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9일 (화) 촬영.
광화문사거리에도 목백일홍이 피었습니다.
새단장을 끝내고 8월 7일 개방한다는 광화문 앞 광장은 아직도 공사 중이네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입니다. 입구에 카페가 생겼네요. 박물관 관람하고, 밥먹고, 이곳에서 차 한잔 마셔볼까 합니다.
이따가 봐요.
서울역사박물관.
날씨도 더운데 안으로 안들어오고 뭐 하는겨.
서울여사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명품도시 한양"전을 열었습니다.
지도, 서화, 고문서, 공예로 나누어 전시하는데요. 그 중 지도와 서화 부분을 소개합니다.
전시를 열며.
2002년에 문을 연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20여 년 동안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에게 알리고 향유하는 주요한 무대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서울학의 보고(寶庫)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잊혀져 가는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을 분야별로 수집하고 보존해 왔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울역사문화특별전 <명품도시 한양 보물 100선>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의 결실을 시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마련한 자리입니다.
박물관의 조선 시대 소장품 중에서도 용비어천가, 청진동 출토 백자 항아리, 대동여지도와 같이 한양을 대표할 수 있는 보물 15건,
유형문화재 25건을 포함한 유물 100여 점을 엄선하여 분야별로 망라하였습니다.
조선 왕실과 한양 양반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담아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고 한양에서 소비되었던 명품들을 감상하면서, 우리 조상의 지혜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며 시민의 자산인 박물관의 소장품에 대해서도 이해를 높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의 소중한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자료들을 수집하여 다음 세대에 전승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시민 여러분이 보내주신 애정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서울역사박물관장 김용석.
땅을 그린 그림 지도.
김정호가 제작한 목판본 전국지도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 보물.
김정호가 1861년에 간행한 대축척(1:16만)의 목판본 지도로,
휴대와 열람이 편리하도록 전국을 총 22층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작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제21첩(추자도)과 제22첩(제주도)을 함께 묶어 총 21층인 것이 특징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별도로 저술하여 지역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지도상에 도로를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어 거리 측정을
쉽게 하였다.
김정호가 제작한 필사본 전국지도 동여도(東與圖)
김정호가 제작한 대축척의 채색필사본 지도로 목판본 지도인 <대동여지도>보다 먼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국을 총 23층으로 나눈 분첩절첩식 구성과 표현 양식, 그리고 지리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도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대동여지도>와 유사하지만, 약 7천여 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다.
지방 수험생에게 판매한 상업용 한양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가 184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를 전주에서 다시 간행한 지도이다.
지도의 내용은 1840년대 판본과 같지만, 위쪽 여백에 정기시험인 식년시 문과 초시 인원수와 생원진사시 초시 인원수가
적힌 표가 기재되어 있어 지방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전주에서 판각된 방각본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시전의 위치가 자세하게 표시된 상업용 한양지도 수선총도(首善總圖)
김정호의 <수선전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지도로, <수선전도>가 도성 밖의 지역을 포함한 것과 달리 사대문 내부만을 그렸다.
조선 시대 최고의 번화가였던 운종가 시전(市廛)의 위치가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 19세기 한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전통적인 도성도(都城圖)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들의 수요에 부응하여 제작된 지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한양도성 창의문의 실경을 그린 산수화 창의문도(彰義門圖) / 정선, 1741년 이전, 비단에 수묵.
겸재 정선(1676~1759)이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은 50대 중반에 인왕산 아래의 '인곡정사(仁谷亭舍)'로 집을 옮긴 후 30년간 한양의 명승명소를 담은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창의문도>는 이 시기에 그려진 실경도 중 하나이다.
서한강의 실경을 그린 산수화 양호처사가도첩(楊湖處士家圖帖) / 작가미상, 1600년, 종이에 채색.
현재의 강서구 염창동에 있던 이덕연(1555~1636)의 별서인 이수정(二水亭)에서 바라본 북쪽의 삼각산과 동쪽의 잠두봉, 서한강의 모습을 그린
<서호승경도>와 정유재란 때 파견되었던 명나라 장수 만세덕이 남긴 시가 수록된 시화첩이다.
