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4일 (목) 촬영.
젊었을 때는 70세가 넘도록 살고프지 않았었는데, 70을 넘기고 보니, 건강하게 살 수만 있다면 불로문을 매일이라도 드나들고 싶어졌다. ㅋㅋㅋ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는 길이다. 이곳에 불로문이 있으니 참고하삼.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9월 25일까지>전시회와 <궁중 현판, 8월 15일까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입장료 없음.
북관대첩비가 보이는 곳에서, 뭐 먹고 마셨다. 인간끼리 먹으니까, 비둘기들이 모여 회의를 하더라.
북관대첩비 / 1708(숙종 34), 높이 187cm, 복제품,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평사인 정문부(1565~162)가 의병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승전비로,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비문을 지어 숙종 34년(1708) 함경도 길주에 세웠다.
1905년 러, 일 전쟁 중 일본군이 비석을 발견해 일본으로 보내 버렸고,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계속 방치되어 있었다. 1978년에 최서면 선생이 다시 비석을 발견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그 후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노력한 끝에 북관대첩비를 2005년 10월 20일에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았고, 남북 합의에 따라
2006년 3월 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래 있던 함경도 길주(현재 김책시)로 되돌아갔다.
이 비석은 2006년 4월 25일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기념하여 세운 복제비이다.
고궁박물관에서 본 광화문이다.
역사 박물관에 벽화가 걸렸다.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궁중 현판, 우리 곁으로 내려오다.
조선시대(1392~1910) 궁중 현판은 처음 궁궐을 세울 때, 화재나 전쟁 등 재해로 궁궐을 보수할 때 함께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당대 상황을 반영하여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뜻과 소망을 담기도 했다.
그 예로 1904년 화재로 훼손된 덕수궁을 1906년에 수리하면서 고종(재위 1863~1907)은 본래 있던 대안문 현판을 대한문으로 바꿔 달도록 했다.
'큰 하늘'이라는 뜻의 '대한大漢'에 '한양이 창대해지라'는 소망을 담았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 조선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던
다섯 궁궐이 관광지, 박람회장 등으로 훼손되면서 현판 대다수는 제자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다.
건물에서 내려온 현판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제실帝室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됐던 창경궁의 명정전 회랑, 경춘전, 환경전 등에 진열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을 전전하던 현판은 1992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옮겨졌고, 이후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이전 개관하면서 다시 이동되었다.
조선 왕실 관련 건물에 걸렸던 현판 775점은 국립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조선 왕실의 문화를 담은 소중한 유물로서의 의미를 되찾았다.
孝子百行之源(효자백행지원) -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며,
際會風雲接一堂 (제회풍운접일당) - 왕과 신하가 뜻이 맞아 바람과 구름같이 한 조정에 모이니.
仁化(인화) - 인으로 교화하라. 念慈保民(염자보민) -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늘 생각하라. 養德(양덕) - 덕을 기르도록 하라.
均貢愛民(균공애민) - 조세를 균등히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
현판 걸기 체험공간. 우리도 아래 사진처럼 "최백문"이라는 현판을 걸어 보았다.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궁궐을 포함한 옛 건축물의 처마 아래에는 현판이 걸려 있습ㄴㅣ다. 현판에는 건축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해당 건축물의 기능과 용도를 알려
줍니다.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거는 것은 건축물이 지닌 의미를 밝히고 건축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궁궐을 비롯해 종묘, 왕릉 등 조선 왕실 관련 건물에 걸린 현판에는 조선이 지향한 유교적 이상사회의 모습이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해당 건물의 성격과 건립 목적에 어울리는 글귀와 좋은 뜻을 담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궁중 현판은 분야별 최고의 장인이 참여해 완성했습니다. 현판의 색상, 글씨, 무늬 등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적인 미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조 궁중 현판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조선 왕실이 궁중 현판을 통해 널리 내걸고자 했던 유교적 이상과 가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이 궁중 현판을 우러러보며 마음속에 되새겼을 이상 정치의 참뜻을 함께 새겨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판을 제작한 사람 / 장천 김성태(서예가), 고원 김각한(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최문정(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 전승교육사)
오늘날 전통 현판 제작 명맥은 전통 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장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현판이 만들어지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장인 간 협업이 필요하다. 현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글씨를 쓰는 서예가, 나무 재료를 다듬고
조립하는 소목장, 바탕판에 글씨를 새기는 각자장, 무늬를 그리고 채색하는 단청장, 설치에 필요한 철물을 제작하는 두석장 등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모여야 한다. 이 중 소목장, 각자장, 단청장, 두석장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판을 제작하는 공구와 단청 재료.
