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이른바 '검수완박'은 오랜 세월 누적된 검찰 적폐의 업보이고, 양질전화의 변증법적 귀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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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책을 몇 권 쓸 수 있는 분량일 텐데, 나는 그중에서도 어쩐지 김재윤 케이스가 종종 악몽처럼 떠올라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신계륜 케이스도 황당하지만, 내가 접했던 국회의원들 가운데 가장 양순하고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김재윤이 빌딩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을 때, 나는 KBS 시사직격 <메이드 인 중앙지검> 편에 나왔던 그의 노기 가득한 절규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김재윤이 4년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하자 입법 로비 당사자인 김민성 전 서예종 이사장은 김재윤을 찾아와 "짜여진 틀에서 저로 인해서 피해를 보신 분들이 (감옥) 안에 계실 때도 저 역시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큰 틀에서 보면 또 정치가 참 무섭구나 그런 생각도 했고…"라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 '짜여진 틀'이라는 게 뭔지 구체적인 사정은 털어놓지 않았는데, 방송을 보면 전후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김재윤 : 만나자는 이유가 뭡니까?
김민성 : 저로 인해서 큰 고초를 겪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제가 죄송하다는 말로 용서를 구하는 게 제일 빠른 것 같아서.
김재윤 : 용서를 구한다고 그러면, 사죄한다고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진정 용서를 구하는 게 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세요.
김민성 : 죄송합니다.
김재윤 : 용서를 구한다고? 나한테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어요?
김민성 : 제가 그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재윤 의원 : 무슨 상황이요? 얘기해 봐요. 얘기해 봐요 그 상황이 뭔지. 그래서 막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살고 싶어? 진실을 말해!!!
타깃을 정하면 악랄한 표적 수사, 별건 수사,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에 없는 죄도 만들어 기소하고, 반면 자기 편 혐의에 대해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덮어버리거나 축소 수사로 봐준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만 해도 경찰이 내사를 한 게 지난 2013년이고, 윤석열이 옷을 벗고 나간 뒤에야 언론과 여론에 밀려 검찰이 소위 '선수' 3명과 권오수 회장 등 공범들을 줄줄이 구속했지만 그로부터 5~6개월이 지났는데도 김건희는 단 한차례 소환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방 대학의 봉사활동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조국 부인 정경심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사실 적시도 없이 '백지 기소'부터 감행하고 수도 없이 압수수색을 벌인 행태와 비교해 이토록 대조적일 수가 없다.
자녀의 의과대학 편입학 특혜, 병역 비리 의혹 등이 다각도로 쏟아지고 있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검찰은 왜 대대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수사로 탈탈 털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는가.
검수완박은 이처럼 한도 끝도 없는 불공정 편파 수사의 자업자득이자 사필귀정에 다름 아니다.
일부 우려되는 점이 없진 않지만 경찰은 이미 치안 등 대부분의 수사(전체 형사사건의 97%)를 담당하고 있어 검찰이 기소권만 행사하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주장들엔 동의하지 않는다.
거꾸로 경찰이 기껏 수사하고 영장 신청하면 검찰이 뭉개는 행태, 가령 사이버 명예훼손과 모욕 등 혐의로 숱하게 피소됐으나 10여 차례 출석 요구에 끝까지 응하지 않아 경찰이 결국 체포한 강용석·김세의·김용호 등 가세연 출연진에 대한 구속영장을 검찰이 모조리 기각한 것과 같은 사례는 또 얼마나 많은가.
경찰 수사 방해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검찰의 전문성 운운하지만 경찰청 산하 독립수사기구인 국가수사본부(국수본)도 6대 범죄를 수사할 수 있다.
6대 범죄 수사권을 아예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또는 특별수사청 등 '한국형 FBI'로 이관했을 때 예상되는 득(得)이 검찰에 계속 맡길 때 두고두고 벌어질 온갖 편파 수사 논란의 실(失)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검찰의 수사 근거 조항을 삭제한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도 시행은 일단 3개월간 유예되고 중수청 설치 방안 등이 추가 논의된다.
보완 수사 요구나 경찰 범죄 수사는 검찰 권한에 둠으로써 상호 견제 및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간다면 바람직한 방향이다.
출입처에 기이할 정도로 경도되고 유착된 검찰 기자들보다는 서울지방경찰청과 본청은 물론 시내 경찰서 곳곳에 상주하면서 틈만 나면 쑤시고 조지는 사스마리, 경찰 출입 기자들의 감시 역할이 더 믿을 만하다.
윤석열이 곧 대통령에 취임하면 거부권 행사로 모든 시도가 물거품이 될 테니 지금 서두를 수밖에 없다는 점도 납득이 간다.
윤석열은 심지어 자신의 최측근이자 수족이나 다름없는 한동훈을 버젓이 법무장관에 지명함으로써 검찰 사유화 의혹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측 인사들에겐 사냥개, 반면 윤석열 집권 세력에겐 애완견 노릇 등 선택적 수사·기소를 둘러싸고 나라가 내내 시끄러울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김건희 수사는 물론 그간 어렵게 진전돼 온 법무부 조직의 탈검찰화, 문민화도 물 건너가게 생겼다.
한동훈은 김건희와 4개월간 9차례 통화하고 332차례 카카오톡을 주고받은 사실이 2020년 당시 법무부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김건희와 <서울의소리> 이명수 기자와의 통화 녹취록도 이 시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명수 : 한동훈 형 전화번호 몰라?
김건희 : 한동훈?
이 : 응.
김 : 왜? 무슨 일 있어?
이 : 내가 제보 좀 할 게 몇 개 있긴 있는데.
김 : 그럼 나한테 줘. 아니 나한테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번호를 줄 테니까 거기다가 해. 내가 한동훈이한테 전달하라 그럴게.
검찰이 상징적 차원에서라도 불편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늦었지만) 김건희를 소환하고 불응하면 체포하고 압수수색에도 즉각 나서는 등 정상적인 수사 의지를 보인다면 여론도 검찰 편으로 쏠리겠으나, 자기들 잣대로 적이냐 아군이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는 작태를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하다 곧바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왔을 때, 그리고 실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우려하는 글이 내부 게시판 이프로스(검수완박으로 지금 난리가 났다는)에 얼마나 올라왔던가.
박철완 법무연수원 용인분원장이 홀로 "전직 검찰총장이 어느 한 진영에 참여하는 형태의 정치 활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법질서 수호를 위한 기관인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염원과 모순돼 보인다" "검찰 내부에서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토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잇따라 올렸지만 2000여 명에 달하는 전국의 검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인권의 수호자, 공익의 대표자로서 불철주야 헌신하며 법과 양심에 따라 직무에만 충실한 일선 검사들도 물론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검사내전>을 읽으면서 김웅도 그런 인물인 줄 알았는데 고발 사주 사건을 보니 '가젤'들과 싸우다 본인도 가젤이 됐나.)
그래서 일부 정치 검사의 문제를 검찰 전체의 문제처럼 매도하고 일반화하면 안 된다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검사동일체 원칙을 내면화한 검찰 조직에서 뜻있는 검사들의 자발적 쇄신 운동이나 기개를 기대하기에는 그 목소리가 미미하기만 하고 현실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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