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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보수주의 |
자유주의 |
절충안 |
기록 방법 |
요한은 기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
요한의 창작품+후대의 보완 |
유기적으로 기록되었다 저자의 개별적 특성(성격, 어휘 사용 방법, 사상적 배경, 정황등)이 무시되지 않고 활용된다. |
저자 |
하나님 |
요한 |
하나님/요한 |
환상적 경험 |
요한의 실제적 경험 |
극적 효과를 노리는 문학적 기법 |
요한의 실제적 경험(참조 행 7:55의 스데반의 경험과 고후 12:1-3의 바울의 경험)+요한의 문학적 기법 |
문제점 |
요한 계시록을 하나님의 신비적 개입을 통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므로 요한 계시록에 대한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접근이 어렵다 |
성경의 권위를 부정 요한 계시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적 계획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을 이해하는데 상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
계시록은 기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요한이 디자인 한 것이다.
독자들이 요한 계시록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목적하고 계시록을 디자인 해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을 읽을 때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와 기록된 시기와는 2-30년 동안의 간격이 있다. 이것은 구전과 기록된 자료들을 가지고 기록했는데 이것을 독자들이 어덯게 잘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기록자의 의도가 개입됐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시록 역시 요한이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가를 고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사려 깊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전체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연구함ㅅ 금광석을 캐듯 캐내어 가야 한다.
이처럼 계시록도 철저히 과학적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회복된 이성으로 해석해야 가야 한다.
이것을 먼저 말하는 것은 계시록을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고 강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패턴으로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저기 묻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지만 디자인해서 기록한 요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게 될 것이다. 물론 요한의 의도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다.
2. 요한 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책을 읽을 때 책이 어떤 부류인가 성격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계시록은 3가지, 예언, 서신, 묵시문학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1) 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이다(계 1:3).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자는 단수 듣는자는 복수인데 이것은 읽는자는 앞에 나아서 읽기 때문에 es수이고 청중은 여럿이 듣기 때문에 복수이다.
(1) 성경적 예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언'이라는 단어는 본래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과거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과 미래에 이루실 하나님의 사역을 근거로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서도록 일깨우는 것에 그 근본적 목적이 있다. 이러한 예언의 의미가 바로 예언으로서의 요한 계시록에 적용된다.
(2)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서도록 촉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서도록 돕는데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예언서로서 요한 계시록을 미래에 대해 사건을 미리 말하고 있는 책으로 오해하여 마치 비밀 문서의 암호 코드를 풀듯이 요한 계시록을 읽지 말도록 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선지자들이다. 그러나 선지서들을 보면 미래에 대한 것만 말하지 않고 과거의 이야기도 많이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과거에 은혜를 주시고 지금도 그런 은혜가 있지만 범죄했다 그러므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회복이 있다(미래 예언이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회복하신다. 이것이 예언의 패턴이다. 이 패턴은 계시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계시록은 예언으로서 하나님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것을 말한다.
예언을 미래를 의미하는 예보다 맡길 예자를 사용하면 더 좋을 것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들에게 전달해 주어 그 말씀을 맡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것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면 절대 답을 얻을 수 없다.
로또복권을 맞출 확률이 0%인 것처럼 계시록을 미래의 해답으로 보려고 하면 확률 0%이다. 인디아나존스 영화에 보면 굴에 들어가 문자를 해석하여 하나 하나 진행해 가는 과정처럼 계시록을 그렇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 뜻과 능력을 계시하는 것이 요한 계시록이다.
(3)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사역으로서 예언은 진공 상태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그 이전에 주어졌던 사건이나 말씀을 근거로 하거나 그것들을 재해석하므로서 자신들의 선지적 메시지를 형성한다. 이러한 원리는 예언으로서 요한 계시록을 읽는 방법을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하다. 곧 요한 계시록은 이전에 주어졌던 구약의 말씀들을 근거로 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으로서 요한 계시록은 구약과의 대화를 통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4) 예언으로서 요한 계시록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구절들: 1:1, 1:19 그리고 4: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속히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1:1)
그러므로 네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1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4:1)
위의 말씀에 의하면 마치 요한 계시록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1:1과 4:1에서 '반드시 될 일' 혹은 '마땅히 될 일'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동일하게 사용된다. 특별히 이 표현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승천등에 집중된다 (마 16:21, 13:7; 막 8:31, 13:7, 10; 눅 9:22, 17:25, 24:7, 24:24; 요 3:30, 12:34, 20:9 등).
이런 경향으로 보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① 네 본 것(과거): 1:9-20절: 방금 본 체험
② 이제 있는 일(현재): 2-3장
③ 장차 될 일(미래): 4-22장
이처럼 계시록을 3가지 시제로 본다. 그런데 분량이 많은 미래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 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처럼 미래에 관한 것들이 현재라는 그룹에 있고.
미래에 대한 것으로 보는 4-22장에도 현재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것을 말하지만 현재에 관한 것들을 많이 말한다는 것이다.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반드시 될 일: 속히라는 말은 긴박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땅히 될 일: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임을 당해야 한다. 부활을 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하나님이 정한 뜻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보여준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행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처럼 마땅히 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마땅히 될 일을 기록하는 것이 계시록이다.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계획해오신 구속의 계획을 생각하고 읽으면 계시록이 100% 이해된다.
창조와 타락이후 하나님이 가장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창조의 회복이다.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 하나님의 영광(창조의 목적, 에덴의 회복)
예수님이 오서서 영적인 새 창조를 이루셨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새창조가 에덴을 배경으로 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회복이라는 구속의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지 해답을 찾기위해 이곳 저곳을 뒤지면 안된다. 곧 의미의 추적이어야지 1:1 대응식의 사건 해답을 찾는 것은 소모적인 작업이다.
(5) 초대교회 때 선지자 그룹의 활동:
개인적 경험(환상과 신탁)을 교회 공동체에 보고 형식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선지자 그룹들의 활동과 요한이 다른 점은 요한이 받은 환상과 신탁이 오랜 동안의 사색을 통해 정교하게 짜여진 구조 형식으로 짜여지고 기록되어져 정경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 요한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최고 정점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요한 계시록의 가치를 증폭시킨다. 요한 계시록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의 경영의 성취와 완성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이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은 종말에 어떻게 일을 이루시는가를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2) 계시록은 서신이다(1:4-5).
서신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있다.
(1) 서신의 구성:
발신자(1-2절: 요한). 수신자(4a: 일곱 교회). 축복(4b-5a). 송영(5b-6절)
발신자는 요한이다(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2) 서신의 특징:
수신자들의 정황을 발신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수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한다.
요즘은 거의 편지가 없이 메일과 문자, 전화로 한다. 이것들은 굉장히 빠른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당시의 편지는 한번 적어서 보내면 한달도 걸리고 그 이상도 걸리면 답장은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편지는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해서 보내야 했다.
문자나 메일은 조금 틀려도 그냥 보낸다. 그로인해 의사소통이 바로 안되면 수정하면 된다. 그러나 당시의 편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이 서신들을 당시 교회 성도들이 읽혀지도록 기록되었다.
(3)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이다(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밧모로부터 순환로를 따라 여행하는 사자가 방문한 순서대로 명명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계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이처럼 각 교회에 편지(서신)을 썼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요한의 기록이 아닌 후대에 다른 사람들이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9페이지의 약속과 성취의 도표를 보면 약속과 성취가 딱 맞아 떨어진다. 이것은 요한이 2-3장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8페이지의 2-3장은 1장과도 연결되고 1:9-20절과도 연결된다.
(계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이 글씨는 원문에 없는 것을 보이는 작은 글씨로 되어 있다.
(계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런 것을 볼 때 2-3장은 일곱교회에 보낸 독립된 편지가 아니라 1-22장까지 유기적을 연결된 것 중의 일부라고 본다.
그래서 계시록을 회람서신이라고 본다.
회람서신은 개인이 인격적으로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교회가 자기 교회에 대한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까봐 2-3장은 각 교회에 대한 인격적 관계성을 자세하게 연결시켜주고 있음을 말한다.
(4) 회람서신이 일단의 수신자들에게 전달된 서신보다는 구체적일 수 없지만 요한은 회람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 한계를 극복하였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각 특정한 교회에게 바라는 만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5) 이것은 바로 2-3장에 잘 나타나 있다.
2-3장은 독립적인 편지가 아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주는 계시록 전체의 서론이다. 2-3장은 바로 일곱개의 서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2-3장이후로는 다시 일곱개의 서론이 통합되는 본론으로 연결된다.
(6) 요한이 그의 메시지를 일곱개의 특정한 정황속에서 상황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통례적인 일반화를 거부한다.
여기에서 통례적인 일반화란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들이 모두 핍박받고 있는 상태라는것이다.
3) 계시록은 묵시문학이다.
묵시 문학과 요한 계시록의 비교를 통한 요한 계시록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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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문학 |
요한계시록 | ||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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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성: 공간적 초월로서의 하늘(계 4-5장 7:9-17; 14:1-5) 시간적 초월로서의 종말(계 20장 21-22장) | |||
상징성: 직접적 표현보다는 상징적 언어 사용을 통한 간접적 표현 상징적 언어의 사용은 임의적이지 않고 구약적 언어를 사용한다 | ||||
환상 |
환상적 표현의 기능 |
1) 환상은 상징적 언어를 통해 초월적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예, 계 4-5장) 2) 환상은 실제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 도리어 문맥이나 구약적 배경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1:9-20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나 5:6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이나 19:11-16에서 군대 장관의 모습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 모습이다. | ||
상징적 환상들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 |
상징적 환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7:1-8의 144,000이 14:1-5에 다시 한번 등장 7:1-8과 7:9-17과의 유기적 관계) | |||
실제적 경험이 아닌 문학적 기법으로 사용된다 |
문학적 기법 + 계시의 방법으로서 실제적 경험: 계시의 무오성과 권위 | |||
상징과 환상의 관계 |
환상은 상징을 담는 그릇이고 상징은 환상을 채우는 내용이다. 환상은 상징을 통해 주어지고 상징은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래서 환상을 '상징적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를 설정할 때 임의적으로 하지 않고 구약의 언어나 사상을 포함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계시록 4장의'네 생물'등의 경우처럼). 저자에게 구약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하나님은 계시의 방법으로서 요한에게 환상을 주시는데 그에게 익숙한 세계관으로서 구약을 사용하신다. | |||
그러므로 환상의 내용에서 구약적 소망과 약속의 성취의 도래(곧 종말)에 대한기대를 발견할 수 있다. |
그러므로 환상의 내용에서 상징적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진 구속사적 성취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
저술 동기 |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성전의 유린과 파괴와 같은 민족적 고난에 대한 (구약)성경 해석을 통한 해답의 제시 |
세상의 도전에 의해 위기에 처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구약)성경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과 적용 | ||
내용 전개 방법 |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전개되지 않는다 |
교회가 처한 실제적 현실에 기초하여 구약에 대한 구속사적이며 기독론적 성취를 중심으로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일관성 있게 전개된다 | ||
이슈 |
온전한 성전의 존재와 성전의 재건 |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 |
(1) 묵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월성이다.
초월성의 종류에는 공간적 초월로서의 하늘과 시간적초월로서의 종말이 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초월성의 두 가지 측면은 요한 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 특징과 일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들은 공간적 초월로서의 하늘과 시간적 초월로서의 종말에 대한 것들이다. 요한은 하늘과 종말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적 계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한이 익숙해 있는 묵시 문학적 기법을 활용하여 그에게 환상적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이해할수 있다.
유대인들의 현실과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에 관한 괴리 때문에 묵시문학이 발달되었다.
(2) 특별히 이러한 계시의 초월성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바로 '교회'이다.
요한은 현재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본다(4장 7:9-17). 그리고 미래에 완성될 교회의모습을 미래에 가서 현재처럼 또한 본다(21-22장). 그리고 이 두 존재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현재 하늘에서 종말적 완성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요한 계시록의 이러한 초월적 특성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의 이러한 초월적 특성은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천상적/종말적 관점에서 이 시대를 보게 하므로서 이 세대의 본질적 모습을 보여주고 로마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에 있어서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 묵시 문학이 갖지 못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계17장은 바벨론 멸망에 관한 것이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바벨론이 아니라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룩 3,4장은 바벨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로마를 상징한다.
이처럼 묵시문학과의 공통점이 계시록에 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특징을 잘 이해하면 계시록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성전과 관련해 바벨론 페르시아(바사) 이후 그리스 로마 등 강대국들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면서 성전이 더럽혀지고 종교지도자들을 외세와 결탁하여 타락했다. 그리하여 일반 성도들은 외세의 영향과 타락 등을 인한 성전의 파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통탄하며 기록한 것들이 묵시문학으로
이런 묵시문학가들이 현실적인 괴리감들을 극복하기 위해 눈을들어 하늘 성전을 말하고 진정한 성전은 하늘나라에 있음을 말한다.
7층, 10층, 15층 등을 소개한다. 묵시문학가들은 각 층에 관심이 많았으나 바울은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초월성을 이야기할 때 하늘에 이어 시간적인 초월로 종말론을 말하기도 한다.
시간을 초월해서 하늘과 종말을 말한다.
의미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들을 많이 사용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분명한 가이드 라인을 두고 상징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상징이 구약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징을 이해하는 좋은 실마리가 된다.
(4) 이 외에 다른 묵시문학과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상징적 환상이 자기 충족적이지 않다 요한 계시록 전체는 마치 단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두 번째로는 가명적으로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약 선지자들의 전통 안에서 쓰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p의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계2-3장)
요한 계시록 1:13-14 |
구약 | ||||
1:13a |
인자 같은 이가 |
예 수
그리스도 |
단7:13 |
인자 같은 이가 |
메시야 |
1:13b |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출28:4 |
그들의 지을 옷은�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와 속옷과관과 띠라 |
제사장 | |
1:14 |
머리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단7:9 |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
하나님 | |
1:14b-15 |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달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
단10:6 |
�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
인자= 메시야 | |
겔43:2 |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
하나님 | |||
1:16a |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사11:4; |
그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
메시야 | |
사49:2 |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 ||||
1:16b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단10:6 |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
인자= 메시야 | |
삿5:31 |
주를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
종말적 전사 모습 | |||
1:17 |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사42:4 |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
하나님의 자기 계시 | |
사44:6 |
나는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
사48:12 |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 ||||
1:18a |
곧 산 자라� 세세토록 살아 있어 |
|
신32:40 |
나의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
하나님 |
1:18b |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가졌노니 |
|
사22:22 |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메시야 |
이런 1장의 도표와 계19:11-16절의 재림의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볼 수 있다.
1장의 문자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그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구약에서 온 것이다.
계시록은 묵시문학으로서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적인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문맥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계시록은 문맥을 중요하게 여긴다.
상징적 표현이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인용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분별해야 한다.
예수님도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진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비유를 통해 듣는 자들이 굉장히 쉽게 이해한 것처럼 계시록의 상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던져 주는 것이다.
상징적 표현은 굉장히 큰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상징과 환상의 관계 도표 참고
계시록이 묵시문학을 무작정으로 받아 들인 것은 아니다.
진리를 바로 전달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했다.
과거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표현방법이 많이 달랐다.
그러나 현대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표현하는 방법이 많이 가가워지고 있다.
그래서 현대 해석학에서는 계시록을 묵시문학으로 단순하게 처리하는 경향도 있다.
문학적인 작품인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일반 묵시문학이 담고 있지 않는 것들을 많이 담고 있다.
2장. 요한 계시록의 구조
계시록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는데 지도교수는 단순하게 분석했다.