단청을 하는 물감.
1, 만들다.
조선이 건국된 뒤 성리학의 통치 이념을 담아 다양한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 궁중 현판도 함께 만들어졌다. 정도전(1342~1398)은
태조(재위 1392~1398)의 명을 받들어 경복궁 이름을 비롯해 궐 안 주요 전각과 문의 이름을 지었다.
1475년(성종 6), 성종(재위 1469~1494)은 아직 현판을 걸지 못해 이름 없는 문이 많은 것을 보고 현판을 더 만들게 했다.
현판은 궁궐 건물의 위계와 용도에 따라 크기, 형태, 색상, 제작 기법 등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 왕실은 백성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위엄을 지니되 사치스럽지 않게 장식한 궁궐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현판 또한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조각이나 무늬 장식 등을 절제하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현판 형태와 장식.
현판 크기와 형태는 현판을 걸 건물의 규모와 격, 글쓴이의 위상 등에 따라 정해졌다. 현판의 위계는 사용되는 나무 종류, 테두리 유무,
장식 무늬, 바탕판 및 글씨 색상과 기법 등에 따라 달라졌다. 위계가 높은 건물의 현판은 피나무나 잣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현판에 테두리를 만들고 봉 조각이나 화려한 무늬를 더할수록 위계가 높다.
테두리에는 칠보, 연화(육화,六花), 과일, 문자 등 좋은 의미를 담은 다양한 무늬를 장식했다. 왕의 글씨를 새긴 현판에는 때로 봉황 무늬를
장식해 격을 높이기도 했다. 바탕판은 옻을 칠한 칠질을 최고로 하고 먹을 입힌 묵질, 흰색을 칠한 분질 순으로 등급이 낮다.
글씨는 금색을 최고로 하고 안료를 칠한 황색, 흰색, 검은색 순으로 등급이 낮다. 글씨를 새길 때는 글씨를 제외한 여백을 깎아내
글씨가 도드라지는 양각, 글씨 주변 윤곽만 파내는 반양각, 글씨 부분만 안으로 파서 움푹 들어가게 하는 음각 기법을 사용했다.
글씨에 나무나 금속을 부착하기도 했다.
삶의 흔적을 담은 영조 어필 현판.
왕의 글씨인 어필은 개인의 필적을 넘어 왕의 품격과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어필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전하기 위해 목판, 석판 등에
새겨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중 현판은 특성상 걸어 두었기 때문에 '왕의 글씨'를 드높이는 데 적합한 매체였다.
전해지는 어필 현판 중 단연 돋보이는 현판은 영조(재위 172~1776) 어필 현판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 775점 중 85점에 달한다.
이는 52년이라는 영조의 오랜 재위 기간과 어필을 남기기 좋아했던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
영조 어필 현판은 재위 기간 동안 왕이 겪었던 다양한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현판의 주제는 크게 공식 행사 수행 후 남긴 생각, 궁궐 내외 여러 장소를 방문하고 남긴 생각, 신하와 함께한 활동, 선대 추모,
관청 근무 지시 사항 및 근무자 독려, 과거에 대한 회상 등으로 나뉜다.
