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도로명 주소가 보령시 주교면 토정로 이다.
바로 근처에 이지함 선생님을 비롯한 그 가족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이지함 선생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토정비결을 많이 생각할 것이다.
난 학교에 있다 보니 송학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특색있게 교육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지함 선생님을 생각했고
여러 자료를 찾다보니 그 분의 진정한 모습을 조사하여 소설로 쓴 책이 있었다.
평전도 있었는데 이휘소 평전을 읽었을 때 딱딱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 번엔 좀더 재미있게 읽고 싶은 책이었으면 싶어서 소설을 선택했다.
토정이라는 호가 붙은 이유는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의 후손 인 이지함 선생님이
서울, 지금의 마포나루 근처에 흙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주변의 낮은 신분과 생활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인물로,
조선사회에서 제일 천하게 여기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양반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거지들에게 잘 곳(걸인청)과 먹을 것을 마련해 주어 정착하게 하고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살 방도까지 알려준 사회복지 사업의 선구자였다.
벼슬을 마다하다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냈고
토질이 좋은 무인도 같은 섬에다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피해
도망다니는 사람들을 이주하게 하여 개척해서 평안하게 살게 하기도 하였다.
서경덕, 이율곡 선생님들과도 스승과 제자 사이로 어울렸던 이지함 선생님
그가 살었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
이지함 선생님과 맥을 이어가는 분은 이상재 선생님 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다음은 누굴 꼽아야 할까?......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분들의 모습을 꼭 알려야겠지요?
-다음은 http://theplace2012.tistory.com/123 에서 검색한 내용입니다.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다.
‘토정’의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1]
동인과 북인의 당수인 아계 이산해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는 이지함의 종증조부가 된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세조 때의 공신 이계전의 4대손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는 그의 종증조부였다.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과 개성의 서경덕으로부터도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그 성품은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하였으며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가 많다.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숙종 때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헌(趙憲)은 이지함을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1713년(숙종 39년)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양반 출신으로 상업을 하며 언제 어디서나 밥을 먹는답시고
머리에 갓이 아닌 무쇠솥을 쓰고 다녔다는 기인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 허균, 정렴 같은 인물과 함께 조선시대 기인으로 알려졌으며
일반 사대부라면 전혀 공감하지 못할 길을 걸어갔지만
그가 삶에서는 남명 조식이 아꼈으며 그의 죽음을 두고는
율곡 이이가 안타까워 한 인물, 그가 바로 토정 이지함이다.
마포구 토정동 138번지(한강삼성아파트 경로당 좌측)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그의 옛집터를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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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tistory/0254413D508F9E450C)
이곳은 문화재 묘역으로서 일면 고정산소이다.
1532년 중종 27년 임진년 토정 선생이 모상을 당하자 명당으로 택지하고
한산에서 선고묘를 옮겨 합장하였으며 후에 형제 자질 등 가족 묘지로 조성되었다.
토정 선생이 택지할 때 예언하기를 향후
우리 삼형제는 기해년에 귀득자 귀한아들을 얻고
후손 중 일품직이 나오겠다고 한바
과연 기해년 1539년에 장형 큰형인 작암공은 군계상공 위 산해를
중형 영의정 지무는 명곡공 산보를
토정공은 충의절공 산두를 각각 득남하고
당대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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