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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간 우리 대중음악계의 화두는 단연 걸 그룹 열풍이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이전의 수년간은 줄곧 보이 밴드의 전성기였다. 그건 지난 10여 년간 우리 음악의 주류가 청소년 아이돌의 주도하에 놓여있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아이돌이 기존의 아이돌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유지돼온 우리 음악산업의 구조적 특징을 집약하는 현상이었다. 소녀시대의 일본진출과 2NE1의 신작발표로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른 걸 그룹의 열풍의 언저리에서, 그 모집단적 현상으로서 아이돌의 안팎과 전후를 살피는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 아이돌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이돌에 대한 정의나 개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크게 보면, 1960년대의 남진, 나훈아, 이미자 같은 트로트 계열 가수도,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석권했던 조용필도 모두 ‘아이돌’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현재 통용되는 ‘아이돌’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형 엔터테인먼트사(연예제작사 또는 연예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 있다. 엔터테인먼트사가 멤버 선발과 기획, 제작과 홍보 등을 통해 만들어낸 하나의 상품이다. 아이돌은 ‘기획사’에 의해 선발된 후 춤과 노래, 어학(심지어 외모까지)에 이르는 철저한 훈련을 거쳐 탄생하게 된다.
다음으로 세대(연령)적으로 보면 아이돌은 전적으로 10대에 의한, 10대를 위한 산물이다. 음악적으로는 대개 댄스음악을 표방하는데, 이는 춤을 추기 위한 용도의 템포가 빠른 음악이다. 다시 말해 특정 장르/스타일이라기보다 여러 장르/스타일의 음악이 합성되고 ‘범장르적’으로 통용되는 ‘한국형 댄스음악’을 가리킨다. 한편, 아이돌은 솔로보다는 그룹 형태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각각의 멤버에게 부여된 개별적인 특정한 상(이미지)이 통합되어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김준수가 아닌 시아준수가 동방신기를, 동영배가 아닌 태양이 빅뱅을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아이돌은 음악뿐 아니라 패션, 댄스, 방송의 이미지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총체적인 산물이다.
그렇다면 아이돌의 시초는 언제로 꼽을 수 있을까. 조금 더 멀리 가면 1980년대 말 3인조 남성 댄스그룹 소방차를 비롯해 김완선, 박남정 등의 솔로가수들을 아이돌 시스템의 전초 현상이라 할 수도 있다. 이 무렵 ‘하이틴 가수’ ‘고교생 가수’로 마케팅되었던 김승진, 박혜성, 이지연의 경우도 현재의 아이돌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개 전면적으로 기획·관리되는 시스템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이들은 음악 스타일과 활동 방식 등 많은 면에서 아이돌 시스템이 정착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양현석의 경우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이 되어 후일 한국 아이돌 시스템 (재)생산의 주도자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악적인 영향을 지적해야 하는데, 가령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와 이른바 사람들에게 ‘갱스터 랩’이라 알려진 이들의 힙합 음악(가령 4집에 실린 ‘Come Back Home’ 같은)은 초기의 남자 아이돌에게 (어쩌면 ‘나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새롭고 진지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 된 것이다. 또한 새로운 앨범 작업을 이유로 기존의 활동을 접었다가 몇 개월 뒤 갑자기 등장하는 방식은 이후 흔한 활동 방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직접 작곡을 하고 프로듀싱을 한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아이돌’의 상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 본격적으로 댄스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 듀스, 잼, 노이즈, DJ DOC, 룰라, 투투, 쿨, R.ef 등 일련의 댄스그룹(의 음악)도 후대의 아이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하우스 리듬이 사용되고, 랩이 삽입된, 당시 ‘X세대 인기가요’ ‘신세대 댄스가요’로 불리던 스타일은 아이돌의 음악에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작곡가로 활동하거나(노이즈), 나이트클럽 DJ나 가수의 백댄서 등으로 활약하다가 데뷔하는(DJ DOC, R.ef) 등, 기획사에 의해 전면 양성되는 시스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의 개막
