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 지내는 다른 교회 권사님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서 그 댁을 다녀왔습니다. 일흔이 가까운 권사님이 부족한 저희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각별합니다. 좋은 것, 맛난 것을 보면 저희들 생각을 먼저 하는 분입니다. 오늘(4월 29일) 저녁엔 사골 국을 진하게 끓어 놓고 함께 먹자고 연락을 주신 거였습니다. 권사님은 영락없이 옛날 분입니다. 더 먹기를 입이 닳도록 권하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지난 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 당면 과제였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대, 그래서 보릿고개란 말이 정말 죽음의 고개만큼 높게 보였던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특히 6.25 전쟁 직후엔 더 그랬습니다. 오죽하면 어른들이 아이들 뛰어 노는 것까지 자제 시켰을까요. 변변하게 먹지도 못하는데 쉬 배 꺼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풍요 속에 빈곤을 느끼는 시대입니다. 풍요는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요, 빈곤은 정신적 영적 공허함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어쨌든 그 권사님의 마음이 고맙고 그로 인해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밤 8시가 조금 지나 귀가했습니다. 새벽이 모자(母子)에게 과외 먹이를 주고 어제(4월 28일) 아내와 김을봉 집사님, 김종말 집사님이 일궈놓은 소농장(?)을 둘러보고 들어오니 아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감격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앞에는 20 Kg 쌀 한 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포장지 위엔 사람 이름과 휴대폰 번호까지 굵은 메직 펜으로 씌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먼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노년부 예배가 따로 드려집니다. 주일엔 함께 드리지만 수요일엔 낮 11시에 노년부 예배를 드리고 12시(정오)에 함께 공동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4년이 넘어 5년에 근접하는 기간을 시종일관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이 노년부 예배와 식사 때문에 불만을 가진 몇 성도가 교회를 이탈했지만, 괘념하지 않고 우리의 할 일이라고 확신하며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처음엔 순전히 목사인 제 개인이 경비를 부담하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주님의 일을 혼자 독식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재정에서 공동식사 경비 일부를 지원할 것을 사무총회에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그것이 받아들여져 교회 전체의 일로 전환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좋아할 일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어서 좋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인간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노년부 공동식사가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공적인 교회 재정 지원도 노년부 공동식사를 준비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목회자 개인의 일에서 전 성도의 일로 확장된 데에서 그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근인(根因)이 되어 불만을 가진 일부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이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목회자인 저 개인이 지고 가야할 사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은 또 다른 일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쌀 겉표지에 적혀 있는 휴대폰으로 전화를 넣었습니다. 자신은 동 사무소에서 나오는 쌀을 지정자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까지 배달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이 쌀을 동 사무소로부터 받아서 할머니들 식사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가지고 온 것 같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오늘 낮 예배 뒤 공동식사를 준비하면서 마지막 쌀을 털어 밥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 아내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이 쌀이 마지막이오니 하나님께서 채워주시옵소서. 저희 교회 사정을 잘 아시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난 뒤, 출처가 알려지지 않은 쌀이 한 포 배달되었으니 아내가 놀랄 만도 하지 않겠어요. 아내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마음 속으로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면 즉시 응답 주시는 경험을 몇 번이나 얘기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한 할머니는 그런 일을 놓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말했지만 아내는 이내 그 말을 수정해 주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 결과라고요.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만큼만 채워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 광야 생활에서 당일에 필요한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섬세한 손길을 찬양합니다. 도우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