특히 두드러지는 주제는 아버지인 숙종을 향한 추모로, 아버지에 대한 계승 의식을 밝혀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조가 젊을 때의 포부를 드러낸 현판과 노년의 감회를 드러낸 현판 사이의 상반된 감정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위) 건구고궁 현판 / 영조 어필, 조선, 1730년(영조 6)
영조가 37세 때 초서로 쓴 현판이다. 힘 있고 짜임새 있는 글씨에서 자신감 넘치는 젊은 왕의 풍모를 느끼 수 있다.
'건구고궁'은 잠저 시절의 자신을 물속에 숨어 있던 용으로, 왕이 된 자신을 날아오르는 용으로 비유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창의궁에 걸도록 했는데 막 왕이 된 영조의 포부와 미래에 대한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아래) 억석회만 현판 /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74년(영조 50)
영조가 81세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옛일을 생각하니 만 가지가 그립다'는 뜻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도총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다. 50여 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가 말년에 품고 있던 심정을 담고 있다.
영조가 노년에 남긴 어필 중에는 옛일을 추억한다는 '억석'이라는 문구가 빈번히 보인다.
영추문 현판 / 허계 글씨, 조선, 1865년(고종 2), 국립중앙박물관.
경복궁 서문에 걸었던 현판으로 무신 허계(1798~1866)가 글씨를 썼다. 무신이 궁궐 현판의 글씨를 쓴 경우는 드물지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경복궁의 4개 대문인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 현판을 모두 무신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의 바깥문에 무신이 쓴 현판을 걸어 왕실을 안전하게 수호하고자 한 소망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양화당 현판 / 순조 어필, 조선, 19세기 전반.
창경궁 양화당에 걸었던 순조 어필 현판이다. 글씨는 해서로 썼다. 양화당은 '화기和氣를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를 접견하는 편전, 또는 비빈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글씨에 네모난 금박을 이어 붙여 만든 자국이 반복적으로 보이는데,
<창덕궁영건도감의궤> 기록을 통해 글씨에 금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어필을 보호하고자 덮는 사롱과 사롱을 고정했던 띠 모양 철물 일부가 남아 있다.
규정각 현판 / 영조 어필 추정, 조선.
경희궁 규정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규정은 '칠정 七政(해와 달을 비롯한 일곱 개 행성)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규정각은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인 선기옥형을 보관하던 곳이다. 글씨는 영조 어필로 추정되며 중국 고대 한자 서체인 전서로 썼다.
전서는 석각이나 전각에 주로 쓰였는데,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글씨 획의 두께가 균일하고 곧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일심재 현판 / 순조 어필, 조선, 1825년(순조 25) 추정.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내 일심재에 걸었던 현판이다. <현목수빈입묘도감의궤>에 따르면 검은색 바탕에 금박을 붙인 금색 글씨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금박은 남아 있지 않다. 넓은 테두리는 칠보 무늬로 장식했다. 현판 뒷면에는 어필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홍색 사롱
조각이 붙어 있는데, 기록에 적힌 일심재 현판의 제작 재료 중 홍운문사紅雲紋紗(홍색 구름무늬 비단)와 일치한다.
현사궁 현판 / 순조 어제어필, 조선, 182년(순조 23)
순조(재위 1800~1834)의 생모인 수빈 박씨(1770~1822)의 신주를 창경궁 밖 경우궁에 모시기 전까지 봉안했던 창경궁 현사궁에 걸었던
현판이다. '생각을 떠올리면 환하게 나타나는 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넓은 테두리에 칠보 무늬를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양각한 후 금박을 붙였다.
정화당 현판 / 이병문 글씨, 조선, 1880년(고종 17) 추정.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정화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올바르게 화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종이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재위 1907~1910)의 혼례를 위해 지은 건물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나비 모양을 한 나뭇조각을 사용해 5장의 나무판을 이어 붙였는데 현판 뒷면에서 그 모습이 확인된다.
