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극복수기 당선작] 새로운 삶을 위하여 | ||||||||||||||||
항상 영업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었고, 대구`경북 지역을 책임지는 지점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나에게는 더욱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지점장이 되기 위해 이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키울거라는 경영자의 말만 믿고 2006년 3월 회사를 옮겼지만, 자금사정으로 제품생산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월급도 처음엔 80%가 지급되더니, 그마저도 50만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모기업인 ACTS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이텍스제약도 흐지부지되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1년여를 허송세월하다 보니 내 나이 마흔, 이제는 오라는 회사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있었다. 전직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던 나에게 처자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중압감은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2007년 4월부터 실업급여를 수령하며,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낱 같은 희망으로 7월에 실시된 대구시 10급 기능직(운전원)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구직활동 등록을 위해 고용안정센터에 가도 나이가 많아서 취직이 어려울 것이라는 말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주위가 온통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막막감만이 생각을 사로잡았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서 주택관리사보 시험을 쳐 보리라 마음을 잡았다. 시험을 준비하며 앞날을 그려보았다. ‘기술직에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실업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10년 했지만, 앞으로 20년을 더 해야 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술을 배우자. 그러면 어떤 기술을 배울까? 기술도 전자나 기계 분야는 젊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하고 여러 생각에 잠겼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전기를 배우자고 결론을 내리고 국비과정으로 영남기술교육원에 전기설비 자동화 과정(2007. 7. 30~12. 24)에 수강신청을 하였다. 남들은 휴가를 가는데 나는 실업급여를 받는 실직자에다 국비로 교육을 받는 교육생의 신분으로 전락해 버렸다. 내년엔 이 시기에 가족과 같이 휴가를 보내리라 각오하고 열심히 교육에 임하였다. 교육 초기에는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과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교육내용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다른 일을 하며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모여 교육을 받으니 의견충돌이 심하였다. 그 의견충돌은 결국 31세의 청년과 50여세의 아저씨의 싸움으로 변했다. 서로 욕설을 하며 ‘죽이네 살리네’하는 것을 보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런 곳에서 내가 무얼 배우겠다고 있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재자의 역할도 해 보았지만, 50여세의 아저씨는 중도 탈락하고 말았다. 그후 교육분위기는 안정이 되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전기 기술을 배울 수 없으며, 앞날은 없다는 생각으로 각종 모임에 발을 끊고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전기설비 자동화 과정은 노동부의 늦은 인가로 인해 2007년 기사 4회와 기능사 5회 시험만 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기사 4회는 교육과정보다 수준이 높아 응시를 포기해야만 했다. 주택관리사 10회 시험을 준비하는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기술교육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학교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10월 21일에 친 주택관리사 시험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아직도 시험을 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시험 잘 쳤냐고 묻던 아들의 질문에 눈물이 글썽거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제 남은 희망은 전기기능사 시험뿐이었다. 전기기능사는 실기가 작업형이어서 기술 습득에 시간이 걸렸다. 9월 16일 기능사 필기시험을 본 후 10월부터 실기를 배우기로 교육일정이 잡혀 있었다. 전선을 연결하여 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파도처럼 밀려 온다고 했던가. 나는 그만 학원생들과의 모임 후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절로 인해 6주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해야 했다. 2007년 10월 26일이었다. 