계시록이 청중들에게 읽히고 들려졌다. 들려지는 음에 의해서 구분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정한 음에 의해ㅔ서 중요한 부분이 구분되었고, 그 반복된 음을 찾으면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음의 구분없이 읽어 내려갔을 때 청중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 반복된 언어가 바로 앤 프뉴마티(성령안에서)이다.
이것이 4번 나오는데, 1:10절, 4:2절, 17:3, 21:10절에 나온다.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언어적 표시를 통한 구조 분석(엔 프뉴마티)
(1) 1:1-18절: 프롤로그 (2) 1:10 : 1:9-3:24 (1) 1:9-2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 (2) 2-3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일곱 메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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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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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2 : 4-16장 (1) 4-5장: 하늘 환상(6-16장에 대한 기초를 마련) (2) 6-16: 세상에 대한 심판과 교회의 구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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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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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7:3 17:1-19:10: 바벨론의 멸망 19:11-20:15 최후의 심판(바벨론 멸망)-솔로몬성전파괴) 19:11-21:8 21:1-8: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헤롯 성전 파괴 (5) 21:10 21:9-22:9 새 예루살렘의 영광 (6) 22:6-21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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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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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18절: 프롤로그
(2) 1:10 : 1:9-3:24
(1) 1:9-2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
(2) 2-3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일곱 메시지
(3) 4:2 : 4-16장
(1) 4-5장: 하늘 환상(6-16장에 대한 기초를 마련)
(2) 6-16: 세상에 대한 심판과 교회의 구속
4장은 16장까지의 본론부분을 연결한다.
4-5장은 6-16장까지의 내용을 응축하고 있다. 하늘 환상은 하늘 성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말은 구속과 심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속, 불신자는 심판이라는 종말을 맞는다.
(4) 17:3 17:1-19:10: 바벨론의 멸망
19:11-20:15 최후의 심판(바벨론 멸망)-솔로몬성전파괴) 결
21:1-8: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헤롯 성전 파괴
이들은 공통적으로 성전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이 돌아온 후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AD 70년에 멸망당하기까지 헤롯성전에 들어가 기도했다. 쿰란 공동체는 광야로 나갔지만.
헤롯이 민심을 얻기 위해 거대한 성전을 건축했는데 거기에 가서 기도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태복음도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출애굽으로부터 돌아온 것으로 표현한다.
15-16장을 보면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이 새노래를 한다. 어린양의 노래,
계시록에서 바벨론으로부터 회복한 후 어린양의 노래 회복의 노래를 하는 것이다.
모세의 노래는 흘러간 구속의 옛노래이고 어린양을 말미암은 새노래가 가장 완벽한 노래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럼 왜 여기서 로마제국을 말하는가? 왜 바벨론(로마)의 멸망이 망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곧 교회를 핍박하는 것들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 공동체를 대적하는 세력인 로마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당시 로마는 기독교 국가였으나 황제를 숭배하는 기독교와 배치하는 새력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시 사탄은 교회의 멸망을 위해 로마라는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시스템(하나님 대신 황제 숭배 등)을 사용했다. 그래서 교회를 대적하는 로마를 바벨론으로 상징해 멸망하는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
첫째짐승 둘째짐승
(네로) (거짓선지자)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절대 망하지 않는다.
교회 공동체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 영광이 영원하다.
첫 창조(에덴- 아담,하와): 타락- 구속- 새창조(새 예루살렘- 교회)
성취
알파: 창조, 오메가: 새창조로 해석한다. 처음과 나중의 완전함, 완성을 말한다.
이 새창조를 교회에 허락하신다.
이미 교회 공동체는 새창조를 경험하는 공동체이다.
고린도서는 고린도 교회의 분파, 은사들이란 정황이라는 것이 있다.
계시록은 로마의 교회 핍박이라는 정황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5) 21:10 21:9-22:9 새 예루살렘의 영광 론
(6) 22:6-21 에필로그
1) 위의 도표에서 계시록은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서론(1:9-3:21장)
본론(4-16장)
결론(17:1-19:10과 21:9-22:9).
2) 서론과 결론은 다시 프롤로그(1:1-8)와 에필로그(22:6-21):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그 시작 부분에 있어서 언어적으로 병행된다(1:1-3과 22:6-9)
(병행되는 언어로는 종, 요한, 천사,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22:6-9은 결론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기도 하지만 에필로그의 시작 부분에 해당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예언의 말씀은 계시록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각각 요한 계시록을 소개하는 내용과 마무리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특별히 프롤로그에서는 요한 계시록이 묵시, 예언 그리고 서신이라는 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3) 서론(1:9-3:24):
서론은 다시 1:9-20과 2-3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이 둘의 관계는 전자에서 소개된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 주며
후자에서 그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분으로 연결된다.
4) 본론(6-16장):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가 있고 일곱 대접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와 함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 삽입들이 주어지는데 이는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교회의 모습을 소개한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 중 일부가 17:1과 21:9에 등장 그렇다면 17:1이하와 21:9 이하는 6-16에서 심판의 메시지의 계속이라 할 수 있다.
삽입은 다음과 같은 내용과 기능을 가진다.
(1) 144,000(7:1-8)과 셀 수 없는 무리(7:9-17):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 사이에 존재
(2) 두 증인 이야기(10:1-11:13):
9:20-21(회개하지 않음) 10:1-11(두 증인의 사역) 11:13(회개가 일어남):
여기에서 삽입의 기능은 교회의 선지적 선포에 의해 회개하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두렵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는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
(3) 용에게 쫓기는 여인(12장)과 교회 공동체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두 짐승(13장)과 하늘의 성전에 존재하는 144,000(14:1-5)
5) 결론(17:1-19:10과 21:9-22:9):
특별히 결론 부분은 서로 병행적 관계에 있다(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의 언어적 병행 뿐만이 아니라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의 주제적 병행도 있다).
결론의 이러한 병행적 관계에 의해 계시록 전체가 향하는 절정으로서 두개의 주제가 서로 대조적 병행으로 존재한다: 바벨론(악의 세력)의 멸망과 새 예루살렘(교회)의 영광(이중적 결론).
3장: 예수 그리스도(계1:19-20)와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7p)
1:9-3:21절은 서론 부분으로서 이는 1:9-20과 2-3장으로 나누어 진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함께 읽어야 되는 관계를 가진다.
1) 1:9-20절에서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특별히 1:13-16의 기록은 단 7:9-14과 10:6, 겔 43:2을 자료로 사용한다.
요한 계시록 1:13-14 |
구약 | |||||
1:13a |
인자 같은 이가 |
예수 그리스도 |
단 7:13 |
인자 같은 이가 |
메시야 | |
1:13b |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출 28:4 |
그들의 지을 옷은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와 속옷과 관과 띠라 |
제사장 | ||
1:14 |
머리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단 7:9 |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
하나님 | ||
1:14b-15 |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달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
단 10:6 |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
인자=메시야 | ||
겔 43:2 |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
하나님 | ||||
1:16a |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사 11:4; |
그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
메시야 | ||
사 49:2 |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 |||||
1:16b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단 10:6 |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
인자=메시야 | ||
삿 5:31 |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
종말적전사의 모습 | ||||
1:17 |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사 42:4 |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내가 곧 그니라 |
하나님의 자기계시 | ||
사 44:6 |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 |||||
사 48:12 |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 |||||
1:18a |
곧 산 자라� 세세토록 살아 있어 |
|
신 32:40 |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
하나님 | |
1:18b |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가졌노니 |
|
사 22:22 |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메시야 |
위의 도표에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메시야이시며 제사장으로서 소개하는데 그것을 구약적 자료를 사용하여 독자들의 접근성과 이해의 폭을 강화한다.
2) 2-3장은 1:9-20에서 소개된 하나님이시며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의 주체자로 제시한다.
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병행되는 관계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구도가 가능하다.
|
구약 |
신약 |
말씀하시는 분 |
하나님 |
예수님 |
전달자 |
선지자 |
선지자 요한 |
말씀을 받는 대상 |
이스라엘 |
일곱 교회 공동체(우주적 교회 공동체) |
3) 1:9-20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모습이 2-3장 메시지의 서두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이름에 그대로 사용되고 2-3장의 메시지 서두에 사용된 예수님의 이름은 다시 그 메시지의 내용과 관련된다.
교 회 |
에베소 교회 |
서머나 교회 |
버가모 교회 |
두아디라 교회 |
사데 교회 |
빌라델비아 교회 |
라오디게아 교회 |
1 장 의 예수님 |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1:16a) |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1:18) |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1:16b) |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 주석 같고(1:1415) |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1:16) |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18b) |
충성된 증인으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1:5) |
예수님 이름 |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금 촛대 사 이에 다니시는 이(2:1) |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2:8)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2:12) |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2:18) |
하나님의 � 일곱 별을 가지 이(3:1) |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 |
�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3:14) |
메시지 내용 |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길 것이다(2:5) |
죽기까지 충성하라(2:10) |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6) |
회개치 않는 자를 환란에 던질 터이요(2:22) |
|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3:8) |
|
4) 이러한 병행적 관계는 2-3장에서 주어진 메시지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는사실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1) 일곱 메시지는 구약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의 서두와 동일한 형식을 따른다
① '교회의 사자에게 써라': 선지적 말씀 선포의 서두의 성격을 가진다(호 4:1)
② '가라사대'= 구약의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기를' 와 동일한 표현이다(참조 암 1:16; 5:4).
(2) 일곱 메시지는 심판과 회개로의 촉구의 메시지이다.
(3) 일곱 메시지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종말론적 약속이 있다.
약속 |
성취 | ||
2:7 |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 |
22:2 |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와 열 두가지 실과 |
22:14 |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 ||
2:11 |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 |
20:6 |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
21:4 |
다시 사망이 없고 | ||
2:17 |
새 이름 |
19:12 |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
22:4 |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
2:28 |
새벽별 |
22:16 |
광명한 새벽별 |
3:5 |
흰 옷 |
22:14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
3:12 |
하나님 성전에 기둥 |
21:22 |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다 |
|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 |
21:2 |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내려오니 |
3:21 |
내 보좌에 함께 앉게 |
22:3 |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
5) 2-3장의 일곱 메시지의 구조의 특징 및 역할
(1) 일곱 메시지는 서신의 특징인 서두와 결론을 생략하고 있다:
서신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메시지에 대한 배경적 역할을 한다. 특별히 '이기는 자에게는'라는 문구를 통해 교회가 영적 전투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2) 각 메시지는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2-3장이 이미 21-22장에 기록된 그 약속들의 성취로서 종말론적 극치를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8쪽 참조).
(3) 칭찬과 책망이 동시에 주어진다.
이는 신약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주어지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주어진다. 이 두개의 교회는 요한 계시록에서 지향하는 최선의 교회와 요한 계시록에서 지양하는 최악의 교회의 모델이다.
(4) 요한은 추상적인 교회에게 일곱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교회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 전체를구체화하고 있다.
(5) 일곱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이 일곱교회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앞으로 있게 될 모든 교회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 전체를 보편화하고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그 기능을 하고 있다.
(6) 일곱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 저자의 주된 관심이 교회에 있음을보여준다.
계시록은 시작과 끝을 교회를 말하고 있다.
새로운 백성들의 탄생과 마침내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말한다.
4장. 하늘의 성전 환상(4-5)
성경읽기: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4-5장에 대한 해석적 원리
사실적 묘사로 보기 보다는 실제적 상황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한은 하늘의 요소에 있어서 구속적 계시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유용한 요소들을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 나타내려고 한다.
4장은 창조자 5장은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말하고 각가 그 대상에게 찬양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5장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것을 이루신 것을 보여준다.
1. 창조주 하나님(4장)
1) 도입(1-2a절)
1) 하늘의 문이 열린 것을 보다:
이리로 올라오라. 성령 안에 있음: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다
묵시문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될 일, 반드시 될 일로 불특정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 안에서
2) 하늘에서 문이 열리다:
하늘에 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늘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이후에 마땅히 될 일들:
1:1의 속히 일어 나야 할 것들과 동일한 문구 '이 후에'라는 문구는 앞의 내용과 시간적 순서를 나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논리적 순서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땅히 될 일들'이라는 문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하는 당위성을 의미하기 위해사용된다 (divine 'dei'의 용법: 마 16:41; 24:6; 막 8:31; 눅 9:22 등). 그러므로 4장은 하늘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핵심적인 것들을 소개한다.
2) 하늘에 대한 묘사(2b-7)
(1)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2b):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같다 무지개가 보좌를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에머럴드) 같다
보석 모티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하늘의 반영으로서 에덴 동산[창 2:11-12]과 성전[출 28:17-21]에도 보석 모티브가 사용된다).
에덴 동산도, 성막도, 성전에도 보석이 많았다. 모든 것을 보석으로 쌓다. 새예루살렘에도 보석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서로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팔, 귀, 눈,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나 실상을 말하기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의 거처인데 모든 곳은 하나님이 거처하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곳이다.
에덴 동산이 보석이 가득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보석 모티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하늘의 반영으로서 에덴 동산)
이루어질 새예루살렘은 장차 이루어질 에덴(하늘, 하나님의 속성, 순수함을 보여주는
(2) 이십 사 보좌와 그 보좌들 위에 앉아 있는 이십 사 장로들(4절):
흰 옷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천사의 특징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람의 특징인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다.
이십사 장로는 '24'라는 숫자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여기에서 이십사 장로는 대상 24:1-19의 성전에서 섬기는 24명의 제사장들과 병행관계: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장적 성격을 가진다.
보좌: 실제보다는 심리적인 보좌라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 들어여 한다. 곧 임재와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보좌는 성전의 의미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14p 참고
하늘과 창조: 계 4장의 피조 세계를 대표하는 네 생물과 관련하여
반영(refecltion) 모형 (copy) 일치(identification)
에덴첫창조) 성막/가나안/성전 새창조
아담 이스라엘 교회
창조 타락 구속 성취/완성
(창3:8) (출 25:9, 히 8:5, 시 78:51-55)
재림(탄생/부활/승천 성취) 재림(완성)
(고후5:17; 엡 2:5-6; 계 4장)
구속의 역사
(엡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가 골고다, 십자가, 무덤, 하늘에 있은 적이 없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골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바울은 이 두 구절외에 우리가 하늘에 앉음에 대한 표현이 없지만 계시록은 굉장히 많은 비중을 두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바울서신을 기록하는 환경과 계시록이 기록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하늘에 보좌가 있음을 말함으로 영적 전투에 있는 성도들에게 교회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망하지 않고 승리해서 하늘 보좌에 앉게됨을 부각시켜 승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안에 감춰졌기에 교회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이겨야 한다.
로마의 황제 숭배에 맞닥트리는 상황에서 이미 승리했음을 자주 언급하여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말은 목회와 성도들의 생활에 이미 승리가 보장된 것이므로 당당히 나갈 수 있으며 아름다운 집으로 세워지게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4장의 메시지는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응축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조직신학 시간에 배운 지상의 교회, 전투중인 교회, 천상의 교회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3)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다(5a):
'종말적 신적 현현'을 수반하는 우주적 지진'(출 19:16; 참조 겔 1:13).
구약에서 오신 하나님의 사건은 종말적 사건으로 보여준다. 그 마지막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만 볼 때는 초림이지만 전체 속에서 보면 종말적 임함이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사건도 종말적 사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은 종말적이 아닌 종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8:5; 11:19; 16:18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세 구절은 인, 나팔, 대접 심판의 일곱 번째에 위치하므로서 종말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하늘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도표로 표시 될 수 있다.
|
표현 양식 |
위치 |
4:5 |
번개, 소리, 천둥 |
하늘 성전 환상 |
8:5 |
천둥, 소리, 번개, 지진 |
일곱 번째 인 심판 |
11:19 |
번개, 소리, 천둥, 지진, 큰 우박 |
일곱 번째 나팔 심판 |
16:18 |
번개, 소리, 천둥, 큰 지진, 큰 우박 |
일곱 번째 대접 심판 |
이것은 미래적 심판의 현상이 하늘에서 이미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들은 종말적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초림이 아니라 재림 때 일어날 사건이다. 일곱 나팔, 인, 대접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나타날 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이미 4:5절에서 나타나 보인다. 이것은 19장의 표현으로 구약에서 가져온 것이다.