정화당 현판의 뒷모습이다. 5장의 나무를 나비 모양의 나뭇조각을 사용해 붙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경운궁 현판 / 고종 어필, 대한제국, 1905년(광무 9).
고종이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 당시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던 즉조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경사스러운 운수가 가득한 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테두리에 칠보 무늬를 장식한 뒤 바탕은 옻칠로 검게 마감했고
글씨는 금박을 붙였다. 위계가 높은 현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현판 테두리에 어필을 보호하기 위해 씌웠던 사롱(紗籠)을 고정했던 흔적이 보인다..
곤녕합, 필수문, 영훈당 현판.
곤녕합 현판 / 고종 어필,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건천궁 안 곤녕합에 걸었던 고종 어필 현판이다.
곤녕합은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1851~1895)의 처소로, '왕비가 편안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활 모양으로 깎은 얇은 테두리에 연화당초 무늬를 그려 장식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금색이며 양각했다.
필수문 현판 /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사정전 동행각과 자선당 서행각 사이 담장문인 필수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반드시 필요한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네 모서리는 테두리 없이 활 모양으로 깎고 흰색 바탕에 글씨를 양각한 후 검은색으로 칠했다.
현판의 형태와 색으로 필수문의 위계가 낮음을 알 수 있다.
영훈당 현판 /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흥복전 북쪽 영훈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향기가 영원히 이어지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흰색 바탕에 글씨는 양각한 후
파란색으로 칠했다. 흰색 바탕 현판은 대부분 검은색 글씨인 데 비해 파란색 글씨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하재일기. 1891~1911)에 영훈당은 '대전 곳간'이라는 기록이 있어 왕을 위한 곳간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2. 담다.
조선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성리학에서는 성인 군주가 인과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이상적 정치로 여겼다.
궁궐은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조선의 의지가 담긴 공간이었다. 정도전은 왕명으로 경복궁과 궁궐 안 건물의 이름을 정하면서
궁궐의 장엄한 외관에 맞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서 보고 듣는 자를 감동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건물 곳곳에 걸린 현판에는 왕도 정치를 이뤄내기 위한 바람과 구체적인 노력이 자연스레 담겼다.
궁중 현판에는 참다운 왕인 성군을 목표로 학문에 매진하는 왕과 세자의 모습,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인륜을 가르치기 위한 노력,
효를 실천하고자 부모와 조상을 모시고 추모한 모습. 왕권과 신권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자 한 왕의 노력 등 당대 정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은 궁궐 건축에 걸려 있는 다양한 현판을 우러러보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겼을 것이다.
인화문 현판 / 조선 후기, 나무, 121.7 x 353.7cm.
경운궁(현 덕수궁) 남쪽 정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어진 마음(仁)으로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궁궐 정문에 조선에서 중시했던 도덕적 가치인 '인'을 담아 그 뜻을 되새기고자 했다. 궁궐 바깥 정문 이름에는 광화문과 같이 '될 화'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는데, 백성을 유교적 가치로 교화하고자 했던 마음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삼봉집 / 정도전, 조선, 국립중앙도서관.
정도전(1342~1398)이 지은 문집으로, 왕명에 따라 궁궐과 전각 이름을 지으며 쓴 글이 수록되어 있다.
궁궐 이름은 <시경,詩經>에 실린 시구에서 발췌해 나라가 만년토록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경복궁이라 지었다.
정치의 중심 공간이었던 정전은 '정치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근정전이라 지었다.
다른 전각의 이름도 유교 경전 구절에서 따오거나 성군의 도리를 담아 공들여지었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들이 다 조성한 바이므로
궁궐을 장엄하게 지어 존엄성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서 보고 듣는 이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삼봉집, 권 4>
궁궐지 / 조선, 1834~1849년(헌종 연간)
조선시대 궁궐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각 궁궐에 있는 전각의 이름, 위치, 연혁, 관련 글과 시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중 창덕궁 이름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이 보인다.