내 인생은 내가 잘못 산 탓도 있지만, 왜 이렇게 비참한 쪽으로 흘러가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을 입원 후 11월 29일에 접수해 둔 실기시험을 치기 위해 아픈 발을 이끌고 퇴원을 해야만 했다. 이론교육장과 실기실습장은 불과 50여m였지만 발등 골절로 다리를 저는 나에게는 천길만길 아득히 멀기만 했다. 또한 실기실습은 5시간여를 서서 작업을 해야 했지만, 발등의 통증은 이번 만큼은 꼭 붙어야 한다는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이렇게 힘들게 실기실습을 하고 11월 29일 실기시험을 치고, 그 자리에서 내가 만든 시퀀스회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고 이제 전기기술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또 다른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육원은 졸업할 때가 되어 가는데 취업이 되질 않았다. 나이는 많고 경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택관리사 홈페이지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비참하다는 생각보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내가 이런 꼴을 당하려고 5개월을 기술을 배우겠다고 힘들게 보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렇게 기술교육원을 취직을 하지도 못하고 졸업을 하고 말았다. 실업급여도 전부 지급 받아 희망도 없이 힘겨운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8년 3월 22일 대구시 기능직 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였으나 또 고배를 마시고 한숨만 쉬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인연까지 끊고 노력하였건만 내 실력이 이것뿐인가 생각하니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차를 몰고 가면서 핸들을 꺾을까하는 생각도 수없이 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워크넷에 구인등록을 하고 주택관리사 홈페이지의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내어 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나에게도 2008년 4월 7일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송림맨션 관리사무소에서 일을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비록 월급은 143만원이었지만, 경력을 쌓고 또한 전기기사 자격증을 따자는 생각으로 입사를 했다. 제약영업을 할 때와는 업무여건이 달라 많이 후회도 하고 방황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기회가 아니면 전직의 기회는 영영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틈틈이 공부하여 2008년 6월 전기산업기사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아파트 여건상 지금은 이직을 하여 범어동의 태왕유성하이빌에서 전기안전관리자로 선임되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길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희생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참고 따라주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이렇게 노력한 결과, 작년에는 연말에 취득한 전기기능사 자격증 하나 뿐이었지만, 지금은 전기기능사 외에 보일러취급기능사, 전기산업기사, 컴퓨터 활용능력 2급 이렇게 4개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소방설비산업기사 필기시험에 합격한 상태에 있고, 지금은 제4회 정처리기사를 취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 중이다. 내가 전기분야에서 일한다고 하니, 어머니께서는 고등학교 진학을 구미 금오공고로 간다고 할 때 말린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어머니 때문에 다양한 인생을 살 수 있었노라고 농담삼아 얘기를 하곤 한다. 간간이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영업직으로 있을 때는 몰랐던 기술직들의 얇은 봉투에 실망을 느끼고 회의감이 들 때가 있지만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하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게 일하고 있다. 모르던 기술들을 익히고, 경력을 쌓아 상위 자격증인 전기기사, 전기기술사를 취득할 것이며, 소방계통으로 소방시설관리사를 취득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희생을 감수하고 참아준 아내와 두 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또한 40이 넘은 아들을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3, 4년 뒤에는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리라 다짐해 본다.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처럼, 나도 또 다른 태양을 맞이할 것이다. 은한기(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