앞의 24 장로도 하늘의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를 말하는 것인데(거룩한 새 예루살렘 공동체(교회),
이렇게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4-5장에서 이미 응축되어 가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여담: 성경을 풀 때 진짜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있다. 이런 것은 넘어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처음보아서 어려운 것이 있다. 이것은 본능적으로 어렵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실제는 쉬운 것이다.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는 것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다.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학자가 강의하면서 맨 먼저 강조하는 것이 마태복음은 절대 그렇게 쉬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보아야 할 그리고 중요한 것들을 넘겨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마1장은 신학이다. 구약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계시록은 참 쉬운 책이다. 두려움을 없애고 접근해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하면 쉽게 풀린다. 물론 미루어 두어야 할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다.
(4) 보좌 앞의 일곱 등불(5b)=하나님의 일곱 영(5b)=성령(참조 1:4)
여기에서 일곱 영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다.
그러나 5:6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는 '일곱 눈'으로 등장한다. 일곱 등불과 일곱 눈은 각각 슥 4:2의 '일곱 등잔'과 4:10의 '일곱 눈'에서 채택되었다(슥 4: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슥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전자(슥 4:2)는 성전 안의 기구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후자(슥 4:10)는 이를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계4:5절: 일곱 등불
계5:6절: 일곱 눈
(5)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6a):
(겔 1: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창 1:6-7)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바다)과 궁창 위의 물(구름속)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에서 우주적 구조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4:6a에서의 이러한 묘사는 유대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한다
무작위적으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정같은 유리바다는 15:2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비교, 심판의 의미 부여하고 15:3-4에서 하늘에 존재하는 바다는 출애굽 모티브로서 사용된다((계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5:3-4)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
대접 심판의 도입부분: (계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우상으로부터 벗어난 자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것은 출애굽한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 부른 구원의 노래와 같다. 곧 우상으로부터 진노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자들이 어린양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음에 대하여 감격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광야로 가게하라는 애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다.
수정같이 맑은 유리바다는 4장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15장에 가서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홍해를 건넘이 애굽과의 단절과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세상과 단절됨을 생각게 한다.
(6) 네 생물(7절)
(계 4:6-8)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네 생물은 에스겔에 나온 것이다.
거룩하다는 이사야에서 가져온 것이다.
① 네 생물의 모양
(ㄱ) 네 종류의 얼굴 모양: ① 첫째 생물: 사자 ② 둘째 생물: 송아지 같고 ③ 세째 생물: 사람 ④ 넷째 생물: 독수리
네 생물의 이러한 형상은 각 피조물의 대표적 존재로서 하늘에서 피조 세계의 원형이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에덴은 하늘의 반영이다):
하늘과 피조세계는 언제나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리고 '4'라는 숫자는 우주적 의미를 가진다(나라, 백성, 족속, 방언[5:9; 7:9; 13:7; 14:6]; 네 모퉁이[7:1])
이렇게 4번을 반복함으로 우주적 대표,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구약적 배경: 겔 1:5이하 에스겔서의 내용을 단순화시킨다.
에스겔에서는 바퀴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데 사용된다(겔1:15; 10:14-20)
하나님의 뜻으로서 새로운 창조의 도래를 확증하고 예고한다(겔 43:2-3; 47장).
(ㄴ) 앞 뒤에 눈이 가득하다(6b, 8a; 겔 1:18):
피조세계의 충만함 여섯 날개(사 6:2에서 스랍의 날개 수와 동일하다 겔 1:6에서 네생물은 네 날개)
② 네 생물의 위치:
보좌 가운데(in the midst of)와 보좌 주위에(around) 있고(6절): 하나님의 보좌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충만하신 분이심을 시사해 주고 있다.
③ 네 생물의 역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찬양: 거룩하다(x3)(사 6:2-3에서 스랍의 활동) 요한은 네 생물을 에스겔의 네 생물(그룹)과 이사야의 스랍을 조합하고 있다.
④ 네 생물은 가상의 존재인가? 아니면 실제적 존재인가?
3) 하나님에 대한 찬양(8-11절):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의 찬양의 차이가있다.
(1) 네 생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2) 이십 사 장로: 우리 주 하나님이여
2. 구속주 예수님(5장)
5장의 중요한 이슈는 누가 책의 인을 뗄 것인가? 이다.
5장은 1-4절: 누가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5-7절: 책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양 소개 그리고 8-14절: 책의 인이 떼짐으로 인한 새노래로 나뉘어 진다.
1-4절은 책의 인을 뗄 자를 찾는 내용이고 5-7절은 책의 인을 뗄 자로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으며 8-14절은 책의 인을 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개에 대한 반응의 내용이다.
1) 누가 책의 인을 뗄 것인가?(1-4절)
(1) '책'이라는 이미지의 구약적 배경:
(ㄱ) 에스겔(겔 2:9-3:3):
계5:1절의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함'이라는 책의 형태와 병행된다.
에스겔 말씀에 의하면 책은 심판의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계 10:9-11은 5장의 책이 겔 2:9-3:3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ㄴ) 다니엘(8:17, 26; 12:4, 9, 겔2:9-10절):
다니엘의 말씀에 의하면 '책'의 인을 떼는 것은 종말의 시점에 허용된다.
말은 봉함할 수 없다. 그러나 말을 기록한 책을 봉함한 것이다.
다니엘서의 봉함된 내용은 마지막 때에 드러난다. 봉함된 책이기 때문에, 그 책을 떼게 된 때는 종말을 나타낸다.
심판은 이방민족이,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주어진다.
책의 인을 떼는 것은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인을 누가 뗄 것인가? = 누가 종말을 도래케 할 것인가? = 예수님이시다.
예수님-> 종말(심판과 구속)이 옴. 곧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다 드러난다.
종말-> 심판(6-16장: 인, 나팔, 대접): 세상(이방나라, 사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기간이 심판의 기간으로 본다. 6장부터 소개하는 심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은 구약적 예언의 성취(요엘, 오바다 등)를 말한다. 사실 인의 심판으로만도 온전하다. 그러나 나팔과 대접으로 인한 심판을 강조하고 심판의 입체적인 증거를 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에서이다. 이것은 출애굽의 심판의 신학(하나님의 백성은 보호, 괴롭히는 이방 백성을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시는)이 계시록의 신학으로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가 주님의 낮을 피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볼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구약적 배경은 겔2:9-10절이다(겔 2: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이처럼 책의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안팎에 쓰였다. 이 내용은 계시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5:5-6절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백성을 구속하는 것을 보여준다.
-> 구원(회복):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 그런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자는 회복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할 일은 왕 노릇하는 것이다. 겸손과 헌신과 희생으로.. 그런데 사람으로서 왕 노릇하려고 하는......,
(ㄷ) 정리:
구약적 전망에서 볼 때 종말적 현상으로서 구속과 심판 두 가지가 일어난다.
실제로 계 5:5-7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을 노래하고, 6-8장에서 책의 인을 떼는 과정에서 심판이 선포된다.
(2)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다(1절):
(계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심판과 구속을 주관 하시는 하나님
(3) 힘있는 천사의 외침(2-3절):
(계 5:2-3)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누가 책을 펴며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2절)( 합당하다는 표현이 이 외에도 세 번 더 나온다(5:4, 9, 12);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할 이가 없다'(3절).
(4) 요한의 큰 울음(4절)
(계 5: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책의 인을 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됨: 종말적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것을 주도할 사람이없다(?).
2) 어린양에 대한 소개(5-7절)
(계 5:5-7)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1)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5절) 사자의 이미지(6절)와 대조:
승리는 철저한 패배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곧 죽음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가장 정확한 방도는 죽으심이다.
(2)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 사이에 서심(6a):
피조물과 교회 공동체를 구속하심
(3) 일곱 눈(일곱 영) 과 일곱 뿔을 가지심(6b):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온 땅에 적용하는 역할을 한다.
(4)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책을 취하심(7절):
책의 인을 떼기 위한 행보 심판과 구속에 대한 주체자가 하나님에서 예수님께로 이동
3) 책의 인을 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
(1) 성도들의 기도(8절):
(계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왜 이 문맥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그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 성도들의 기도(6:9-11; 8:3-5).
하나님이 원래 출애굽에 대한 계획을 가지셨다., 아브라함 때부터......,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다. 계획을 실행하시는데 있어서 성도들의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셨기에 우리가 먼저, 빨리 가서 전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더욱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감지하고 더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없이도 이루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2) 새 노래로 찬양(9-10절):
(계 5:9-10)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구속에 대한 찬양(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그리고 땅에서 왕노릇하게 하심)
모세의 노래/어린 양의 노래와 비교(15:2-4; 14:3)
(3) 어린양께 올리는 예배의 찬양(11-14절):
(계 5:11-14)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ㄱ)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강조
(ㄴ) 13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동시에 찬양이 드려지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성취로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정리
4-5장은 하늘의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매우 집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며 종말적 심판의 현상들의 근원이며 새 창조의 실재가 존재한다. 이 세가지 모두가 미래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다. 그런데 이미 그 완성품이 하늘에 존재한다. 누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시므로서 승리를 쟁취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신유다의 사자 때문에 가능하다.
4장과 5장의 관계
|
4장 |
5장 | ||
주제 |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
예수님은 구속주이시다 | ||
등장 인물 |
보좌위에 앉으신이 성령; 이십 사 장로 네 생물 |
보좌 위에 앉으신 이 어린양 예수; 성령 힘 있는 천사 네 생물 이십 사 장로 천사들 | ||
이슈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질 것이다 |
누가 책의 인을 뗄 것인가? | ||
찬양의 대상 |
하나님 |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 ||
찬양의 내용 |
창조와 섭리 |
죽음을 통한 구속(5:9-10) | ||
네 생물 |
영광과 존귀와 감사 |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 |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심 | |
이십 사 장로 |
영광과 존귀와 능력 |
많은 천사 |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 |
모든 만물 |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 | |||
정리 |
창조의 목적은 구속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므로4장은 5장에 대한 배경적 역할을 한다. |
5장: 일곱 심판 시리즈(6-16장)
6장부터 심판의 메시지가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다.(심판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부분의 심판까지)
인 심판의 처음과 마지막
첫 번째 인이 떼어지는 것은 십자가이다.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이다(4:5, 8:5, 11:19, 16:18, 10p의 내용 참고
계시록이 구약의 선지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고: 세 개의 심판 시리즈를 이해하는 원리들(25P)
1) 인, 나팔, 대접 심판 시리즈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
2) 인 나팔 대접으로 갈수록 더욱 심판의 강도가 강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뒤로 갈수록 종말에 더욱 치중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인, 나팔, 대접 심판 시리즈는 첫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 시간적 순서를 내포하지만(일곱 번째가 항상 종말의 시점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시간적 순서로 짜여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각 심판의 경우 처음 네 개는 어느 것이 먼저 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섯 번째 인 심판은 성도의 기도이므로 시간적 순서를 설정하기 어렵다.
(1). 그러므로 각 심판의 내용들을 미래적 사건을 일대일 대응식으로 나열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자의 자세가 아니다.
4) 세개의 심판 시리즈는 구약적 약속의 성취로서의 종말적 심판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은 구속 사건은 종말을 도래케하였으며 종말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동반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5장에서 어린양 예수께서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을 때 언급된 바 있다. 책의 인봉을 뗀다는것은 종말을 의미하며 그 종말은 곧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어린 양 예수께서 책의 인을 떼시는 인 심판 시리즈를 담고 있는 6장은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한 5장의 연속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1) 그리고 나팔이나 대접 심판은 바로 이러한 인 심판의 강조를 위해 두 번 등장하고 있다. 인 뿐만 아니라 나팔이나 대접은 심판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2) 4번의 경우는 심판 시리즈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나 용어들이 출애굽 사건의열 가지 재앙뿐 만이 아니라 요엘서와 같은 구약적 배경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지지를 받는다. 특별히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사건은 요한 계시록에서 심판의 패턴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심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적대적 세력을 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심판은 버리는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버릇을 고치기 위한 심판이다. 훈련을 위한 것이다. 심판의 개념보다 훈련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적대적인 행위에 대한 회개가 아닌 징벌의 심판
(3) 4번과 4-1, 4-2의 원리에 의해서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구체적으로 일어날 미래적 사건을 일일이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고(3-1 참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종말적 심판에 대한 구약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게 될 때 그것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강대국의 지배.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구약 선지자들의 역할처럼 계시록을 해석한다. 끊임없이 구약과 대화하며 계시록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환경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드리워진 일종의 현실이므로 그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어떤 형태로든지 주어질 심판의 양상을 마칠 일대일의 대응식으로 요한 계시록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나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주어진 원리를 가지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우주와 인간에게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필요하다.
1. 구조분석:
A) 1:9-3:22 |
일곱 교회들을 향한 일곱 메시지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와 교회들에대한 최초의 환상 |
B) 4:1-5:14 |
세개의 일곱 시리즈와 두개의 삽입들로 이어지는 하늘에 대한 최초의 환상 |
C) 6:1-8:1; 8:3-5 |
일곱 인들, 숫자 배열: 4 + 1 + (1 + 삽입) + 1 |
D) 8:2; 8:6-11:19 |
일곱나팔들, 숫자 배열: 4 + 1 + (1 + 삽입) + 1 |
E) 12:1-14:20; 15:2-4 |
악과의 충돌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 |
F) 15:1; 15:5-16:21 |
일곱 대접들, 숫자 배열 (4 + 3) (삽입없음) |
1) 위의 구조에서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규칙성을 가지고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규칙성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디자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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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심판 시리즈 |
나팔 심판 시리즈 |
대접 심판 시리즈 |
1 |
내생물중 하나 흰말 |
피섞인 우박이 땅에 떨어짐 |
대접을 땅에 쏟음 |
2 |
둘째 생물 붉은 말 |
불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지워 짐 |
대접을 바다에 쏟음 |
3 |
셋째 생물 검은 말 |
큰 별이 강과 물 샘에 떨어짐 |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음 |
4 |
넷째 생물 청황색 말 |
해, 달, 별 각각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어두워 짐 |
대접을 해에 쏟음 |
5 |
순교자들의 기도 |
황충이 무저갱에서 나옴 |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음 |
6 |
천체의 변화 |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풀려나 전쟁을 일으킴 |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음: 용과 두 짐승의 멸망 |
|
삽입 |
삽입 |
없음 |
7 |
하늘에서의 침묵: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 |
하늘에서의 찬양: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됨 |
대접을 공기에 쏟음: 바벨론의 멸망 |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 |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 |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큰 지진, 큰 우박 |
2) 먼저 각 심판 시리즈의 처음 네 개는 하나의 공통된 단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네 개의 심판의 내용은 모두 자연계에 대한 것들이다. 자연계에 대한 심판으로서 '넷'이라는 숫자가 동원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곧 '넷'이라는 숫자는 우주적 성격을 가지므로 자연계에 대한 심판의 우주적 성격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인 심판은 처음 네 개에서 네 생물과 네 마리의 말이 동원되고 그리고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의 경우에는 땅, 바다, 강/물 그리고 하늘과 같은 자연계의 네 방면이 동원된다.
