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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에게 문명과 고대 그리스세계
임광자 추천 0 조회 326 08.05.09 08: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

에게 문명과 고대 그리스 세계      (이길상)

가. 에게해의 어제와 오늘

에게해 일대소아시아반도의 서쪽과발칸반도의 남쪽 즉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좁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400여개의 섬들이모여 다도해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에게해(Aegean-sea)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이 되고 있는, 에게해의 북동부는 병목처럼 좁은 해로인 다르다넬스해협을 통하여 마르마라해와 연결되고,마르마라해는 다시 보스푸르스해협(Bosporus Str-)을 지나 흑해와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통하여 오리엔트 제국과 연결되어있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으로 델로스섬을 비롯한 이 지역 곳곳에는BC 1500년경부터 에게 문명과 고대 그리스문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곳에서는 에게 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하여 에게문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하천문명과는 달리, 바다를 중심으로 문명이발생했기 때문에 해양문명이라 하며, 에게 문명의 일어난 중심은 크게 세 개로 분류하고있습니다.

문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오리엔트와 가까운크레타섬에서 일어났으며, 이 문명을 크레타문명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오늘날 터키땅인 소아시아 반도의 남서부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트로이 문명이라고 하며, 그리스본토 미케네 지방에서 일어난 문명을 미케네 문명이라고 구분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이 세 문명은 미케네에 의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가 사라졌는데 그 내용을 살펴볼까합니다.

지금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있는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은 그만큼 위험도 내포하고 있어서 고대그리스세계가 케로네아 전투(BC338)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  패배하여 폴리스의영광을 잃은 후, 그리스가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할 때(1821)까지 약 2천년 동안,이 지역은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열강의 쟁탈 장이 되어 수 많은 시련을 껶여야했고, 누리던 문화도 이제는 보잘 것 없이 쇠퇴하였습니다. (영화 나바론에서 2차대전때독일이 나바론 요새를 설치한 곳도 이곳입니다)

현재 이곳의 주민은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는 적고대부분이 혼혈이며 밀, 포도, 무화과와 산호, 해면(海綿)등의 영세 농·어업에 종사하고있다고 하네요.

소아시아 반도에 가까운 동해안 부근의 섬들을 제외하고는대부분의 섬들이 그리스에 속하지만, 후진국 그리스의 정치력으로는 모든 섬에 대한정령(政令) 전달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도해 통치가 매우 곤란하여, 최남단의큰 섬 크레타의 주민도 대부분이 맨발로 살고 있을 정도로 지금은 후진성을 면하지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 대서사시의 세계

여름은 덥고 비기 오지 않으며 겨울은 따뜻하고 약간의비가 내리는 곳 이런 기후를 지중해성 기후라고 하지요. 이런 지중해 기후의 영향을받는 지중해 연안은 홍수를 낼만한 큰 강도 비옥한 넓은 평야도 없어서 관개농업대신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하고 계절 따라 산 아래에서 산 위로 이동하는 양떼를따라 다니는 이목(移牧)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곳입니다.

포도로 만든 포도주나 올리브에서 짠 올리브유는 기호내지 조미식품으로는 우수하지만 식량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식량은 다른곳에서 구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곳은 다른 곳과의 교역은 필수적인 사안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이곳에 정착한 에게 인들도 포도주나 올리브유를용기에 담아서 배를 타고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을 누비며멀리 까지 나가서 상품을 팔아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교역에 종사하였고,교역이 신통 치 못할 때는 대신 약탈을 하여 생활을 보충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약탈행위가 집단적으로 규모가 커지면, 전쟁이라할 수 있지요. 그래서 많은 전쟁이야기들이 오래 전부터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을신과 결합해서 대서사시로 남겨진 것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라는 신화적인 문학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 서사시인 호머(Homeros)가 썼다는"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지금으로부터 약 3100여 년 전 미케네(Mycenae)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은 그의 아우이며 스파르타의왕인 메넬라우스의 비(妃) 헬레네(Helene)를 유괴해간 트로이(Troy)의 왕자 팔리스에게복수하기 위해서

몸이 날랜 아킬레스(Achilles)와 지략이 뛰어난 오딧세이(Odyssey)등을거느리고 바다건너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 쌓인 트로이는 좀처럼함락되지 않았고, 그리스측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를 전사케 하였으나그 자신도 팔리스의 화살에 발 뒷굼치(아킬레우스 건;腱)를 맞고 전사하는 등 10년간공방을  주고 받다가.......