창덕궁과 각 전각의 이름에는 왕도정치가 담겨 있으므로 단순히 아름답게 꾸며 감상할 것이 아니라, 되새겨 교훈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 창덕궁의 명(名)이 어찌 단순한 궁의 이름일 뿐이겠는가, 인군은 창덕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옛적 신하가 전호로써 임금의 덕을
힘쓰게 하였으니, 전호라는 것이 어찌 금판에 새겨 단청으로 장식하여 한갓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도구일 뿐이겠는가.
이에 명하노라. 창(昌)은 창하게 성(盛)은 성하게 하라는 뜻이다. 창의 뜻이 크니 이 전호의 교훈에 힘쓰라. -순조, <창덕궁지>
성군의 도리를 담다.
왕이 정치를 하는 공간이나 왕위 계승자인 세자가 지내는 공간에는 성군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가치가 담긴 현판을 걸어
현판을 볼 때마다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했다.
부지런히 정치할 것(근정전,勤政殿), 어질게 정치할 것(인정전,仁政殿), 덕을 기를 것(양덕당,養德堂)처럼 올바른 정치와 어진 마음,
덕을 중시했다. 전각의 이름뿐 아니라 문이나 부속 건물에도 이러한 의미를 담아 공간 전체에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가치를 담았다.
세자가 성리학적 도리를 몸소 체험해 깨닫는 것은 곧 왕위 정통성과도 연관되었기 때문에 역대 왕은 세자의 교육을 중요시했다.
세자를 위한 교육 기관인 춘방에서는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를 스승으로 두었다. 왕은 세자의 교육 현황을 수시로 검토하고 기념해 현판으로
제작했는데 하루 일과 동안의 공부법, 교재를 읽는 횟수 등 사소한 내용까지 지시한 현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는 경연을 수시로 행해 끊임없이 올바른 정치를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수양해야만 했다.
융문루 현판 / 김병학 글씨,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동행각의 누에 걸었던 현판이다. '문을 융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행각에는 융무루를 걸어 문과 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보였다. 이처럼 주요 건물 외의 부속 건물 이름에도 중요한 의미를 담아
공간 전체에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글씨는 고종 대 영의정인 김병학(1821~1879)이 썼다.
양덕당, 융무루, 계인문 현판과 태조실록.
태조실록 / 조선 1448(세종 30), 영인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경복궁이 완성되자 태조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한 내력이 실린 실록이다.
정도전은 정전의 동서쪽 누를 각각 융문루, 융무루라 지으며 문과 무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된 정치 공간인 정전 양편의 건물에 문무를 함께 높여야 나라가 오래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양덕당 현판 / 영조 또는 정조 어필 추정, 조선 18세기. 나무, 41.2 x 108.3cm.
경희궁 양덕당에 걸었던 현판이다. 양덕당은 '덕을 기르는 곳'이라는 뜻으로, 왕세자가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궁인 경현당 북쪽에 위치했다.
조선은 덕으로 하는 정치를 이상으로 여겼다.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의 공간에 걸렸던 현판 이름을 통해서 세자 역시 성군의 덕목으로 길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융무루 현판 / 신관호 글씨,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서행각의 누에 걸었던 현판이다. '무를 융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행각에는 융문루를 걸었다. 두 누각의 이름은 조선 건국 후 경복궁이 완성되자 태조(재위 1392~1398)의 명을 받아 정도전이 지었는데,
문무를 함께 힘써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글씨는 고종 대 훈련대장 신관호(1810~1884)가 썼다.
융문루, 융무루에 대해서 말하자면, 문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로써 난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인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을 높이고 무를 높이게 한 것이며, 전하께서는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태조실록> 권 8, 태조 4년(1395) 10월 7일.
계인문 현판 / 조선, 19세기 후반.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동행각 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어짊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치 공간으로 문 이름에도 성군의 기본 도리인 인(仁)을 담았다.
주요 전각뿐 아니라 공간 곳곳에 정치적 이상을 내재해 우러러보며 되새기도록 했다.
