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대동문화해설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5기회원방 스크랩 `양림동 근대역사문화 답사
록사꽃 추천 0 조회 266 08.12.15 14:38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1.양림동 선교유적과 호랑가시나무 (대동 5기 송년에 즈음하여)

광주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빛고을로 만드셨으며, 교회를 통해 광주에 영적 부흥과 축복을 허락하신 축복의 현장 양림동 일대 선교의 유적들을 둘러본다.

기독간호대학 교정에 있는 오웬기념각으로부터 시작, 오웬기념각을 먼저 알기 위해서는 전남과 광주의 선교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894년 전주에 선교부를 설치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나주에도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전라도의 중심은 전북의 전주와 전남의 나주였기 때문이다. 1897년 배유지 목사는 나주에 와 전도를 시작하였지만, 나주는 고루한 양반세력의 저항으로 외국인에 대한 배타심이 심해 선교사들에게 방해와 위협이 그치지 않았다. 청년들이 주민들과 작당하여 선교사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 공갈을 일삼았다. 할 수 없이 나주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때마침 1897년 10월 1일에 목포가 개항되고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다.

1898년 배유지 목사 가족과 신도 변창연 그리고 그해 11월 5일 목포에 도착한 의사 오웬이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 배 목사의 주거지인 목포 양동 86번지(현 정명여중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집회소로 삼으면서 여기에 전남 최초로 세운 교회가 양동교회다.

이후 광주의 선교역사는 1904년 당시 목포에 있던 배유지 목사(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광주개척을 위해 옮겨옴으로 시작되었다. 1904년 12월 25일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최초의 예배를 드렸다. 배유지 목사와 함께 전남과 광주 선교의 기둥이었던 오웬 선교사는 1909년 4월 장흥의 어느 시골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중 급성폐렴으로 쓰러져 광주로 급히 후송되었지만 사랑하는 동료들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소천하게 된다.

그는 의료와 선교활동을 위해 쉴 틈도 없는 무리의 연속으로, 그는 장흥 전도에서도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 그리고 문답하는 일 등으로 열흘 동안 쉼없이 일하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대로 충성된 종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른 후 그의 시신은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광주의 여러 정든 곳과 그의 살던 집이 내려다보이는 선교부 동산위에 안장되었다. ‘오, 나에게 조금만 휴식을 주었으면!’ 그가 병상의 고통중에 되 뇌이던 말이다. 이 피로에 지친 군사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저 건너편의 평안한 휴식, 그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그는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그는 믿음을 지켰고 빛나는 면류관을 받은 것이다.

 오웬기념각

선교사 오웬(Owen)과 그의 할아버지(William)를 위한 기념각으로, 미국에서 그의 친지들이 보내 준 돈으로 1914년 건립되었다. 회색벽돌로 된 2층의 서양식 건물이며, 형태는 예배나 집회의 장소로 적합하지만 현재는 기독간호대학의 강당으로 쓰인다. 변변한 공연이나 집회 장소가 없었던 일제시대 때는 기독교 관련 집회는 물론이고 음악회나 영화상영 등 각종공연과 집회들이 거의 모두 이 건물에서 행하여 졌으며 따라서 이 지역 문화공간의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기념관 입구 문지방에 [윌리암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여)라는 표찰이 붙어있다.

오웬기념각을 답사하고 기독병원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양림동 호랑가시나무라는 안내팻말이 있는데 이 골목 못 미쳐 오른쪽에 2층 회색 벽돌 건물로 우월순(윌슨) 선교사 사택이며 위로 올라가면 양림동 선교동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우월순 선교사 사택