[실업극복 수기 당선작] 무궁화 꽃을 떠올리며 금상/정병율 | |||||||||||||||||||||||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소위 말하는 막일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치는 시간이 일정치가 않았다. 아내는 아직도 내가 그전 직장에 다니는 줄 안다. 아무래도 아내는 근로조건과 월수입도 꽤 괜찮은 데를 자기남편의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기 싫은 까닭에 나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거짓말이나 일삼고 있다. 공사장의 잡부일은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볕 따가운 요즘에는 땀이 절로 난다. 먼지와 소음에 지레 지치기 일쑤고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이 나서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초고층에서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하는 날이면 이곳이야말로 지옥(?)의 앞자락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든다. 그럼에도 나는 이 높은 곳에서 좋구나, 하며 뽕짝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쿵, 쿠웅 연이어 터져 나오는 펌프 카의 진동소리가 박자를 맞추고 있었는데 그때는 나는 잠시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티는 공사장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까맣게 잊는다. 내 걸어온 부끄러운 날도, 쓰라린 마음의 고통에서도 일순간에 벗어나곤 했었다. 아내에게는 늘 미안했다. 내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지금도 아내는 다 해져서 너덜너덜한 속옷을 입은 채로 지내고 있으니까. 처갓집 동생들이 쓰는 샘플용 화장품을 얻어 사용해도 아내는 명랑하게 군다. 도리어 아내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내 건강이나 잘 챙기고 다니라며 아침마다 그런다. 탁탁, 와르르, 쨍그렁 이 시간 동료들의 망치소리, 벽돌 나르는 소리, 철근 던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면 내 존재를 새삼 발견하곤 한다. 내 생명도 따라 펄펄 살아 움직이는 걸 느끼는 것이다. 그렇듯이 공사장에서의 하루는 풀풀 날리는 시멘트가루만 마셔대는 것이 아니었다. 참 시간에 동료와 막걸리 잔이 오고가는 그 순간에도 사람끼리의 우애를 느낄 수가 있고, 땀 뻘뻘 흘려가며 배관을 옮기는 슬래브 위에서도 구성진 노래가 들려온다. 그 노래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숨소리를 듣곤 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성질도 급한 ‘희망’이 벌써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어 그러는 건 아닐는지. 이미 아내도 내 행색에서 실직을 눈치 챘지 싶다. 그렇다면 아내는 왜 내게 위로의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을까? 한편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설마 아내가 내 자존심까지 헤아려주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말이다. 정말 아내는 내게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그간의 자초지종을 다 아는 듯이 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예전보다 내게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게 ‘힘’이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 이 시간에도 나는 기지개를 켜가며 망치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로소 이 공사장 안에서 깨달았다. 치열하기까지 한 현장에서 ‘가장들의 눈물’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를 배웠고, 용쓰고 난 뒤에 먹는 막국수 한 그릇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세상이 내 것 갈았고, 리프트 작동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이내 동심으로도 돌아간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도 잠시, 나는 뙤약볕에서 일하다가 평소부터 앓고 있던 고혈압과 허리통증으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몸도 야윈 난데, 나로서는 이제 중노동은 못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일 년 가까이 방안에 드러눕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가 가정을 도맡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나는 그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선천적으로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아내라서 집에서 설거지도 겨우 할 판에, 복지관에 나가 잡일을 하는 것을 보면 연방 가슴이 아파왔다. 그렇게 우리 가정은 겨우겨우 끼니만 연명해가며 살았는데 도저히 이대로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빚을 내서 장사에 뛰어들었다. 아파트상가지하에서 비디오가게를 개업했는데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한 덕분인지, 처음에는 매상도 괜찮았다. 늘 병자 같았던 아내의 얼굴에도 차츰 화색이 감돌았다. 모처럼 우리 가족은 웃음꽃을 피웠고 아이를 데리고 외식도 다녔다.