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가를 달리는 동안 60-70년대 우리 시골 풍경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기와를 얹은
열 댓집에서 스무채 남짓한 마을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저녁밥
을 짓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소에 쟁기를 매달고 논에서 일을 정리하는 아저씨 아주
머니의 모습이 산을 막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늘이고 있다. 어디를
갔다 오는지 한 보따리는 손에 들고 한 보따리는 머리에 척 얹은채 서너 명의 아주
머니가 길을 재촉한다. 교통수단이 거의 없는 동네인 듯 싶다. 조장의 말에 따르면
가장 빠른 것이 자전거인데 자전거를 사려면 직장인 월급을 3개월 모아야 살 수 있
다고 한다. 그만큼 자전거도 부잣집에서 살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충청남도 천안군 성남면 신덕리, 내 마을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떠오른다. 우리도
저렇게 가난한 시절이 있었다. 논 두 마지기. 일곱 식구가 사는 우리 집의 재산은
논 두마지기였다. 논 두 마지기에서 나오는 쌀은 일곱 식구 1년 식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밥이 아닌 다른 구황작물로 끼니를 때울까 어머니는 늘 고민
했다. 감자와 고구마는 어린시절 나에게 밥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식량이었다. 일곱
식구 생활에서 열 두가마니의 고구마를 캐도 이듬해 싹 없어질 정도로 고구마는 밥을
대신 하는 쌀이었다. 밭, 그러고 보니 그당시에는 논보다 밭이 더 소중했다. 아버지
소유로 된 밭은 300평, 주인 없는 공동묘지 비탈길에 따비밭을 일구어 조금 보탬을
했던 땅까지 다 합해도 우리 일곱 식구의 식량문제는 늘 부족했다. 그러니 돈은 만질
래야 만질 수가 없는 형편일 수밖에 없다. 내 고등학교 때까지 우리 집은 자전거가
없었으니 지금 북한 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해가 산을 넘었다. 산이 뜨거워진다. 더워진 산을 바라본다. 내 눈도 뜨거워진다.
내 몸도 더워진다. 어둠이 들판을 조금씩 짓누른다. 내 가슴도 무엇엔가 눌려 답답
함을 느낀다. 점퍼를 벗는다. 한숨을 크게 쉰다.
가난하다는 것과 행복, 부자라는 것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
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 위치에서 저 마을과 지나가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모
습을 보니 그냥 불쌍하다. 우리집이 그 가난에서 벗어나 지금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북한은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 아닌가.
2.
초겨울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해넘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온통 까맣
다. 창문밖으로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산이 어슴푸레 지나갈 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멀리서 보이는 가로등 같은 불빛이 하나 보인다. 그 둘레로
작은 마을이 있는 것 같다. 전기불 하나 보이지 않는다. 관광 조장은 설명한다.
"북한은 전력란이 아주 심각하기 때문에 밤 9시만 되면 모든 전등을 끕니다. 그리
고 지금 정도의 어둠에서는 될 수 있으면 전등을 켜지 않습니다."
전기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 될 무렵 전기불을 처음 보았다. 그때까지
등잔불을 켜고 살았던 나는 촛불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등
을 처음 보는 순간 그것은 불이 아니라 '빛'이었다. 지금도 에어컨을 사 놓고 전기세
무서워서 켜지 않는 그런 가정이 많듯이 당시에 우리 동네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지만
전기불은 그야말로 촛불이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날에만 켜야했다. 전기와 등잔불이
공존하는 세월이었다.
언제였던가. 북한이 남한에게 전력 공급을 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우리 언론에서는
여러 우려와 함께 최소한 전력을 공급해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용도로 쓸 경우
를 생각해서, 백성들은 불쌍하지만 수뇌부를 믿을 수가 없어서 전력 공급은 안 된다
고 힘주어 말하곤 했었다. 그들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왜 우리에게는 좀 더 합리
적인 의견 도출 과정이 없이 언론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
이다.