오딧세이의 지혜로 만든 목마(木馬)를 트로이성으로끌어들인 것이 화근이 되어 드디어 트로이가 멸망하게 되는데(B,C 1150년 경), 수많은영웅들의 싸움 못지 않게 인간들과 같은 형상과 감정을 가진 신들이 복잡한 이해관계에따라 전쟁을 진행시키고 조정하는 모습을 엮은 것이 일리아스(트로이의 다른 이름)라고합니다. 즉 트로이의 이야기란 뜻이지요.

그러나 Troy의 신들은 속임수로 전쟁에 이긴 아가멤논과오딧세이에게 복수하여,  고향에 돌아온 아가멤논은 그의 아내와 아내의 정부에게살해되고 그의 두 아들은 어머니와 그 정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등저주받은 미케네왕가의 비극은 계속되었고,.....

한편 이타케의 왕 오딧세이는(라틴명:Ulyxes 또는Ulysses) 목마(木馬) 속에 병사를 숨기는 꾀를 써서 트로이를 함락시켜 헬레네를 구출하였으나,그것이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으로의 개선 길에 거인 폴리페모스에의해 동굴에 갇히기도 하고, 마녀 키르케에 의하여 부하가 돼지로 변하기도 하고,세이레네스의 요염한 노래의 유혹을 받는 등 위험을 무릅쓰면서 20년간의 방랑 끝에겨우 고향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없는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밤낮으로잔치를 베풀고,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청혼하며 승낙을 재촉하였고,..... 그녀가더 이상 견뎌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오디세이가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모조리죽이고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오디세이아(Odysseia)의줄거리 내용이고,.... 이런 것들은 그리스 신화라는 이름으로, 소설로 영화로 많이소개되어 알고 계시지요.

이 두 가지 큰 줄거리를 중심으로 Homer(희랍명:Homeros)는신과 영웅들간에 얽힌 이야기를 일리아스 15,693행 오디세이아 12,110의 장대한 서사시로노래했는데 신화적인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해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를사실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화적인 내용에 매료된 두 사람의 용단과당시만 해도 상업적인 발굴의 유행에 힘입어 에게 문명은 서서히 그 모습을 세상에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신화가 아니라 사실로서......

다. 에게 문명의 세계 - 크레타, 트로이, 미케네

(1) 木馬와 트로이와 아가멤논의 미케네를 찾아 이를발굴한 독일인 쉴리만

고대의 역사라는 것이 아예 기록이 없거나, 있다고할지라도 당시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훨씬 후에 쓰게 된 것이고, 그 남아 오랜 세월을지나면서 그것마저 없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고고학이나 인류학 등의 도움없이는 체계적인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진이나 화산 홍수등 천재지변으로 도시가 매몰되거나,화재나 전쟁으로 부서진 곳,  생활 쓰레기를 모아 버린 쓰레기 장(패총:貝塚),부장품이 들어있는 무덤등이 고고학의 주된 조사 발굴의 대상으로 되지요.

예를 들면, 삼국사기는 고려시대(1145)에 쓰여졌으나그 내용은 그 보다 훨씬 전의 삼국시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진위여부를 믿기 어렵다는것이지요.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것이분명히 밝혀진 것은 물론, 명문(銘文)내용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밝혀짐으로서 삼국사기의 다른 내용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개더미, 조개무지 등으로 불리는 패총이라는 것도석회질로 된 조개껍질이 섞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조개껍질 자체는 큰 의미가 없고, 조개를 잡아먹고 껍질을 버린 곳, 즉 그곳이 당시의쓰레기 장이 였기 때문에 다른 쓰레기도 같이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김해패총을 발굴한 결과, 그 중간층에서 중국왕망시대(8 ~23 AD)의 화폐인 화천(貨泉)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이 때에 중국과김해지방 사이에 어떤 형태였던 간에 교류가 이루어 졌다는 것도 이를 통해서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고대 그리스로 들어가 보면,