1904년 12월 25일 광주 최초의 예배를 드린 광주 선교부는 1905년에는 진료소도 개소하였는데 배유지 목사의 임시사택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는 배유지 목사의 사택이 진료소로 이용되었다. 이 선교 진료소의 책임은 의사 놀란이 맡았다. 이 진료소가 기독병원의 시작이며 따라서 기독병원 초대 원장은 의사 놀란이었다. 놀란이 떠난 후 잠시 진료소가 폐쇄되었으나 1908년 합류한 우월순(윌슨) 선교사에 의해 재개되었고 1912년에는 그레이엄기념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우월순 선교사는 1920년대에 사택을 건립하였는데 평면은 정사각형으로,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에는 거실?가족실·다용도실?부엌·욕실이 있고, 2층에는 사생활 공간으로 침실을 두었다. 지하에는 창고와 보일러실을 두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는 보육시설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네델란드 양식으로 지어졌다. 광주에 남아있는 서양식 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건물의 건축년도, 화재와 증개축 연도등은 학계의 규명이 더 필요함)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우월순 선교사 사택을 답사하고 나오면 바로 호랑가시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호랑가시나무는 전남 남해안과 제주 서해안에 주로 자생하고 있는 상록활엽소교목(常綠闊葉小喬木)이다. 변산반도(邊山半島)가 북쪽 한계선이며 잎은 두꺼운 가죽질이고 광택이 있으며 잎가에 가시모양의 톱니 다섯 개가 있다. 잎 끝이 가시처럼 되어있어 호랑이의 등을 긁는데 쓸 만하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호랑이등긁기나무, 묘아자나무라고도 한다.

열매는 9?10월에 빨갛게 익는데, 겨울철에 눈 속에서도 붉은 빛을 띠어 관상수로서 제격이며, 성탄절 장식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호랑가시나무의 잎과 줄기를 둥글게 엮은 것은 예수의 가시관, 붉은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 나무껍질의 쓰디쓴 맛은 예수의 수난을 의미해 ‘예수의 나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이 나무의 안내판에는 수령이 약 400년 되었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나이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를 많이 먹은 4백년 된 이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벨 기념예배당’이 왼쪽에 있고 그 언덕 아래에는 학교 수피아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선교사 묘역 안내도

108m 양림산 정상까지 10분도 안 걸린다. 꼭대기 팔각정 아래편이 선교사 묘역이다.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다 돌아가신 미국인 선교사들과 가족이 묻힌 묘’ 호남신학대학이 만든 묘역안내도에 22명의 이름과 사진들이 선명하다. 아래의 묘역번호는 묘역안내도에 나타나 있는 묘역번호이다

 

 

다형 김현승 시비와 시인의 마을

 고독의 시인 김현승 선생의 '가을의기도' 시비와 연혁 및 평설비가 시인이 살던집, 고향 언덕, 다니던 양림교회와 숭일학교터(무등파크맨션 일대), 신사참배 반대로 잡혀간 경찰서, 근무하던 조선대학, 그리고 그가 사랑하던 도시와 무등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서있다. 다형이 한국 문단에 배출한 탁월한 문인들 외에도 '봄비'의 시인 이수복 선생을 비롯한 걸출한 많은 문인들이 그 발자취를 남겼기에 양림동은 시인의 마을이라고도 일컫는다. 다형 시비가 서있는 양림산 능선(사직공원 포함)에서 바라보이는 무등산 일출은 광주 8경의 하나로 꼽힌다. 

대동5기 해설사님들의 늘름한 모습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지정 민속자료 제1호)

 1899년 정병호가 건축하였고 1965년 이장우가 사들였다. 비낀 동서측으로 대문간, 곳간,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배치된 기와집이며 안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정면 6칸에 좌우 마루가 있으며, 우측면은 4칸과 뒷마루, 좌측면은 1칸과 앞뒷마루가 있다. 상류가옥 형식으로 2고주 5량의 팔작 기와지붕이며 세벌대의 다듬돌 기단위에 원형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을 세웠다. 온돌방문은 2분합 겹문으로 안은 미닫이, 밖은 여닫이로 되어있다. 대청 문은 4분합 들어 열개문으로 문들을 고정하기 위해 참새모양의 장식물을 장혀(맨 끝 서까래)에 두고 있다. 이 집터 언덕 아래서 굽이쳐 흐르던 양림천의 물길과 집 정면에 펼쳐진 무등산 봉우리들의 풍광이 이 집과 어울려 한 폭의 경관을 이루었다.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지정 민속자료 제2호)

