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삶
골로새서 3:22-4:1 / 권오진 목사
오늘은 설교 제목을 “예배와 삶”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일 예배에 대해서 꼼꼼하게 여섯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배에 대한 설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영과 진리의 예배를 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두 분 목사님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미국의 예배학자 루스 덕(Ruth C. Duck)은 ‘리허설로서의 예배’를 말하면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세상에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예행연습하는 것이다” 100주년 기념교회를 섬기다 은퇴하신 이재철 목사님은 “예배와 교회는 주차장이 아니고 주유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두 분의 정의는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같습니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공급받고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 은혜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오늘 설교 제목 “예배와 삶” 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삶” 사이에는 항상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둘 모두를 우리는 붙잡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 둘을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및 오늘날 유럽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일반 사람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제도화된 교회나 예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생활은 어느 정도 기독교적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무너졌는데, 삶은 살아있는 경우이지요.
반대로 우리나라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고 예배하는 일에는 열정적입니다. 순위를 매긴다면 분명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부분으로 넘어가면 부끄러울 정도로 삶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이지만 신대원에 다니는 아들(혁준)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들만 데리고 서울 구경을 시켜준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을 데리고 광나루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가서 – 여기가 우리 교단을 대표하는 신학교라고 알려줬고, 마포구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도 가서 여기가 우리나라에 선교하시다 돌아가신 선교사님들의 묘소이다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대표적인 교회로 꼽힌 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몇 교회를 보여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수요예배를 드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 답게 1층 2층은 성도로 이미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당 3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배하는데 성도 중 일부는 껌을 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속으로 ‘예배 자세가 너무 심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횡단 보도 건너는데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횡단 보도 선을 지키지 않는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신자들이 이 모습을 볼 텐데 예배하고 나와서 이렇게 행동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생각해 보니 아차 싶었습니다. 금방 ‘아멘’ ‘아멘’하면서 은혜 충만한 모습을 보이던 분들이 예배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항상 두 가지를 다룹니다. 하나는 교리를 다루고, 또 하나는 실천적인 면을 다룹니다. 로마서만 해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1-11장까지는 이신칭의 교리를 세밀한 필치로 말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실천에 대해 말씀을 합니다. 실천 부분을 시작하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한 마디로 <몸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시대를 잘 분별해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일까요? 골로새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잘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지 않았지만, 본문 앞부분에는 - 부부지간에는 이렇게 살아라.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이렇게 살아라, 가정생활의 방침을 줍니다.
오늘은 이 부분은 생략하고,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종들아”(22절)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기록할 당시 로마에는 전 인구의 삼 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지방 따라 조금씩은 달랐지만,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는 하나의 살아있는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사고팔고 주인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는 도덕성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바울이 “종들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뜻 보면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명백하게 찬성한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명백하게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바울은 제도를 바꾸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개인의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종들아”라는 말이 주는 두 번째는, 노예들이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에 종들이 나오고 있었기에 “종들아”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노예들이 교회에 나온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노예는 인격을 가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주인의 살아있는 재산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옷을 입혔겠습니까? 그들에게 제대로 된 잠자리를 제공했겠습니까? 그저 죽지 않을 만큼의 환경에서 살았겠지요. <자료 1. 1890년 잔지바르 노예 소년 사진> 1세기 노예를 이해하기 위해서 <1890년 아프리카 탄자니아 잔지바르 노예 소년> 모습을 한 번 보세요. 이 사진 하나만 봐도 말로 설명이 더 필요 없지요. 130여 년 전의 노예가 이러했으니 2천 년 전, 노예의 삶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노예가 교회에 예배하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그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그들의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났을까요? 아무리 씻고 주일에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도 노예 특유의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유민 성도들이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게 대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 오늘 여러분도 예배할 때에도 옆자리에 누가 앉는가? 신경 쓰지 않습니까?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이 앉으면 기분이 좋습니까? 예쁜 아가씨가 옆에 앉으면 예배가 잘 될까요? 반대로 옆자리에 냄새가 나는 분이 앉으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옆에 앞과 뒤에 누가 앉아계시든 그분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사신 줄 믿으시고, 귀하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왕 노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말씀드리면, 로마 제국을 복음화하는데 노예 성도들의 공이 컸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노예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해지고 충성된 사람들이 많아지자, 주인들이 노예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주인이 밤늦게 집에 돌아가면서 보니 어느 한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노예들의 거처였습니다. 돼지우리 같은 환경에서 노랫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몰래몰래 다가가 보니 그 집의 노예들이 잠자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자기네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 건강하게 해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시고, 훌륭한 일을 하게 하시고” … 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듣고 있던 그 주인이 감동되었습니다.