전설적인 미케네와 트로이, 미노스왕 등에 얽힌 이야기의진실을 밝히는 첫 작업은 독일의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닌 상인 출신의 쉴리만(Schliemann,Heinrich)이라는 사람으로서, 그가 "목마의 트로이"라고 짐작되는 소아시아서해안 히사알릭 언덕을 발굴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목적은 돈벌이.....이때 이미유럽에서는 골동품의 희귀성이 인정되어 굉장한 값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발굴 첫해(1870)에는 별 수확이 없었고 이 언덕의유적이 여러 층(9층)으로 겹쳐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의발굴과 연구에 의해서 트로이의 베일이 벗겨지게 되었는데, 유적과 유물을 층(層)별로분류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873년는 밑에서부터 두 번째 층(제2시)에서는 메가론(megara)식의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황금장신구와 잔(盞)등 많은 재보를 발굴해 낸 쉴리만은목마의 트로이를 발견했다고 세상에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쉴리만의 성급한 판단일  뿐 유적이나유물의 내용이 호머의 일리아스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호머의 트로이는 어디인가? 이래서 발굴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제6층이 미케네식도자기등을 포함하고 있어서 쉴리만과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6층이야 말로 "목마의 트로이"가 분명하다고 선언하였고, 쉴리만을 비롯한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1936년 미국의 신시네티대학의 발굴팀을 이끈블레겐(C.W.Blegen)이 다시 이 지역을 조직적으로 발굴한 결과 제6층은 전쟁이나화제 등 인간의 힘이 아닌 지진 같은 것에 의하여 파괴된 것이고, 한 층 위인 제7층A가 전쟁으로 파괴된 호머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7층A를 "목마의 트로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6층이니 7층이니 하는 것은발굴에 따른 유적이나 유물의 종류에 대한 해석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래층일수록 시대가 앞서고,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후대의 것이 나왔다는 것이지요.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땅속에 묻혀 있다면, 그 순서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않겠습니까?

이것을 편년으로 정리해 보면, 제7층 B는 철기시대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트로이가 아닌 ‘일리움’이라고불리었고, 알렉산더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렸다고 합니다.

쉬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 반출, 1881년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나찌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1945년5월,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의 푸슈킨미술관에,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미술관에 보관하였다가

95년 4월 푸슈킨미술관으로 옮겨 모든 유물을 같이전시하고 있다니 트로이 전쟁만큼이나 뺏고 뺏기는 유물의 신세가 다음은 또 어디에서전시되고 있을지? 우리에게 오지는 않겠지요.

트로이 발굴로 재미(?)를 본 쉴리만은 아가멤논의미케네(Mycenae)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였습니다.트로이의 실체가 밝혀진 이상 그보다 훨씬 크고 세력이 강했던 미케네도 실체였을것이라는 확신(많은 보물)을 가지고 1876년 여름 쉴리만은 그의 처 소피아와 함께백여 명의 인부를 동원,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아르골리스에 있던 고대 성채도시  미케네(Mykenai)를발굴, 총량 10Kr 이상의 순금제품들이 쏟아져 나오자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왕관 및 순금장신구들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여섯개의 황금가면으로 그 중 2개는 파손되어 형체를 알 수 없거나 獅子의 모습을 한것이고, 형체가 뚜렷한 나머지 4개는 남자의 모습인데 그 훌륭한 코를 보고 쉴리만은단번에 그리스인의 초상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즉 미케네 문명의 주인공은 그리스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중 한 개는 코 밑과 양 뺨, 턱에 멋진 수염을 달았고,수염으로 보아 미케네인들이 올리브기름을 사용했다고 추측했는데 이런 쉴리만의생각과 추측은 아주 정확했다고 합니다. 이 황금가면을 근거로 해서 미케네문명의주인은 그리스인이 였다고 교과서는 쓰기 시작했습니다.

쉴리만에 뒤이어 영국인 웨이스와 그리스인들의 조사에따르면, 이곳이 미케네문명의 중심지로 BC 1400∼BC 1200년경까지 번영을 누렸고,유적은 BC 16세기∼BC 12세기의 것으로, 삼각형의 작은 산에 동서 약 300 m, 남북약 150 m의 견고한 성벽이, 그 북서쪽 구석에 사자문(獅子門), 성벽 안에 왕궁·신전·원형묘역·창고등이 있고, 창고 안에서는 간단한 기하학무늬의 도기(陶器)가 많이 발견되었다고합니다.