이것은 심판이 우주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 심판의 다섯 번째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간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이 기간동안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계속되어 리마인드되고 있다.
3) 그리고 인과 나팔의 경우에서 나머지 세 개의 부분은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접의 경우에 나머지세 개는 공통적으로 사탄의 진용에 대한 심판에 집중된다: 짐승의 보좌, 용/두짐승 그리고 공중. 이것은 대접 심판의 다섯 번째부터일곱 번째는 종말적 성격을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4) 인과 나팔의 경우에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 삽입이 들어가 있으며 대접 심판의 경우에는 이러한 삽입이 없다.
처음과 끝은 재림까지의 사이이다.
인 심판(4+1+1+1): 처음 4개는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주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따로 다로 논다. 그런데 여섯 번 째와 일곱 번 째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 중요한 연결점을 가진다. 곧 교회론이다.
나팔 심판(4+1+1+1): 이것도 인 심판처럼 처음 4개는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주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따로 다로 논다. 여기서도 앞의 인 심판처럼 여섯 번 째와 일곱 번 째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 중요한 연결점을 가진다.
대접 심판(4+3): 그러나 대접 심판은 4+3이다. 그런데 이 대접 심판이 주어지기 전 12-14장에서 (11장은 나팔심판을 마무리하는 장이다) 원래 대접 심판의 6-7번째 들어갈 자리인데 이것을 앞으로 빼고 뒤에 삽입하지 않고 곧 바로 17-22장까지 직접 넘어가게 된다. 결론으로 의도적으로 끌고가는......,
그렇지 않고는 12-14장의 내용 연결과 해석이 어려워진다. 이 부분도 역시 교회론이다.
17:1-20:15절은 의도적 결론의 첫 번째 부분으로 여기서 반복이 된다.
2. 일곱 심판 시리즈에서의 출애굽 모티브
나팔 심판 시리즈 |
애굽의 재앙들 |
대접 심판 시리즈 | |
첫번째(8:6-7) 우박, 불, 피 |
일곱번째: 출 9:13-25 |
일곱번째(16:17-21) 뇌성, 우박 | |
두번째(8:8-9) 바다가 피로 변함 |
첫번째: 출 7:14-25 |
두번째(16:3) 바다가 피로 변함 | |
세번째(8:10-11) 쓴 물 |
첫번째: 출 7:14-25 |
세번째(16:4-7) 물의 근원이 피가 됨 | |
네번째(8:12) 어둠 |
아홉번째: 출 10:21-23 |
다섯번째(16:10-11) 어두움 | |
다섯번째(9:1-11) |
황충 |
여덟번째: 출 10:12-20 |
|
어두움 |
아홉번째: 출 10:22-23 | ||
|
여섯번째: 출 9:8-12 |
첫번째(16:2) 독한 헌데 | |
|
두번째: 출 8:2-6 |
여섯번째(16:12-16) 개구리들 |
이것은 출애굽의 심판의 의미가 계시록에서 심판의 의미로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도표에서 우리는 나팔 심판 시리즈와 대접 심판 시리즈에서 재앙의 종류들은 출애굽할 때 애굽에게 내려졌던 재앙들을 중심으로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요한은 구약 출애굽기의 자료들을 사용하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사탄의 존재를 바로/애굽과 병행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병행을 통해 요한은 출애굽기에서의 사건들을 근거로 교회와 사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출애굽의 열가지 재앙의 원리를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신학적 원리에 적용시키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애굽과 바로를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3. 일곱 심판 시리즈의 요약과 비교
|
인 심판 시리즈 |
나팔 심판 시리즈 |
대접 심판 시리즈 |
첫 번 째 |
(네 생물중 하나가 '오라'라고 말함) 흰말을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이기려고 함(6:1-2)(슥 1:8f) |
피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과 수목의 삼분의 일과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림(8:7) |
(대접을 땅에 쏟음)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16:2) |
두번 째 |
(둘째 생물이 '오라' 라고 말함) 붉은 다른 말이 나와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서로 죽이게 큰 칼을 받음(6:3-4) |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워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짐(8:8-9) |
(대접을 바다에 쏟음)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16:3) |
세번째 |
(셋째 생물이 '오라' 라고 말함) 그 손에 저울을 가진 검은 말이 나옴: 음성이 말하기를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6:5-6) |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져 물들의 삼분의 일이 쓰게 되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됨(8:10-11) |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음) 강과 물의 근원이 피가 됨(16:4) |
물을 차지한 천사의 응답: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16:5-6) | |||
네번째 |
(넷째 생물이 '오라'라고 말함) 청황색 말: 그 탄자의 이름이 사망 음부가 그 뒤를 따름 땅 사분의 일에 대한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임 (6:7-8) |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8:12) |
(대접을 해에 쏟음)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짐(16:8) |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8:13) |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함(16:9) | ||
다섯번째 |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 있음 그들의 신원을 위한 탄식: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사 14:12; 눅 10:18)가 무저갱의 열쇠로 무저갱을 여니 무저갱에서 황충이 나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를 가지고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을 해하도록 함 그들을 죽이지 않고 다섯달 동안 전갈이 쏘는 것 같이 괴롭게만 하게 하는데 사람들이 괴로워서 죽기를 구해도 죽지 못함(9:1-11) |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음) 그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6:10) |
첫째 화가 지나가고 두개의 화가 이를 것(9:12) |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함(16:11) | ||
여섯번째 |
큰 지진이 나고 해가 총담같이 검어 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가가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것 처럼 땅에 떨어질 것이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게 될 것이다(6:12-17) |
유브라데 강에서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을 받는데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다. 말들과 그 탄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와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함(9:13-19) |
(대접을 강 유브라데에 쏟음)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을 예비: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데 저희들은 귀신의 영이요 천하 임금들을 모아서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준비(16:12-14) |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5-17) |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함 (9:20-21) |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6:15)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 |
삽입 |
7:1-19 땅에 있는 144,000과 하늘에 있는 셀수 없는 무리 |
10:1-11:13 작은 책과 두증인 |
없음 |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1:13) | |||
둘째 화가 지나가고 셋째 화가 속히 이를 것이라(11:14) | |||
일곱번째 |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8:1-4)
|
하늘에 큰 음성: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이십사 장로: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11:15-18) |
(대접을 공기에 쏟음)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이루었도다(Ge,gonen)' 하심(16:17)(참조 21:6)
'큰 성 바벨론이 세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로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6:19) |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8:5) |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11:19) |
이때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일어남: 이 같은 큰 지진이 이 세상에 없었다�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내리매� (16:18-21) |
1) 인 심판 시리즈(6:1-8:5; 7장은 삽입 부분)
(1) 첫 번째 인을 떼시는 것은 5장에서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으로 소개된 것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인을 떼시는 것의 출발은 곧 그리스도의 초림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책은 이미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종말이 도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점에서 책은 일곱 번째에서 완전하게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외에 일곱 인을 차례로 떼어 가는 과정에서 종말적 심판의 생생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2) 인 심판 시리즈의 첫 네 개에서 등장하는 네 마리의 말들은(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 슥 1:8과 6장에서 심판의 전령 역할을 하는 네 마리의 말들을(홍마[x2], 자마, 백마) 약간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인 심판 시리즈에서는 스가랴의 네 마리의 말들 중 홍마가 두 번 겹치는 것을 피하여 홍마 하나를 검은 말로 변경한다.
(3) 인 심판의 처음 네 개는 전쟁과 기근이 심판의 중요한 주제로 사용된다.
(4) 다섯 번째에서 순교자들의 기도가 소개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유보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종말적 심판으로서 이 기도의 응답이 주어진다(18:20).
이 기도의 소개는 곧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이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추진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일곱 번째 심판과의 비교).
교회 공동체의 마크는 순교적이어야 한다. 환경적으로 황제 숭배를 대항하는 정신으로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기도는 당시 성도들의 일상적인 기도이다.
이 기도는 18:20절부터 시작한다(계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5) 여섯 번째는 천체의 변화를 심판의 현상으로 소개한다.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내용으로서 천체의 변화에 대한 묘사는 임의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 29:6, 겔 32:7, 단 8:10 그리고 사 34:4 등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묘사들을 사용한다.
투모로우라는 영화를 보라. 우주의 재난, 재앙(지구온난화로 인한 빙하와......,
인간복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과 상업주의가 결탁하여 올 수 있는 문제 등
터미네이터도 인간이 만든 Computer Chip이 나중에는 인간을 죽이는.....,
이러한 구약의 사용은(처음 네개의 심판을 비롯하여) 여기에서 소개되는 심판이 요한 계시록의 저자가 구약에서 제시된 심판의 성취로서 주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6) 여섯 번째 심판의 반응으로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들이 하나님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땅'은 '하늘'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요한 계시록에서 사탄에게 속한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땅에 사는 자'는 11:10, 13:8과 17:8에서 반대로 '하늘에 거하는 자'는 12:11-12과 13:6).
그러므로 여기에서 괴로워 하는 자는 바로 사탄에게 속한 자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의 구별
하늘에 거하는 자와 땅에 사는 자로 표현
심판은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징벌하시는 것임을 기억하라.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하시는 것처럼
(7)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 삽입이 있다.
이 삽입 부분은 여섯 번째 인 심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다:
여호와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6:15-17). 7:1-8과 7:9-17은 각각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곧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에서 보호함을 받는 다는 것을 말한다.
(8) 일곱 번째에서 인 심판이 '하늘이 반시 동안 고요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자 하시는 의지의 표현이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것'은 천사가 기도의 중보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를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는 유대적 사상의 반영일 뿐이다(다섯 번째 심판과의 관련성).
반시는 아침에 향을 피우는 시간이 반시라고 한다.
천사가 마치 성도들의 기도를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놓는 모습으로 잘못 이해하면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놓는다는 것이 기도의 중보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성도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표현일 뿐이다.
보좌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로 보아야 하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9) 일곱 번째가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뇌성 음성 그리고 번개와 지진'을 통해 알 수 있다.
(계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2) 나팔 심판 시리즈(8:2, 8:6-11:19; 10:1-11:13은 삽입 부분)
나팔, 인, 대접 들은 일반적으로도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1) 나팔 심판 시리즈의 처음 네 개에서 그 심판의 영역은 땅, 바다, 강/물/샘 그리고 하늘(해/달/별)이다.
이 처음 네 개에서 '삼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지배적으로 사용된다.
이 숫자는 심판과 회복의 이중적 측면을 내포한다.
이 숫자는 절묘한 숫자이다.
이 부분은 작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크다고 말하기도 그런 크기이다.
이 숫자는 남은 자 개념을 많이 담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회복을 염두해 두고 있다.
처음 나팔 네 개는 피조물에 대한 심판이다. 네 생물도 마찬가지이다.
피조 세계는 사탄에게 일시적으로 지배하도록 허용한 것이지 온전히 맡긴 것이 아니다.
(2) 다섯 번째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20:1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별'과 비교)은 사 14:12(너 아침의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 졌으며… 에녹2서 29:4-5와 아담과 이브12, 15-18에서 이를 '사탄'으로 해석한다)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으며 계시록 본문에서는 타락한 천사로서 사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①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가 무저갱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바로 무저갱의 주인이며 무저갱은 사탄의 거처로서 간주된다.
열시를 가지고 있는 자를 그 집의 주인으로 인식한다. 열쇠를 가지지 않고 들어가는 자를 도적으로 보는 것처럼.
20장에서 무저갱에 갇힌 사탄과 9장의 사탄에 대한 표현이 다르다.
사탄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절대 평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황충'이 나온다. 황충은 메뚜기를 의미하는데 이는 출애굽 사건의 열 가지 재앙 중 여덟번째이다(출 10:15). 그리고 요엘서에서는 이 심판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으로서 바벨론 군대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욜 1:4, 2:25; 나훔 3:15, 17). 계시록 문맥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로서 사탄적 도구에 사용된다.
② 심판의 수단의 사탄이며 그 대상은 바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이다.
사탄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착취하며 괴롭히는 속성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심판의 대상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사탄에 속한 자(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고 짐승의 인을 맞은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의 구별
이런 표시가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의 상징이다.
세대주의의 특징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 공동체는 임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경향 등
③ 심판의 기간을 다섯 달 동안 정한 것은 메뚜기의 생존 기간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일정한 기간 동안 주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심판의 극렬함이 '사람들이 괴로워서 죽기를 구해도 죽지 못함'을 통해 표현된다.
괴로워도 죽지 못하는 고통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단에게 속한 자를 사탄이 와서 심판하는
(3) 여섯 번째에서 유프라데 강은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이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곳이다.
실제로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를 침공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심판의 양상은 다시 살아난 네로와 함께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를 침공하는 모습으로 주어진다. 특별히 9:16-17은 파르티아 군대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인터넷에서 Parthia라고 치면 파르티아제국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로마제국 파르키아 제국
이런 당시 상황을 사용하여 말씀하고 있다.
① 9:17a의 '화홍색, 청색, 유황색 가슴막이'는 9:9의 '가슴 막이'와 병행되며 이러한 색깔은 또한9:17b에서 심판을 나타내는 '불', '연기' 그리고 '유황'과 관련된다. 이 군대는 심판의 전령들이다.
② 이 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회개치 아니하였다(9:20-21)
③ 10:1-11:12은 삽입 부분으로서 요한의 부르심과 두 증인 이야기를 통해 회개치 않던 자들이 회개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11:1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계 14:7; 눅 1:46; 롬 15:6, 9; 벧전 2:12).
(4) 일곱 번째 나팔 심판은 두 가지로 나누어 소개된다.
이것은 마지막 때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땅을 더럽힌 자들에 대한 심판.
① 첫 번째가 찬양의 내용이다(15-18절):
이 찬양의 주제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 통치가 영원히 드러나게 되었다'(15, 17절)라는 것과 '최후의 심판의 때가 왔다'(18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서 '죽은 자'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제시된다. 전자는 믿지 않고 죽은 자를 가리키고 후자는 믿지 않고 살아 있어 종말을 맞이 하게 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spoil) 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이들로 인하여 땅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내용 사이에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신다'는 문구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에 상응하는 구원으로서의 상의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상은 심판의 상대 개념으로 구원을 말한다. 상은 기본이고 +a가 있어야 할 것을 생각들 하는데 이 구원은 +a가 필요없는 대단한 것이다.
② 두 번째는 종말적 현상으로서 번개, 음성, 뇌성, 지진 그리고 큰 우박의 발생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곱 번째 인보다 더 강화된 표현으로서 종말적 현상의 강조로 보여진다.
일곱 번째 나팔 심판에서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이는 것은(11:19) 이 심판이 하늘에서 결정되어 시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결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말적 현상으로서 '번개, 음성, 뇌성, 지진 그리고 큰 우박'이 발생한다.
3) 대접 심판 시리즈(15:1-16:21)
(1) 대접 심판은 15:2-4에 의해 동기화(動機化) 된다.
① 15:2-4은 일곱 대접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15:1과 15:5 사이에 삽입되어 있어 일곱 대접 심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해 주는 역할을 한다.
② 2절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는 문구에 의해 13장을 배경으로 한다.
③ 이들은 현재 하늘에 존재하는 구속 받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교회 공동체는 심판의 대상이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④ 이들의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의롭고 진리라는 것과(3절)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들 곧 심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4절).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의 통치는 그 백성들을 향해서는 구속으로 나타나고 대적하는 세력들을 향해서는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다시 16장에서 주어지는 이방 세력을 향한 대접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성립시켜 주고 있다.
(2) 대접 심판은 다른 두개에 비하여 훨씬 종말적 성격을 가진다:
①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인 심판(6:9-11)에서의 순교자들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심판이 주어짐을 시사하고 있다.