 1920년 지어진 이 집은 본디 양림리 최부자인 독립운동가 최상현의 집으로 정면 8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규모가 큰 한옥이다. 무등산의 절경과 마주하는 양림산의 경사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 1퇴 공간의 반지하층을 구성하였다. 최상현은 이 집에 다락을 배치하여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을 숨겼다고 하며,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가난한 사람들 구제에도 힘섰다.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위하여 구시청자리에 마련한 흥학관은 신간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들어서 있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이 집에 가까운 119에는 최상현의 동생이 1920년대에 2층 목조건물로 지어서 살던 최승남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광주 정공엄지려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낸 정엄(鄭淹. 호는 楊村, 孝仙)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 명종 때 문과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정엄은 타고난 기질이 온화하고 사람됨이 단정 성실하여 일을 정확히 처리하였다는 평을 조정에서 들었다. 선조 4년에는 전라도의 강직한 관리3인 중 한명으로 뽑혔고 남원부사로 재직 시는 민을 따뜻하게 돌보아 백성들이 잘 따랐다. 모친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병중인 모친을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돌보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병을 얻어 별세하였다.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611년 왕명으로 정려가 주어졌으나 이후 퇴락되어 1975년 후손들이 석조로 재건 하였다. 문헌 고증은 어려우나, 한양까지 주인 정공의 문서를 심부름하다 죽은 충성스런 개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이 정려 한 켠에 견석상을 세웠다.

커티스메모리얼홀(배유지목사 기념교회)

커티스메모리어홀은 배유지 목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벨기념관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배유지 목사(Rev.EugeneBell, 1868~1925)는 미국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1894년 6월에 리치몬드에서 샤로트(Charlotte Ingram Witherspoon, 愛稱 Lottie)양과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인 1895년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배 목사 부인 샤로트는 1901년 4월 12일에, 배 목사가 전주지방에 가 있는 동안에 급환으로 아들 헨리(Henry)와 딸 샤로트(Charlotte Witherspoon)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1901년 당시에는 광주선교부 묘역이 없어 서울 양화진 묘역으로 가 묻히게 되었다. 사별 후 배유지 목사는 1904년 5월 10일에 버지니아 출생의 마가레트(MargaretWhitakerBull, 1873. 11. 26생)와 재혼하였다. 이 두 번째 부인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온 후 광주교회를 함께 세우고 1919년 3월 26일 교통사고로 부인이 세상을 뜰 때까지 15년간이나 배 목사와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그는 3.1 만세 운동 때 수원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을 돌아보고 오던길에 선교사 일행이 타고 오던 자동차가 수원 남방 병점(餠店) 건널목에서 기차와 충돌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양림동 선교회 묘지에 배 목사와 나란히 묻혀 있다. 호남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던 유진벨 선교사는 1925년 소천하였는데 그 이듬해 그를 추모하여 선교사들이 기념관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벨기념관(커티스메모리어홀)이다. 이 기념관은 양림동 선교사촌의 선교사들의 교회로 사용되었다.

경사지를 이용한 평면계획, 적설을 고려한 급경사 지붕형태, 주변경관을 최대한 이용한 배치계획, 검소하면서도 부족함이 없는 의장 등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건축수법이 우수한 건물이다. 배유지 목사 기념과 바로 옆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 더 가면 수피아 여학교 교정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 수피아 교정에 수피아홀이 있는 것이다. 1907년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4명의 어린이(최윤옥, 김명은, 최숙, 서영순)가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8년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가 개교되게 된다. 남학교인 숭일학교의 초대교장에는 변요한 목사(John F.Preston)였고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뜻으로 崇一 이라는 교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숭일학교는 1906년 광주선교부 유진 벨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남자 1명, 여자 3명 4명으로 첫 문을 열었다. 점점 학생이 많아지자 남학교는 1908년 2월 대한제국으로부터 숭일학교로 인가를 받고 초대교장에 프레스톤(J. F. Preston, 변요한), 여학교 역시 1908년 광주여학교(후에 수피아여학교)로 인가 받았으며 초대교장은 그래함(E. I. Graham, 엄언라)선교사였다. 광주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경우 숭일학교는 최병룬교사가 학생동원을 맡았으며 수피아여학교는 홍승애 교사가 각각 학생을 동원하여 준비된 태극기 여섯가마니를 장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일경에 체포된 수만도 1백명이 넘었으며,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양순은 총검을 들이대는 일본헌병을 향해서 “쏠테면 쏘아라”를 외치며 용감하게 항의하였다. 숭일학교 송광춘은 일경에 체포되어 10월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그의 시신이 오던 날 학생들은 호남선 송정리 역까지 나가 시신을 운구하여 숭일학교 지하에 안치해 두자 일경이 시신을 압수해 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송광준열사 시신을 내놓으라”면서 다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후 두 남녀학교 학생들은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9년 스스로 폐교했다. 해방이 되자 숭일학교는 1945년 11월21일, 수피아여학교는 1945년 12월5일 각각 복교를 하였다. 수피아여자중고등하교는 양림동 옛 교사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숭일중고등학교는 양림동 교사를 매각하고 1993년 칠봉산 기슭에 초현대식 교사를 완성하고 이전했다.