<서호승경도>는 안양천 부근의 명승명소를 그린 그림으로, 서울 근교 지역의 실경산수화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문인화가의 산수화를 모은 화첩 선화첩(扇畵帖) / 유덕장, 정선, 윤덕희 외, 17세기 말~18세기, 종이에 수묵.
숙종, 영조 연간의 문인화가 11인의 부채 그림 16점을 모은 화첩이다. 유덕장의 묵죽을 제외하면 산수화 또는 산수인물화로,
조선 중기의 절파화풍에서 후기의 남종화풍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심사정이 그린 조선풍 남종산수화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 심사정, 1760년대, 종이에 채색.
현재 심사정(1707~1769)이 그린 조선풍 남종산수화이다.
깊은 산속의 가파른 절벽 길을 지나 나귀를 타고 낡은 다리를 건너는 나그네의 모습이 그려졌다.
금강산 진주담의 실경을 그린 산수화 진주담도(眞珠潭圖) / 심사정, 1740년대, 비단에 채색.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내금강의 명승 진주담을 그린 실경 산수화이다. 아름다운 실제 경관을 이상화하기 위해
그림 속 유람객을 화보풍(畵譜風)의 예스러운 인물로 그려 넣었다.
자신만의 사의적(寫意的)인 필묵법으로 금강산 폭포의 가을 절경을 조화롭게 재현하였다.
평안도의 실경을 그린 산수화 관서명승도첩(關西名勝圖帖) / 작가미상, 19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서울시유형문화재.
관서 지방인 평안도의 실제 자연경관을 16폭 화첩에 그려낸 실경산수화이다.
기존의 관서명승도가 수묵에 옅은 채색을 더한 수묵담채로 그려진 것에 비해, 먹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짙은 녹색으로 채색한 청록채색풍이다.
화려한 장식성을 추구하는 당시 서화 시장의 취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병풍으로 장황한 계병 형식의 기록화 영조을유기로연, 경현당수작연도.
1765년 음력 8월의 기로연과 10월의 수작연 행사 장면을 병풍에 담은 궁중기록화이다. 첩의 형식으로 기록되던 기로연 행사 그림이 병풍으로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이며, 두 개의 행사 장면을 하나의 병풍에 담은 첫 작례이다.
영조을유기로연.
경현당수작연도.
평양감사의 부임지 도착 장면을 그린 풍속기록화 기성도(箕城圖展風)
평양성과 대동강의 전경과 평양감사의 뱃놀이 장면을 가로로 길게 8폭 병풍에 담은 성읍풍속도(城邑風俗圖)이다.
한양의 도화서에서 파견된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기성도병이 평양 도성도 하단에 평양감사 행렬을 배치한 것과 달리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을 그린 점이 특징이다.
한양의 세시풍속을 담은 풍속화 상춘야연도(賞春夜宴圖)
매화나무 아래에서 솥뚜껑처럼 생긴 번철에 고기를 구워 먹는 철립위(鐵笠圍) 광경을 그린 풍속화이다.
철립위는 음력 10월 초하루에 방안에 화로를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세시풍속으로 중국의 풍속인 난로회(煖爐會)에서
유래하며 조선 후기 수도권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철립'은 쇠로 만든 군사들의 모자를 말하며, 철립의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춘야연도에서 번철에 고기를 굽는 장면.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를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 계란, 파, 마늘,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데, 이것을 난로회라고 한다. - 홍석모洪錫謨(1781~1857) <동국세시기>. '난로회'
족자로 장황한 계축 형식의 기록화 비변사계회도(備邊司契會圖)
1550년(명종 5)에 있었던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당대의 저명한 문인인 신광한(1484~1555)의 제시가 적혀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광화문과 경복궁, 육조거리의 실경이 그려졌다.
장원서 관원들의 전별 방면을 그린 기록화 장원서전별도(章苑署餞別圖) / 안호, 1781년경, 종이에 채색.
장원서 별제 안호(安祜,1715~?)가 퇴임하며 모인 전별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의 화동(花洞)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던
장원서(궁중의 조경업무를 관장하던 관청)를 그린 유일한 실경산수화이며,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이 심었다는 '성씨송,이 그려져 있다.
