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초봄 드높은 하늘에 풍선을 띄우며
1. 본능적 취미 생활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유휴시간을 이용하여
나름대로의 취미 생활을 영위한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일요일이면
등산을 취미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풍광이 좋은 곳에서 나무 그늘을 깔고 앉아
유유자적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취미 활동은 자연을 상대함으로써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융화하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생과 자연과의 관계, 자연 속에서 인생의 위상,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참다운 행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꽃 한 포기를 가꾸거나 새 한 마리를 보살피고 키우는 동안에
생명의 존귀함과 대 우주의 법칙도 터득 할 수 있고,
그림 한 폭을 감상하고 거문고 줄 한 가닥을 어루만지는
사이에 옛사람들의 정서나 심금(心琴)을 체감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인생의 목표에 대한
영감(靈感)을 얻을 수 있으며 삶의 지표를
각득(覺得)할 수도 있다.
굳이 장황한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건전한 취미생활은
자신의 유휴시간을 값지게 보내기도 하려니와
그만큼 정신적인 부가가치를 얻는 일이고 보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취미생활이란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고
윤택하게 가꾸는 윤활유(潤滑油)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취미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작지만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3년여 교내 합창부에서 활동한 것이
동기가 되었는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남달리
음악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것이 언제나 내 몸 속에서 꿈틀거려 나로 하여금
노래에 관심을 이끌게 한다.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으로 그런 생활에 몰입한다는 것은
뱀이 하늘을 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한 주간의 특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전문가의 집을
찾아가 새삼스레 성악의 기본이 되는 ‘코리분겐‘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손윗동서인 L형은
“ 몸이 열 개도 모자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취미생활을 할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이제 이순(耳順)을 넘어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걸 해서
어쩌겠다는 게냐“고 나무라기도 한다.
이 나이에 성악을 학문적으로 수학(修學)하는 내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그 짓을 하려거든 차라리 TV 앞에서
과일이나 깎아 놓고 늙어가는 마누라와 마주앉아
술잔이나 기울이며 ‘가요무대‘를 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충고도 빼놓지 않는다.
내가 이런 일에 몰두하는 것을, 말은 하지 않지만
아내 쪽에서도 마땅치 않은 눈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취미생활이란 미명으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무얼까
그것으로 내가 입신(立身)하고자 함도 아니고,
성악가의 명성을 얻고자 함도 아니고 더구나 그것으로
돈을 벌고자 함도 아닌데 나는 어째서 그런 일에
아직도 관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을 나는 ‘본능적 취미’로 해석한다.
교육학에서는 잠재학습이라 하고 분석심리에 서는
잠재의식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출생과 더불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체험을 하였는가는
심리학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감동적인 인물과의
만남이나 경험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가히 인생 항로를 바꿀만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마음속에 침전(沈澱)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2. 하느님 주신 선물
나는 30여년이 넘게 남모를 고뇌를 안고 산다.
그것은 내 힘으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그 중압감으로 인하여 서서히 수몰(水沒)될지도
모를 엄청난 무게의 돌덩이를 가슴에 매어달고 산다.
발달장애의 둘째 아들과 함께한 고애의 가파른 세월이
39년이나 흘렀으니 말이다.
아들의 장애를 잊어버려 보려고 술에 취해보기도 하고,
다른 취미 활동도 해보고, 멀리 여행도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은 없었다.
나는 수없이 휘청거리며 살았다.
그럴 때 그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것이 부상(浮上)하여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 모른다.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후련해진다.
노래를 부르면 내 마음을 가리고 있는 슬픈 구름이 걷힌다.
노래를 부르면 온몸을 할퀴고 내 가슴을 쥐어뜯는
광풍(狂風)도 가라앉는다. 하느님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 노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나는 남달리 유명한 성악가가 무대에 나와
하늘을 가르는듯한 곡조가 장내를 뒤덮었을 때
그 신선하고 짜릿함이 온몸에서 활화산이 폭발하듯
전율감에 휩싸이고 , 그것은 초속 200킬로의
태풍으로 바뀌어 거짓과 음모와 부정한 사바세계의
온갖 군더더기를 단숨에 쓸어버리는 감동을 받는다.
내 가슴 한가운데를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가
툭 터져 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음악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미 8군 합창단에서 테너로 활동하였고,
성당에서는 가회동 성당과 여의도 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였고, 동기 약사들과는 노래교실이란 소모임을
만들어 7년간 월 1회 모임을 지속시키고 있고,
근자엔 서울시약사회 합창단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더구나 투석을 11년이나 받고 있는 나에게 고등학교의
배재 아펜젤라 합창단에 최근 2024.3월에 가입하여
세칸 테너 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항상 테너파트가 나의 몫이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음을 내기 어렵다는데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으면서 G#(솔 샵) 까지의
고음이 A(라음)까지 반음이나 높은 소리를 낼 수 있었다.
2009년 5월에 영등포약사회 자선 음악회에서도
테너 파트를 맡아 봉사한 것도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습성이었다.
목청을 통하여 울려 퍼질 때 마다 나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풍요가 나의 목청에 와 닿는 느낌에 감동하면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빠진다.
이것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것으로 꿈을 간직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계시가 아닌가 싶다.
괴테가 그랬던가. 부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반을 잃는 것이요 희망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다고.
그렇다. 전부를 잃진 말아야 한다.
‘안드로포스’(인간)라는 말은 하늘을 보고 사는
동물이란 의미가 아닌가.
내일도 나는 하늘을 보며 하늘이 베풀어 주신 목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팔순 나아 들어 여의도 샛강 인도교를 건너며 윤중로에
핀 벗꽃을 보며 가슴속으로 뭉클 뭉클 흘러 나오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하느님께 내 마음에 빨간 풍선을 띄우리라.
노래에 몸 담은 건강한 내 모습을 상상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