유, 근엄함에 대한 골계(滑稽)와 해학(諧謔), 잘난척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의도적인 엇박자 콘셉트,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회 속에서의 복고와 엉뚱함, 긴장을 비웃는 편안함, '정통 학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현장 잔뼈'의 응답, 으스대고 뻐기는 사람들에 대한 '일부러 망가짐'의 선택, 혹독한 현실 앞에 굴복하지 않는 긍정의 미학, 걸그룹은 이래야 된다는 편견에 맞서 추리닝 교리닝 패션 입고 얼굴에 철판 까는 배짱, 일견 유치한 듯 보이면서도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선(先)병맛 후(後)중독’의 위력, 대형 기획사가 폼을 잡느라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틈새시장의 성공, 성공을 하더라도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밑바닥 길바닥의 자생력(自生力), 타성이나 관성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무브먼트를 창출할 수 있는 창의력, 지금까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팬덤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 대략 이런 것들에 대한 총체적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국가와 사회와 가정을 위해 줄곧 달려오기만 하다가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채 지쳐버린 대한민국 아저씨들에게 ‘구원’이 됐다. 동시에 그 아저씨들이 아이돌의 새로운 수호자로 나선다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현상을 창출해 낸 힘이었다. 이미 사회에 나와 현실의 쓴맛을 겪을 만큼 겪어 본 아저씨들이야말로 그동안 크레용팝이 겪은 신산(辛酸)한 노력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팬사이트에는 “용팝이들(크레용팝)을 알게 된 뒤로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출했다” “직장에서도 활력이 생겼다” “사업 실패와 가족 해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간증’이 줄을 잇는다. 크레용팝이 대한민국을 구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크레용팝은, 이 삭막한 경쟁사회 속 희귀한 오아시스이자 힐링의 청정구역며 천연 비타민이자 행복의 활력소다. 따뜻한 부성애(父性愛)와 아련한 첫사랑의 설렘이 중첩된 낯선 팬덤문화는 오래지 않아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팬들과의 ‘악수회’와 ‘크레용팝 TV'라는 크레용팝만의 독특한 소통 문화도 계속될 것이다.
정연두 작가가 새 개인전에서 ‘팝저씨’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정 작가는 2012년 ‘아트 앤 옥션’이 선정한 ‘미래 소장가치가 있는 50인의 작가’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뽑힌 미디어 아티스트다. 이로써 나는 그것이 새로운 문화현상이라는 데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그 대열에 문화계의 유명인사들도 하나둘씩 참여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4년 1월 4일 팝저씨 50명을 모아 진행한 정 작가의 촬영과 녹음에 참가한 한 팬은 “작가님이 백추(크레용팝 의상인 일명 ‘백수 추리닝’)를 입고 춤까지 같이 추더라”며 반가워했다. 전시의 성공을 확신하는 마음 못지않게 설레는 것은, 올해 봄 신곡을 낼 크레용팝의 재약진과 함께, ‘팝저씨’가 괴짜 아이돌 팬이란 선입견에서 벗어나 더 확연한 대한민국의 문화적 코드로서 입지를 굳힐 2014년의 상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빠세!
그냥 감동이고 감동이고 흔한 음악방송 1위 순간을 보고 감동을 해서 생전 처음(그전에는 눈팅족) 팬싸이트에 가입한 저로써는 정말 감동입니다.
굿!....
나도 글 잘쓰고싶다요...ㅎㅎ
감동이 밀려오는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글잘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다시 용팝님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이였던것 같네요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너무 좋은글이네요
작년 여름 느닷없이 입덕해서 하루 종일 유튜브 영상 본거 또 보며 설레이고 행복했던 그때의 초심이 마구 밀려 오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여기 계신 연식 좀 있는 아저씨들은 모두 공감하시지만 부족한 필력으로 뭐라 표현할 수 없었던 내용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저도 작년 여름 이들이 빠빠빠로 뜨기 시작할 때 얘들 뭐지 하면서 유튜브로 찾아 봤다가 뭔지 모르게 가슴에 뭉클한 감정을 느끼게 되더군요. 이후 위에 나온 노철중님(스트로크란 닉을 쓰시는 분 맞지요, 아마도?)의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바로 이런 감정이구나 하면서, 입덕이라면 입덕이랄까 들어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쓰신 글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도네요. 잘 읽었습니다.
댄싱님 글 잘 쓰시네 ㅜㅜ;;
미씨 킴 휴지즘!
푸휑~
잘 읽었습니다. 전 작년 10월에야 팝뽕에 취했는데, 멤버들과 고생을 함께 해온 팝저씨 선배들처럼 같은 마음이 생기게 한 큰 원동력은 뭐니뭐니해도 크레용팝 영상물들이겠죠..이런 좋은 글들과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영상물들을 보면 앞으로도 새로운 팬층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기존 팬들도 팝뽕 유지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리라 생각됩니다.
댄싱인더문라잇 님의 이전 기고문이 떠오르네요.
댄싱인더문라잇 님의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ㅜㅜ 읽다가 정말 눈물날 뻔 했다는 ㅜㅜ
제 자신이 왜 크레용팝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없이 열광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들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0^
콧등이 찡합니다.~이글을 읽으며 이곳 저곳에서 접했던 에피소드들이 한목에 정리되네요.유튜브 크레용팝 영상찾아 근 한달간 주경야튜브(?) 한던때가 생각나네요. 보이지 않는곳에서 우리 용팝이들을위해 마음 써주시는 많은분들이 있으니 가요사에 길이남을 용팝이들이 되어주길 바램해 봅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아쉬움이 느껴질만큼 정말 좋은글이네요..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크으~ 정말 대박이네요. 인생은 용팝이들처럼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직껐 남의 글을 읽으며 이렇게 감동한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정말 감동,,,감동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