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해쯤이 흐르자, 주변에 대형매장이 들어서고 손님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쟁심만으로 조금 벌어놓은 돈을 재투자해 점포를 확장했고, 나중에는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미 발길을 돌린 손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급기야 점포를 내놔도 인수할 사람도 없는 걸 보니 나로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종내에는 더 이상 현상유지도 할 수 없어 업자한테 공짜다시피 물건을 넘겨버렸고, 월세만 까먹고 있는 빈 점포는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로 내주고 말았다. 이제는 의욕마저도 사라져갔다.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눈만 감고 있었고 아내 역시도 그 사태가 어이가 없었던지,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양식도 떨어져 결혼패물이나 아이의 돌 반지를 팔아가면서까지 연명하곤 했었다. 심지어는 자식한테 제대로 입힐 옷조차 없어, 딸아이가 시내에 놀러갔다가 또래에게 거지 취급까지 받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 순간 정말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내 무능력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의미한 세월을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보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저버린 채 말이다. 어느 날 딸아이가 내게 그랬다. “아빠, 나 용돈 떨어진 지 오래야! 다른 아빠는 친구들한테 용돈도 잘 준다던데……” 그 말을 듣자 마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나는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버지가 돼가지고 자식에게 용돈 한 푼 쥐여주지도 못한다면 차라리 ‘부모자격’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여태껏 나는 아내와 딸아이를 말로만 사랑했을 뿐이지, 그것을 행동으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그동안 '상록복지관'에서 시간제로 일하던 아내는 재차 의욕을 가지는 내 모습에 제일 먼저 반가워했다. 아내는 자신도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여러 장애가 있는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참용기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나는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용역회사에 구직등록을 했더니 경비직을 권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도 아니고 해서 나는 곧장 그 일에 뛰어들었다. 내 근무지는 성서공단에 있는 전자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첫 출근부터 당장 모자를 쓰고, 호루라기를 차고, 발걸음도 씩씩하게 근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보람도 생겨났다. 이를테면 산업발전에 내 한 몸도 일조한다는 그런 것! 주로 수출용 LCD를 만드는 우리 회사는 용차나 컨테이너가 많이 왕래했다. 자연히 차량정리에도 신경써야 하고, 3교대 근무체제라 직원들도 쉴 새 없이 왕래하곤 해서 나 또한 덩달아 바빴다. 불황이라곤 전혀 모르는 회사에서 일하는 나는 그만큼 긍지를 가지게도 되었다. 점차 나는 활기를 되찾아갔다. 파견직이라 비록 월급은 쥐꼬리만 하지만, 내가 ‘직업’을 가졌다는 게 무엇보다 신났던 것이다. 잔돈푼에 불과하지만 떳떳하게 나는 딸아이에게 용돈도 주었고, 아내의 속옷이며 립스틱을 선물하게도 되었다.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된 나는 어깨 으쓱거리면서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댔다. 그 호루라기의 위력 또한 대단(?)했다. 숱한 납품차량들이 질서를 어기다가도 그 호각소리에 깜짝 놀라 멈춰 섰고, 직원들은 금연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얼른 꺼버리곤 하였다. 적어도 나는 이 큰 회사의 지킴이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소임을 다해 근무할 수밖에는!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확연하게 가정 분위기도 밝아져갔다. 부드러운 대화와 웃음이 절로 넘쳐났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가족의 기도 덕분인 것 같다. 내가 아파할 때 곁에서 위로해주곤 했던 아내와 딸아이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삶이란 그런 건가 보다. 절망 너머에는 분명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고, 그 과정들이 다름 아닌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고 보면 여태껏 내가 아파하며 걸어온 길도 바로 ‘조물주의 사랑’ 때문이 아닐는지. 아닌 게 아니라 숱한 고통도 따랐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잘못도 있기 마련이고,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할 사정 또한 생기는데 그걸 두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고로 머리가 빈 사람이 허풍만 살아있고 또 빈 수레가 시끄럽다고 하질 않았던가. 원래 그 한 사람의 가치란 남이 먼저 인정해줄 때 그것이 진실한 것일 터. 