성벽밖에는 벌집모양의 무덤과 몇 개 집 자리가 있는데,그 중 "기름장수의 집"과 다른 곳에서 점토판에 새겨진 선문자 B(LinearB)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자는 크레타섬에서 나온 점토판 문자(Linear A. B)와같은 것으로 오래된 순서에 따라 A B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다량으로 출토된 이 문자를 해독한 것은1953년 영국의 건축가였던 벤트리스(Ventris. M. G. F)로서 선문자 B(일명 미케네문자)가초기의 그리스어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독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케네를 비롯한 크레타문명의주인공이 그리스인들이라는 사실도 함께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물과 문자를통해서 미케네 세계를 살펴보면,

미케네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초기에는 황금제 잔(바페이오배),중기에는 항아리(크레타궁전식), 후기에는 견고한 미케네식 도기(陶器)가 주요 수출품이되었고, 건축에서는 메가론 양식이 확립되어 그리스 고전시대의 신전건축에 영향을주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크레타 섬을 정복하여 그곳에 있었다는 미노스문명을 정복하였으며(기원전 1400년경) 다시 소아시아 반도에 있었던 트로이를 정복(기원전1200년경)하여 에게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케네문명은 에게문명 후기에속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케네 문명은 언제 누구에게 왜 사라졌는가?라는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요. 미케네를 중심으로 한 이들 미케네인들 역시 그들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바다를 통한 교역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역이란 상호간에필요한 물자를 주고 받아야 하는데,...크레타와 트로이를 멸한 후 에게 해의 패자가되고 나서 교만했던지 아니면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잘못된 피(?)는 속일 수 없었든지,

말로만 교역이었지 약탈과 살상을 밥먹듯 하게 됨에따라 교역의 상대가 피폐해지고 경계의 태세를 굳힘으로서 미케네 자신도 쇠퇴의길을 걷다가 BC 1200∼BC 1100년경 발칸반도를 남하해온 또 다른 그리스인(도리아인)에의해 멸망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계란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닭에게도 충분한 먹이를줘야겠지요. 먹이는 주지 않고 알만 낳으라면 글세....어떻게 되겠습니까?

(2) 미궁에 얽힌 크레타 문명(미노스 혹은 미노아문명이라고 함), 이를 찾은 영국인 에반스

앞에서 잠깐 미케네가 크레타 문명을 정복했다고 했는데,그렇다면 크레타문명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도 호머 서사시의 세계가 그 의문을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신화는 미케네와 트로이 외에, 테베의 오이디푸스를비롯한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있는 전설이 크놋소스의 미궁과 미노스왕에관한 것입니다.

오랜 옛날 크노소스(Knossos)에는 미노스(Minos)라는강력한 왕이 있어서 에게해의 섬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물소한테반하더니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고 합니다.

미노스왕은 사람을 식용하는 이 괴물을 미궁 깊숙한곳에 숨겨두고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사람들을 공물로 받아 먹였는데 미노스의 지배하에있던 미케네도 9년마다 7명의 미혼 남녀를 보냈다고 합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자진하여 공물인간들 틈에끼여 크노소스궁에 들어가 그에게 반한 왕녀의 도움으로 괴물과 미노스왕을 살해하고,이곳을 미케네의 지배하에 두었다고(B C 1400년경) 하는데 이를 근거로 이때부터크레타가 미케네에게 정복되고 그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역사의 편년을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크노소스궁과 미노스왕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가?신화 속의 여러 정황을 참작하여 이곳이 크레타섬의 북쪽으로 판단하고 발굴을 시작한것은 영국의 에번스( Sir Evans, Arthur John)였습니다.

독일의 쉴리만과는 달리 그는 명문 출신으로 고고학적인분위기가 풍기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881년 아테네에 있던 슐리만을 방문하여 그수집품에 자극받아 1900년부터 10여년간에 걸친 발굴의 성과로 고대 에게문명의 지배자미노스의 거성인 대규모 궁전의 유적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경사면을 이용해서 세운 크노소스궁은 가운데 마당을사이에 끼고 수백의 작은 방을 배치한 복잡한 미궁(迷宮)으로, 계획에 의하여 건립된대건축물로서, 제례와 공무, 왕족의 사실(私室)과 공방(工房), 창고 등이 있는데,