아무 빛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한참 달리고 나서야 환한 빛이 서울의 한 모퉁이를 생각
나게 하는 곳을 보게 되었다. 고성항 또는 장전항 이라고 부르는 금강산 관광의 정착
지이다.
3.
남측에서 떠날 때보다 더 복잡한 통과 의례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섰다. 여기에서는
북한 검열관들이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을 하게 된다. 그렇게 차례
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질수록 여기저기서 투덜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는 금강산에 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기 시작한다.
"지금이 몇 시야? 참 내, 아 유럽에 갔어도 도착할 시간이네. 에이, 답답해서 원."
북한과 남한이 50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까맣게 잊고 해외 여행과 똑같게 생각
을 한 탓이다. 해외여행은 여권과 비자만 있으면 갈 수 있지만 북한은 여권도 비자
도통하지 않는 곳이다. 외국 관광객보다 우리 남한 관광객에 대해 더 경계를 하는
나라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민족의 아픔이 간직된 곳이다. 그런 나라에 갈 수 있
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절차상의 어려움이 있어도 다 겪어야 한다는 지극히도 평범
한 상식을 자꾸 투덜이들은 잊는다. 그것은 북한의 경직된 체제를 욕하는 것 같이
보여도 자신의 무지를 털어 놓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불만이 많다. 그것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잘 알게 되면 불만이
아니라 이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호된 통과 의례. 그들보고 아무 표정도 없는 마네킨 같다고 투덜이들은 말을 한다.
그런 투덜이들은 검열관들에게 자기가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면 그들도 대답을 한다. 물론 100%는 아니지만.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내 신분증을 검사하는 북한 검열관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예, 반갑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예, 고맙습니다."
4.
호텔 해금강에서 잠을 청한다. 고성항 물 위에 떠있는 배 호텔이다. 홍콩에서 끌어
왔다는 호텔 배이다.
정주영이 생각난다. 현대가 떠오른다. 김대중씨의 철학을 알 것 같다. 정몽헌의 죽음
은 무엇이었던가. 투덜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정주영과 김대중
에 가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하긴 했어."
비자금, 북 송금. 미국은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를 하나 평양에 내면서도 엄청난 공을
들이고 그 댓가를 치렀다고 하는데 뱃길을 열고 육로를 열고 금강산 관광을 통채로
얻어내기 위해 준 돈이 문제가 되는 아쉬움.
고성항과 금강산은 현대 땅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세간에 현대와 삼성을 비교하는
말들이 많다. 주로 현대가 밀어붙이기 식이라면 삼성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투자
하는 회사라고. 기업주의 스타일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와보면 과연 현대
가 이루어 놓은 일이 얼마나 큰 역사적 사건인지 알게 된다.
정주영씨가 일생 일대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이루어 낸 북한 금강산 관광사업은 그를
좋아하고 싫어 하고에 의해 평가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자금이라든지
정권과의 연결 고리를 통해 북한 길을 열어 놓았다고 비아냥 거리고 결국 정몽헌을
죽음으로 내몰고 현대라는 기업 자체가 풍비박산 났지만 그 모든 평가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라고 본다.
김대중씨의 평양 방문과 정주영의 금강산 관광길 열기를 단순하게 정치와 경제적인 잣
대로 보면 이구동성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나는 자본가 정주영의 평가와 정치인 김대중의 평가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 우리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눈으로 보면 정주영이라
는 사람과 현대, 김대중씨가 일구어 놓은 북한과의 관계 트기는 아무리 평가 절하를 해도 분단 이후 가장 큰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잠을 청한다. 날씨가 아주 흐리다.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 모두 비옷을
준비해야 될지도 모른다. 물 위에 떠있는 배라 좌우로 조금씩 흔들린다. 이영희씨의
책 제목이 생각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이렇게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떠 있는 배. 이곳에서 편히 잘 수 있는 것처럼 인간사에서 좌우는 꼭 필요
한 이데올로기일텐데. 그 좌우가 꼭 이념이 아니더라도 모든 생각의 차이를 좌우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좌우를 인정해 주는 삶. 그 똘레랑스의 깊이를
흔들리는 배 침대위에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