주인은 노예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 “나도 예수님 믿겠소” 고백했고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이 집에도, 저 집에도 일어났고, 그 소문이 퍼져서 마침내 로마 제국이 기독교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노예 성도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노예 성도 중에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니 자신의 주인이나, 종인 자신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며, 형님과 동생이라고 불러주니 이제부터는 집에서도 대충 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주인에게 무례히 행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 중에 <종(노예)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하는 이 권면은 지금 우리는 <피고용인> 직장인에게 하는 말씀으로, 혹은 어떤 집단의 하급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공무원도 급수에 따라 상급자와 하급자가 있지요. 회사원도 직장에 가면 상사와 하급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사장과 직원으로 나뉘지요. 심지어는 교회에서는 위임목사를 돕는 부 교역자들에게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급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면 됩니다. 사실 모든 직업은 귀합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직업은 성직과 평민으로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성직에 들어가 신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았지만, 일반 평민들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무의미한 삶으로 보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어느 곳에 일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부르신 그곳은 모두 다 존엄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는 것입니다. 이 직업을 어떤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본문이 말씀해줍니다. 먼저 하급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십시다. 22-23절 보세요.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〇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2-23절)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을 찾아보세요. “순종하되” (22절) - 설명이 필요 없지요.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22절)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라는 말은 경건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을 뒷부분과 연결하면 경건한 성실, 적극적 성실, 신앙적 성실을 말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일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23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은 마음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성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정성과 성심을 다해서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노예에게 <순종하라, 경건한 성실로 하라, 정성과 성심을 다하여 일하라>고 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가 하는 일은 “욕탕에 물 채우기, 음식 나르기, 잔치 준비와 뒤처리, 주인의 잔심부름”과 같은 보잘것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 소홀히 해도 될 일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야기 주인공은 프랑스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을 지낸 (장 바티스트 콜베르)입니다.
<그림 2. 장 바티스트 콜베르>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부터 한 번 보십시오. 콜베르는 소년 시절에 포목점 점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돈 많은 은행가가 호텔에 와 있으면서 옷감을 하나 가져오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옷감을 갖다 주고 돈을 받아 왔는데 받은 돈을 계산해 보니 두 배나 더 받은 것입니다. 콜베르는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렸지만, 주인은 시큰둥하게 ‘우리 잘못은 없네, 그냥 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콜베르는 “아닙니다. 더 받은 돈을 갖다 줘야 합니다.”라고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주인은 “됐다” 콜베르는 “아닙니다. 갖다 줘야 합니다.”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고, 콜베르는 은행가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고 더 받은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포목점 주인은 콜베르가 지나친 정직에 화를 내며 그날부로 해고했습니다.
콜베르는 좋은 일을 했다가 직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튿날 은행가는 청년이 자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행가는 콜베르에게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하며 은행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고, 은행가를 따라 파리로 가서 은행원이 되었습니다. 콜베르는 은행에서도 성실하게 일했고, 정직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은행에도 계속 승진했고, 1665년에는 프랑스의 재무부 장관직에 올랐습니다. 재무부 장관직을 감당하면서 조세제도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프랑스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데 공헌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콜베르와 같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일하는 직장이 어떤 환경이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복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바울이 종들에게 주신 권면대로 살면 상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24절 보세요.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절) 여기에서 말하는 “기업”이란 – 천국을 차지하는 특권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에게 천국이 보장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큰 복이었습니다. 만약 불의를 행하면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고 25절에 이어서 말씀합니다.
자 그럼 상급자에게 관점을 돌려봅시다. 지금으로 말하면 직장에서 하급자를 두고 있는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골로새서 4장 1절을 보세요.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4:1) 이미 말씀드렸듯이 주인은 노예를 자기 마음대로 “가라, 오라, 잘했다, 못했다, 하고 심지어 팔아먹어도 되고, 마음대로 때려도 되고, 심지어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상전들은 잊지 말아라…. 너희 위에 하나님께서 상전으로 계신다는 것을 –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노예를 하나님의 법인 의와 공평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의 전체 핵심은 <예배와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한 자는 한 주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초점을 직장인에게 맞춰서 생각했습니다. 이 외에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예를 들어, 운전할 때, 대화할 때 등 적용할 부분이 많습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예배가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부분에서 많이 약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예배와 삶이 연결되도록 주일에는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고, 한 주간의 삶에서도 최선을 다하셔서 주일에도, 평일에도 늘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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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