경연학사지서 현판 /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경연을 하는 학사의 관청'이라는 내용을 새ㅣ긴 현판이다. 경연은 왕이 성군이 되기 위해 신하 중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공부하는 제도이다.
조선 왕은 인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성군이 되어야 했다. 틈틈이 경연을 열어 스스로 수양하고 자신의 학습상태를 확인했다.
경연 때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는 한편 신하와 정책을 의논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열성조계강책자차제 / 조선, 19세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역대 왕이 공부했던 책과 공부 기간을 정리한 책이다. 효종(재위 1649~1659)부터 고종(재위 1863~1907)까지 왕세자 시절의 공부인 서연(書筵),
왕이 되고 나서의 공부인 경연(經筵), 불시에 열렸던 공부인 소대(召對) 때 기록이 실려 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책을 공부하며 성리학적 도리를 익힌 것을 알 수 있다.
춘방 현판 / 효명세자 예필(왕세자가 쓴 글씨), 조선, 1829년(순조 29)
왕세자만을 위한 교육 기관인 세자시강원, 곧 춘방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선은 유교적 도리가 체화된 성군을 기르기 위해 세자를
어려서부터 교육했다. 현판에는 보도계옥이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는데 신하가 충성스러운 의견을 아뢰어 왕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자를 좋은 말로 잘 보필해 성군이 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연회강식 현판 / 조선 후기.
왕세자가 한 달에 두 번 그동안 배웠던 내용을 시험하는 회강(會講) 때의 규칙을 새긴 현판이다.
강론을 담당한 문관인 강관과 세자가 번갈아 가면서 음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회강은 여러 사람 앞에서 학문을 시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세자가 질문을 받고 대답할 만한 능력을 갖출 만큼 학문이 무르익어야 행할 수 있었다.
효명세자가 쓴 천지장남궁 글씨를 탁본한 첩 / 조선 1829년(순조 29)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순조(재위 1800~1834)의 왕세자인 효명세자(1809~1830)가 쓴 춘방 현판 글씨를 탁본한 서첩이다.
세자가 직접 쓴 현판 글씨를 통해 춘방과 세자의 긴밀한 관계를 읽을 수 있다.
효명세자는 4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유교 경전이나 역대 국왕의 모범적 사례를 담은 서적 등을 공부하며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길렀다.
왕세자입학도첩 / 조선 1817년(순조 17)
왕세자가 조선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첩(帖)이다.
왕세자는 춘방에서 따로 교육받았으나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례를 치러 세자 역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였다.
왕위 계승자인 세자가 조선의 정치 철학인 유학을 익히는 것은 왕실의 정통성 확보와도 연결되었다.
회강반차도첩 / 조선, 영인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왕세자가 회강하는 절차를 그림으로 남긴 첩이다. 그림으로만 이루어ㅕ 구체적인 절차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신하가 참여한
가운데 배운 내용을 시험하는 왕세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회강은 일정한 절차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식 의례였기 때문에 배운 내용을 숙지해야 할 뿐 아니라 절차 역시 몸에 익혀야 했다.
춘방에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 / 영조 어제, 조명경 글씨, 조선, 1747년(영조 23)
영조(재위 1724~1776)가 세자 교육 기관인 춘방에 내린 명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세자를 철저히 교육할 것을 신하에게 당부하며
강독 시 규칙을 춘방에 걸도록 했다. 세자가 오전과 오후에 각각 공부할 내용과 횟수 등 세세한 규칙까지 지시하고 있다.
휴식 시간에도 복습하고 강론할 것을 명해 영조가 세자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수원 세 고을의 부토 및 백성에게 내린 글을 새긴 현판 / 정조 어제, 조선 1790년(정조 14)
정조가 수원의 세 고을 백성을 배려한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정조는 세 고을에 내렸던 기존의 조세 면제가 살림이 미천한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실정을 파악해, 10년 동안 조세가 면제되는 토지 500결을 하사하고 부족한 곡식을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백성에게 식량이 하늘같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한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며 지은 글과 시를 새긴 현판 /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43(영조 19), 나무, 47.9 x 126.0cm.
