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담정.김려.함양군수.순직.200주기.담정총서.편찬.200주년입니다.기념학술대회.ㅡ총서문학의.대가.함양군수.담정.김려와.담정총서ㅡ
한문학.고전문학.현대문학.삼위일체의문학관.지리산문학관.준비중.김려.함양군수.1820년.12월5일임명.1821년.9월16일순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려(金鑢) 1766~1822
사정(士精), 담정(藫庭)
경력 연산현감, 함양군수
대표작 우해이어보, 담정유고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요약 1766(영조 42)∼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藫庭). 할아버지는 김희(金喜), 아버지는 김재칠(金載七)이다. 집안이 노론계의 비중 있는 명문이다. 당쟁의 화를 많이 당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0년(정조 4)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의 문장을 익혔다. 그리고 김조순(金祖淳)과 『우초속지(虞初續志)』라는 패사소품집을 냈다. 이옥(李鈺) 등과 활발한 교유를 하면서 소품체 문장의 대표적 인물로 주목받았다. 이때부터 1797년에 부령(富嶺)으로 귀양갈 때까지 청암사(靑巖寺)·봉원사(奉元寺) 등에서 독서하였다.
1791년 생원이 되었고 촉망받는 인재로 인정을 받았다. 김려는 1797년에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 :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 원인되어 일어난 일)에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부사 유상량(柳相亮)과는 반목하고 가난한 농어민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는 그의 문학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부기(府妓 : 관기)인 연희(蓮姬)·노심홍(盧沁紅)·관옥(關玉)·영산옥(寗山玉) 등과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시를 지어 필화(筆禍)까지 입었다.
그는 지방의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화려하고 속이 빈 벌열(閥閱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보다 더 우수한 인재라고 강조하고 그들에게 벌열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웠다. 이로 인해 1799년에 유배지에서 필화를 당했으며, 그의 저서는 이때 대부분이 불에 탔다.
1801년(순조 1)에 강이천사건이 재조사되어, 김려는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진해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어민들과 친해져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지었다.
1806년에 아들의 상소로 10년간의 유배생활이 끝났다. 1812년에 의금부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릉참봉(靖陵參奉)·경기전영(慶基殿令)을 거쳤다. 1817년에 연산현감(連山縣監)이 되었다. 1819년에 연산을 떠난 뒤부터 몸이 약해졌다. 함양군수로 재직 중에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 『담정유고』 12권이 있으며, 자신과 주위 문인들의 글을 교열하여 『담정총서』 17권을 편집하였다. 말년에는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등 야사를 편집했다. 『우해이어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함께 우리 나라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
다음백과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요약 김려는 악부시의 대가였으며, 전이라고 빙자한 단편소설을 지어 불우한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 노론계 명문인 재칠(載七)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사건에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당했고,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진해로 유배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만년에 아들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함양군수로 있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시절에 이옥(李鈺)·이안중(李安中)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소품체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10여 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를 시로 표현했다. 기속악부의 전형적인 예인 〈황성이곡 黃城俚曲〉은 충청도 연산현감으로 있으면서 관찰한 지방의 풍속과 세태를 다룬 것이다.
대표적인 시 〈고시위장원경처심씨작 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은 세태소설이라도 쉽게 미치지 못할 경지에 이른 장편서사시이다. 백정의 딸인 여주인공을 양반이 며느리로 삼겠다는 내용으로, 신분차별을 이겨내고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있게 내세우고 있다.
허균의 전례를 이어 일사소설(逸士小說)이라고 할 수 있는 전을 짓는 데도 힘썼다. 의리있고 걸출한 인물을 그린 〈가수재전 賈秀才傳〉·〈삭낭자전 索囊子傳〉·〈장생전 蔣生傳〉 같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이룬 많은 글들을 자신의 문집인 〈담정유고 潭庭遺藁〉의 〈단랑패사 丹良稗史〉에 실었다. 이 문집에는 악부시를 비롯해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일기·편지·전(傳)·발문·상량문(上樑文) 등이 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주위 문인들의 글도 모아 〈담정총서 潭庭叢書〉를 엮었다. 여기에는 이옥·이안중·이우신을 비롯한 당대 문인들의 글 46편이 수록되어 있어, 문학사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한국문집총간 해제 > 담정유고
김려(金鑢) 1766년(영조 42)~1821년(순조 21)
본관: 연안(延安)
자: 사정(士精)
호: 담정(藫庭), 담사(藫士), 담수(藫叟), 담옹(藫翁), 담원류자(藫園纍子), 한고류자(寒皐纍子), 귀현자(歸玄子), 해고(海皐)
특기사항: 이옥(李鈺), 김조순(金祖淳) 등과 교유
행력
영조 42 1766 병술 乾隆 31 1 3월 13일, 태어나다.