② 마지막 세 개의 대접 심판이 공통적으로 사탄과 짐승을 대상으로 주어진다.
③ 가장 강도 높은 종말적 현상의표현이 주어진다(번개,음성. 뇌성, 큰 지진, 큰 우박).
④ 대접 심판이 소개되기 전에 15:1, 5-8에서 이것이 종말적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1절에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8절은 또한 일곱 대접 심판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2) 대접 심판의 처음 네 개는 나팔 심판의 경우 처럼 '땅, 바다, 강/물샘, 해'에 대접을 쏟아 자연계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진다.
특별히 첫 번째의 경우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명시한다. 이것은 다섯번째 나팔 심판의 경우에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과 동일하게 사탄에게 속한 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3) 그리고 세 번째에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16:5-6; 참조 17:2)라는 것은 바로 다섯 번째 인 심판에서 순교자들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관계는 세 번째에서부터 종말적 시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4) 네 번째의 심판의 반응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는다'(16:9). 그리고 다섯 번째에도 그 반응이 유사하게 주어 진다: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였다(16:11). 이러한 반응은 심판에 대한, 사탄에게 속한 인간의 일반적 반응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사이에 주어진 삽입 부분에서 두 증인의 사역의 결과로서 주어진 인간의 반응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진 것이다.
(5) 다섯 번째에서 짐승의 보좌에 대접을 쏟으므로서 짐승을 향한 심판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태의 심판은 앞에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초로 주어진 이 심판의 형태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를 시초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가 짐승과 사탄을 향한 심판의 형태로 주어진다.
(6) 여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의 경우와 같이 유브라데 강이 사용된다.
나팔 심판의 경우는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가상적 전쟁의 상황을 설정하여 심판의 강도를 강조하는 경우이고 대접 심판의 경우는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가상적 전쟁의 상황에 근거하여 미래적 종말에 나타날 치열한 영적 전쟁의 존재를 예고한다.
이 전쟁에 용과 두 짐승의 개입은 이 전쟁이 영적 전쟁임을 의미한다(12:7-12; 12:17; 19:19-20; 20:7-10).
여섯 번째에는 배후에 사탄과 두 짐승이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음에 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여섯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가상 시나리오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극렬할 것인지를 말하는 중에 재림시 영적 전투의 상황이 더 치열해 질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대비하라는 것이다(벌거벗음으로 인한).
이러한 영적 전투의 결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으나 여기에 사탄과 두 짐승의 철저한 패배가 예상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의 내용으로 주어진 것은 당연하다.
① 이것이 미래적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이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러한 미래적 종말적 사건은 16:15에 의해서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주어진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 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 부끄러움음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6:15).
② 세 영은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은다(16:16):
아마겟돈은 히브리어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문자적으로 므깃도를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구약에서 므깃도와 관련된 전쟁의 사건들을 떠 올리므로서 독자들에게 이 전쟁의 양상에 대한 생동감 있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므깃도 전쟁과 관련된 구절은 삿 5:19-21; 왕상 18:40; 슥 12:9-14 등이다.
G. K. Beale의 아마겟돈에 관한 주석 책을 참고하라. 이 사람은 하르+므깃도(+ㄴ) 삿5:19-21, 왕상18:24 등에서 보는 것처럼 하르= 산, 므깃도= 전쟁과 관련한 평지이다. 이런 면에서 이렇게 보는 것에 이해는 잘 안되지만 므깃도에서 전쟁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단어조합을 통해 전쟁이 처참할 것을 픙성히 상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수신자들이 므깃도를 들으면 전쟁에 대한 상상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창표 교수의 요한 계시록 해설이라는 책(3권)을 참고하라.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을 리서치해서 참고할 만 하다.
여기에 삽입부분이 없는 것은 12-14장으로 뺏을 것으로 본다.
(7) 일곱 번째에서 대접을 공기에 쏟는다.
이 공기는 '공중'이라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다.
공중은 사탄이 통치의 영역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곱 번째도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와 마찬 가지로 사탄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심판의 반응으로서 '다 이루었도다'(16:17)라고 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 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언급이 주어진다.
① 바벨론의 멸망은 곧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큰 지진과 큰 우박'의 종말적 현상을 수반한다.
당시 가시적 적대적 표현의 가장 적합한 것은 로마 였고 로마로 대비되는 대적하는 세력은 사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적용할 때 나에게 바벨론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말씀한다.
(8)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의 심판의 내용으로서 용, 두 짐승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이 주어진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 동시적으로 일어날 종말적 사건이다. 그리고 17-20장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순서를 바꾸어 반복 설명한다. 그러므로 16:12-21은 17-20장의 해석학적 기초이다.
세 개의 심판 시리즈를 이해하는 원리들
1) 인, 나팔, 대접 심판 시리즈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한다
2) 인 나팔 대접으로 갈수록 더욱 심판의 강도가 강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뒤로 갈수록 종말에 더욱 치중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인, 나팔, 대접 심판 시리즈는 첫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 시간적 순서를 내포하지만(일곱 번째가 항상 종말의 시점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시간적 순서로 짜여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각 심판의 경우 처음 네 개는 어느 것이 먼저 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다섯 번째 인 심판은 성도의 기도이므로 시간적 순서를 설정하기 어렵다.
(1) 그러므로 각 심판의 내용들을 미래적 사건을 일대일 대응식으로 나열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자의 자세가 아니다.
4) 세개의 심판 시리즈는 구약적 약속의 성취로서의 종말적 심판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은 구속 사건은 종말을 도래케하였으며 종말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동반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5장에서 어린양 예수께서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을 때 언급된 바 있다. 책의 인봉을 뗀다는것은 종말을 의미하며 그 종말은 곧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어린 양 예수께서 책의 인을 떼시는 인 심판 시리즈를 담고 있는 6장은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는 분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한 5장의 연속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1) 그리고 나팔이나 대접 심판은 바로 이러한 인 심판의 강조를 위해 두 번 등장하고 있다.
인 뿐만 아니라 나팔이나 대접은 심판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2) 4번의 경우는 심판 시리즈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나 용어들이 출애굽 사건의열 가지 재앙뿐 만이 아니라 요엘서와 같은 구약적 배경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지지를 받는다.
특별히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사건은 요한 계시록에서 심판의 패턴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심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적대적 세력을 향한 것이라는 것이다.
(3) 4번과 4-1, 4-2의 원리에 의해서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구체적으로 일어날 미래적 사건을 일일이 예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고(3-1 참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종말적 심판에 대한 구약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의 환경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드리워진 일종의 현실이므로 그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어떤 형태로든지 주어질 심판의 양상을 마칠 일대일의 대응식으로 요한 계시록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나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주어진 원리를 가지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우주와 인간에게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은 필요하다.
심판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교회를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20040817 화 오후 강의시작
심판은 종말적 현상인데 이것을 현상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나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인 나팔 대접
종말 인 나팔 대접 종말
전체 도표(요한 계시록 요약 정리(구조분석) (별지 참조)
교회들을 향한 환상(메시지들)
책을 통해 인을 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심
삽입(7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건재할 것이다.
삽입(10:1-11:14)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말한다. 12-14장, 21-22장 등도
이렇게 볼 때 계시록의 중심주제는 교회이다.
이단은 매뉴얼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집중 공격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문맥을 모른다.
우리는 문맥을 가지고 있다. 문맥을 잘 알아야 한다.
서두: 1:1-8절
서론: 1:9-3:21
1:9-21: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2-3장: 일곱교회를 통한 선지적 메시지
일곱 교회가 갖ㄴ 배경적 설명을 2-3장이 말해 주고 있다.
본론: 4-16장
4-5장: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예수님 소개
6-16장: 4-5장을 배경으로 인, 나팔, 대접 심판 소개
5장에서 6장으로 넘어가면서 누가 책을 인봉을 떼실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6장부터 인, 나팔, 대접 심판 소개하면서 중간에 삽입 부분을 통해 말한다.
결론: 17-22장
17:1-19:10: 바벨론의 멸망(심판)- 하나님의 교회 대적, 핍박함에 대한 교회는 영광
19:11- 위를 지원
21:1-8는 아래를 지원
21:9-22:
6-7번째 대접 심판
사탄, 두 짐승이 대상이 됐다.
바벨론의 심판(멸망) (계16:12-16)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 전쟁은 물리적인 전쟁은 아니다. 곧 지난해의 이라크 전쟁은 두 짐승의 개입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두 짐승이 있다(계 16: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러므로 전쟁은 영적인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탄이 패배할 확률은 100%이다.
16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전쟁, 19:16이후, 20:의 전쟁은 한결같이 영적인 전쟁이고 이런 영적인 전쟁에서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것은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심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벨론 사탄
첫째짐승 둘째짐승
사탄(A)
두짐승(B)
바벨론(C)
이것은 17-20장까지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서 알 수 있다.
17-19:10 바벨론의 심판(C1)
19:11-21장: 두 짐승의 심판(B1) -재림
20:1-10(7-10): 용(사탄)의 심판(A1)
1-3: 천년기간
7-10 천년이 지난 후 배도의 역사
20:11-15: 사탄에 속한 자들의 최후의 심판
이것들은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적같이 오실 때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말해 이럴게 재림과 심판에 대한 사건을 반복하여 말한다.
이 일이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백마타고 오심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천년동안 사탄이 옥에 갇힐 것이라는 것, 천년이 찬 후에 등은 시간적인 순서로 보
이 때 19:11절의 재림과 20:1-3절의 천년 7-10절의 시간은 천년이라는 기간이 있다.
16:15절을 볼 때 사탄의 멸망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숲을 보았으니 나무들을 보는 내용들을 보자.
6장: 삽입들(7장/10-11장/12-14장)
삽입들은 여섯 번째 인 심판과 일곱 번째 심판 사이와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사이에 위치해 있어 주로 교회론적 접근을 상징적 표현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접과 일곱 번째 대접 사이에는 삽입이 주어지지 않으며 곧 바로 종말적 현상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자들 간에는 삽입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고 12-14장의 내용을 대체하고 있다는 이론을 개진한다.
이러한 입장은 12-14장에서 논의되는 것들이 주로 교회론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득력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12-14장에 나타난 내용들을 함께 삽입부분으로 이해하여 나누도록 한다.
1. 144,000(7:1-8)과 셀 수 없는 무리(17:9-17)
7장은 교회에 대한 두개의 관점을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삽입으로서 7장은 여섯 번째 인 심판과 일곱 번째 인 심판 사이에 위치해 있다.
위 본문은 6:17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다. 곧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는 아무리 극렬한 심판에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7장은 교회 공동체의 현재적 위치를 지상에 있는 교회와 하늘에 있는 교회로 이중적 관점에서 바라 보고 있다. 아래 도표는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7:15-17 |
21-22장 |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15a) |
�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22:3)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겔 37:27; 레 26:9-11)(15b) |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21:3) |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다시)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사 49:10)(16절) |
� 다시 사망이 없고 (다시)애통하는 것이나 (다시)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21:4) |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사 49:10)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사 25:8)(17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21:4a)
�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21:6) |
7:15-17은 '셀 수 없는 무리'가 하늘에서 누리는 축복의 목록인데 이를 21-22장과 비교하는 것을 매우 흥미롭다.
위에서 7:15-17과 21-22장에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가 누리는 축복이 병행을 이룬다. 이러한 병행적 관계는 교회 공동체가 현재 하늘에서 미래적 축복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 공동체의 현재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2. 14:1-5 의 144,000
7:1-8의 144,000이 14:1-5에서 144,000로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서 144,000은 7:1-8과 관계에서 살펴 본다. 그리고 13장과의 문맥에서는 다음에 살펴 보기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는 144,000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반면 후자는 144,000이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4:1-5의 144,000을 7:1-8이 144,000과 7:9-17의 '셀 수 없는 무리'를 병합해 놓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발생했는가?
이러한 변화를 시간적 순서로 보기 보다는 문학 구조상의 논리적 순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14장을 12-13장의 연속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교회와 사탄과의 치열한 전투를 묘사하는 12장과 사탄의 두 짐승을 묘사 하고 있는 13장 직후에 14장에서는 그러한 전투의 현장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의도에서 7장에서 전투하는 교회를 이미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14장에서 144,000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다(1a):
이는 144,000이 하늘에 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계 5:6에 의하면 어린양은 하늘에 존재한다. 이는 또한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과 짐승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2)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1b):
이는 7:3에서 144,000이 그 이마에 인 맞은 모습과 동일하다. 이는 13:16에서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대조를 이룬다.
3) 하늘에 나는 소리가 물소리와 큰 뇌성과 같고 또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소리(2절):
전자는 4:5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 그리고 후자는 5:8에서 거문고 소리를 연상케 한다.
4) 이들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다'(3a):
이러한 모습은 144,000이 하늘에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며 '새 노래'는 5:9에서 24장로들이 불렀던 '새 노래'와 동일하다. 이 '새 노래'는 곧 구속을 주제로 하는 노래이다.
5) 144,000은 더럽힘을 받지 않은 정결한 자들이며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란 13장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들은 짐승에게 절하거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임을 의미한다(4-5절).
이는 그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진 것과 관련된다.
6) 5절에서도 '그 입에거짓말이 없는 자들'이란 짐승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은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3. 10장의 작은 책
1) 5:2의 책(비블리온)과 10장(비블라리디온)의 작은 책은 동일한 책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데리온과 데르 아르니온과 아렌 '목자'에서 비블리온과 비블라리디온의 혼용
(2) 힘센 천사의 등장(5:2, 힘있는 천사 10:1, 다른 힘센 천사)
(3) 구약의 사용의 연속성: 겔 2:9-10계 5:1
겔 3:1-3 계 10:9-11
2) 5:2의 책과 10장의 작은 책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10장의 해석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1) 먼저 5장과 10장의 문학적 연결 고리를 형성하여 10-11장의 의미를 5장의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2) 계시록 5:1과 10:9-11의 말씀의 배경으로서 에스겔 2:9-3:3과 관련해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하신 것처럼 요한은 종말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을 선포할 것을 위탁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 10:8-11).
(3) 다니엘 8:17, 26 그리고 12:4, 9와 관련해서 다니엘 선지자는 '종말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그러나 종말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 책의 봉함이 열리게 되었으며(계 5장) 따라서 다니엘에게는 닫혀 있던(마지막 때까지 봉함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신적인 목적이 요한에게 계시되었으며(참조 계 10:7) 바로 그것이 요한에게 예언의 내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적 목적은 초림으로 계시되었지만 재림으로 완전하게 알려 질 것이다(계 10:6-7).
3) 펴 놓인 책의 의미(5-7절):
(1) 저자는 본래 '인 심판 시리즈'와 관련이 있는 '열린 책' 사건을 여섯 번째 나팔 심판과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사이에 위치시키므로서 '책'을 '나팔 심판 시리즈'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러한 위치 설정은 11장의 두 증인 사건과의 관련성 때문이다. 두 증인 이야기는 여섯 번째 나팔 심판과 일곱 번째 나팔 심판 사이에 놓인 삽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 책이 열려 있다는 것은 미래적 종말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첫 번째 인을 뗄때에 이미 책은 열려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왜냐하면 책의 인을 떼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초림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이며 일곱 째 인이 떼어지는 순간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곱 인을 모두 떼므로서 책이 열려 있다는 것은 이제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비밀이 이루어지고 알려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7절).
4) 예언의 사역의 위탁(8-11절):
하나님은 요한에게 이 비밀의 말씀을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할 것을 위탁한다. 이 예언의 사역은 곧 11:3-13에서 두증인에 의해 상징되는 교회에게 전이된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주어진 예언의 사역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대표해서 주어진 것이다. 11장은 바로 10장의 말씀의 연속이다.