영조가 기우제를 지내고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백성을 생각한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비는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영조는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며 기우제를 지내 백성을 위로하고 항상 백성을
생각해야 함을 강조했다. 현판에 새긴 글을 세자에ㅔ도 내려 백성을 중히 여길 것을 훈계했다.
호조에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 / 영조 어제어필, 조선, 1734(영조 10), 나무, 26.8 x 46.5cm.
영조가 나라의 재정을 담당한 호조에 내린 현판이다. 절약하며 힘을 비축하고 공물과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으로,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쓴 것이다. 국가가 세금을 공평히 거두고 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백성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조는 백성이 조세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다각도로 노력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홍화문에서 쌀을 하사한 장면 / 조선 1796(정조 20), 보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년)의 회갑을 기념해 행한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 실린 그림이다. 정조는 수원 화성에 행차해
잔치를 연 뒤 신풍루에서, 탄신 당일에는 창경궁 연희당에서 잔치를 연 후 홍화문 앞에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었다.
조선 왕실은 경사가 있을 때 잔치를 열고 백성에게 쌀과 음식 등을 나눠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패문경직도 / 중국 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백성의 농사일과 길쌈 등 노동 풍속을 그린 책이다. 중국 청나라 황제 강희제(재위 1661~ 1722)의 명으로 처음 편찬되었다.
황제가 백성의 노동을 이해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간행되었다.
조선에도 유입되어 조선 왕은 이러한 경작도를 두고 보며 백성의 농사짓는 고충을 생각하고 성군의 의지를 다지고자 했다.
염자보민 현판 / 철종 어필, 조선, 1860년(철종 11), 나무, 50.4 x 158.0cm.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을 새긴 현판이다. 조선의 정치 철학인 유학에서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겨
백성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다고 생각했다. 왕이 직접 쓴 이 현판을 통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
즉 보민(保民)이 백성에 대한 사랑, 애민의 기본임을 강조한 조선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거행할 때 지은 글을 새긴 현판 / 정조 어제, 홍낙성 글씨, 조선, 1795년(정조 19)
정조가 낙남헌에서 노인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고 지은 글과 시를 새긴 현판이다. 왕은 양로연에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노인을 초대하여 공경하는 모습을 만천하에 보임으로써 백성의 효성과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을 북돋고자 했다.
정조는 직접 일어나 술을 돌리는 등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을 몸소 보이고 노인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지었다.
오륜행실도 / 조선, 1797년(정조 21).
유교의 도리를 잘 지킨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고 일부를 수정하여 편찬한 책이다.
풍속을 두텁게 하여 나라 안에 유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편찬했다.
주요 관청, 지방의 주(州), 현(縣)까지 배포해 교화가 두루 미치도록 했다. 그림, 한자, 한글을 함께 구성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장
위) 정본당 현판 / 고종 어필, 조선 1865(고종 2)
조선 최고 행정 기관인 의정부의 삼정승이 근무한 곳에 걸었던 현판이다. 의정부는 역할이 축소되기도 했으나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다.
삼정승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일컫는 말로 의정부의 우두머리, 곧 조선 백관의 우두머리이다.
이들이 근무했던 건물 이름에 '정치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담아 의정부의 역할 즉 조선 정치에서 신하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아래) 의정부의 역할과 중요성을 기록한 현판 / 어필, 조선 후기, 나무, 73.2 x 264.0cm.
'백관을 통솔하고 온갖 정사를 바로잡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니 국정과 관계됨이 긴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현판이다.
성종대에 완성된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 중 의정부의 역할을 규정한 항목에서 발췌한 것이다.
국기판 / 대한 제국, 나무, 82.0 x241.0cm.