위의 정의에 입각해 가장 본격적인 아이돌 시스템이 가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형 엔터테인먼트회사들이 정립된 1990년대 중·후반이 된다. 오디션이나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멤버를 선발하여, 연습과 훈련을 거쳐 음반을 발표하고 타이틀곡(과 후속곡)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공중파 TV 방송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이런 과정에서 공식 팬클럽이 창단되고 대형 콘서트가 개최된다. 약 3~6개월 단위의 앨범 활동이 끝나면 다음 음반 작업을 위해 휴지기에 들어가는 공식이 생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아이돌의 시작은 SM엔터테인먼트의 H.O.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의 젝스키스를 비롯해, N.R.G, 태사자 등이 이 무렵 활동했다. H.O.T.의 1집(1996)의 ‘전사의 후예’가 사회비판적(특히 교육문제) 메시지를 힙합 스타일에 결부되었다면 아기자기한 사랑 노래 ‘캔디’가 대중적인 인기에 부합했다. 젝스키스는 1집(1997)의 ‘학원별곡’과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를 통해 H.O.T.와의 라이벌로 부각되었는데 이러한 (팬덤과 언론을 통한) 대결 구도는 아이돌의 점유율을 키우는 상호 시너지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앨범 발표와 활동 시기 및 방식을 겹치지 않게 하면서 상호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들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조금씩 다른 전략을 통해 아이돌을 대중화·차별화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고 지속·강화되어왔다. SM엔터테인먼트는 아이돌 시스템을 선도하고 공식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회사이다. 말하자면 SM엔터테인먼트가 훈련된 아이돌의 모범형을 생산한다면, 이에 대한 대항적 캐릭터를 발빠르게 만들었던 DSP미디어는 보다 친근하고 접근가능한 유형을 창출했다. 이 두 회사의 걸그룹의 경우, 모두 ‘요정’ 컨셉을 내세웠지만, S.E.S.가 보다 신비롭고 다소 비현실적인 유형이었다면, 핑클은 옆집 소녀 같은 현실적이고 친근한 유형을 대동했다. 그밖에 강한 이미지의 디바나 베이비복스는 이후에 경쾌하고 발랄한 이미지로 선회하여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한편, 후발 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god는 최초의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할 ‘육아일기’를 통해 친근한 캐릭터를 전국적으로 알리고, ‘어머님께’와 같은 보편적인 노랫말로 호소하면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H.O.T.에 뒤이은 보이그룹 신화는 나중에는 남성적인 캐릭터를 강화하여 다른 보이그룹과 차별화를 꾀했는데, 지속적이고 열성적인 팬덤을 통해 장수하기도 했다.
지누션과 원타임 등을 통해 대중적인 힙합 중심의 레이블을 표방한 YG엔터테인먼트(당시 양군기획)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아이돌을 양성한다는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다. 이는 SM엔터테인먼트의 철저한 기획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는 인상을 들게 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아이돌 시스템이 ‘기획사의 꼭두각시’를 만들어내고, 획일적이고 편협한 댄스음악 중심의 구조를 양산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가창력 논란, 잦은 표절 시비, 특정 장르/스타일에 대한 외면적 차용 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중파 TV에 편중되었고, 손익분기점이 높아지는 고비용 구조는 계속 이어졌지만, IMF구제금융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불황과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 아이돌들은 도태되기도 했다.