4. 성전의 척량(11:1-2)과 두 증인 이야기(11:3-13)
1) 성전 척량(11:1-2):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의 부르심과 그 선지적 메시지를 구현하는 상징적 행위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11:1-2에서 요한은 단 8:11-14, 12:7과 슥 12:3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다.
단 8:11-14; |
단 12:7 |
슥 12:3 |
계11:2 |
비고 |
성소를 헐었으며 성소와 백성이 짓밟힐 일 |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짐 |
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리라 |
성전 밖의 마당을 밖으로 던져 버리고(개역 성경은 '그냥 두라'로 번역) |
요한은 단 8:11-14와 슥 12:3의 내용이 단 12:7의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곧 성전과 성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성소 |
성도 |
예루살렘 |
성전 밖 마당 |
요한계시록에서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킨다. |
헐었으며 짓밟힘 |
깨어짐 |
치려고 |
'밖으로 던져 버리고' |
계 11:2은 슥 12:3과 연결하여 단 8:11-14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
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 계 11:2에서 성전/도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2) 척량되는 부분은 이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이방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곳이다.
(3) 요한은 다니엘서와 스가랴서의 내용을 창조적으로 변형하여 다니엘서와 스가랴서에서는 짓밟히게 될 성전 혹은 성소를 짓밟힐 수 없는 곳으로 보고 대신에 그 짓밟히게 될 부분을 성전 밖 마당 혹은 예루살렘 도시 전체로 본다.
(4) 이것은 교회의 이중적 측면을 나타내 준다.
2) 두 증인 이야기(11:3-13)
교회가 외적으로 받는 고난과 핍박은 결국 교회의 복음 증거와 그 복음 증거를 통한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두 증인이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두 증인을 주님 앞에 서 있는두개의 촛대와 동일시(11:4): 일곱 교회를 나타내는 일곱 등대(=촛대)를 연상케 함(1:12, 20; 2:1; 두개의 촛대와 일곱 등대를 비교).
(2) 두 증인은 구약의 대표적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의 모델을 사용한다.
① 엘리야(5-6a): 불을 하늘로부터 내리는 사역(왕하1:10-14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사역(왕상 17:1-7
② 모세(6b): 애굽에 내려진 재앙(출 7:14-24
(3) 왜 요한은 이 두 모델을 사용하고 있는가?
첫째로, 모세와 엘리야의 모델은 교회가 감당해야할 증거의 사역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방 통치자와 종교와의 적대적 관계(11:7-9을 보라).
두 번째로 구약의 대표적 선지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에 병행적 관계를 형성한다.
(4) 두 증인의 증거사역의 기간:
1260일(11:3; 12:6)(=42개월[11:1-2; 13:5]= 한 때 두 때 반 때[12:14])
두 증인이 교회를 상징한다면 이 기간은 교회의 존재 기간인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기간이 다 지나고 난 후에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을 죽임
천년 동안 결박 당했던 용이 천년 후에 잠시 놓여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고 종말적 전쟁을 준비하는 것과 병행된다(20:3, 7-8).
(5) 왜 1260일인가?
요한은 여기에서 단 12:7의 '한 때 두 때 반 때'를 사용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문맥에서 이 기간은 종말로 치닫는 종말적 기운으로 충만한 특정한 기간이다. 요한은 이 때를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적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초림은 종말의 시작이요 재림은 종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6) 두 증인은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나 삼일 반만에 다시 살아남:
삼일 반이라는 숫자는 삼년 반이라는 증거의 기간의 축소판이다. 삼년 반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왕권의 행사의 기간이요 삼일 반은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짧은 기간이다.
(7)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은 그들의 증거가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한다(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같이)
사람들이 보고 놀랐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입증된 두 증인의 증거의 신실한 신적 권위를 나타내 준다.
(8) 이 결과로 남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11:13; 참조 14:7; 15:4; 16:9):
9:20의 말씀과 대조된다.
(9) 11:3-13의 말씀은 두 증인이 교회 공동체를 나타내 준다고 할 때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게 될 모습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할 수 없지만, 철저하게 시간적 순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시간적 순서를 살리면서 각 시대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양태를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10)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과 20장에서 무저갱에 갇힌 용과 비교
|
11장(짐승) |
20장(용) |
기간 |
3년 반(1260일) |
1000년 |
적대 세력 |
짐승 |
용 |
대립이 성격 |
두 증인의 증거의 사역에 대한 도전 |
교회 공동체와의 종말적 전쟁 |
결말 |
짐승이 두 증인을 죽임으로 승리하는 것 처럼 보이나 그 두 증인은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 |
용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진다 |
두 증인에 대한 이해의 정리
(1) 종말이 가까울수록 싸움은 더욱 치열해 진다.
(2)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간다: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기록 위치는 편리상증거의 마지막 시점에 두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죽음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경험한다.
(3) 영광은 길고 수치는 짧다.
(4) 교회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고난과 보호를 동시에 경험한다.
(5) 교회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한은 세상과 적대적이다.
5. 영적 전투의 현장(12장)
1) 주제 파악:
본문은 두개의 주제로 형성되어 있다:
전쟁과 출산
전자는 다니엘 7:7-8, 21서에서 이스라엘과 짐승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후자는 사 7:14; 54:1-3; 66:7-9; 미가 4:9-10, 5:2에서 시온의 출산을 통한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초래한다.
2) 본문 구조와 관찰
A |
1-6절 |
여인, 용 그리고 여인이 나은 아이: 용이 아이를 잡아 먹으려 한다. |
B |
7-12절 |
하늘에서 일어난 일: 용이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남 |
A’ |
13-17절 |
아이를 잡아 먹으려 했던 용이 하늘로부터 쫓겨나 여인을 쫓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인을 보호해주신다. |
A’는 A와 B를 종합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
3) 본문 해석
(1) 1-6절
① 여인은 일차적으로 구약 교회를 상징한다: 열두 별의 면류관 (1-2절); 5절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아이를 낳은 것은 구약 교회로서의 여인의 의미를 강화한다.
② 여인의 모습: 해를 입고, 달을 밟고, 별을 머리에 쓰고 있다 찬란함과 영광스러움
③ 용은 사탄을 의미한다 (3-4절, 참조 9절)
④ 여인이 낳은 철장으로만국을 다스릴 아이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 (5절): 이 예수님의 탄생은 사54:1에서 이스라엘이 낳은 새 이스라엘의 출발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여인은 구약 교회에서 신약 교회로의 의미의 발전을 가져 온다.
⑤ 1260일은 종말로 충만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다 (단 12:7; 계 11:1-2, 3; 12:14; 13:5)
⑥ 여인의 안식처로서 광야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 사건 후에 광야에서 드디어 안전한 장소를 찾은 것과 병행된다 (6, 14절)
(계 12:1-5)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구약)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그리스도)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아이를 낳은 후 여자는 신약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여자가 쓰고 있는 면류관에 열두(구약) 별이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신약 교회의 탄생을 보여 준다.
용: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이것은 아이를 죽이려는 헤롯 대왕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고 말함은 예수님이 부활 후 들리움(승천)의 영광스러움을 말하는 것과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리고 6절의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는 말씀의 광야와 양육은 출애굽 모티브이며, 1260일의 시작은 예수님의 초림이며 마지막은 재림으로 보아야 한다.
신6-7장의 양육을 보여주는 것을 참조하라. 이런 양육이 신약교회를 보호하시고 양육하신다.
(2) 7-12절
①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7절)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련의 구속 사건의 결과로일어난 사건이다.
②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로서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사건(9-10절)
(계 12:9-10)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용의 철저한 패배를 의미한다.
③ 이 사건에 대한 반응: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찬양 그리스도의 탄생과 승천은 곧 성도들의 구속을 완성하는 사건이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죽기까지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승리를 보여준다.
④ 하늘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거하는자들은(12절)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각각 하나님의 백성(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과 사탄에게 속한 자들(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늘에 거하는 자들로 사탄에게 속하는 자들을 땅에 사는 자들로 구분한다 (참조 13:6, 8; 17:8a).
⑤ 용(마귀)이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안 것은 (12b)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욱 강렬하게 활동하며 마지막 발악을 한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불못에 던져질 것을 분명하게 알게 있는 사탄이 땅에 거하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괴롭힘을 보여준다.
오늘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척박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뭔가에 미치게 한다(일, 인터넷, SEX, 마약, 술 중독 등으로).
7-12절은 5절의 하늘로 올려간 이후의 된 일로 사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3) 13-17절
① 13절의 전반부는(용이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는 7-12절을 요약 정리하여 이어가고 후반부는(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6절을 요약 정리하여 이어간다.
(계 12: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용이 아이 대신 여인을 핍박하게 된 것은(13, 15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공격의 대상을 교회 공동체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교회를 보호하신다(14, 16절).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한 때 두 때 반 때는 1260일
②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
출 19:4의 사용 12장에서 출애굽 모티브의 사용은 애굽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③ 용이 공격의 도구로 물을 사용하는 것은 출애굽의 홍해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역 출애굽 모티브: 홍해 사건에서는 물이 애굽 군대를 해하는 도구였지만 여기에서는 물이 교회를 해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 결과에 있어서 전자는 물이 애굽 군대를 수몰시키게 되었지만 후자에서는 물이 교회를 해할 수 없다.
이러한 역 출애굽 모티브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④ 용은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시자 자신의 군대를 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마지막 영적 전투의 치열함이 예상된다(16:14; 19:19-20; 20:7-10)
영적 전투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철저하게 보호를 받는 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탄은 교회를 해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전투의 현장은 반드시 있다. 다만 사탄은 손톱, 발톱 빠진 존재이기 때문에 으르렁거리기는 하지만 교회에 해를 입히지 못한다. 다만 땅에 속한 자들은 무서움을 가질 수 있다.
첫 사랑을 잃어버렸음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성도되자.
6. 두 짐승 이야기(13장)
두 짐승이야기는 12장의 연속이다. 특별히 이러한 관계를 12:17에서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12장은 용에 대해서 소개하고 13장에서는 두 짐승에 대해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1. 첫 번째 짐승(1-10절)
(1) 짐승에 대한 묘사(1-2a):
① 바다에서 나옴 뿔이 열 머리가 일곱 그 뿔에는 열 면류관 거짓된 영광
②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③ 이러한 모습은 단 7:4-7에서 네 왕의 모습을 조합한 모습이다: 사자, 곰, 표범 그리고 철의 이와 열 뿔을가진 짐승 그 짐승들이 바다에서 나옴 그리고 세 번째짐승의 머리가 넷+나머지 세 짐승의 머리=일곱 머리 이러한 조합을 통하여 짐승의 능력을 강조한다.
(2) 이러한 능력은 용으로부터 부여 받았다(2b, 4절): 용과의 밀접한 관계
(3) 짐승의 능력의 또 다른 모습: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았다: 온 땅이 기이히 여겨 그를 따름(3절).
(4) 짐승의 활동(5-7절)
① 큰 말 곧 교만한 말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 하나님을 대적(5-6a절)
② 교회를 대적한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6b-7절) 창세로부터(전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짐승을 경배한다.
③ 마흔 두 달 동안 활동(12:6, 14에 의하면 이 기간은 초림과 재림 사이이다)
④ 짐승이 교회를 대적하는 사역은 단 7장의 문맥에서 네 짐승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모습을 사용한다.
(5) 활동의 결과(10절):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로 잡히기도 할 것이다 성도들에게 인내가 필요하다.
(6) 이 짐승의 모델은 네로 황제이다. 특별히 죽을 뻔 하다 다시 살아난 네로 황제에 대한 전설을 사용한다.
2) 두 번째 짐승(11-18절)
(1) 짐승에 대한 묘사(11절):
① 짐승이 땅에서 올라 오다: 땅은 사탄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② 두 뿔이 있다: 단 8:3에서 '두 뿔 가진수양'과 관련된다. 첫 째 짐승의 열 뿔에 비하여 작은 수로서 종속적 위치를 암시한다 용의 열 뿔(12:3)과 첫 째 짐승의 열 뿔(13:1)과 함께 뿔의 존재는 힘과 능력의 상징이다.
③ 용처럼 말하다: 용과의 밀접한 관계
(2) 짐승의 사역
① 처음 짐승과 동일한 권세를 행하고(11절)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12-15절)
②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한다(16-18절) 이러한 표현은 이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소 아시아에 황제 숭배를 정신적 지주로 간주하거나 이방 신들을 섬기는 경제 시스템을 배경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경제 시스템은 조합 형식(길드)으로 되어 있어 이 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면 경제 행위에 제약을 받았다. 바로 황제 숭배를 거부하거나 이방 신들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추구하고 이방 신전에서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강요하는 이러한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고 가입하더라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자명하였다(2:13, 20).
③ 짐승의 수는 666으로서 이 숫자는 네로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숫자로 환산한 결과이다.
7. 승리한 교회 공동체(144,000)(14:1-5)
14:1-5에서 하늘에 거하는 144,000은 곧 7:1-8에서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 공동체요 11장에서 증거하는 공동체요, 12장에서 용에 의해 쫓겨 다니는 공동체요 13:6에서 짐승의 공격을 받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증은 7장의 144,000과 관련하여 앞에서 논의한 내용을 참조 바람)
8. 최후의 심판과 최후의 구원(14:6-20)
14:6-20은 13장과 14:1-5의 문맥속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연결의 당위성은 바로 심판의 대상으로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는 자"를 말하는 14:9절에 의해서 주어진다. 곧 13장에서는 사탄의 동역자로서 두 짐승을 소개하고 14:1-5에서는 그 짐승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구속 받은 백성들이 하늘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14:6-20은 이 두 개의 대조적 상황을 다소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므로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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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3 |
14:14-20 |
비고 |
첫째 다른 천사 |
땅에 사는 자들(13:8; 17:8과는 구별됨)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을 날다(6-7절) |
구름 위에 앉으신 인자에게 날이 날카로운 낫을 땅에 보내도록 간청하여 인자로 하여금 땅의 곡식을 추수하도록 하다(14-16절) |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사역 |
둘째 다른 천사 |
바벨론의 멸망 선포: 바벨론은 진노의 잔으로 모든 이방 나라들을 취하게 하였다(8절, 참조 17:2, 6) |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성전으로부터 나와 셋째 천사의 간청에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넣다(17, 19-20절) |
종말적 심판의 사역: 바벨론의 멸망은 곧 종말적 사건이다(16:17-21; 17-19:10) |
셋째 다른 천사 |
짐승을 경배하고 그짐승의 표를 받음으로써 영적인 음행을 행한 자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9-13절) |
둘째 다른 천사에게 포도를 수확하여 진노의 포도주 틀에 넣으라고 간청한다(18절) |
불과 유황의 심판은 종말적 심판을 가리킨다(20:10, 15) |
7장: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최후의 심판(19:11-20:15)
바벨론의 멸망은 17:1-18과 18:1-19:10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바벨론에 대한 전체적인 묘사이고 후자는 바벨론의 멸망과 그 멸망에 따른 결과들이다. 이러한 바벨론의 멸망은 19:11-20:15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이 내용은 16:11-21의 여섯번째 대접 심판과 일곱째 대접 심판의 자세한 설명이다.
1. 바벨론의 멸망(17:1-19:10)
1)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로마의 멸망이 17-18장에 장황하게 설명될 정도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로마가 거대한 나라라는 사실 때문인가? 로마라는 나라가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사탄의 도구로서 그당시에는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며따라서 로마의 멸망은 곧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의 궁극적 멸망을 의미한다. 요한이 오늘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다면 바벨론을 어디에 적용시킬 것인가?