 


 

 

수피아홀

여학교인 수피아학교의 초대교장에는 엄언라(Miss Ella Graham)선생이 취임하였다. 처음에는 배유지 목사의 사택에서 공부하던 선교부의 여학교는 구애라(Anna McQueen) 선교사가 미국에 건너가서 모금활동을 한 노력으로 1911년 미국 스턴스(Mrs.M.L.Sterns)여사가 세상을 떠난 친정동생(Jannie Speer)을 기념하기 위하여 5000불을 기증하였는데, 이 돈으로 양림동 251번지에 회색벽돌 3층 교사를 짓고 수피아홀(Speer Hall)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때부터 학교이름도 수피아여학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수피아 홀은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면서도 건물배치 및 평면계획이 매우 실용적이고, 기념성이 강조되어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윈스보로우홀

1911년 수피아홀에 이어서 1927년 윈스보로우홀이 건축된다. 이전의 건물들은 회색벽돌로 지어졌지만 이 무렵부터 건축된 건물들은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전에는 붉은색 벽돌을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윈스보로우여사가 건축비를 대고 건축가인 서로덕 선교사가 설계하여 완공한 건물인데 지금은 수피아여중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주공원 시인동산

▶ 광주서오층석탑(보물 제109호: 남구 구동16-2)

이 탑(높이 7m)이 있는 곳은 원래 성거산 또는 성구강이라 불렀으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다고 전해진다. 거북이 광주를 이롭게 하는 좋은 동물이라 생각하여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에 성거사를 세우고 목 위치에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전체적인 상태는 매우 양호한데, 통일신라 때의 이중기단 양식에서 단층기단 양식으로 변화 된 모습을 보여준다. 탑의 오층 몸체부 중 초층을 다섯 개의 돌로 짜 맞춘 것이 다른 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며 지붕돌의 추녀와 몸체부의 알맞은 비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줄어드는 각층의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튼튼한 안정미와 수려함이 넘치는 고려시대 탑으로서는 뛰어난 수작이다.

▶ 광주동오층석탑

광주시내에는 동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2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이 가운데 동쪽에 있는 탑을 동오층석탑(높이 7.24m)이라 하는데 이 부근은 백천사지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고증할만한 자료가 발견되지않고 있다.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5층 석탑으로 하층기단 면석에는 귀 기둥과 탱주 2주가 있고 몇 개의 판석으로 되었으며, 상층기단 중석도 역시 몇기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石인데 각층 탑신면에서는 귀기둥이 있다. 옥개석은 추녀사이가 좁아져 두꺼우며, 전각에 이르도록 직선이고 상면에서 반전되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있으나 파손이 심하다. 1955년 해체수리시 4층옥개석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그 후 1961년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탑신을 비롯해 각부가 고준하게 보이는 것으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은 통일신라 하대석 탑이다.

 

 

 
다음검색
댓글
  • 08.12.15 19:00

    첫댓글 추운 날씨에도 참석해 주신 회원여러분께 감사 드리며, 참석 하지 못한 회원님들의 모습도 뵙고 싶습니다. 이 모든 준비를 해 주신 한우열님,최홍근 고문님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 08.12.16 18:51

    커피&코코아 그 기막힌 첫경험 ㅋ ㅋ.....또 먹고 싶당

  • 08.12.18 10:30

    즐겁고 보람있는 하루 였습니다...

  • 08.12.18 22:49

    그리운 얼굴들이 다 모였네요. 사진으로 실컷(?) 보고 갑니다.ㅋ...오래전부터 타고 싶었던 산길이 있어서 부득히 참석치 못했습니다 죄송하고요. 다음 날에는 함께 좋은 시간 만들어보게요. 연말연시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