정조 4 1780 경자 乾隆 45 15 성균관에 들어가다. 당시 유행하던 稗史小品體의 문장을 익히다.
정조 5 1781 신축 乾隆 46 16 嶺南의 선비까지 저자의 文體를 익힐 정도로 저자의 문체가 京鄕에 알려지다.
정조 7 1783 계묘 乾隆 48 18 靑巖寺에서 독서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19 서울 水標橋에 있던 權常愼의 집에서 玄同 李安中 등과 「離騷經」을 읽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21 봄, 金山寺와 直指寺의 승려인 廣訓上人, 影派高足과 함께 香爐方에서 「中庸」을 읽다.
정조 11 1787 정미 乾隆 52 22 7월, 아들 金夔淵이 태어나다.
정조 12 1788 무신 乾隆 53 23 10월, 모친상을 당하다.
정조 16 1792 임자 乾隆 57 27 봄, 進士試에 급제하다. ○ 6월, 아들 金虑淵이 태어나다. ○ 가을, 李鈺과 함께 短賦를 짓다. ○ 金祖淳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모아 「虞初續志」라는 稗史小品集을 내다.
정조 17 1793 계축 乾隆 58 28 이옥과 北漢山을 3일간 유람하고 각각 日錄을 합하여 「中興遊記」 1권을 만들다.
정조 18 1794 갑인 乾隆 59 29 5월, 淸涼山에 들어가 國淸寺에 머물다.
정조 20 1796 병진 嘉慶 1 31 정조의 명으로 李白과 杜甫의 五言十韻을 批擬하여 시를 지어 올리다.
정조 21 1797 정사 嘉慶 2 32 부친이 龍潭 縣令으로 나갈 때 모시고 가다. ○ 11월, 姜彛天의 飛語事件에 연좌되어 慶源府에 유배되는 도중 특명으로 富寧으로 移配되다.
정조 22 1798 무오 嘉慶 3 33 1월, 부령에 도착하여 〈記夢詩〉를 짓다. ○ 이때부터 鎭海로 유배될 때까지 부령에서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다.
정조 23 1799 기미 嘉慶 4 34 1월, 부친상을 당하다.
~ ~ ~ ~ ~ ~ ~ 府妓인 蓮姬, 甯山玉 등과 賣花禊를 조직하여 친교를 맺다. 守節하던 영산옥을 위해 富寧 府使 柳相亮의 잘못을 풍자한 〈貞雁傳〉을 지어 筆禍 사건이 일어나다.
순조 1 1801 신유 嘉慶 6 36 4월, 李象謙의 상소로 인하여 天主敎徒인 강이천 등과 교유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刑訊을 받고 鎭海로 유배되다. ○ 10월, 〈思牖樂府序〉를 짓다.
순조 3 1803 계해 嘉慶 8 38 가을, 진해 僦舍에서 〈牛海異魚譜序〉를 짓다.
순조 6 1806 병인 嘉慶 11 41 4월, 〈慕先齋記〉를 짓다. ○ 10월, 10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다.
순조 7 1807 정묘 嘉慶 12 42 고향에 돌아오다. 이때부터 시묘살이하면서 3년간 追服하다.
순조 8 1808 무진 嘉慶 13 43 여름, 廬陵村莊에서 서울로 들어와 旅邸에 머물다. ○ 擬唐別藁를 완성하다.
순조 11 1811 신미 嘉慶 16 46 廬陵 別業에서 서울 三淸洞으로 이사오다. 이때 지은 시 모음집이 萬蟬窩賸稿이다.
순조 12 1812 임신 嘉慶 17 47 의금부에서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하다.
순조 13 1813 계유 嘉慶 18 48 12월, 〈翠蓮峯記〉를 짓다.
순조 15 1815 을해 嘉慶 20 50 1월, 의금부 도사로 있으면서 순조의 병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시를 짓다.
순조 16 1816 병자 嘉慶 21 51 겨울, 靖陵 參奉으로 直廬하다.