2) 바벨론에 대한 묘사
(1)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1절):
참조 17:15
(2) 큰 음녀(1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를 음녀라고 하고 그 행위를 음행이라 한다(예: 고멜).
(3)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함(2절):
이것은 6절에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는 것과 병행된다.
(4) 붉은 짐승을 타다(3절):
바벨론과 짐승(네로)와의 친밀성을 의미한다. 로마와 황제와의 친민성을......,
(5)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4절):
가증스러운 모습 이 화려함은 새 예루살렘의 찬란함과 병행된다.
신부의 단장은 아름답지만 음녀의 단장은 추해 보인다.
(6) 바벨론과 땅의 왕들/짐승(17:2, 18)과 일곱왕(짐승의 일곱 머리)과 열왕들(짐승의 열뿔)(17:7-14):
전자는 포도주에 취한 모습으로후자는 예수님과 교회와의 전쟁의 모습으로 소개된다.
(7) 짐승과 바벨론의 관계
(ㄱ) 17:3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다: 밀접한 관계
(ㄴ) 17:16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다: 대적관계
벌거 벗게 하고 살을 먹고 불로 사름 악의 자기 파멸적 성격 구약의 간음한 여자에 대한 형벌을 바벨론에 적용시킨다. 여기에서 음녀를 망하게 하는 짐승의 모습은 파르티아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나타난 네로 황제를 모델로 묘사되고 있다.
(8) 짐승의 이름(17:8a; 17:8b; 17:11):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계 17: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17:8a)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17:8b)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17:11)
이 짐승의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멸망 당할(들어갈) 자라는 것이다.
(9) 17장에서의 짐승의 이름과 13장의 짐승의 이름(13:3; 13:12; 13:14)의 비교: 네로의 건재함을 로마의 강력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종말론적 적대 세력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목적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13:3)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3:12)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3:14)
짐승의 마지막이 13장은 죽을뻔 하다가 살아남. 17장은 짐승의 결과를 멸망으로 규정한다.
17장에서는 13장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는다.
17-18은 바벨론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를 밝히는 목적에 맞게 네로의 전설을 활용하고 있다. 17:14과 13:7의 대조는 이러한 목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여기서 특정한 인물을 지칭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제를 가지고 계시록을 접근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어떤 성경이든지 문맥을 중시하자. 그리고 문맥을 형성하는 사상적 배경(일차는 구야, 그리고 당시의 상항)을 고려해야 한다.
(10) 짐승의 모습(13장): 교회 공동체를 대적하는
열 뿔과 일곱 머리(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열 뿔은 열왕을 가리키며 일곱머리는 로마의 황제를 가리킨다.
짐승이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열국을 통치하며 파르티아 제국에서 돌아온 네로는 로마의 여덟 번째 황제가 될 것을 말한다.
당시 네로를 짐승으로 본 것은 당시의 상황이 그렇게 받아들이게 했다.
네로가 도망가서 ‘자살을 했다.’ ‘부하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는 말과 그러나 죽을 뻔 하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 등이 나돌면서 그렇게 보게 되었다(계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장은 네로 황제의 강력함(멸망할 뻔 한)을 강조한 장이다.
그러나 17장은 멸망하는(멸망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곱 머리 중에 다섯은 이미 지나가고 여섯 번째가 현재 왕. 일곱 번째는 속히 지나가고 여덟 번째가 있는데 일곱머리(다섯중)에 속한 자로 이것을 네로 황제로 본다. 그것은 몸인데 짐승이다(네로 자체가 짐승이 아닐 짐승을 상징)라는 표현이다.
이 네로가 도망가서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나 다시 들어왔지만 금방 멸망 당할 것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다 안다는 것이다.
(11) 바벨론이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18:1-8)
① 교회를 핍박(18:3a; 17:2, 6, 18:20);
(계 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계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성중에 보임(18:24); 바벨론의 멸망은 순교자들의 신원에 대한 응답이다(18:20)
② 사치하므로 자신을 영화롭게 함(18:7; 18:3b)
(계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③ 하나님께서 그 죄를 기억하셨다(18:5-6)
(계 18:5-6)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12) 바벨론의 멸망과 상고들의 슬픔(18:9-11):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경제 체계의 붕괴
(계 18:9-11)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가상적 이야기로 악의 세력의 멸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 성취를 기대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다. 즉 로마가 기록대로 멸망하지 않았다..
(13) 상고(상인)들이 바벨론과 주고 받았던 물품의 종류(18:12-13):
사치의 극치 이 상고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장사하던 자들임을 알 수 있다(13:16-17)
(14) 바벨론의 멸망의 과정:
과정이 생략되고 일시간에 일어났다(18:10; 19)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심판은 가차 없이 일어난다.
(15) 바벨론의 멸망의 반응으로 주어진 찬양(19:1-10):
(계 19:1-10)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ㄱ) 하나님의 진실성과 정당성(19:2)
(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ㄴ) 하나님의 통치(19:6):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사탄의 통치 수단으로서의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을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ㄷ)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때가 왔다(19:7-10).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란 무엇인가?
적대적인 세력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통치로 어린양과 신부와의 혼인잔치로 완전케 됨을 보여준다. 혼인은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어린양과 그의 신부인 교회가 완전한 결합을 이루게 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연합된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합을 방해하는 적대적인 세력인 바벨론이 무너지게 된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을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공중 혼인잔치를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실제 계시록에서 다 혼인잔치와 휴거 대환난을 여기 저기서 가져와 말하는 것은 성경적 임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바벨론과 두 짐승이 멸망: 모든 적대 세력의 멸망
어린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에게 요구되는 순종,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를 붙들므로서 그 요구를 온전히따르는 것이다.
연단을 통한 단장(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처럼 교회가 혼인잔체에 들어가기까지 단련된 후에 정금같이 아름답게 꾸며주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17장부터 소개되는 바벨론의 멸망이야기이다.
2. 최후의 심판(19:11-20:15): 두 짐승의 멸망
최후의 심판의 대상은 두 짐승(19:11-21)과 용(20:1-10) 그리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짐승을 추종했던 자들이다(20:11-15).
특별히 두 짐승과 용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전쟁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형식을 취한다. 두 짐승과 용 그리고 그들을 따랐던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심판의 자리는 '유황 불 붙는 못'(19:20) 혹은 '불과 유황 못'(20:10) 혹은 '불못'(20:14)이다.
1) 두 짐승의 심판(19:11-21)
(1) 구조분석:
A(19:11-16)- 종말적 전쟁을 주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참조 12:17; 20:8)
11-16절: 재림하시는 주님의 위용스런 모습(어린양의 혼인잔치)
특별히 (계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로 심판의 내용을 말한다.
B(19:17-18)- 공중의 새들에게 큰 잔치에 모여 사람들의 고기(육체)를 먹도록 초청(하나님의 심판을 의미, 참조 겔 39:17-20)
17-21절: 재림하시는 주님의 위용스런 모습(어린양의 큰잔치)
(계 19:17-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겔 39:17-20)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18) 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지라 (19)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잔치의 기름을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그 피를 취토록 마시되 (20) 내 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사를 배불리 먹을지니라 하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두 구절은
범죄한 이스라엘 대한 회복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말하는 것이다.
A´(19:19-21a)- 종말적 전투의 현장:
이 전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도된다(말탄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검[19:21]-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19:15])
전쟁의 결과:
두 짐승은 완전한 패배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빠지게 됨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전쟁은 하나님의 회복된 백성들이 바벨론의 강력한 연합군보다 강한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 포로로 가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의 회복과 그 백성들의건재를 보여준다.
B´(19:21b)- 모든 새가 그 고기를 배부르게 되었다
이런 표현들은 겔 39장에서 온 것인데 성취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진다.
겔40-48장까지 새 성전의 마스터플랜이 소개된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가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은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며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B´는 B의 발전된 반복이다.
후자는 아직 고기를 먹지 않고 초청된 단계에 있지만 전자는 이미 배부르게 먹은 상태이다.
이것은 A에서는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으나 A´에서 전쟁이 이미 시작된 상태에서 그 결과를 B´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큰 잔치(19:17-18, 21b)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19:7-10)
중요한 공통점:
두 잔치의 직전에 ① 바벨론의 멸망(18:1-24)과 ② 두 짐승이 불과 유황에 던지우는 종말적 심판의 사건(19:20)이 각각 일어난다.
이 두개의 사건이 종말적 사건으로서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라면 이 두개의 잔치는 동일한 잔치이다.
이 두 잔치는 요한의 두가지 관점을 형성:
전자는 어린양과 교회의 완전한 결합의 관점에서 종말적 상황으로서의 잔치를 묘사하고, 후자는 종말적 전쟁의 승리와 승리의 관점에서 종말적 상황으로서의 잔치를 묘사한다.
2) 사탄/용의 심판 (20:1-10): 사탄의 멸망
이 20장은 논쟁이 되는 본문이다.
(1) 구조분석
1-3절: 용의 결박과 놓임(초림): 무저갱
4-6절: 천년 동안 왕노릇함: 천년 동안
7-10절: 천년이 찰 때 일어날 일(이 시점은 재림): 용이 풀려나 종말적 전쟁과 그 결과로서 심판(19:20과 동일한 전쟁)- 불못으로
계16:12-20절까지의 내용이 여기서 다시 반복된다.
초림 7년 재림 천년 신천신지(새창조)
천년(5:9)
(2) 1-10절의 해석학적 원리: 용과 무저갱 그리고 천년왕국
① 용의 결박과 무저갱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결박당하고 말았다(마 12:29).
무저갱(한글- 밑이 없는 항아리, 영어- 웅덩이(Pit)
사탄(용)이 무저갱에 던져져서 결박을 당했다 .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결박당했다. 이것은 상징이요 영적인 것으로라야 풀이될 수 있다.
강도가 도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집에 들어가 힘이 센 주인을 결박해야 물건을 늑탈할 수 있는 것처럼 사단도 이렇게 결박한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력을 예수님께서 오심(초림)으로 말미암아(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이 결박당했다.
② 천년 동안의 왕노릇 또한 상징적이다(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왕이 되었다 [5:10]):
그렇다면 천년은 당연히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③ 용의 결박은 용의 무행동(無行動)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 계시록에서 용의 이중적 측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④ 용의 결박과 성도의 왕노릇은 서로 대조적으로 존재하는 양태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통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말하는 것이고, 창조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처럼 왕노릇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왕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나머지 죽은 자들을 왕노릇하지 못한다.
⑤ 20:4의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 주고 있다(13:8; 17:8).
이들은 모두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다.
⑥ 비교: 첫째 부활, 둘째 부활, 첫째 사망, 둘째 사망
⑦ 20:7-10에서 종말적 전쟁은 19:11-21절의 전쟁과 동일한 영적 전쟁을 가리킨다.
이 두 전쟁에 대한 묘사는 동일하게 겔 38-39장의 말씀을 사용한다.
곡과 마곡을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쟁을 말한다.
⑧ 용, 두 짐승의 종착지는 영원한 형벌로서의 불과 유황.
사탄은 결박 당했음을 말한다(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이미).
귀신을 쫓아낼 때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답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라.
정리:
바벨론의 멸망, 두 짐승의 멸망, 사탄의 멸망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일어난 사건을 연상케 하도록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0:1-10절은 사탄의 멸망을 말씀한다. 문자적이지 않다(천년왕국 등).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논문을 쓸 때 무천년설을 가지고 논문을 쓰니깐 막혀서 전천년설로 적으려고 보니 더 많은 문제가 있어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논문을 적었다.
3) 짐승을 추종했던 자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던 자들의 심판(20:11-15)
(1) 크고 하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11절): 심판의 하나님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2) 크고 작은 죽은 자들(12):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앞에서 심판 받을 죽은 자들은 높고 낮음이 소 용없다.
(3) 심판의 책들(복수)과 생명의 책(단수)
(4) 13절의 죽은 자들은 바로 12절의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 죽은 자들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을 말한다.
이러한 죽은 자들이 어디에서 오는가? 바다/사망/음부(지옥)
(5) 이처럼 죽은 자들이 여기에서 온다는 것은 바다, 사망, 음부는 현재 죽은 자들이 임시적으로 거하는 지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대 사회의 바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의 바다는 악의 근원지, 악의 터로 사용되었다.
심판의 부활에 나와 14절의 두 짐승과 사탄이 가 있는 곳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시록에는 지옥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바다, 사망, 음부가 곧 지옥을 말하는 것이다.
(6) 11-15절에서 믿는 성도들이 심판받는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맥은 심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책'에서 믿는 성도들에 대한 것이 암시되고 있다.
(7) 사망과 음부와(20:14)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움(20:15)
(8) 두짐승(19:20)과 용(20:10) 그리고 사망과음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20:14-15)이 모두 동일하게 불못에 던지운다.
이러한 단계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논리적 순서이다: 여기에서 불 못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은 이 세개의 개체가 동일하게 최후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9)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21:1-5)
※ 요한계시록 20:10-15 요약(38p)
첫째사망 대기 상태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참고하면 이런 구도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청사진은 에덴의 회복이다. 에덴에서 세우신 창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새창조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에덴의 회복은 회귀와는 다르다. 여전히 선악과가 있고 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자리에서 지향했던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을 회복이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죄와 저주가 다시는 저주나 범죄가 없는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리모델링이 아니다.
예수 믿고 가는 천국과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들(하늘)과 구별된다.
예수님 믿고 가는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말한 낙원과의 용어 구별과 정리가 필요하다.
빌3:20-21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죽은 자나 산 자나 똑같이 예수님의 몸과 같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장차
존 머레이가 말하는 과정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놓으셨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
믿는자= 예수님의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
불신자= ?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심판의 부활이라고 표현하기는 한다.
다만 신령한 몸으로 변화한다는 사실
8장: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8)
21:1-8은 다시 21:1-5과 6-8절로 나뉘어 진다.
전자의 경우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누가 그것을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를 말하고 후자는 전자에서 언급되었던 새창조의 주인 될 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주어진다.
1. 새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21:1-5)
이 단락에서 중요한 이슈는 다음과 같다:
새 창조가 갱신의 방법으로 이루어 지는가? 아니면 재창조의 방법으로 이루어 지는가? 그리고 누가 새 창조를 차지 할 것인가?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A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B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C
2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을)
내가 보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D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C'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B'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1-처음 하늘과 땅)을 새롭게(갱신) 하노라 A'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믿을만 하고) 참되니(진실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A
B 는 새창조
C
D 는 교회 공동체
A'
B' 는 재창조(갱신으로)
C'
이것은 새로운 만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만물을 새롭게 갱신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이 땅에서 창조의 목적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일관성있게 강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사65:17-25)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가장 일상적인 생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기가 집을 짓고 거기 살며 포도나무를 심어 자기가 먹는데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은 자기가 집을 짓고 살지 못하고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먹지 못하는 일이 있다.
25절은 에덴을 의식하는 회복을 말한다. 이 사상이 계시록의 기록자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만물을 버리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새롭게 하여 지금과 같지는 않은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움으로 천사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A와 A'는 갱신이다.
이 땅에서 새롭게 되는, 이 땅과는 구별되는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이다.
B와 B'의 대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새 창조는 재창조(있는 것을 없애고 온전히 새롭게 한)와 갱신(있는 것을 바꾸어서 새롭게 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에덴에서 시작한 것을 보존의 언약으로 계속되어
C와 C'를 비교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다시 있지 않다.
악을 생산할 공장이 온전히 불못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D는 중앙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으로 완벽한 연합, 새롭고 온전해진 상태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이런 관계 속에 있다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우리는 굴곡을 경험한다. 그러나 장차는 온전해진다.