더욱이 내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일부 사람들의 그 무시하는 시선은 견디기조차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자연히 나는 내 삶에 어떤 오기랄까,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랬다. 아직도 살림살이야 하나도 나아진 것은 없지만 마음 하나만큼은 철저히 무장이 된 나는, 험준한 계곡 고비마다를 힘차게 헤쳐 나갈 자신감도 생겨났다. 내 옆지기인 아내랑 그리고 부쩍 커버린 아이와도 함께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내 이런 행동도 가족의 믿음 덕분이었다. 내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는 우리 가족이 있기에 어떨 때는 참 행복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기나긴 실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용역회사라도 좀 나은 조건에 있는 자동차부품회사(달성공단의 S사)의 경비직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상여금이나 자녀 학자금지원 등 복지혜택이라곤 전혀 없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위안이 되었다. 요즘은 일을 하고 싶어도 직업이 없어 노는 실업자가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그것도 젊은 고학력자들도 쉽게 어디 직장을 못 구해서 쩔쩔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고급인력을 활용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은 나라전체의 손실이기도 하리라. 아무래도 나는 행운을 잡은 모양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우선 내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니, 가족도 어째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믿기지도 않았다. 장애자인 아내가 뇌성마비 아이를 가르친다는 그 자체가 말이다. 우리 구청의 소개로 아이들에게 전공인 미술을 가르치고, 또 어떤 날은 구슬장식을 만들거나 서예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서 네 시간씩 하는 아르바이트 수준이긴 했지만 결코, 아내로서는 쉽지만은 않은 일일 텐데 끝까지 고집을 내세워 다녔다. 하루는 아내가 말했다. “가들이 진짜 천삽미데이! 나는 그런 사람들한테 색안경 끼고 보는 기 더 이상하이 느끼지는 기라. 당신은 안 그렁교?” 그 순간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아내가 더 천사같이 여겨졌었다. 아내는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다행히 큰딸아이도 졸업을 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중견기업에 취업이 되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이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는 우리 가족의 기도에 힘입어 무난하게 통과를 했던 것이다. 볕이 쨍쨍 내리쬐는 요즘이다. 이젠 우리 가족의 앞날도 그렇게 찬란하게 펼쳐지리라. 왜냐하면 가장인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 그 밑거름 역할을 충분히 할 터이므로. 비로소 내 삶도 어떤 여유로움으로 넘쳐나리라. 통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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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극복수기] 은상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 | ||||||||||
망설여졌지만 지난 1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이제 한번쯤 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졌다. 또한 이종룡 선생님을 비롯, 여러 직업전문학교의 선생님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을 떠나와 천직처럼 생각하고 몸담았던 대구의 첫 직장서 명예퇴직한 것이 1998년 2월. 그 후 몇 군데 더 직장생활을 하며 마지막 직장이 됐던 한국언론재단서 퇴직한 것이 2002년 12월 말. 말이 좋아 명퇴지 정리해고나 다름없었던 서너번의 퇴직으로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마지막 퇴직을 꼭 1주일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겨우 50대 초반의 나이 때부터 반신불수가 된 육신을 부둥켜안고 살아온 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2002년 12월 23일.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강권에 따라 사표는 이미 반년 전에 제출하였고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정말 치밀어 오르는 어떤 분노와 절망감으로 몸이 훨훨 타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힘든 백수생활을 어떻게 또 다시 한단 말인가 ? ” 아이들의 미래는? 몸이 약한 아내는? 별별 생각에 달서구 노인대학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첫날 미디어교육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고 귀가하다 노인대학 입구의 버스정류장서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강의 도중 왼손에 들었던 교재를 자꾸 놓치고 무언가 오른쪽 귀 뒤를 자꾸 간질이는 느낌이 왔을 때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던가? 