기둥은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늘며, 중요한 방은 대부분선명한 벽화로 장식되고 채광과 배수시설도 세심하게 배려되었다고 합니다. 다른지역의 궁전도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크노소스와 공통된 성격임이 확인되었고, 독립된신전은 없고 또 이것이 신상(神像)이라고 확인될 만한 조상(彫像)도 없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왕은 지배자인 동시에 최고의 신관(神官)으로서신성시되었으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와 같은 체계화된 신의 모습들은 존재하지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술적(呪術的) 대상물을 숭배한 것으로 보여지는이들에게 있어서 신과 비슷한 것으로는 원시적인 지모신(地母神)을 생각할 정도였을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문자로는 그림문자(상형문자)와 선(線)문자A·B가 있었는데, 문서창고나 특정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훈련받은 서기에 의해서 작성되었고 내용도 징세(徵稅)나 왕가의 재산목록 등이 짧은문장으로 되어있고, 제도나 왕가의 역사같은 기록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일반에게유통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선문자 B만이 영국의 벤트리스에 의해 거의해독되었다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하였지요.

에게 문명은 오리엔트에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으로발전시킨 해양문명으로, 기원전 2000년 경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시작하여, 기원전1500년 경에는 크레타섬의 미노스왕이 에게해를 지배하여 크레타문명(미노스문명)을일으켰으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가 기원전 1400년 경에 크레타문명을정복하고, 소아시아 반도에서 흥성하고 있었던 트로이를 점령하여 미케네가 에게해를장악했는데 이를 미케네문명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의 적힌 내용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라.  폴리스의 세계 - 아테네와 스파르타

(1) 폴리스의 성립과 성격, 기능

Greece는 영어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정작 그들 자신들은신(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스(Hellas: 라틴어 Graecia)라고 하며, 희랍(希臘)은헬라스를 한자의 음으로 옮긴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우리 발음대로 읽어희랍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종교·관습을 가진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습니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앞에서 이야기한 초기에게 문명까지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폴리스시대로총칭되는  B,C 8 ~ B,C 4세기 동안입니다.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이 시기의 일이 였고, 고대세계에서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도 이 시기로서, 이것이 서양문화의근간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폴리스(Polis)란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를말하는데 우리로서는 여기에 적합한 번역어가 없어서 그대로 폴리스라고 합니다.한 때는 도시국가라고도 했지만 규모면에서는 적합할지 몰라도 내용면에서는 개념부터가다릅니다.

이러한 폴리스가 이합과 집산을 거듭했으나 대개 150개정도의 폴리스가 있었고, 해외에 식민 폴리스가 다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델로스동맹의맹주인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였던 스파르타가 주가되었기 때문에 이것이폴리스의 대명사처럼 되었습니다.

BC 1200년경부터 아리아계의 일파인 도리아인이 급격히남하하여(제2차 남하) BC 1100년경 철기로써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정복, 미케네 문명을파괴하였고, 미케네 문명의 중심이던 왕궁이 파괴되어 문자가 잊혀짐으로써 오랜세월 동안 문자가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던 시기 즉 BC 1100~BC 750년경까지를 그리스역사에서는 암흑 시대라고 합니다.

이 기간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간에 분분한논쟁만 야기시킬 뿐 정확한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해상활동도 중지되었기 때문에미케네를 대신한 페니키아인들의 해상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폴리스란 울타리로 둘러싼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합니다. 폴리스가 성립된 것은 BC 750년경으로 펠레폰네소스반도로 내려온 도리아인과이들에게 쫓기거나 다른 사정으로 에게해의 섬이나 소아시아 반도로 건너간 이오니아인들이 외적의 방어를 목적으로 높은 언덕(아크로 폴리스)을 중심으로 성채를 쌓고신전을 세워 수호신을 모시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일반시민들이 자유롭게토론하고 상품을 교환하던 아고라(광장?)가 있고, 성벽 내부는 귀족과 상인듣이,그 외곽인 전원지대는 농민과 노예 반자유민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시민에게 여가와 향락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 것은수 적으로 자유민의 수배 내지는 수십 배에 이르는 노예노동의 덕택(?)이였고, 자유민의숫자는 많아야 수만 명 적은 곳은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플리스의 대표 격인 아테네의인구는 2만명 정도, 노예는 그 다섯배가되었고 스파르타의 인구도 수만 명에 불과했으나노예는 인구의 30배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들 폴리스간에 교류는 빈번했지만 매우 폐쇄적이어서민족은 같았으나, 다른 폴리스 주민을 외국인으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충주와청주가 같은 한국이고, 한국인이면서도, 이들 상호간에는 외국으로 보았다는 것이지요.그리고 다른 폴리스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들은 영원히 외국인으로취급하였다고 합니다.

