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영미 작가들 / 김종길(끝)
캐시 송과 브렌다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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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캐시 송(Cathy Song 1955~)을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초가을 그가 한국을 찾았을 때이다. 미국문화원 초청으로 그해 8월 하순에서 9월 초순에 걸쳐 그가 한국에 온 것은 하와이 교포 3세대로서의 그의 첫 번째 조국방문이었다. 그가 8월 말경에 부산과 대구를 거쳐 서울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이곳 영어여문학회 회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 것이 9월 1일 목요일 오후였는데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 강연장에서였다.
강연회가 있었던 그날 오후였던가 지금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나는 그를 고려대학교로 데리고 와서 나의 대학원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게 하였다. 수업은 캠퍼스 한구석에 자리한 인촌기념관 2층의 세미나실에서 있었는데 그 수업이 끝난 다음 1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나를 왈칵 포옹하는 거이 아닌가!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갑자기 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우리말은 할 줄 몰라도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게로구나, 하고 그때 혼자 마음속으로 되새긴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 나이가 그때 육십 대 말경이었으니 할아버지로 보였을 법도 하나 캐시 송이 나의 손녀뻘이 되는 것은 아니다. 1955년생이니 그는 나의 장남과 동갑이고 그때는 만으로 39세였다. 피부색이 검은 편이기는 했으나 눈매가 날카롭고 콧대가 굵직하여 영리하고도 강렬해 보이는 그는 체격 또한 다부져 보였다. 그는 호놀룰루 태생이지만 대학은 미국 동부에서 다녔다. 학부는 명문 여자대학인 웰즐리대학에서 그리고 대학원은 보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다닌 것이다.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그때 그로부터 들었는데 그가 보스턴대학을 다닐 무렵 학비를 버느라 그곳 일식당에서 기모노 차림으로 손님 접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식당에서 술자리를 벌인 한국인 또는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자기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꼬치꼬치 캐묻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못 들은 체하다가 하도 그들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기에 그는 화가 나서 "나 에스키모다 어쩔래!"하고 대들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로 보아도 그는 성깔이 있는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캐시 송의 할아버지 송석순은 20세기 초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 노무자로 가서 그곳에 정착한 한국인으로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송군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야기를 그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그의 두 번째 한국방문 기간 중 대구시 외곽에 있는 수성관광호텔에서였는데 그는 그때 대구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문학행사에 초청되어 왔던 것이다. 그 행사는 2002년 11월 1일 대구시 남서부 외곽에 위치한, 그때 개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되었고 그날 오전 개막식에 뒤이어 <한국문학의 세계화 방안>이라는 기조강연을 내가 하게 되었다. 그 행사를 국제행사라고 말했지만 외국에서 초청된 인사들은 캐시 송처럼 해외교포 작가들이었는데 그 분들과 내국인 참가자들의 숙소가 앞에서 언급한 수성관광호텔이었던 것이다.
캐시 송이 할아버지 고향을 알게 된 것은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남편과 함께 벤더빌트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그의 고모의 끈질긴 추적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곳을 근년에 감옥이 들어선 데서 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하니 청송 감호보호소가 들어선 청송군 진보 근처의 어디였던 것 같다. 그 진보라는 곳은 마침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곳인데 그 근처에는 송강(宋江)이라는 송 씨들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 어쩌면 캐시 송의 할아버지는 그 마을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할머니 전복필은 할아버지보다 18년 뒤 스물세 살 때 사진중매로 13년 연상의 신랑을 맞으러 부산에서 하와이까지 배를 타고 간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를 사실대로 서술한 것이 1982년도 <예일대학 신인상> 수상시집인 <사진중매로 시집온 신부>의 표제시이다. 그 작품을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나보다
한 해 아래였다,
한국을 떠날 때 스물세 살이었으니.
그녀는 그냥 아버지의 집 문을 닫고
걸어나왔던가, 그리고
그 이름도
그제서야 처음 들어본 섬,
그 기슭에서
한 사나이가
와이 일루아 제당공장 밖
수용소 안의 등이 켜지고
자기 방안이
사탕수수 사이로부터 날아드는
나방이들 날개로
훤했을 때
불빛에 그녀의 사진을
비춰 보는 그 섬으로
그녀를 데려다줄
배가 기다리는 부두까지는
부산의 옷가게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먼 길이었던가.
할머니는 어떤 물건들을
가지고 왔을까, 그리고
그녀가 도착하여
자기보다 13년이나 연상인 남편이라는
낯선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다소곳이
저고리의 명주 옷고름과
사내들이 사탕수수 대둑을 불태우는
주변 사방의 밭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으로 부풀어오른
천막 같은 치마의 끈을 풀었던가.
시집 <사진중매로 시집온 신부>에는 이 표제시 말고도 저자의 가족사적 내지 자전적 작품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찍이 강용흠이 <초당Grass Roof>이라는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미국에 소개했듯이 캐시 송은 이 시집의 시를 통해서 처음으로 한국을 미국에 소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영어로 시를 썼지만 시의 내용은 한국계 이민자 가정인 자기 집안 이야기가 많고 그의 시풍 내지 시적 어조 또한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시인 교수이며 <예일대학 젊은 시인상> 심사위원이기도했던 리처드 휴고(1923~1982)는 이 시집에 부친 <머리말>에서 그의 시풍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캐시 송의 장점은 그의 조용함이다. 그의 감수성은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열정이 곁들여져 있는데 그 열정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요하게 그리고 균형 잡힌 어조로 표현된다. 그는 경험을 생생하게 그리고 미리 조정된 데도 없이 받아들인다. 그의 지각은 천진스럽고 수용은 완결된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에서만 완결된다.