산업의 재편, 아이돌의 변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일부의 아이돌 그룹들은 아시아 시장에서 약진하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대개 해체나 활동 중단의 수순을 밟았다. 그룹 형태가 약세로 돌아선 대신, 수퍼스타급 솔로 가수들이 등장하여 한류 스타의 지위를 이어갔다. SM엔터테인먼트의 보아를 시작으로, JYP엔터테인먼트의 비, YG엔터테인먼트의 세븐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바다(S.E.S.), 옥주현(핑클), 이효리(핑클), 강타(H.O.T.), 문희준(H.O.T.) 등 이전 시기의 아이돌 그룹 출신의 솔로 가수들이 활동도 시작되었다. 특히 이효리의 경우 2000년대 중반 이후 독보적인 섹시 스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 인터넷과 휴대폰의 보편화 및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라 음악시장을 둘러싼 급격한 변화는 모든 것을 바꾸기에 이른다. 새로운 매체를 위한 음원시장은 급성장했고 CD나 카세트테이프 등을 중심으로 한 음반산업은 급격히 사양세로 돌아섰다. 소리바다, 벅스뮤직 사건으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및 다운로드를 둘러싼 무료·무단 사용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었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위의 사이트들도 모두 유료화가 결정되었고, 이동통신사의 유·무선 음악사이트가 개시했다. 음악 생산과 수용도 이에 걸맞게 변화되기 시작했는데, 아이돌 시스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2004년 동방신기의 데뷔가 싱글(‘Hug’)을 통해 이루어진 것, 세븐이 디지털 싱글(‘Crazy’)을 발표한 것은 이러한 음악산업의 변화에 대한 모색의 대표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즉, 음악 생산과 소비가 앨범 중심에서 싱글 중심(곡 단위)으로 개편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다시 말해 동방신기는, 직전 시기까지 침체되어 있던 아이돌 그룹에 변화를 요구하는 시장의 논리에 부응한 한 결과이다. 화려한 비주얼과 댄스를 중심에 두면서도, 애초에 ‘아카펠라 그룹’으로 홍보되었던 것처럼 아이돌의 논란거리였던 가창력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했다. 또한 성공적인 일본 진출을 통해 소위 ‘한류’의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등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아이돌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아이돌 시스템의 강화 또는 진화
1990년대 말 이후 여성 그룹은 특히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이런 공백이 깨진 것은 원더 걸스의 ‘Tell Me’를 시작으로 한 이른바 ‘걸그룹 열풍’이었다. 이런 흐름은 ‘So Hot’ ‘Nobody’를 연이어 히트시킨 원더 걸스를 위시해 소녀시대, 카라, 브라운 아이드 걸스, 애프터 스쿨, 포미닛, 2ne1, 티아라 등 2007년에서 2009년 무렵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9명의 많은 멤버를 거느린 소녀시대는 유로 팝 스타일의 ‘Gee’ ‘소원을 말해봐’ 등을 통해 대표적인 걸그룹으로 자리잡았는데, 이전 시기의 S.E.S.처럼 단정하고 신비로운 소녀의 이미지를 계승한다. 반면 ‘Honey’ ‘미스터’ 등을 히트시킨 DSP미디어의 카라는 귀엽고 친근한 옆집 소녀 이미지를 구현하여 핑클의 직계 후예라 할 만하다. 이들에 반해 2ne1은 알앤비 팝 스타일의 ‘I Don’t Care’ 등을 통해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애프터스쿨은 섹시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Abracadabra’ 등이 실린 3집을 통해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20대 이상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지지를 얻기도 했다.
보이그룹의 경우에도 ‘거짓말’(2007), ‘하루하루’(2008) 등을 발표한 YG엔터테인먼트의 빅뱅을 필두로, SM엔터테인먼트의 슈퍼 주니어의 ‘Sorry Sorry’(2008), 샤이니의 ‘Ring Ding Dong’(2009), JYP엔터테인먼트의 2PM의 ‘Again & Again’(2009) 등으로 이어졌다. 이밖에도 FT아일랜드, 씨엔블루처럼 소위 밴드형 아이돌의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아이돌 열풍은 걸그룹 붐으로부터 시작되어 아이돌 전반으로 확대되었는데, 대중적 지지는 물론 비평적 관심까지 획득하며 사회적 문화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전 시기와 달리 앨범 중심이 아닌 싱글이나 이피(미니앨범)를 중심의 ‘곡 단위’ 활동으로 바뀌었고, 히트곡의 순환은 점점 더 빨라졌다. 지상파 순위프로그램에 대한 의존도는 이전 시기에 비해 낮아진 반면, 케이블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인터넷 블로그, UCC 등을 이용한 다양한 매체의 비중은 높아졌다. 가령 빅뱅은 데뷔 이전 자신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리얼 다큐 빅뱅’(2006)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걸그룹 열풍의 시작점은 ‘텔 미 댄스’ UCC 동영상이었다.