폴리스가 융성한 BC 500년을 전후해서는 내부적으로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곳곳은 물론 흑해 연안까지 진출, 새로이 개척한 해안곳곳에 많은 폴리스를 세웠는데, 이를 식민폴리스라고 합니다. 식민이라는 용어가사용되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모두 독립적인 폴리스로서, 이는 그리스 세계의 확대를의미하였으며, 그들 사이의 해상교역을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는 폴리스 시민의 경제생활뿐만아니라 정치생활에도 중대한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흑해와 소아시아 반도의 진출이 당시 세계적인대제국 페르시아를 자극하여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492-479 BC)을 불러왔고,둘째는 각 지방의 특산물 유통이 크게 진전되고 공업원료인 구리·주석·철 등이풍부하게 공급됨으로써 수공업을 촉진시켰으며, 각종 금속무기가 널리 보급되어 이른바밀집중장보병(密集重裝步兵)의 새 전술이 유행됨으로써 평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고합니다.

(2) 그리스 세계의 변화 - 아테네의 민주정치

한 시대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거창한 정치가의 논리가아니라 작은 발명이나 발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로서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무슨 인권단체의 활동이나 여성 해방운동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만들어진 피임제가 일등공신(?)이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여성에게 원하지 않는 임신의 무거운 멍에가 벗겨지는날, 그것은 어쩌면 여성해방의 첫 걸음이 였을 것입니다. 남자를 당할 여자가 없던세상에서 여자를 당할 남자가 없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과도기에 우리가 서있다는 것이지요.

첩(妾)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살았던 남성사회가 사리지고선택권이 여자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아무리 청소년문제를 들고 나와도 시대의 도도한흐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love hotel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제도적 법률적인장치만으로 가능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컴퓨터는 세상을또 얼마나 바꾸어 놓을까요?

그리스 역사, 나아가서는 유럽세계를 바뀌게 만든것도 전투에서 필수적인 방패의 손잡이의 위치가 위에서 중간지점으로의 위치 변경된아주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은 전투장면으로 축소되는데 우리들이 연의삼국지를보면 장비와 여포가 한바탕 싸우다가 누가 먼저 달아나면 뒤에 서있던 군사들이 소리를지르며 내달아 승패가 결정되듯이, 그리스에서도 전쟁은 귀족의 전유물로서 전사는방패의 고리를 위쪽에 내어 어깨에 매달고, 손에는 창이나 칼을 잡고 말이나 전차를타고 적진으로 들어가 신나게 휘둘러 전쟁의 승패를 결정 지웠습니다.

그러나 방패의 손잡이를 중간에 두어 왼손으로 잡아앞을 보호하고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어깨와 정갱이는 견고한 보호대로 감싸고 오른손으로창을 잡아 내미는 전술,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일렬 종대나횡대로 늘어서 어깨를 맞대고 틈을 좁히면 삽시간에 거대한 성벽이 이룩되고, 다시원형으로 바꾸면 거대한 요새가 형성되는 것을 밀집대형의 중장보병제도라고 합니다.

요즘 데모를 막기 위해서 전투경찰이 방패로 무장하고일렬로 늘어선 형상인데 전투경찰의 오른손에 창이 쥐어져서 적을 공격한다고 생각하면거의 틀림없습니다. 전투의 양상이 무장한 기병에서 보병으로 핵심이 이동되었다는것인데,...이러한 전술의 변화는 전쟁에 참가자가 귀족에서 평민으로 대체되는 것을의미하고, 한편으로는 페르시아제국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술이 스파르타를 위시해서 전 폴리스에 확산됨에따라 중장보병을 구성한 핵심세력인 평민들도 이들이 귀족과 대등한 발언권을 요구함으로써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대두하게 됩니다.

여기서 두 계층의 사회적 대립의 완화를 목적으로한 타협적 개혁안이 절실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테네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것이 바로 솔론의 개혁안이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화폐경제의 유통과 더불어 빚을지고 갚지 못하여 노예로 팔리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것이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므로,BC 594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솔론은 종래의 부채대장(負債臺帳)의 말소, 사람을담보로 한 돈 빌리기 금지, 토지소유의 상환설정 등으로 시민 공동체의 보존에 힘썼고,