장원서전별도(章苑署餞別圖)
십장생도 (十長生圖屛風) / 작가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서울시유형문화재.
장수를 상징하는 10가지 사물인 '해, 구름, 산, 물, 바위, 학, 사슴, 거북, 소나무, 영지'를 조합하여 제작한 궁중장식화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십장생도를 주로 큰 규모의 병풍 형태로 제작하여 왕비와 대비의 처소나 왕실 가족의 혼례. 왕실 어른의 생신 잔치 등의
궁중행사를 장식하는 데 사용하였다.
묵죽도(墨竹圖屛楓) / 신위, 1830년, 종이에 수묵.
조선 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히는 자하 신위(申緯,1769~1845)가 62세에 그린 것이다.
현존하는 신위의 묵죽 병풍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10폭 작품이며 유일하다.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신위의 작품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묵죽도이며, 시구(詩句)를 본격적으로 적어 넣은 초기 작례이다.
모란도(牡丹圖屛風) / 작가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모란과 괴석이 조합된 4폭 병풍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궁중장식화이다. 모란은 부구ㅣ영화를 상징하여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이나
다양한 왕실의례 행사를 장식하는 병풍에 많이 그려졌는데, 이 병풍은 흥선대원군의 안채인 이로당에서 사용한 것이다.
궁중 모란화의 특징인 만개한 꽃 9송이와 꽃봉오리 8송이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석란도 (石蘭圖屛風) / 이하응, 1891년, 비단에 수묵, 서울시유형문화재.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72세에 결혼 60주년을 기념하여 그린 석란화를 병풍으로 제작한 것이다.
바위틈에서 자라난 난초의 모습을 두 폭씩 비슷한 구도로 그렸으며 총 여섯 쌍이 하나의 병풍을 이루고 있는 12폭의 대규모 병풍이다.
정계에서 물러나 서화에 몰두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말년의 변화된 양식과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흥선대원군이 난을 잘 그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정말일까요. 석란도에서 난을 그린 부분만 올려 봅니다.
류순정과 윤익렬의 초상화.
공신 초상화 류순정초상(柳順汀肖像) / 작가미상, 1506년(17세기 이모 추정), 비단에 채색, 유원배 기증, 서울시유형문화재.
조선 전기 문신인 류순정(1459~1512)의 전신을 그린 공신상(功臣像)이다.
류순정은 한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진주 류씨 출신으로 1506년 중종반정을 주도한 공으로 정국공신이 되었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복식과 인물의 자세 등에서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공신 초상화의 이행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사대부의 관복 차림을 그린 초상화 윤익렬 초상(尹益烈肖像) / 작가미상, 1810년대, 비단에 채색, 윤성진 기증.
조선 후기 문신인 윤익렬(1752~1821)의 전신을 그린 관복 차림의 초상화이다.
윤익렬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후손으로 한양에서 태어나 대사간과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윤익렬이 예조참판으로 재직할 당시인 68세(1819년)의 모습으로 짐작되며,
숙종 때의 조선 후기 공신상을 원류로 삼고 이후 변화된 정조와 순조 연간 관복본 초상화의 특징을 반영하였다.
책가도(冊架圖屛風) / 작가미상, 1860년대 후반, 비단에 채색.
각종 골동 기물과 책을 그려 넣은 2폭 가리개 형식의 책가도로 운현궁 이로당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서가의 맨 아래 오른쪽 칸에 그려진 소라 모양의 술잔에는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고종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고 대원군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물이다.
책가도 오른쪽 아래칸에 그려 있는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 소라 모양의 술잔.
술잔에 써 있는 '수진보작.壽進寶酌' 글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
사대부의 평상복 차림을 그린 초상화 이하응 초상 와룡관 학창의본 / 이한철, 유숙, 1869년, 비단에 채색. 보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이다.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이 되던 44세에 그려둔 초본을 50세(1869년) 때
본떠 그린 것으로, 그림 우측에 어진화사인 이한철과 유숙이 합작하고 한홍적이 장황했다는 화기가 자필로 적혀있다.