내 주변으로 노란 유황비가 내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직감적으로 뇌동맥 혈관의 이상을 확신한 나는 본능적으로 도로변 아파트의 정원에 휘휘 늘어져 있던 줄장미 가지의 가시를 훑어 열 손가락 끝을 찔러대었다. 짬짬이 배워둔 수지침 상식을 신속히 응용하였던 것이다. 보도에 떨어지는 흥건한 핏방울을 보며 의식을 잃고 말았고 행인들의 도움으로 119구급차로 후송된 나는 힘든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필연코 반신불수란 후유장애를 안고 말았다. 며칠 후 의식을 회복했을 때 병상에는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지키고 있었다. 그때부터 마라톤처럼 지루하고 험난한 재활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 5월, 완치란 판정을 받고 대학병원을 퇴원할 때도 나는 언어, 보행, 손동작 등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라의 경제상황이 그랬던 걸 어떡해요! 목숨 건진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아세요.”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아내 앞에서 나는 꼭 다시 일어서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직은 뇌병변장애 3급의 중증 장애자가 한번 더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가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는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서리라. 보란듯이…” 나는 사장과 면담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직속상관의 “박부장. 사장에게 그토록 밉보였더냐?”라는 말 한 마디만 들은 채 22년간 근무하고도 쫓겨나오다시피 했던 첫 직장의 그 경영진 간부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에 놀라고 말았다. 이젠 잊어야지. 버릴 건 버리고… 그리고 나는 평소부터 꿈꾸어 오던 출판인으로 거듭나기로 굳게 맹서하였다. 어차피 날 더 이상 채용해 줄 직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산재 장애자란 이름 아래 숨어지내듯 하기란 죽는 것보다 싫었다. 산목숨이면 당연히 일을 해야지. 그것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가장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 그러자면 우선 언어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막내에게 직업전문학교 중에서 언어와 관련한 과목을 개설하는 곳이 있는가 알아보라 했더니 대구직업전문학교에 일본어 관광통역과정이 곧 개설된다는 것이었다. 불안한 눈초리로 아버지를 쳐다보던 막내의 그 가녀린 눈길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늦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3년 8월의 어느날. 대구직업전문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담당선생님은 난색을 표했다. 벙어리나 다름없는 사람이 관광통역과정에 도전하겠다니? 오른쪽 뇌세포의 상당 부분이 괴사한 상태여서 음식조차 씹지 못하던 내가 생각하여도 그것은 무리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6개월의 과정이 끝났을 때 나는 결석은커녕 조퇴, 지각, 외출 한번 없는 완벽한 출석 기록과 함께 마침내 언어능력을 되살릴 수 있었다. 김애란 선생님께서 열심히 공부한데 대한 기념으로 공로상을 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좀더 언어훈련을 하기 위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교재를 따라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4성이란 특성이 있는 중국어학습은 언어 단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통대 4학년이던 2005년 대구직업전문학교에서 정보통신시스템이란 또 한 번의 과정에 도전하면서 나는 보행능력도 많이 되찾게 되었다. 거주지인 복현오거리에서 대구역부근의 대구직업전문학교까지 매일 서너시간 도보로 등하교하는 고행의 시간 끝에 나는 보행능력을 50% 정도 되찾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출판사 창립의 꿈도 조금씩 현실화시켰는데 곧 큰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사진이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는 마당에 사진도 내가 직접 촬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면 사진촬영법을 또 배우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명색이 출판사 꿈을 꾸는 놈이 갖고 있는 것이라곤 달랑 컴퓨터 한 대 뿐인 처지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본이라니? 언감생심 그건 신문에나 나오는 경제용어일 뿐이었다.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졸업도 한 홀가분한 상황에서 2006년 봄, 나는 다시 대구직업전문학교 디지털사진과의 문을 두드렸다. 첫 직장의 어느 선배에게서 선물받았던 「필름카메라 캐논EOS630」을 목에 걸고 등교했을 때 나는 화려한 디지털장비로 무장한 학우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더욱이 출사 후 촬영해 온 사진을 평가받을 때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한 손으로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찍자니 자꾸 흔들려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왼쪽 눈이 잘 감겨지지 않아 대신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자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렌즈라곤 100mm밖에 없어 촬영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교 후엔 집에서 한 시간 가량 셔터 누르는 연습을 하며 내공을 쌓아나갔다. 