또 해마다 농산물 수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시민의권리와 의무를 4등급으로 정하여 양(兩) 계층의 대립 완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양 계층의 이해를 미온적으로절충한 것으로, 그의 중도적인 개혁에는 두 계급이 다같이 불만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금권정치(金權政治:Timocracy)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명문출신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僭主政治:Tyrany)를등장케 하였는데(BC 561) 참주정치란 크게 보아 솔론의 금권정치와 더불어 민주정치에이르는 불가결한 하나의 과도기적 정치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솔론계 평민파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BC 508년 집권한 후 먼저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 중심적인 부족구획을지역적인 10부족구로 개편하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하게 하여 500인 평의회를구성함으로써 이를 전 시민이 출석하는 민회(民會)에 대해 상설 정무기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명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의발생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법(陶片追放法:Ostrakismos)을 만들어 중장보병시민을중심으로 한 민주정치의 기초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테네의 민주정이라 하는데

그 절정기인 페리클레스시대라 불리는 약 30년간으로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국정의 최고결정권은 민회(시민총회)에,  관리의 임기는1년, 관리선출은 추첨 등으로 했는데, 누구나 최고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관리의 권위 저하와 선동정치의 위험요소가 동시에 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의민주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불과 30여년밖에 안된 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 내용 또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는 차이가 크다는 것도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보면, 민중재판소의배심원도 시민의 희망자 중에서 추첨되었고, 이들의 다수결에 의한 판결로써 재판하는관습도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정치는 부녀자와 노예를 제외한어디까지나 성년 남자시민만의 민주정치였고, 대의제(代議制)가 아닌 전체적인 정치참여라는점에서 근대 민주정치와 구별되며, 다른 폴리스 출신은 아무리 오래 머물고 살아도영원히 이방인으로 취급되어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이 시대에 아테네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하고 강대한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도 BC 8세기 말, 서쪽의 메세니아 지방을 정복하고 그 주민을국유노예로 삼았지만, BC 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 그 진압에극심한 고전을 겪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쇄국주의로 대표되는 스파르타식교육과 생활양식도 바로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자유민에 비해서 숫자가 수십배 많은 반자유민이나 국유노예에 대한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자기관리를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아테네에서는 말 잘하는 사람이, 스파르타에서는 용감한전사가 최상의 목표가 되어 아테네에서는 변론 술을 가르치는 소피스트가 날개를달았고, 스파르타는 전사를 기르기 위한 정책이 국가적 제도적으로 완성되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마을 장로에게 신체검사(?)를 받고, 6살부터 학교에 들어가주로 군사훈련으로 짜여진 교육을 받고 18살에 군대에 들어가 31살 까지 복무를 한후에야 결혼 등의 개인생활이 허용되었음으로 튼튼한 아들을 얻기 위해 아내를 건장한남자에게 빌려(?)주는 풍속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3) 페르시아와의 전쟁

식민폴리스의 건설로 야기된 페르시아전쟁(BC 492~BC 479)에서 아테네가 중심이 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이는 동방 페르시아 전제정치에 대한 서방 폴리스 자유시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며,이로써 그리스의 자유가 수호된 동시에 아테네의 번영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하는 서양 문명 발전의 기반이 확립되었고, 오리엔트적 전제정치로부터 폴리스적자유와 그 문화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리스로 하여금 지중해의 주도권을장악하게 함으로써 유럽 문명의 본질을 결정 짓게 하였던 점에 세계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페르시아,스파르타, 아테네를 비롯한 모든 폴리스가 아리아인들이 였고, 이들간의 투쟁과 생성소멸은 아리아 민족내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의 번성을 두려워 했던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힘을 빌려 아테네를 멸망 시켰고(펠로폰네소스 전쟁: 431-403 BC) 스파르타도 역시 페르시아의 힘을 빌린 테베에게 망했으며, 그 테베와 페르시아도또다른 아리아인 인 마케도니아에게 망했습니다. 이 후 이곳을 통 털어 헬레니즘세계라고 불렀지만 그리스의 영광은 다시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마. 그리스 문화- 지면관계로 생략합니다.

역사가 싫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복잡한연대, 발음도 잘 안되는 한글식 원음표기, 수 많은 인명과 지명들이 머리를 혼란스럽게하여 무슨 이야기 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하는데 그런 약점을 보완하려고 칼럼을 시도했으나,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텍스트가 아닌 그냥 칼럼으로 보아주기 바라며, 다음 이야기는 우리와 접근이 쉬운

중국 진 한의 통일제국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일환으로 이룩된 만리장성으로 발길을 돌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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