이 땅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이 하늘의 장막을 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구별이 없는 새 예루살렘(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천국)으로 온전해 진다.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승리한 교회(천상적 교회)
지상적 교회(전투하는 교회)
D는 교회 공동체를 언급하는 것인데 이 공동체가 새창조한 새하늘과 새땅을 차지하게 된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서......,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살 것인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하나님이 새롭게 해서 아담과 하와가 이룬 에덴 동산의 회복을 차지하게 한다.
그런데 죄많은 이 세상은 내집이 아니고 저하늘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이 땅에서의 삶은 세상과 관심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실제 이 땅에서의 갱신으로의 종말관을 가지면 적극적인 신앙생활과
천국 중심의 삶(Kingdom of the Life)이 아닌 예배당 중심의 삶(Church of the Life)을 살므로 세상에 대한 변혁을 일으키지 못하는 불행한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성도들이라고 하면 어디서건 하나님이 주권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미 경험한 새 창조의 삶을 구현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2. 새창조는 누가 차지 할 것인가?(21:6-8)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는 자가 아닌 이기는 자(전투적인 자세를 가지고 승리하는)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미 불신자도 있지만 믿는 자 중에 이런 부류에 빠질 자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 예수님 믿으면 아무것도 안해도 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불신의 삶을 사는 자도 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1) 이루었도다(6a) (참조 16:17):
종말적 완성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참조 요19:30의 '다 이루었도다'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2)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6b):
새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적절한 이름이다
3) 새 창조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다(7절):
(1) 새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로 이기는 자들의 모임이다.
(2) 2-3장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들은 모두 새창조 안에서 통합된다
4) 이기는 자들과 대조적 무리들의 목록(8절):
이들은 바로 사탄의 도전에 굴복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 16:12-21절 ● 17:1-2:15: 악의 세력의 제거
6-7장: 대접심판 A
사탄 멸망 바벨론의 멸망(17:1-19:10) C'
두 짐승 B 두짐승의 멸망(19:11-21) B'
바벨론 멸망 C 사탄의 멸망(20:7-100 A'
1-3 사단의 결박
4-6 왕노릇(천년이 찬 후)
7-10 멸망 과정
10-15 최후의 심판(바다/사망.멸망)
위의 것들은 재림 대 한꺼번에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재림을 대비하라(벌고 벗고 있지 말라).
사단의 멸망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천년이 찬 후 교회는 왕노릇 한다.
사탄 다스리고 정복하라(하나님의 왕권으로).
두짐승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들 우리는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
바벨론
TV 토론 중한 패널의 이야기는 현재 세상이 인간복제, 로봇제작 등이 우리 상상을 토월하는 상황이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분명한 타임 스케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특권이다.
삽입부분에서의 영적 전투(12장)를 다루고자하다.
9장: 새 예루살렘(21:9-22:5)
A
B 는 새창조
C
D 는 교회 공동체
A'
B' 는 재창조(갱신으로)
C'
21:9-22:5절까지는 교회에 대한 집중적인 설명이다
내가본 세 예루살렘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재미교포가 쓴 천국은 확실히 있다(조용기목사 역) 자기가 본 체험을 중심으로 기록된 책
그러나 이 교수가 보는 관점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기가 본 체험과 성경이 말하는 것들을 가지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본 것과 체험하는 것과의 차이로 인한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새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9절).
새 예루살렘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위개념 - 새 예루살렘(교회 공동체)
하위개념 - ① 건축적 구조물
② 내부의 구조
이런 부분에서 상하위 개념이 각 개념으로만 가지고 볼 때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21-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내가 본 천국' 을 묘사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되어 왔다. 천국을 경험한 많은 간증자들이 바로 21-22장을 근거로 그들의 간증을 전개해 나간다.
이것은 21-22장이 지금 하늘의 '내가 본 천국'을 묘사하는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요한 계시록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그리고 계시록을 감상적인 감정를 자아내는 그래서 이 세상을 등지고 오직 저 천국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내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21-22장은 새 예루살렘이 '내가 본 천국'이 아니며 그것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전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최정점에 이르는 순간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성취하는 '교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21:2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21-22장은 '내가 본 천국이 아닌' 새창조의 주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묘사인 것이 분명하다. 21:1-5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명제는 21-22장 전체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1:1-8은 새 창조와 그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말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새 예루살렘, 교회가 그 새 창조의 주인이 될 것을 말한다. 이러한 패턴은 이미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시 활용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그곳에 새 예루살렘을 내려오게 하신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이러한 관계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구속 역사의 그 정점에서 첫 창조의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21-22에서의 요한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새 예루살렘의 특징의 특징은 건축적 요소와 새 예루살렘 내부의 특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A. 건축적 요소: 성벽, 12 문 그리고 12 기둥
1) 성벽 (성곽):
(1) 그 높이가 144 큐빗(사람의 치수 = 천사의 치수: 17절):
144라는 숫자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왜 저자는 성벽의 높이로서 144라는 숫자를 선택했는가?
그것은 12 x 12 라는 점에서 그 어떤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공동체가 약속으로 구성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개의 12는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교회와 성취로서의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이 성벽을 통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성벽에 함께 붙어 있는 12 기둥에 새겨진 열두 사도의 이름과 열두 진주문에 쓰여진 열두 지파의 이름을 통해서 더욱 확증이 되고 있다.
(2) 크고 높다 (12절);
성의 존재는 외부로부터의 보호 안전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를 새예루살렘 공동체에 적용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안전하게 거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목적과 더불어 저자는 그 성벽이 크고 높다는 표현을 통해 도시가 완전 (complete) 하고 완성 (finished) 된 것이며 완전한 안전(security) 과 장엄함 (magnitude) 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하고 있다. 한가지 유의해야할 점은 성벽의 존재가 외부인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외부인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벽의 존재는 본문이 구약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패러다임도 또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구약적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성경 저자들, 특히 요한은 구약에 나타난 종말적 기대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 Jasper(벽옥)로 장식되어 있다 (18절):
새 예루살렘(하나님의 교회)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함을 상징한다. (참조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신령한 세계에 합당한 몸을 가질 것을 보여주어 실제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몸으로의 변화를 연상케 해준다.
하나님과 동질(그러나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히도 거룩하라는 말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으로, 그 형상을 입는 것으로 된다. 그래서 하나님 처럼되는.....,
2) 열두 문들 (12-14):
(1) 성벽은 12 문들을 가지고 있다(겔48장).
겔40-48장은 성전(하늘의 성전에 아닌 포로이후의 돌아와 짓게될 성전으로 종말적 축복으로 줄 새 성전)에 대한 마스터 플랜을 가고 있다.
예수님이 성전인데 어떻게 교회가 성전인가?
고전3:16절을 보자. 여기서 너희는 개인보다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2) 12 문은 외부로부터 계속적인 출입을 위한 입구로 간주할 수 없다 (사 60:1-14; 2:2-4; 14:1-2).
(3) 열두문은 겔 48:30-35 에서 인용하고 있다.
(4) 여기에서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은 48:30-35 에서 따온 것이다.
각 지파마다 하나씩의 문을 가진다. 그래서 계시록은 각 문마다 열두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여호와 샤마(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5) 에스겔의 비젼은 각 지파가 땅의 분배에 있어서 각 지파에게 할당된 충분한 몫을 가지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출입을 위한 각 지파자신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6) 이러한 원리가 요한 계시록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동등한 권리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7) 그러므로 12 문은 미래의 새하늘과 새 땅에 서 있는 요한의 시점에서 이러한 영광스럽고 놀라운 하나님과의 교제로 들어갈 풍성한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8) 문이 항상 열려 있다(25절)는 묘사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잘 설명해 주고 있다.
(9)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은 약속으로서의 구약 백성을 지칭한다.
(10) 열두문은 열두개의 통진주로 만들어져 있다 (21절).
새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주는
3) 성벽의 열두 기초석
(1)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짐 (14절):
열두 사도는 신약 교회의 기초이며 이를 대표한다
� 그러므로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진 것은 새 예루살렘의 기초는 신약 교회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열두 기초석 각각에 열두 종류의 보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열두문이 진주라는 하나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과 비교해 보라. 열두 기초석이 훨씬 화려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신약의 교회가 구약 교회의 성취라는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3) 왜 열두 지파는 열두 문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열두 사도는 열두 기초석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 계시록에서의 열두개의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은 에스겔 48:30-35의 것을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 12 사도는 교회의 기초로서 묘사된다 (엡 2:20). 그러므로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그리고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12이라는 숫자가 건축에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새공동체가 새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 믿으면 변두리에 않게 됩니다. 면류관과 개털 모자를 쓰는 것들로 비유하지 말자.
좀 속 썩이는 교인이 있어도 장차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는 온전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자.
B. 새 예루살렘 (교회) 내부의 특징
1) 성전이 없다 (21:22)
(계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1) 먼저 성전 건물이 없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 그렇다면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
실제하지 않지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성벽으로 안전함을, 성전으로 분명함을, 열두 보석으로 아름다움을 보게한다.
(2) 대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성전되신다 (21:3 과 연결).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이다.
(3)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성전되신다고 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기독론적 이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성전이 멸망한 가운데
유대인들은 성전이 멸망 한 후에도 성전을 버리지 않았다. 거기서 예배드리는 등
그런 유대인들에게 성전의 멸망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일부는 성전을 재건축하고자 했고, 일부는 성경을 연구하는 등의 주장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하나님이 성전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성전에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고 성전 멸망으로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든지 길거리, 가정, 직장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므로 보이는 성전으로 인한 소모전은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신령과 진정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할 것을
오늘날의 성도들이 너무 예배당 중심으로만 매 두지말고 세상 속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자.
(4) 그런데 요한은 새 예루살렘처럼 성전에 대한 것도 하나의 상징으로서 그 존재를 거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 없음을 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까?
(5) 이 문제에 대해서
첫째로 요한은 새 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임재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로 요한이 성전에 대한 건축적 요소를 생략한 것은 새성전으로서의 교회와 새 예루살렘으로서의 교회가 서로 중첩이 되기 때문이다.
2) 보석 모티브 (21:11, 18, 19, 21):
① 교회 공동체의 아름답게 단장했음을 보여준다. 욥23;10절
② 교회 공동체가 완성된 에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가슴에 12 보석을 달고, 에스겔의 에덴의 이사야의 새 예루살렘의 보석 등과 함께 여기의 보석은
에덴(겔28:13)
성전(출28:17-20) 새 예루살렘(사54:11-14)
계시록을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확신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1) Hoeksema 의 말:
우리는 모든부분에 의미를 부여하여 알레고리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전체 비전의 내용과 상충된다. 보석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성" 을 표현해 주고 있다.
21:2 과 관련해서 이러한 보석의 기능은 남편을 위해 단장한 새 예루살렘과 같다. 이런 개념의 구약의 선례들은 다음과 같다:
① 이사야 54:4-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
② 이사야 54:9-10) 하나님의 아내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새 예루살렘의 재건에 의해 표현이 되고 있다
③ 이사야 54:11-12) 이러한 예루살렘의 재건은 여러 종류의 보석들로 장식이 된다.
(2)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이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어린양 예수의 신부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단장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3) 11절의 Jasper:
계 4:3 에서 보좌에 있는 신적 현현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교회는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4) 열두기둥의 열두보석(19-20):
열두 사도들과 그들의 메시지가 교회에 얼마나 큰 보화와 축복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5) 구약에서 보석에 대한 또 다른 주제들
① 출 28:17-20: 대제사장의 가슴에 있는 보석들: 성전 모티브
② 에스겔 28:13: 에덴 모티브
③ 사 54:11-12: 새 예루살렘 모티브
여기에서 보석 모티브는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과 에덴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3) 순례 (새 예루살렘에로의 나라와 왕들의 순례)(21:24-26; cf. 22:2)
(1) '순례'는 구약(사 2:2-4; 14:1-2; 60:1-4; 슥 2:11; 14:16) 과 초기 유대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 종말론적 축복중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구약과 초기 유대 문헌에서의 Pilgrimage 는 두가지 중요한 성격을 갖는다:
a) 구속성: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
b) 예루살렘의 중심성(centrality)과 우주성(universality) 을 강조
(2) 위의 두가지 목적이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된다
① 중심성: 새 예루살렘이 온 우주의 중심이 되는
나라들이 도시의 빛으로 걷고 그리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그것 안으로 가지고 온다(21:24-26; 이 구절에서 chiastic 구조를 주목: A[24]-B [25]-A [26]).
② 구속성(22:2) :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나무들의 잎파리들이 만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3) 21:25 에서 문을 24 시간 열어 놓으므로서 외부 세계로부터의 계속적인 유입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4)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옳지 않다.
이는 구약의 말씀과 유대 문헌을 다루는 요한의 방법에 있어서 새 예루살렘에서 종말론적 기대의 충분한 성취를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가 깔려 있다. 요한 구약적 유대적 표현을 그대로 빌려 사용하므로서 구약과 유대 문헌에서의 종말론적 축복의 기대의 성취로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5) 특별히 21:25 은 이사야 60:11 의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6) 나라와 왕들이 가지고 들어온 영광과 존귀는 무슨 의미인가? Doxological sense: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온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의 영광을 짐승과 바벨론에게 주지 않고 새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므로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므로서 하나님이 주재권의 확립을 의미한다.
4) 새 에덴 (22:1-5)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교회가 에덴의 삶을 살게 된다.
(1) 유대적 전통에 의하면 새 에덴은 항상 새 예루살렘과 공존한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완성은 첫 창조의 회복이라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2) 생명수 강물의 출발점의 비교:
창세기의 에덴동산 꼭대기와 에스겔의 성전에서와 계시록의 하나님의 보좌. 이러한 연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생명수 강물의 의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의 계속적인 유입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전해진 왕국의 삶의 축복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득 채운다.
(4) 이러한 삶의 특징은 생명수 나무에 의해 더욱 강조가 된다(7절).
생수- 영생(수가성 여인에게 말하는)
생수의 강을 성령으로 보기도 한다(요한복음으로 토대로)
(5) 22:3a 의 "다시는 저주 (kata,qhma) 가 없으리니"의 의미:
kata,qhma 는 슥 14:11 ~rx 의 문자적 번역이다. 요한은 이러한 개념을 22:2b 의 치료받은 이방인들에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22:3a 는 22:2b 에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치료받은 이방인들이 다시는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6) 22:4 에서 이방인들로 짐승의 표를 받는 대신 이마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새기게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22:4).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① 창 3:9-11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아담과 하와와의 모습의 반전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② 창 4:10-14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③ 출 33:20, 23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함.그러나 새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
④ 왕노릇함 (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궁극적 가치(ultimate value, 1:26)를 연상케 한다.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충만함을 말한다.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창조의 명령이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8) 결론: 새창조 안에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첫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회복
이런 이야기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한데 이것은 미래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날마다 보고 있으며, 등등의 현재적 삶에 새 예루살렘이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삶이 성도들에게 더욱 분명하고 확신있게 나타나도록 하자.
상급은 없는게 아니라 구원이 가장 큰 상급이다.
헌신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성도들이 가진 긴장이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0:1-15)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는 가운데 현실의 보이고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22:12절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으면 불못이다.
천국에는 차별이 없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게되는 곳은 새창조의 세상이다. 여기에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로 대비되지 거기에 차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대단함만을 보여준다. 또한 지옥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새창조에 들어가는 것으로 기쁨과 영광이 가득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천국에서의 상급에 목표를 두기보다. 천국자체에 목표를 두자.
우리가 성경적 진리에 근거해서 구원의 감격에 초점을 맞추자.
상급은 보상의 개념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은 지금이나 2000년 전이나 후나 성경의 권위는 동일하다.
상급의 차별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가 없는지 검토해보라.
한 달란트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