그런 나의 사진공부를 열심히 지도해 주신 이종룡 선생님에게 무언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끝에 수업 중 들은 강의내용 중 초점이 될만한 말씀을 파일로 정리해 학우들에게 나눠드리도록 하기도 했다. 사진공부를 시작한지 석달 째 접어들 무렵 마침 하동에서 하동야생차 사진촬영대회가 열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학우들을 따라가 촬영대회에 참가하였다. 보행이 완전하지 않아 우왕좌왕, 자빠지고 엎어지며 거기다 불구나 다름없는 왼손으로 카메라를 받치고 필름과 배터리를 갈아끼우는 고행 끝에 겨우 필름 세 통의 사진을 촬영해 낼 수 있었다. 그중 인화해 뽑은 사진 3장을 우송하고 ‘한번 해보았다.’는 가벼운 심정으로 지냈는데 한 달쯤 뒤 수업이 없던 주말, 이종룡 선생님으로부터 ‘입선축하’메시지가 왔다. ‘차따는 소녀’로 제목을 붙인 한 점의 사진이 입선된 것이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나는 흔해 빠진 입선 소식이었지만 날 것처럼 기뻤다. 그런 추억을 쌓으며 사진과정도 거의 끝날 무렵 다시 국가기술자격증 사진기능사 시험에 도전해 보았다. 디지털 사진시대에 필름촬영으로 시작, 현상 인화작업으로 진행하는 아날로그 작업과정의 시험은 무의미하였지만 난 자신을 시험하며 가능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한 손으로 해야 하는 암실작업연습은 끝없는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게 하였고 암실작업을 끝내고 나오는 나의 표정은 항상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종룡 선생님은 항상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사진과 수료를 열흘 정도 앞두고 사진기능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사진기능사 시험준비는 색채의 본질과 사진 전반에 관한 매커니즘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대구직업전문학교 사진과 학습 역시 100% 퍼펙트 출석으로 마무리한 나는 2007년 여름엔 서부정류장 부근의 대구디지털디자인교육센터서 4개월 코스의 편집디자인과정을 또 수료하며 출판사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2008년 3월 마침내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 있는 어머니의 고향마을 시골집 집필실을 사업장으로 하는 도서출판 밀어(密語)를 국립중앙도서관과 청도군청, 경산세무서에 등록, 1인출판사를 출범시켰다. 그러는 사이 내가 집필한 책도 네권이 됐고 일부는 교보문고 등에 납본하고 있다. 올해 안으로 세권을 더 출판할 계획이다. 아직은 보잘 것 없이 얼굴 붉힐 정도의 작은 출판사지만 내가 쓴 책을 좀 더 자유스럽게 출판하며 보잘것 없는 지식이나마 세상에 알리고 나와 같은 퇴직자, 장애자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그런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우뚝 서고자 한다. 첫 직장서 퇴출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암담하고 우울했던 퇴직자의 일상을 떨치고 일어선 지금 장래는 불투명하지만 행복하다. 혼자 집필하고 사진찍고 편집하며 배본까지 하는 출판사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난 알 수 없다. 신은 아시겠지. 10년전 어느 날 갑자기 퇴직이란 총탄을 맞았듯이 언제 또 중풍재발이나 사고로 이 일을 끝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이 내일 당장이더라도 그때까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불굴의 근로자이고 싶다. 「마음뿌리 있다면 만개의 팔(가지) 벋는 영광은 온다(心根萬臂榮)」는 신념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가을이 익는 들녘에 서서 하루하루가 틀리게 알이 굵어지는 감나무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직업전문학교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직장을 떠난 후 망가질대로 망가진 의지를 진정 그 곳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퇴직자, 특히 장애자 여러분들. 절대 용기를 잃지 마세요. 절대로. Never! 박해봉 |
첫댓글 교수님,감사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한 현장수기를 보니 찡하네요.
배가 고파바야 밥맛을 아는법이지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기자들의 용기있는 삶이 마음에 와 단는구려 고맙습니다.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우리집도 폭풍우가 몇번을 휩쓸고 지나갔기에 글을읽고 나니 내일처럼 가슴이 찡 하네요. 어려운 삶의 수기를 잘읽었습니다.
저와 남편도 또한 뼈저리게 느껴본 지라 더욱 가슴에 와 닿으며 가슴이 짠합니다. 교수님 감사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성실함을 배우고 희망을 전한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도요.. 지금의 직장에 불만만 토로할께아니고 감사하며 더 궁지가지며 일해야겠다 다짐하게 되요ㅠㅠ!!
역시 초심을 잃지 않는 긍정마인드 필요할듯!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