한편, 그룹의 멤버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많아졌는데, 언젠가 해체될 위험을 안고 있는 그룹의 단일한 정체성 대신 유동적으로 변화가능한 ‘유닛’ 형태로 대체시켰다. 이는 여러 각도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멤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 전략과도 맞물려있다.
섹슈얼리티의 측면도 다면적으로 분화했다. 걸그룹의 경우 이전의 이미지들(섹시함, 귀여움, 발랄함, 신비로움, 친근함 등)의 연속선상에 있었지만, 보이그룹의 경우는 이전보다 다분화된 이미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PM은 섹시한 남성미를 표방하고(소위 짐승돌), 샤이니는 귀여운 연하남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는 팬덤의 확대 및 세분화와도 연계된다. 걸그룹의 경우 ‘삼촌팬’으로 대변되는 30대 이상의 남성 수용자들을 포괄하기에 이른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20, 30대 여성팬들의 지지를 획득한 반면, f(x)는 온전히 10대 소녀를 겨냥한다. 보이그룹의 경우에도 이른바 ‘누나팬’ ‘이모팬’ 같은 중년층 이상의 여성 수용자까지 포섭했다.
음악적으로는 전세계적 주류 트렌드와 동시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 ‘줄리엣’, 슈퍼주니어의 ‘너라고’ 등처럼 해외 작품의 공식적인 구매를 적극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해외 시장 지향성과 연결되었다. 일부 멤버를 외국인으로 채용하는 것은 이제는 흔한 현상이 되었다(2PM의 닉쿤, 미스에이의 페이와 지아, 에프엑스의 빅토리아와 엠버 등). SM엔터테인먼트의 보아나 동방신기의 일본에서의 활동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알앤비, 힙합 등 흑인음악 중심의 포지셔닝을 강화하며 2000년대 후반 들어 급부상한 YG엔터테인먼트의 전략도 마찬가지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원더 걸스의 시도를 비롯해 몇몇 아이돌들은 미국 진출을 하나의 큰 목표로 삼았다(그리고 대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해외 시장의 진출은 국내에서이루지 못한 어떤 활로를 모색하려는 경향과도 맞물렸다.
이러한 글로벌한 지향은 국내 작곡가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동시대의 해외 팝 트렌드가 그대로 직수입된 경향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일렉트로닉 댄스 스타일의 음악이 주도적인데, 이들은 대개 반복적이고 단순화된 양식으로 수렴되곤 했다. 이는 이른바 ‘후크 송’이라는 이름의 유행으로 압축되기도 했는데, 미니멀한 양식적 변화는 산업적 요구에 부응한 결과이기도 하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아이돌 음악은 잦은 표절 시비와, 비슷한 스타일의 양산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낳기도 했다. 특히 아이돌 음악에만 편중된 양상은 전체 음악산업의 발전에 저해요소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연제협 사태’나 ‘동방신기 사태’ 등을 통해 불거진 불공정 계약 문제, 방송사와의 유착을 드러낸 ‘PR비 사태’ 등에 이르는 비리들도 여전히 사회 이슈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보다 엄격화된 이른바 ‘연습생 시스템’은 갈수록 고된 훈련을 오랫동안 거치도록 만들어졌다. 아이돌은 진화해왔지만, 여전히 해결해야할 숙제는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