이 처녀시집으로 캐시 송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의 매체로부터 가위 격찬을 받고 <예일대학 젊은 시인상> 뿐만 아니라 <전미서평가상>도 받았다. 그는 첫시집에 뒤이어 <창틀 없는 창, 빛의 사각형>(1988), <피켜스케이트동작>(1994) 및 <축복의 땅>(2001) 등의 시집을 내어 여러 가지 문학상을 더 받은 바 있다.
그는 첫 번째 한국방문 때 서지문 교수와 가진 인텨뷰에서 자기 자신이 미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의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는 그의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텨뷰에서는 그의 치열한 시정신을 내비친 강렬한 발언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저는 시를 스케이트 선수가 스케이트 날로 정확한 곡선을 그리며 온 힘을 다해 얼음에 갇힌 풀꽃을 풀어내듯이 언어의 칼날로 우리 속아 감금되어 있던 자아를 해방시키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캐시 송의 아버지는 기계를 다루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직업은 비행기 조종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중국계 하와이 사람이었다. 그녀는 더글라스 데번포트라는 백인 의사와 결혼하여 세 아이를 두었고 자기은 하와이 교육청 소속으로 하와이 저역을 돌면서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학생들에게 시 쓰기 지도를 해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 시작은 화산 가까이 있는 작업실에서 혼자 틀어박혀서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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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시 송 말고 또 한 사람의 하와이 출신 교포 여류작가를 최근에 만났는데 그의 이름은 부렌다 권(1968~)이다. 1968년생이니 캐시 송보다는 13년 연하지만 매우 차분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2005~2006년도 풀브라이트 강사로 고려대학교 영문과에서 가르치다가 하와이로 돌아가기 직전인 2006년 6월 25일 오후 대학로의 당시 '자바'라는 이름의 커피점에서였다. 마침 그때 위스콘신대학의 입학허가를 받고 귀국해 있던 나의 손녀도 자리를 함께했는데 그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캐시 송과도 아는 사이라 했고 그도 캐시 송처럼 우리말을 하지 못한다 했다. 그날 저녁엔 그와 함께 대학로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택시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숙소인 고려대 외인숙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나서 1년 만인 금년 6월 12일 오후에 고려대 구내다방에서 그 대학 영문과 김양순 교수와 함께 잠시 그와 재회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녀가 서울에 온 것은 고려대학 캠퍼스에서 개최된 어떤 국제행사에 초청을 받아서였다. 그때 화제에 오른 시인이 네브레스카에 살고 있는 테드 쿠저(1939~)였는데 내겐 그의 시집이 없다고 했더니 그는 하와이로 돌아가자 즉시 쿠저의 시집 <기상통보>(1994)과 <한국 풀브라이트 리뷰> 2006년 여름호를 보내주었다. 그 풀브라이트 간행물의 첫 면에 "저의 한국체재 기간을 잊지 못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라고 단정한 필사체의 영어로 된 인사말이 적혀 있었고 거기엔 또한 그의 <한 세기에 걸친 자장가>라는 4페이지에 걸친 긴 시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작품은 그가 한국에 와서 자기가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계로서 이른바 정체성을, 거의 절규에 가까운 절절한 어조로, 가지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작고한, 약 백 년 전 하와이로 망명한 그의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는 투로 쓰여져 있다. 그는 한국어를 못하지만 자기가 아는 몇 마디의 한국어를 원음대로 시에 삽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Harabeoji(할아버지) aniyo, hanguk saram ye yo(아니오, 한국사람이예요)와 같은 것이 그것들이다. 비록 그는 차분하고 얌전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작품으로 보아서는 캐시 송보다도 오히려 더 열정적인 데가 있는 사람 같기도 한다.
그 작품의 한 대목을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내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당신은 항상 이론적이었을 수 밖에.
우리의 끈은 상상할 수밖에.
당신 사진과 내 사진으로 엮어진 끈이기에 나는
우리 사진을 도려내어 함께 붙여
우리가 카메라의 거룩한 플래시의 한순간만이라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던 척이라도 하고 싶었지요.
만일 내가 만날 수 없는 종이쪽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 당신이 어머니의축 처진 뱃살을 통해서만 보셨지요,
세월과 어머니의 뱃가죽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들이었군요.
브랜다 권도 호놀룰루 태생이면서 대학은 미 본토에서 다녔다. 학부와 대학원 다 L.A.에서 다녔는데 학부는 USC 즉 남가주대학에서 영문학과 문예창작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은 UCLA, 즉 캘리포니아주립대학 L.A. 캠퍼스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그 뒤 호놀룰루의 하와이대학교 부설 단기대학(Comunity Colleage)에서 가르침년서 공연활동과 문필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