순조 17 1817 정축 嘉慶 22 52 가을, 慶基殿 令으로 秋享하다. ○ 10월, 黃城(連山) 縣監이 되다.
순조 18 1818 무인 嘉慶 23 53 5월, 〈題丹良稗史卷後〉와 〈題擬唐別藁後序〉를 짓다. ○ 8월, 〈鄭農塢詩集序〉를 짓다.
순조 19 1819 기묘 嘉慶 24 54 3월, 連山 縣監에서 체직되어 돌아오다. ○ 5월, 〈題坎窞日記卷後〉를 짓다. ○ 7월,〈題歸玄觀卷後〉를 짓다.
순조 20 1820 경진 嘉慶 25 55 9월, 〈題艮城春囈集卷後〉를 짓다.
순조 21 1821 신사 道光 1 56 4월, 〈題萬蟬窩賸稿卷後〉를 짓다. ○ 9월 16일, 咸陽 郡守로 재임 중 졸하다.
고종 19 1882 임오 光緖 8 ― 손자 高靈 縣監 金謙秀가 活字로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延安金氏族譜(文靖公派), 跋(金綺秀 撰), 本集內容,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藫庭遺藁跋 / 跋[金綺秀]
右我伯祖藫庭先生遺稿也。......晩暮筮仕。止咸陽郡守。辛巳卒于官。嗚乎痛矣。
............................................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년(영조 42)~1821년(순조 21) 藫庭叢書
순조 21 1821 신사 道光 1 56 4월, 〈題萬蟬窩賸稿卷後〉를 짓다. ○ 9월 16일, 咸陽 郡守로 재임 중 졸하다.
晩暮筮仕。止咸陽郡守。辛巳卒于官。嗚乎痛矣。
고종 19 1882 임오 光緖 8 ― 손자 高靈 縣監 金謙秀가 活字로 문집을 간행하다.
右我伯祖藫庭先生遺稿也。歲壬午四月中澣。從孫綺秀敬識。
...........................
藫庭遺藁卷之四 / [題後] / 題萬蟬窩賸稿卷後
辛未春。余自廬陵別業。避飢就食于漢師之三淸衚衕。屋如螺螄殼。頗有空址園林。然皆蕪穢不治。家甚窶乏。三旬九食。每病暇。隨目所見。漫咏紙墨。遂多投諸巾衍。今始搜閱。衆木七律。衆草七絶。全數閪失。衆花五律。逸其太半。其餘苟完。故棄之可惜。倩侄子翯淵。移寫凈紙云爾。辛巳孟夏五日乙酉立夏。藫翁書于渭城之鈴閣。
...........................
藫庭遺藁卷之十 / 叢書題後 / 題小石和陶編卷後
小石金吾與侍郞。平常未嘗以詩自負。故無膾炙名。然余酷愛其五古樸而潔。澹而光。幽而淸。譬如玄酒鉶羹。驟嚼無味。非篤古者。鮮能知也。公之守楊岳也。移書求見其近作。以和陶編一卷。專致郵筒。敬藏之篋笥。及余來渭城。輒於朱墨之暇。幡閱敾寫。以付叢書。
.............................
藫庭遺藁卷之十 / 叢書題後 / 題東游亂稿卷後
李生𥠧川。嘗示其東游亂稿一𢎥。倩余評隲。余時在桂署。汩汩未有暇隙。及來渭城。時暇薄牒。敬加攷閱。稺川之奇健。伯訥之䧺深。儀之之俊逸。各有長處。雖或有些未圓熟之病。諸君皆年少。其進不可量也。後生眞可畏哉。穉川。石見之胤。而伯訥。竹莊先生之子。儀之。秋碧公之長男也。當余少壯。猥從諸公遊。常上下角逐馳呼。今諸公皆有兒。能世其家業。吁可奇矣。
............................................
승정원일기 2136책 (탈초본 110책) 순조 20년 12월 5일 정해 13/24 기사 1820년 嘉慶(淸/仁宗) 25년
李存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以李存秀爲刑曹判書, 洪羲臣爲工曹判書, 林漢浩爲右賓客, 李魯益爲左副賓客, 李相璜爲藝文提學, 洪益聞爲司僕正, 徐憙淳爲軍資監正, 李龍秀爲黃海監司,
金鑢爲咸陽郡守。 承文著作單崔綱魯, 左副賓客單金魯敬, 右副賓客單李魯益。