섭정왕이 된 대원군의 모습을 제갈량을 상징하는 와룡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차림으로 표현하였다.
사대부의 평상복 차림을 그린 초상화 이하응 초상 복건 심의본 / 이한철, 이창옥, 1880년, 비단에 채색. 보물.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이다. 대원군의 61세 회갑을 맞이하여 그린 것으로,
그림 우측에 어진화사인 이한철과 이창옥이 합작하고 한홍적이 장황했다는 화기가 자필로 적혀있다.
1880년은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 등에서 한거하던 시기이며 선비들이 평상복으로 주로 입었던 복건과 심의를 착용한 모습이다.
회(回)자 무늬가 연속되는 뇌문의 청백색 돗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앞으로 포개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16세기 명필 한호의 글씨 석봉한호해서첩(石峯韓護楷書帖) / 한호, 1543~1605, 종이에 먹, 첩장. 보물.
선조 때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4)가 당대 문장가이며 절친이던 간이당 최립의 글 21편을 필사한 것이다.
한호는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서체인 소자(小字) 해서를 익혀 단아학 고풍스러운 서풍을 구사하였다.
선조의 후원 아래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으로 활동하며 이름을 떨쳤고 후대 사자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명필 허목의 글씨 전법(篆法) /허목, 1674년, 종이에 먹, 책장,冊粧.
인조~숙종 초의 명필 미수 허목(1595~1682)이 1674년 8월에 <주역,周易>, 복괘(復卦)를 풀어 쓴 책이다.
책을 쓰기 한 달 전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에서 남인이 주장한 기년(朞年,1년)이 채택되어 대공(大功,9개월)을 주장한 서인이 실각한 것을
'위에서 극에 달하면 아래로 돌아와 다시 태어난다'는 역리(易理)에 빗댄 것으로 짐작된다.
허목은 평소 선진유학(先秦儒學)을 지향하여 <서경>, <주역> 등을 타목하고 진한시대 이전의 고문(古文)을 애호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인전서체를 구사하였다.
*효종비가 사망한 뒤 자의대비의 상복입는 기간을 두고 남인과 서인이 벌인 논쟁으로 위 논쟁은 2차 예송(갑인예송)이라고 한다.
*1차 예송(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한 이후 새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
서인은 왕실도 사대부의 예를 따라야 한다며, 효종은 인조의 차남이기 때문에 자의대비가 1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남인은 왕실은 사대부와는 다르다며,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여 장남에 준하기 때문에 자의대비는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1차 예송에서는 현종이 서인의 의견을 수용함. (자의대비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임)
17세기 명필 송준길의 글씨 대자서(大字書) / 송준길, 17세기, 종이에 먹, 첩장.
인조 - 현종 때의 명필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쓴 글자 '위학(爲學)', '정일(精一)', '거성(去聖)', '계절(械絶)'로
"정일한 마음으로 중도를 지켜 성인의 심학(心學)을 이어가라"는 뜻이다. 표지에 근대 서예가 이병희가 '우암' 동춘 양선생 유묵'이라 썼지만,
서풍으로 보아 모두 송준길의 필적으로 여겨진다. 양송(兩宋)이라 불린 우암 송시열과 송준길은 한호의 글씨를 배워 초기에는 비슷한 필체였으나,
이후 송준길은 이황의 서풍을 더해 단정한 짜임과 완곡한 획법을 구사했고,
송시열은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 서풍을 더해 중후하고 질박한 필치를 구사했다.
18세기 명필 윤수의 글씨 백하진묵(白下眞墨) / 윤순, 18세기, 비단에 먹, 첩장(帖粧)
숙종~영조 때의 명필 백하 윤순(尹淳, 1680~1741)이 당나라 문장가 한유의 오언시, 칠언시 등을 비단에 쓴 것이다.
윤순은 시 ,서, 화를 두루 잘 했는데, 글씨는 동진 왕희지나 당나라 명필을 지향하면서도 미불, 소식, 문징명, 동기창 등이 쓴
송, 명대 글씨를 널리 수용했다. 특히 북송 시대 미불의 행초(行草) 서풍을 재해석한 백하체를 이루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명필 이광사의 글씨 석고가(石鼓歌) / 이광사, 1734년, 견본묵서.