조선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의 이름과 위치 등을 새긴 현판이다. 왕과 왕비의 제삿날은 국가의 기일로 여겨 유흥이나 도살 등이 금지되었다.
조선 왕실은 종묘, 왕릉과 같이 왕과 왕비를 모신 곳을 비롯해 관청에도 국기판을 걸어 신하가 국가 제사를 기억하도록 하였다.
국기판이 걸린 곳에서는 언행을 바로 하여 현판 앞에서도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3 걸다.
조선 왕실 관련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뿐 아니라 당대 왕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이 담긴 현판이 걸렸다.
건물을 짓는 의의와 축복을 기원하는 상량문 현판에는 건물을 세운 목적과 과정을 새겨 건물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상적 국가 운영을 위한 지침, 도덕적 규범, 왕이 신하에게 내린 훈계 글 등을 새긴 현판은 중요한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했다.
관청의 업무 정보와 규칙, 소속 관리 명단, 국가 행사 날짜 등을 새긴 현판은 관청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중국의 옛 시구나 명구,
왕의 개인적인 감회나 경험을 읊은 시 등을 담은 현판은 왕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공공에 드러내는 창이 되었다.
현판의 다양한 기능은 매체가 한정된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기능은 오늘날 여러 매체로 변화되어 우리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효제충신 현판 (아래 왼쪽) / 선조 어필, 조선, 나무, 41.0 x 110.5cm.
창덕궁 영화당에 걸었던 선조(재위 1567~1608)의 어필 현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며,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라'는 뜻을 담았다.
만수무강 현판 (아래 오른쪽) / 영친왕 글씨, 대한제국, 1904년(광무 8), 나무,종이, 37.3 x 106.5cm.
영친왕이 여덟 살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영친왕이 공부하며 쓴 글씨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수진지만 현판 / 영친왕 글씨, 대한 제국, 1902년(광무 6), 나무, 81.0 x 203.5cm.
영친왕(1897~1970)이 여섯 살 때 쓴 글씨를 새긴 현판이다. 영친왕이 공부하며 쓴 글씨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연못을 바라보며 쓴 시를 새긴 현판 / 숙종 어제어필, 조선, 1694년(숙종 20), 나무, 80.5 x 105.6cm.
효명 세자가 종묘 제사를 지내고 제수와 제기를 살핀 날짜를 새긴 현판 / 조선, 1837년(헌종 3), 나무, 50.5 x 84.2cm.
효명세자(익종 1809~1830)가 부왕인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할 때
종묘의 제사 날짜, 제사에 쓰일 제물과 제기를 살핀 날짜를 새긴 현판이다.
경연청 관리 명단을 새긴 현판 / 조선, 1871년(고종 8) 나무, 51.5 x 104.8cm.
현판, 시대를 넘어 함께하다.
현판은 조선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다가 15세기 후반 이후 왕실에서 사찰과 서원 등에 현판을 내리기 시작하며 퍼져나갔다.
19세기 후반부터 민간에서도 가게 홍보를 위해 현판을 사용했다.
간판은 일제강점기 때 현판을 일본어로 간판이라 표기하면서 들어온 용어로, 당시 상업 시설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태의 간판이 설치되었다. 상업용 간판과 조선의 유교적 이념을 담은 현판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니지만,
둘 다 시각에 호소하여 정보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했다.
상업용 간판과의 경계가 흐려진 현대 현판은 여전히 우리의 생활 곳곳에 걸려 있다.
첫댓글 덕분에 공부도 하고 잘 감상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저 불로문 지나쳤습니다
칠복이거사님께선 120세까지 장수하실거 같습니다
지금 생활 하시는 것을 보면 그러실거 같습니다,,,ㅠㅠ
다양한 현판
공부 잘 합니다
영조 건구고궁 초서
숙종의 연못을 바라보며 쓴 시를 새긴 현판
순조의 현사궁 현판
효명세자의 춘방 현판등에 머물어 봅니다.
그림 못지 않게 아름다운 현판 감사히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