영조 때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당나라 문장가 한유의 <석고가>를 소자 해서로 쓴 것이다.
스승 윤순 이래로 왕희지의 <황정경>에 바탕을 둔 소해(小楷)로 엄정한 짜임과 명료한 획법을 보인다. 소론 명가에서 성장한 이광사는
시, 서, 화에 두루 능한 인물로 특히 서체로 유명했으며, 서예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지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편액 노안당 편액(老安堂扁額) / 김정희 글씨 모음, 1864년 이후, 격자 틀에 장지 채색.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노안'이란 당호는 '늙은이가 편안하다'라는 뜻인데, 편액 말미에
"석파 선생을 위해 쓰다 書爲石坡先生, 늙은 완당,老阮"이라 새기고 앞뒤로 김정희의 인장을 새겼다.
그러나 노안당은 1856년 김정희 사망 후 세워졌으므로 김정희의 글자를 모아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명필 김정희의 글씨 난정서설(蘭亭敍說) / 김정희, 19세기, 횡권(橫券)
19세기 전반의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왕희지 <난정서>의 여러 본에 대해 후배 김여균에게 보여주고자 쓴 것이다.
두루마리 겉면 쪽지에 오세창(1864~1953)이 '완당행서ㅏ난정첩논권'이라 썼다. 이 글은 김정희의 글이 수록된 시문집 <완당전집> 권8
<잡지>에도 실렸는데, <난정서>를 베껴 쓴 임본(臨本)과 모본(募本), 탑본(榻本)에 관해 해설한 것이다.
노안당과 이로당의 상량문.
19세기 명필 이하응의 글씨로 추정되는 상량문 노안당 상량문(老安堂上樑文) / 이하응(추정), 1864년, 비단에 금니.
1994년 운현궁 중수공사 때 노안당 대들보 아래에서 나온 상량문이다. 좌의정 조두순이 지은 29행 661자의 글을 붉은 비단에 금니로
썼으며 해서체이다. 내용은 이곳이 고종이 나고 자란 장소로 형제들의 도타운 우애로 왕위를 잇게 된 이야기,
방계에서 대를 이었던 중국의 사례, 공역을 벌인 사정 및 당호에 대한 설명 등이다.
상량문 글씨를 쓴 인물은 밝히고 있지 않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필적으로 짐작된다.
이하응의 글씨로 제작한 운현궁 사랑채의 눌림쇠 노안당 상량문 눌림쇠(老安堂上樑文文鎭) / 1864, 은제양각.
억년무강(億年無疆)이란 예서를 양각한 은제 눌림쇠이며 김정희의 서풍을 따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필적으로 여겨진다.
이하응의 글씨로 추정되는 상량문 이로당 상량문(二老堂上樑文) / 이하응(추정), 1869년, 종이에 먹.
운현궁의 안주인 부대부인 민씨(1820~1898)가 생활하던 별채 이로당의 상량문이다.
영의정 김병학(1821~1879)이 지은 55행 663자의 글을 붉은 종이에 예서체로 썼다. 상량문 글씨를 쓴 인물은 밝히고 있지 않으나
1865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남연군묘갈>의 예서체와 비슷하여 그의 필적으로 짐작된다.
이하응의 글씨로 제작한 운현궁 안채의 눌림쇠 노락당 상량문 눌림쇠(老樂堂上樑文文鎭) / 1864, 은제양각.
억년무강(億年無疆)이란 예서를 양각한 은제 눌림쇠이며 김정희의 서풍을 따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필적으로 여겨진다.
첫댓글 대한민국 수도
서울한복판 서울역
많은문화재관람
선배님 덕분에
공부잘합니다
저는 가까운 곳이니
시간내여 여유롭게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와우~!!
박물관이 따로 없구만요!
이보다 상세한 백과사전이 있을랑가 모르겠습니다.
다녀올려고 작정 중인데
관람할 때 좋은 길라잡이가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중한 정보와
정성으로 올려주신 설명과 작품들
관람할 때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도 여러 곳에서 흥선 대원군이 난을 잘 그렸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고맙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